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의 인생 "남북에서 소외, 추방"
        2006년 11월 18일 1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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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바닥 인생

    박종기. 42세. 가정형편이 어려워 경남 남해고를 1년 만에 중퇴하고 상경했다. 대입시험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트럭 운전 보조와 운전사, 택시기사 등을 전전했다. 중고 트레일러를 직접 구입해 운송사업도 해봤으나 실패했다. 사회평론에 관한 원고를 들고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지인’들은 그를 "말이 없는 사람, 수줍음 많은 사람, 순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에서도 늘 주변을 겉돌았다고 한다. 변방의 변방. 소수자의 소수자. 그는 지금 국가보안법상 밀입북과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구속되어 있다. 그리고 보수언론은 그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무시무시한 딱지를 붙여놨다.

    밀입북

       
     ▲ 두만강변 건너편 북한 땅
     

    그는 2003년 3월 중국 대련에서 두만강을 건너 밀입북했다. 그가 처음 월북을 생각한 것은 90년대 후반이다. 그를 접견한 변호인에 따르면 "출판과 사업 실패에 따른 충격과 좌절감으로 월북을 처음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최근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난 북으로 가서 영구적으로 살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북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밀입북 첫날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중간첩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고, 그는 "목숨 걸로 넘어온 사람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대판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밀입북 이틀째 되는 날, 그는 청진 보위부에 인계됐다. 이후 그는 북을 떠날 때까지 청진에 있는 한 호텔에 체류했다. 북측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는 조바심이 났던 모양이다. 평양의 보위부에서 조사원이 내려와 조사할 것이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7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그는 술을 마시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고 한다.

    그는 변호인에게 "전화기를 부수고, 책상을 밀치고, 노래도 하면서 소란을 피웠다"고 진술했다. 청진 도착 후 2주만에 그는 평양에서 온 조사원으로부터 하루에 3~4시간씩 4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조사 종료 1주일 후 평양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추방

    북 당국은 중국으로 여행이나 다녀오라면서 기관원을 붙여 그를 중국 회령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회령에 도착하자 그 기관원은 그를 중국 공안에 넘기고 사라져버렸다.

       
     
     

    중국 공안에 넘겨진 그는 40일간 억류되어 있다가 벌금 3,000달러를 내고 풀려났다(그는 1만달러를 가지고 밀입북했는데, 북에서 3,000달러를 도둑 맞았다고 했다. 그런 사실을 얘기했더니 중국 공안도 3,000달러 벌금을 매기더라고 한다.).이후 기차를 타고 대련으로 가,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그는 북한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다고 한다. 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내가 북에 가서 추방당한 것"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북측을 신뢰할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했다. 이때부터 그는 청와대와 국정원 홈페이지에 일부러 자극적인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2-3건, 국정원에 1건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일상으로

    국정원에서 잡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담담하게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다시 일상은 시작됐다. 그는 어느 레미콘업체에서 일하다 산재로 허리와 다리, 온 몸 구석구석에 골절상을 입었다. 3개월에 걸쳐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본인 명의로 사업자등록이 되었다는 이유로 산재처리가 되지 않아 카드를 긁어 수술비 1,000만원을 댔다. 이후 그는 산재요양불승인에 대한 1년 간의 법적 다툼 끝에 산재인정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5년 조선족 여인과 결혼.

    체포

    그는 지난 10월 23일 아침, 부인과 함께 있다 집에서 연행됐다. 공안당국은 그에게 4가지 혐의를 씌웠다. 밀입북 – 잠입, 탈출죄. 군사기밀 누출. 이적표현물 제작. 간첩혐의.

    이 가운데 간첩혐의에 대해 그는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북한에 갔다 오고 1년이 지난 후고 (인터넷에 올린) 500건의 문건 중 겨우 10여 건만 아주 조심스럽게 북의 좋은 점을 올린 것 뿐"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에서) 난 당당하게 행동했고 북에 대해 많은 비판도 했기에 미움을 샀고, 충성서약조차 한 게 없는데 지령이라니…."라고 적고 있다.

    그는 수사 과정 내내 민주노동당 관계자의 면회를 거부했다. 어떠한 접촉과, 법률적 지원도 거부했다. 당원으로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고, 당에 누를 끼치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마녀사냥

       
     ▲ 11월 17일자 조선일보
     

    11월 16일, MBN이 그의 테러 관련 혐의를 최초로 보도했다. 그리고 17일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언론이 그의 테러 혐의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작성한 기사의 취재원은 공안당국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총기구입 계획…..일부 인사 자택 주변 답사" 등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 기사화했다. 공안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테러사건에 그가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접견한 변호인에 따르면, 이들 보도는 조사 과정에서 그가 곁가지로 "한 때 테러를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 진술을 크게 부풀린 것이라고 한다. 물증이라는 게 언젠가 <한겨레신문>에 실린 것을 그가 오려서 보관해뒀다는 조선일보 방사장의 집 사진 정도.

    게다가 그가 "테러를 생각한 적이 있다"는 시점은 90년대 중반으로, 이번 방북과는 무관하다. 검찰의 기소 내용에도 관련 혐의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글픈 에피소드

    그는 남에서 소외받았고, 북에서 추방당했다.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그의 일상은 ‘추방’으로 끝난 밀입북의 원죄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지금 힘 센 언론이 자신을 대서 특필하는 것이 어쩌면 행복할까.

    그는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어쩌면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리 상태 아래서, 변호인의 선임과 주위의 어떤 도움도 거부한 채, 자기 한 몸의 공간으로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있다. 그리고 한 없이 무력한 이런 개인을 상대로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잔인하고, 비겁하고, 야비한 ‘테러리스트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접견한 변호인은 "이 사건은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 그러면서도 피해의식과 약간의 과대망상을 갖고 있었던 한 개인의 서글픈 에피소드"라며 "이런 사건을 공안기관과 언론기관이 마녀사냥식으로 확대 과장하여 부풀리는 것은 코미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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