• 오월 광주의 정신과
    공수처의 정의를 생각한다
    [기고] 공수처의 그 칼날은 어디로?
        2021년 05월 24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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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찍는 모습을 보고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항의하는 어른들조차 박달나무 몽둥이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대학 기숙사에 있던 학생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와 무릎 꿇린 채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다. 오월 광주에서 젊은이들은 그저 공수부대의 사냥감이었다. 독서실에서, 대학 기숙사에서, 그리고 다방에서 끌려 나와 치욕을 당했다. 심지어 공수부대는 집 안 방구석까지 쫓아 들어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난타했다. 그러다 축 늘어지면 청년들을 질질 끌고 나왔다.

    베트남에서 베트콩 잡던 그 잔인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5월 21일 12시 애국가 소리에 맞춰 M16 총구에선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순간 금남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50명이 넘는 시민들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500명 가까운 시민들이 순식간에 총상을 입고 꽃잎처럼 쓰러졌다. 광주는 한순간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할 부처님 오신 날! 전두환 쿠데타 세력은 자기 나라 국민을 적으로 규정해 학살을 자행했다. ‘충정작전’, 이른바 ‘화려한 휴가’다.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베트남 인민들에게 저지른 학살 만행을 자국민을 향해 자행한 것이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은 학살당한 광주 시민들을 쓰레기차에 포개 실어 망월동에 파묻었다.

    만삭인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고 헌혈을 하고 돌아가던 여고생이 총에 맞아 죽었다. 시신 담을 관을 구하러 화순으로 가던 19살 처녀는 총상을 입고 가슴이 도려진 채 죽었다. 청각 장애를 지닌 인정 많은 젊은이가 총 개머리판에 맞아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다. 28살 김경철 님의 사례다. 그는 5월 18일 광주 공용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구타당하던 대학생들을 목격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잔혹한 행위를 말리다가 공수부대에 의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 김경철 씨의 머리, 턱 등이 M16 개머리판으로 맞아 깨어져 있었고 어깨 위에는 수없이 많은 곤봉 자국이 있었으며 군화발로 얼마나 짓이겼는지 발가락은 문드러져 있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1987).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 41쪽.

    5월 광주항쟁 당시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4명의 동생을 부양하고 있었다. 당시 김경철 님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나 막 백일 된 딸을 두었다고 했다. 그는 거리에서 구걸하던 아이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에 발길을 돌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먹을 것을 주었던 마음 착한 젊은이였다.

    집단학살이 자행된 5월 21일은 수요일이었다. 이 날은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공수부대 군인들은 부처님 오신 날 순식간에 수백 명에 달하는 인명을 학살했다. 미얀마 군부쿠데타 세력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광주를 참혹하게 학살했다. 우리가 5월 21일을 ‘피의 수요일’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집단 학살이 자행된 광주 시내 병원엔 총상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복도에까지 총상환자들로 가득했다. 인권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높은 이념을 위해 처음부터 광주 시민들이 저항한 게 아니다. 공수부대의 잔혹함 앞에 치를 떨었고 학살이 자행되는 불의한 현실 앞에 분노했다. 그 분노와 저항이 공수부대 학살 만행을 목격하면서 시민군으로 무장한 것이다.

    오월 광주의 정신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자국민을 향해 자행된 학살 만행 앞에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했다. 따라서 광주 시민들 누구나 시민군이 ‘폭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공수부대의 학살을 두 눈으로 목격했고 시위에 나섰다. 20년 전 4‧19혁명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언젠가 전두환이 재판 받으러 광주 법정에 갔을 때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창문으로 전두환을 규탄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우리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광주 민중 항쟁’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광주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돼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맞섰다. 실제로 광주 코뮌 당시 학살당하거나 부상당한 이들 가운데 60% 이상이 사회 주변부 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오늘날 광주는 5‧18 항쟁 주간이 돌아오면 초중고 절반 가까운 학교에서 항쟁 첫날인 5월 18일을 휴업일로 정한다. 그 날 초중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5‧18 운정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추모행사에 참여한다. 그렇지 못한 학교는 5‧18 항쟁을 기리는 글쓰기 행사를 하거나 주먹밥 시연과 마라톤 행사를 한다.

