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⑭
    공산당 선언과 주체사상
    민수, '자·창·의'의 논리에 맞서다
        2021년 05월 17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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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통일주의자로 불리다'(13화)

    (14화) 공산당 선언을 읽고, 주체사상과 싸우다

    그해 서대협은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이 되었고 서총련과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6·10 남북학생판문점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규모 투쟁을 전개하였다. 6월 10일 연세대학교에서 2만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남북 학생 회담 출정식을 갖고 판문점으로 행진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공권력에 의해 ‘원천봉쇄’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었고 민수는 근대사상연구회에 일주일에 두 번 나가서 책을 읽고 토론을 했고, 유정과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만났다. 유정과의 하루는 데이트였지만 하루는 일종의 공부였다. 유정이 일주일에 하루는 영어로 말하는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민수는 처음에는 한 문장을 완성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1980년대까지의 한국 영어 교육은 말하기와 쓰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오로지 중 고등학교에서만 영어를 배웠던 민수가 말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근대사상연구회 세미나를 준비하며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을 읽었다. 이미 전년도에 읽은 일이 있었던 그에게는 이 책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두려운 말, 공산당. 그러나 마르크스의 문장들은 아름다웠고, 현실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했던 그 글에 빠져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녹여 버렸고, 인간의 자유를 단 하나의 파렴치한 상거래의 자유로 대체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유란 상거래의 자유, 판매와 구매의 자유일 뿐이다”

    “사적 소유를 철폐하면 그 순간, 사회는 게으름이 만연할 거라 비난한다. 그렇다면 진작에 부르주아지체제는 일순간에 몰락했어야 했다. (이 사회에서) 대다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니까.”

    “당신들의 법과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생산체제와 소유관계의 부산물이고 지배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사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위 문장이 그 이유).”

    “한 시대의 지배사상은 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1)

    그에게는 자신을 매료시킨 그 문장들의 내용을 반박할 능력이 없었다.

    8월 15일에 그는 인생 처음으로 소중한 책을 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가 그 날 오후에 독립문 역에서 내리고 위로 오르려 할 때 그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전경들이 검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독립문 역에서 검문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민수는 몰랐지만 그 날 연세대학교에서 ‘8.15 민족 해방제 및 출정식’이 있었고 그 후의 싸움은 독립문역이나 구파발 역 등에서 이루어졌다. 판문점을 향한다는 외양을 보이는 상징적인 싸움이었다.

    민수는 <공산당 선언>을 ‘눈물을 머금고’ 지하철역 화장실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는 검문을 당했고 주민등록증의 주소를 확인한 경찰은 동네 주민임을 확인하고 가방 검색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아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지 말 걸.’ 하지만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것도 우스웠다.

    전투경찰에 밀린 학생들이 인왕산 기슭의 민수 집까지 올라왔다. 민수는 몇 명의 학생들에게 물을 주었고 나중에 그들을 인왕산 자락을 빙 돌아 내려가 전경의 검문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민수는 자신이 저 순박해 보이는 아이들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생각하기도 했고, 주로 1학년이었던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하고 이 행사에 참여했는지도 생각했다.

    민수는 8월 20일에 처음으로 유정과 함께 밤을 보냈다. 유정은 침대 위에서, 민수는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다행히 둘 다 취한 상태였고, 민수가 먼저 유정이 나중에 잠이 들었다. 민수와 유정은 집에는 둘 다 지방으로 놀러간 것으로 보고한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 유정이 일어난 민수를 안아주었고 대견하다는 듯 민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약속을 잘 지키는 착한 어린이야. 진짜 손만 잡고 잤네.”

    “손도 안 잡고 잤잖아. 나는 바닥에서 잤으니까.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지? 나는 그렇다고 치고 너도 많이 마셨네.”

    “어, 우리 영어로 말하는 날이야, 오늘.”

    “오늘은 그냥 우리말로 하자. 머리 아파.”

    “그래, 한 번만 봐준다, 누나가. 너 집에 가. 점심 때 밖에서 보자. 누나가 너무 상태가 안 좋아서 목욕하고 미용실이라도 가야 할 것 같아.”

    민수는 상태가 안 좋은데 왜 미용실을 가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유정의 뜻을 따랐다. “알았어.”

    둘은 열두시에 다시 만나 물냉면으로 해장을 했다. 둘 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둘은 냉면을 먹은 후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민수는 이제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했다.

    9월이 왔고 민수에게 예상 못한 일이 생겨났다. 동아리의 9월 두 번째 주의 토론 내용은 분홍색 표지를 지닌 제본된 문건이었는데, 겉표지에는 제목이 없고, 안에는 <사람됨의 철학>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수는 유물론자들이 쓰기에는 좀 이상한 이 제목을 본 후 안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첫 부분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은 자주성을 가진 존재, 자주적인 사회적 존재입니다.

