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⑮
    주체사상 비판서를 쓰다
        2021년 05월 20일 08: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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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 선언과 주체사상'(14화)

    (15화) 주체사상 비판서를 쓰다

    정신없이 걷던 그는 자신이 낙성대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는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술에 취해도 집으로 돌아가고, 정신이 빠져도 자신이 하교하는 시발점으로 걸어간다. 민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버스에 올랐고. 거기서 고등학교 1년 선배이자 대학교 1년 선배인 중문과 86학번 민정우를 만났다.

    친한 사이였던 둘은 낙성대 전철역 근처에서 술을 마셨다.

    “우리 1학년 때에는 아시안 게임 기간에 학교가 아예 문을 닫았어. 그 기간에 학생 시위를 못하게 하려는 전두환이의 지시 때문이었겠지. 아무튼 학교를 보름이나 안 가니까 매일 동문들끼리 모여서 마신 거야. 보름을 술을 마시니까 나중엔 다들 완전히 맛이 가더라고.”

    그 날은 올림픽이 시작된 지 며칠 후였다. 아시안 게임 얘기로 시작된 대화는 여자 문제로 이어졌다가 주체사상 문제로 이어졌다. 정우는 자신은 주체사상이 코미디라고 생각하지만 학생들이 진짜로 그것을 믿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런 식이었을 거야. 광주로부터 시작해 군사독재와 싸우다 보니 뒤에 미국이 보인 거야. 그래서 그들은 자주 없이 민주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 그러다가 NLPDR이란 것을 접한 거야. 뭔지 알지?”

    “예.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이겠죠.”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를 어떻게 규정할까에 대한 문제가 나오고, 그러다가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이 등장해. 나는 그 때 N. L.을 정리했어. 식반론은 코미디라고 생각했거든. 이 사회가 반봉건 사회라니. 식민지는 인정할 수도 있어. 물론 신식민지가 더 나은 표현이기는 하겠지만. 그런 과정에서 주사(주체사상)까지 접한 것 같은데, 그거에 깊이 빠진 사람은 별로 없어. 대개는 PD나 CA 쪽보다는 NL 쪽의 방향성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거에 불과해. 물론 요즘 하는 거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통일운동 말이야. 이게 큰 전략 속에서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기계적으로 보이기도 해.”

    “기계적이라니요?”

    “그러니까 민주화 투쟁, 자주화 투쟁, 통일 투쟁을 기계적으로 섞는다는 거지. 올해 2월에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도 하고 광주미문화원에는 폭탄도 설치하고 그랬잖아. 그런 게 자주화 투쟁이고, 지금 하는 게 통일투쟁이고, 또 민주화 투쟁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 낙선운동을 하는 식으로 진행한 거지.”

    “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요. 그럼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일이 생겨도 계획된 자주화나 통일운동 일정 때문에 싸움의 방향이 이상해지기도 하겠네요.”

    민수는 정우의 얘기를 듣고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 상태로 집으로 향했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빨리 김종찬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똑똑한 마레주의자(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정말로 이런 개똥철학을 받아들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민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가 구속된 것이다. 아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으나 통일운동과 단독 올림픽 반대 운동의 배후 중의 한 명으로 지목된 것 같았다. 그리고 구속의 명분은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 단체의 구성원의 활동에 동조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쉬웠지만 형이 빨리 나오기만을 희망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보안법으로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0월 중순에 민수는 과 선배 김현우와 대화를 나누었다.

    “네가 종찬이 형 재판에 올 줄은 몰랐다.”

    “과 선배에 세미나 선배였는데 시간이 나면 당연히 봐야죠.”

    “그래 어떻게 지냈냐? 통 안 보이던데.”

    “본부 서클, 아니 동아리에서 공부 좀 했어요. 얼마 전에 그만 두긴 했지만. 사실은 형에게 부탁이 있어요.”

    그는 그 <사람됨의 철학> 문건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어느 문서를 편집한 것 같은데 원전을 구할 수 있을까요?”