    시대의 불의에 맞서 저항 정신을 아낌없이 보여준 광주 시민들은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헌혈을 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을 형성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헌혈대열에 동참했다. 나아가 주먹밥을 만들어 순찰을 돌던 시민군에게 건네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가게나 약국에선 음료수와 박카스를 상자 채 시민군 트럭에 건네주는 풍경이 쉽게 목격되었다. 주유소에선 기름이 필요한 차량에 대해 그냥 기름을 넣어주었다.

    한마디로 광주 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 모두가 하나 된 도덕공동체였다. 시민군에게 총기 5천정이 풀렸음에도 은행이나 전당포 단 한 군데도 털린 곳이 없었다. 광주 시민의 높은 도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아름다운 자치공동체를 이룩한 적이 없었다. 광주민중항쟁 기간 광주의 모든 아들딸들이 우리 모두의 아들딸이자 광주 시민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된 대동(大同)세상을 연출했다. 1871년 파리 코뮌보다 광주 민중 항쟁은 훨씬 더 아름다운 자치공동체였다. 그야말로 오월 광주의 정신은 인류 역사상 빛나는 인간성의 승리이자 고귀한 정신의 발로였다. 우리가 오월 광주를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길이길이 기리는 이유이다.

    올해 1월에 출범한 공수처는 불의한 권력을 단죄하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된 기구로 출발했다. 판검사가 저지른 범죄와 경무관급 이상 고위직 경찰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게 공수처의 주된 임무다.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준헌법기구이다. 그 공수처의 탄생에 수백만 촛불 시민의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불의한 권력에 맞섰던 촛불 정신으로 공수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수처의 탄생은 시대가 낳은 산물이자 촛불시민의 저항과 분노의 결실이었다. 이는 불의한 군부 쿠데타에 저항으로 맞섰던 오월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오월 광주의 정신은 참혹할 정도로 잔인하게 진압된 5월 27일 새벽에 더욱 빛났다. 그날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는 M16자동소총과 화염방사기, M60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반면에 시민군은 반자동 카빈 소총이 전부였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시민군은 5월 26일 밤 물러서질 않았다. 도청에 남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걸 알면서도 시민군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불의한 권력에 굴복하느니 죽음으로 치욕을 덮었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기 전날 외신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는 죽음을 예감한 듯 처연한 모습이었다.

    시민군이‘폭도’가 아님에도 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방송 소리!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라는 애절한 목소리에 광주 시민들은 이불 속에서 흐느꼈다. 광주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 ‘폭도’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운 불의한 권력 앞에 숨죽인 채 흐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정확히 7년 뒤 전두환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6월 항쟁이 전국을 휘감았다. 전투경찰이 마구 쏘아대는 최루탄에 굴하지 않고 시민들은 밤을 지새워 저항했다. 그리고 불의한 권력에 분노했다.

    87년 6월 항쟁은 7년 전 이불 속에서 흐느끼며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다. 그 부끄러움이 다시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저항으로 되살아났다. 오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87년 6월 항쟁 당시 저항과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월 광주의 정신은 6월 항쟁으로 오롯이 부활했다. 마찬가지로 2016-2017 정의를 갈망한 수백만 시민들이 군부독재에 기반한 적폐 정권에 맞서 촛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2019 가을에도 백만 촛불 시민들이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에 맞서 광화문과 서초동에 집결했다.

