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좌파다” 말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2006년 11월 19일 09: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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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는 앞으로 9년 동안 ‘아시아 민주주의 비교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그 첫 성과물이 지난 11월 17일(금) ‘위기의 민주주의 어디로 가고 있나 –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복합적 갈등과 위기’라는 제목의 심포지움에서 발표되었다.

    전체 11편의 논문이 준비된 이 날 심포지움의 총론은 조희연(성공회대, 사회학)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복합적 갈등과 위기에 대한 비교 연구」다. “자유주의를 전제한 민주주의 이행론을 급진적으로 확장해서 맑스주의 또는 포스트 구조주의와 만날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이 논문의 ‘명제’는 다음과 같다.

    권력 분립에 따른 권력의 분점이 민주주의 핵심

    ‘권력의 분점’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권력 분립(權力分立)’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출발하여 권력 개념을 정치권력, 경제적 권력, 사회적 권력으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실현을 재규정하고자 한다. (명제 1)

       
    ▲ 11월 17일 성공회대에서 ‘위기의 민주주의 어디로 가고 있나 –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복합적 갈등과 위기’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이 열렸다.
       

    정치에 대한 ‘사회’주의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제도정치의 ‘정치’만이 전부가 아니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들’이 존재한다. 모든 근대민주주의 하에서 제도정치에는 지배적인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배제된 다수의 ‘정치적인 것들’이 존재한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는 독재 하에서 억압되었던 정치의 복귀만이 아니라 다수의 하위주체들의 정치가 정치의 장에 복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명제 3)

    독재 하에서 구축된 정치적 독점이 이행과정에서 탈독점화되는 범위가 민주주의의 정치적 한계이며, 경제적 독점의 탈독점화 범위가 민주주의의 경제적 한계이며, 사회적 독점의 탈독점화 범위가 바로 민주주의의 사회적 한계이다. (명제 7)

    정치적 독점구조는 사회경제적 독점구조와 결합되어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회경제적 독점구조의 변형적 재편과 결합된 정치적 독점구조의 민주화(사회경제적 하위주체들이 감내할 수 있는 변형적 재편)이 이루어져야 공고화가 되는 것이다. “사회화 없이 공고화 없다". (명제 8)

    조희연이 바라보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거칠게 정리하자면, 제도 정치에 머무르고 독점돼 있는 민주주의를 ‘제도 정치 이외의 정치’, ‘정치 이외의 경제 사회 영역’으로 분산 확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약정 토론자들은 조희연의 논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론한다.

    권력 쪼개고 분리하면 인민 권력접근 더 어려워져

    박명림(연세대 국제대학원, 정치학) :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 외양은 우리가 바라는 지점까지 왔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파퓰리즘 외양을 띄고 있으되, 전문가 민주주의다. 대학, 언론, 재벌의 신과두제가 담론 형성과정과 그 왜곡과정을 독점하고 있다. 대학 건물에 재벌 이름이 붙는 나라는 우리 나라 뿐이다.

    사회 재구성 없이 정치 재구성이 있을 수는 없다. 정치적 민주화에만 몰두하여 사회 부문에 무관심하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을 낳았다. 요즘 여러 학자들이 정당 발전을 주장하는데, 정당 발전은 사회 발전을 반영하는 결과물이다. 사회 발전 없이 정당 발전을 요구할 수 없다.

    언론, 사법부, 시민단체가 대표성과 책임성 없이 정당을 대신하고 있는데, 이념만 빼면 보수언론과 시민단체는 정치정당을 무시하는 점에서 같다.

    민주주의 공고화론에서는 꼭 윤리론을 이야기해야 한다. ‘386’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 도덕을 분리시켜 생각한다. ‘버블세븐(주택가 폭등 지역)’에 살고, 학원재벌을 이루었으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건 웃기는 짓이다. 나쁜 수단과 과정으로는 좋은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 정치학) : “독점과 분점이라는 틀을 민주주의에 도입하는 것이 올바른가? 권력을 쪼개고 분리하면 인민의 권력 접근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분산이나 분점을 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방법이다.

    사회 중심 민주주의라는 시각도 위험하다. 정치, 정당, 국가에 거리 두는 경향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승해야 하는 맑스주의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다수를 조직하기 위하여 정치의 장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깨우쳐 준 것이다. 이 점이 맑스주의와 다른 공동체주의의 다른 점이다.

    정치 없는 사회운동은 정치에 동원될 뿐이다. 사회운동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던 프리드리히 에버트 같은 사람이 노동운동을 통해 독일 대통령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 노동운동이 기여한 것은 노동운동이 정당을 만든 것이다.”