    김영철은 한참을 고민한 후에 말했다. “구해 줄게. 단, 조건이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읽을 것. 이 문서 얘기를 나를 제외한 누구와도 하지 않을 것. 과 친구든 누구든 얘기하지 마. 나하고만 얘기해.”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영철은 그에게 <대하여>라는 문건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원제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고 했다.

    수령님께서는 고루한 민족주의자들과 행세식 맑스주의자들, 사대주의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을 반대하고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시는 투쟁과정에 주체사상의 진리를 발견하시였으며 마침내 1930년 6월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시고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로선을 밝히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창시와 주체의 혁명로선의 탄생을 선포한 력사적 사변이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아직 20대에도 이르시지 못한 젊으신 나이에 민족개량주의, 좌우경기회주의 등 온갖 어지러운 사상들이 판을 치던 혼란속에서 시대의 지향과 인민의 념원, 력사발전의 합법칙성을 꿰뚫어보시고 주체의 진리를 밝히시여 우리 혁명의 자주적발전의 길을 열어놓으시였습니다.(1)

    ‘김일성이 1912년생이니까 만 18세에 이미 주체사상을 확립했다는 것이군. 나 정도로 똑똑했나.’ 민수는 자화자찬을 한 후 이 글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주장은 주체사상이 북한의 국가이념으로 등장한 것이 1960년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지고 물질의 운동에 의하여 변화 발전한다는것은 이미 밝혀졌습니다. 주체사상은 자연과 사회를 지배하는 주인은 누구이며 그것을 개조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줌으로써 세계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밝혔습니다. 세계는 사람에 의하여 지배되고 개조된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밝힌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해입니다.

    주체사상은 세계의 주인으로서의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기초하여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립장을 새롭게 밝혔습니다.

    주체사상이 밝힌 세계에 대한 관점과 립장은 세계의 주인인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하는 관점과 립장입니다.(2)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이 객관적 실재를 의미하며 사람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님을 그는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어.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를 대한다고? 애초에 무언가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대한다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어. 고릴라를 중심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말이나, 고양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중심으로 대한다는 말 또한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이야.’

    민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제목은 줄여서 <대하여 비판>이었고, 그는 김정일의 이 글을 낱낱이 해부할 생각이었다.

    민수는 김현우를 만나 슬쩍 떠 보았다. “형. 이 수령이 인민대중의 뇌수라는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닌도 <무엇을 할 것인가> 등에서 노동자 대중만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으며 강력한 지도부, 전위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했어. 내가 보기에는 그것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렇군요.”

    민수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고 그의 철학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역사에서의 ‘인민대중’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 3부작도 읽었다. 그는 주체사상 비판을 위해 시작한 공부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즐겁게 공부를 이어갔다.

    1989년이 왔고 드디어 민수와 유정은 결단을 내렸다. 1월 8일에 둘은 여행을 떠났고, 강릉의 한 호텔에서 첫 경험을 했다. 민수는 유정의 가슴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아늑한 것이라고 느꼈고 유정은 민수의 가슴에서 단단함과 열정을 느꼈다. 둘은 미숙했고, 첫 정사는 애무는 길었지만 그 뒤의 과정은 짧았다. 민수는 또 한 번 시도했고 이번에는 첫 번째와는 달랐다.

    다음날 아침 유정은 창피한 듯 얼굴을 가렸고 민수는 얼굴을 가린 시트를 빼앗고 유정과 안고 누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해. 나는 어제 이전에도 너를 좋아했고 이후에도 그럴 거야. 이건 남자의 입장인가?”

    “사실 달라진 것 없어. 다만 새로운 걸 알았으니 더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런데 너는 유아기에 애정 결핍이었음에 분명해. 두 달 된 아기도 그렇게 젖꼭지를 탐하지는 않을 거야. 아이 창피해. 가슴을 탐하지 않을 거야.”

    “나는 젖꼭지도 가슴도 아니고 유두를 탐할 거야.”