    그 역시 시대의 불의에 분노한 저항의 외침이자 정의를 갈망하는 목소리였다. 공수처는 그렇게 탄생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갈망하는 촛불 시민들의 외침이 공수처를 시대정신처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 공수처가 5‧18 광주항쟁 첫날 서울시교육청을 무려 10시간에 걸쳐 압수수색했다. 20명이 넘는 공수처 인원을 동원해서 조희연 교육감실을 수색했다. 전교조 해직교사 4명을 교육감이 복직시킨 것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는 정당한 행정행위였다. 그러나 탈원전에 반기를 들고 산자부 공무원들을 범죄시했던 감사원은 진보교육감마저 경찰에 고발했다. 공수처는 이에 장단을 맞춘 듯 직권남용 권리행사 혐의로 교육감을 공수처 수사 대상 1호로 삼았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적폐정권에서 탄압받고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일부 언론들은 공정 프레임을 씌워 부도덕한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그 해직교사들은 모두 존경 받는 교사들이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을재 선생과 송원재 선생(당시 전교조 서울지부장)은 촛불 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아예 사면 복권도 되지 못한 채 영영 학교로 돌아오질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과연 촛불 정부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나마 약하게 벌금형을 선고받고 해직된 전교조 교사 4명을 복직시킨 것을 감사원과 공수처가 문제 삼은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전교조 해직교사를 복직시킨 일은 무너진 교육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정당한 조치였다. 교육감에게 위임된 권한인 특별채용임에도 공개 채용으로 진행했고 블라인드 처리를 하여 진행했다. 그럼에도 감사원과 공수처는 범죄시했고 일부 언론들은 젊은이들 일자리를 빼앗는 불공정 프레임으로 몰아갔다.

    돌이켜보건대 공수처는 진보교육감을 수사할 게 아니라 당시 전교조 교사들을 탄압한 이명박 정권 검찰 고위직을 수사해야 마땅했다. 공수처의 칼날이 교육감이 아니라 검찰을 겨냥했어야 마땅했다. 그게 공수처의 제대로 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시행된 2008년 민선교육감 선거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당연히 진보교육감을 지지했다. 진보교육감 후보가 자사고와 국제고 등 특권교육을 폐지하고 0교시 수업과 강제 자율학습을 반대하는 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친환경 학교급식과 방과후 맞춤형 돌봄교실, 그리고 대안형 공립학교 운영과 공립어린이집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교사에겐 정치기본권이 전무한 상태였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마저도 전교조 교사들은 살얼음을 걷듯 일일이 선관위에 문의하며 진보교육감 당선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서울지역 모든 선거구에서 이기고도 강남 3구에서 공정택에게 몰표가 쏟아졌다. 주경복 진보교육감 후보는 38.31%를 득표하고도 1.7% 표 차이로 진보교육감 당선이 좌절되었다. 선거가 끝나자 이명박 정권 검찰은 수사의 칼날을 진보교육감 후보와 전교조 교사들을 향했다. 무려 20명이 넘게 검찰 조사를 받았고 8명은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 곽노현 교육감이 이후 진보교육감으로 당선되었지만 이명박 정권 검찰 권력은 후보 사후매수죄로 옭아매 현직교육감인 곽노현 교육감조차 감옥으로 보냈다. 리틀 MB 공정택 교육감은 2010년 3월 교육감 재직 시절, 장학사와 교장 등 5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1억 4천만 원이 넘는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한 혐의로 2011년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2008년 교육감 선거 당시「전교조에 휘둘리면 학교가 망한다」는 천박한 플래카드를 큰길가에 내걸고 당선된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 희생을 딛고 2014년 13개 시도에서 대거 진보교육감이 당선됐다. 조희연 교육감도 현직교육감인 문용린 교육감을 8% 차이로 따돌리고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선됐다. 이젠 더 이상 진보교육감을 빼앗길 순 없다. 공정택에 의해서 영혼마저 피폐해진 서울교육을 회복시키고 아이들 상처를 보듬은 진보교육감을 공수처 수사 대상 1호로 삼은 것은 공수처의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공수처는 오월 광주의 정신을 더 이상 훼손해선 안 된다.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세우려던 촛불 시민의 열망으로 탄생된 공수처가 오월 광주의 정신을, 그리고 촛불 정신을 배반한다면 이는 더더욱 몹쓸 짓이다.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공수처는 불의에 저항했던 시대정신에 충실함으로써 역사 속 시대적 소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수처가 사는 길이자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는 모습이다.

    필자소개
    <우리역사에서 왜곡되고 사라진 근현대 인물한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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