    민주적 절차와 성공적 경제모델 함께 가져야

    이병천(강원대, 경제학) : “조희연은 민주주의의 장애 성격을 ‘독점’으로 잡고 있는데, 비민주적인 구체제든 민주적인 신체제든 모두 강제와 동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독점’을 이론 틀로 잡다 보니 강제와 동의가 공존한다는 지점을 놓치는 것 같다.

    또, 한국이나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의 역사적 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는데, 그런 고찰이 없다. 민주주의 20년, 한 순환이 끝났다. 현 시점에서 보자면 자유주의적 전진이 아니라, 한나라당 집권으로 넘어갈 것 같은데, 왜 그런지를 살펴야 한다. 즉, 한국의 민주화나 민주주의가 서구에서의 자유주의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한국 자유주의가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자유주의에서의 절차적 합리성은 인민주권과 민중주의를 세우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제도와 비제도에서 이중민주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권력 뿐 아니라 권위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단순히 민주적 절차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 경제모델을 함께 가져야 한다.

    조희연은 ‘사민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보다 훨씬 약한 주체를 가지고 유럽처럼 되거나 넘어설 수 있겠나? 우리에게 유럽과 같은 혁명의 전통과 시민사회가 있는가?”

    약정 토론자들의 비판은 대체로 ‘독점-분점’이라는 이론 틀을 민주주의에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와 비제도 또는 비정당적 민주주의 운동을 강조하는 데 대한 우려로 모아졌다고 할 수 있다. 조희연은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제도정치 공고화 통해 민주주의 공고화되지 않아

    “정당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최장집의 이론과 대립하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제도 정치의 정상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급진적 발전 없이 민주주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1987년에 만들어 놓은 제도적 역관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민주주의를 평등주의적 방향에서 확장해야 하는데, ‘너 빨갱이지?’라는 질문에 ‘빨갱이가 뭐가 나쁘냐? 나 좌파다’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담론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독점’ 이론 틀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독재적 독점 질서에서 민주주의적 독점 질서로 가야 한다는 것이 연구팀의 생각이다. 맑스주의는 국가 중심론이 아니라, 사회 중심론 아닌가? 가난한 사람이 배제된 국가장치를 사회의 혁명적 조직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것 아닌가? 우리 문제의식의 핵심은 관계론, 정치와 시민사회 관계에 대한 강조다.”

    어쨌거나 ‘정체’인 것은 분명한 지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9년이라는 ‘긴 호흡’을 계획하고 있는 진보학계를 현실 정치가 쫓아갈 수 있을지, 또는 언제나 앞서 갔던 현실을 추수하고 평가하는 학계의 사후약방문이 될지는 성공회대 연구팀보다는 우리의 말과 행동, 말과 행동을 낳을 생각에 더 크게 의존할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과연 민주주의가 ‘위기’인가? ‘민주주의 위기’의 전제 중 하나로 거론되는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부진함 또는 민중과의 부조화나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조차도 민주주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유럽에서 사민당이 퇴조하고 보수당이 집권한다 하여 그것을 위기라 하는가?

    1987년 체제를 이야기할 때, 왜 그 전반기의 두 정권 – 노태우와 김영삼은 제외하고, 김대중과 노무현 – 후반기만을 거론하는가? 한국에서의 절차적 제도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분점을 민주화 전반기와 후반기가 공유한다는 경험적 실증이 있음에도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진퇴로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것은 연구 관점의 선험적 오류, 즉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주체 동질화가 아닌가?

    위기론,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주체동질화에서 오는 거 아닌가

    둘째, ‘국가, 제도, 정당 vs 시민사회, 비제도, 시민사회운동’이라는 패러다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1968년 혁명에서 녹색당의 연정 참여까지 사이의 서유럽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 이론 틀은 아닌가?

    실제에 있어 한나라당에서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정당들이 어떠한 시민사회 단체보다도 시민과 더 많이 대화하고, 설득하고, 비제도적으로 투쟁하지 않는가? 정치의 불안정성과 비정상성이 한국 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질이라면 정당이야말로 가장 크고 본원적인 시민운동 조직이고, 언론과 정치만을 매개 삼는 시민단체들은 오히려 전위적 정치조직이 아닌가?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성장률의 울타리를 맴도는 한 제도와 비제도의 구분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셋째, ‘민주주의의 사회주의적 확장’ 또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조합한 개량이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어떤 신사상이나 새 이론을 가져다 붙이든 그 현 실태는 그저 사회민주주의일 뿐이라는 것을 지난 세기의 유럽 사민주의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발전한 민주주의 – 유럽에서는 이미 이루어졌고, 제3세계에서는 멀었고, 한국은 그 문턱에 서 있는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요소의 확대나 축소는 민주주의의 질적 전환이 아니라, 단지 발전한 민주주의, 발전한 자본주의 일반의 내재적 운동이지 않는가?

    http://www.redian.org/bbs/list.html?table=bbs_1&idxno=232&page=1&total=65&sc_area=&sc_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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