    유정은 민수의 어이없는 발언에 웃음을 터뜨렸고, 잠시 후 말했다.“너 또 하려고 그러지?”

    “아니. 콘돔도 두 개 다 썼잖아.”

    둘은 입맞춤을 시작했고 서로를 안고 한참을 침대 위에서 놀았다. 겨울 바다를 본 그들은 서울로 돌아왔고, 민수는 유정이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결단을 내리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고 유정은 결단을 더 빨리 내렸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버스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고 뒤쪽에 앉은 그들은 버스 안을 ‘애정 행각’으로 물들였다.

    민수의 글은 쌓여갔다.

    주사는 관념론이다. 인간의 속성이란 것은 인간을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떼어내어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자주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주적이라거나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오류이다. 게다가 한 인간도 어떨 때엔 자주적이지만 다른 때에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목에 칼이 닿은 순간 자주적이었던 어떤 이는 일제에 부역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칼 역시 사회적인 의미이다. 제국주의 지배가 식민지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당연하고, 이 주사의 자주성 론은 그것을 설명할 능력조차 없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령님께서는 억압받고 천대받던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시고 위대한 주체사상을 창시하심으로써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시였으며 인류력사발전의 새시대, 주체시대를 개척하시였습니다.”(3)

    주체사상의 창시가 인류 역사 발전의 새 시대를 개척했다는 말은 주사가 혹은 저자의 주사에 대한 인식이 관념적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떻게 사상 하나가 시대를 규정한다는 것인가? 우리가 석기시대니 청동기시대니 하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인류의 도구가, 소위 물질적인 것이 한 시대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한 시대를 규정한다. 우리 시대도 주로 ‘자본주의 시대’라고 불린다. 누구도 어느 시대를 헤겔 철학이나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스미스, 케인즈의 경제 사상이 규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사 역시 한 시대를 규정할 수 없다.

    2월 말의 어느 날 유정은 왜 테이레시아스가 “남녀의 쾌감을 합친 것이 10이라면 남자가 느끼는 것은 그 중 1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었는지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생 최초의 절정을 경험한 유정은 다음 날 말했다. “타이어지어스 있잖아. 왜 헤라의 저주로 장님이 된 예언가.”

    “아, 테이레시아스?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그렇게 부르겠구나. 많이 좋았구나, 우리 유정이. 하하.”

    “너. 누나 놀리면 혼난다. 아무튼 너무 좋았어. 이건, 음,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근데 진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좋은가?”

    “여러 얘기가 있는데, 그게 뭐 중요하겠어. 좋기만 하면 되지.”

    그날 오후 민수가 나름대로 말재주를 뽐내려다 그것을 포기했다.

    “나 테베의 테이레시아스는 예언하노니, 김일성의 아들이 다음 수령이 될 것이고. 또 그 수령의 아들이 그 다음 수령이 될 것이다.”

    ‘아니야. 이건 현학적으로 보일 거야. 그리스 신화 많이 안 읽은 사람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거고.’

    나는 예언할 수 있다. 김일성의 아들이 그 다음의 최고 지도자가, 혹은 수령이 될 것이고, 또 그의 아들이 그 다음 수령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남한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라고 부른다고 한다. 불행히도 반봉건 사회는 북한이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탈을 쓴, 국가자본주의와 봉건적 왕정이 결합된 사회일 뿐이다. 그들의 삶이 남한의 군사정권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임을 나는 알지만, 그것이 개인숭배와 일인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순수한 일인독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시스템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최종 결정자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은 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남한의 대기업 총수 앞에서 누군가가 아무리 합리적인 말을 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대기업 총수가 하듯이, 북한의 정치적 결정 또한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민수가 20년 3개월 째 세상을 살았던 1989년의 4월에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비판>을 완성했다.

    <각주>

    1, 2, 3 모두 https://ko.wikisource.org/wiki/주체사상에_대하여 에서 인용함.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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