    자주성은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자주성으로 하여 사람은 자연의 구속을 극복하고 사회의 온갖 예속을 반대하며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복무하도록 만들어나갑니다.(2)

    순간 민수는 전년도에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를 읽고 영철과 토론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6번 테제를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자신이 읽은 글은 마르크스의 테제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이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의도 아닌가?

    “인간은 자주적인가? 일단 ’인간은 ~하다.‘라는 것 자체가 관념적인 표현이고, 인간은 대개 오히려 의존적이라고 할 수도 있어.” 이렇게 혼잣말을 한 민수는 잠시 후 생각했다.

    ‘누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가? 우리는 보통 그런 사람들을 위인이라고 부르고 위인의 수는 많지 않다. 이순신보다는 원균이 더 많고 안중근보다는 이완용이 더 많다. 이순신보다는 수동적인 백성들이 많았고, 안중근보다는 수동적인 시민들이 많았다.’

    민수는 기분이 나빴지만 계속 읽어보았다.

    사람은 창조성을 가진 존재, 창조적인 사회적 존재입니다.

    창조성은 목적의식적으로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사회적인간의 속성입니다. 창조성으로 하여 사람은 낡은 것을 변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 자연과 사회를 자기에게 더욱더 쓸모 있고 이로운 것으로 개변시켜 나갑니다.(3)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만한 얘기네. 하지만 말은 되지 않지. 인류를 집합적으로 보면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창조적이라는 말은 말이 되지 않지. 대개 창조적이기보다는 관습이나 주변 사람을 따라하는 이들이 많으니까.’

    민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메모를 했다. “창조성이라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행글라이더를 만들 수 있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중력과 넓은 천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기의 저항을 인식한 인간이 부력을 일으킬 수 있는 행글라이더를 만들어냈다.”

    “어느 진술이 과학적인가? 당연히 후자이다.”라고 민수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더 읽기 싫었지만 그래도 읽었다.

    사람은 의식성을 가진 존재, 의식적인 사회적 존재입니다.

    의식성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개변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규제하는 사회적인간의 속성입니다. 의식성으로 하여 사람은 세계와 그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파악하며 자연과 사회를 자기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고 발전시켜나갑니다. 의식성에 의하여 사회적 존재인 사람의 자주성, 창조성이 담보되며 그 합목적적인 인식활동, 실천 활동이 보장됩니다.

    결국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으로 하여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고 힘 있는 존재로 되며 세계에 숙명적으로가 아니라 혁명적으로,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하고 세계를 맹목적으로가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하게 됩니다.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곧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유일한 개조자입니다.(4)

    ‘인간에게 세 속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인간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가? 맹목적이 아니고 목적의식적인가? 사람이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인가?’

    민수가 메모했다. “인간은 수동적이기도 하며 능동적이기도 하다. 맹목적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속성 때문에 능동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기만하는 것이다. 사람이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라는 말은 사실과도 배치된다. 원시시대에 인간은 다른 포유류에게 잡아먹히기도 했다. 지금도 인간은 태풍에, 지진에, 해일에 무력하다. 많은 비에 무력하다. 그리고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쿤타 킨테도 인간이고 노예 소유주도 인간이다. 아마존 유역의 원시적인 부족도 인간이고 미국의 자본가들도 인간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라는 말은 관념적인 말일 뿐이다.”

    며칠 후에 세미나가 열렸다. 동아리 선배 김철중이 말했다. 민수는 그 날 이상함을 느꼈다. 마르크스를 논할 때와 그가 상당히 달라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한다기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암송하는 것 같았다. “이 새로운 철학의 등장 배경을 말해보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유물론의 원리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의 원리는 밝혔지만, 이러한 철학적 원리만으로는 물질세계의 일반특징은 밝힐 수 있어도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은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가 말했다. “무슨 얘기죠?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마르크스주의가 물질세계의 특징을 밝힐 수 있다고요? 그건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 하는 일이죠.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은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질계의 특징은 밝혀도 인간은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용어 사용을 이상하게 섞는 궤변에 불과해요.”

    김철중은 당황하며 말했다. “좋은 문제제기야. 일단 오늘 논의를 진행한 후 후반부에 그것은 다시 얘기하자.”

    민수가 “예”라고 답했다. 민수의 싸움은 지속되었다.

    ”인간의 속성이 창조성이라고요? 혹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 나온 이 유명한 말 못 들어보셨어요?”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그 얘기가 여기 왜 나오지?”

    “그게 아니라 6번 테제요.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거 말이에요. 창조성도 자주성이라는 말도 바로 그 추상이에요. 인간은 이러저러한 속성을 지녔다는 말은 관념적인 것이고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해요.”

    “인간은 자주적이잖아. 그렇지 않은가?”

    “자주적인 사람보다는 의존적인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많고 그렇지 않고 또한 중요하지 않아요. 자주적인 사람과 자주적이지 않은 사람이 모두 존재하는데 인간의 속성이 자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자주적이어야 혁명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자주적이어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위일 뿐 인간의 속성과는 관련이 없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속성이 자주적이지 않다는 것을 형이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는 증거에요.”

    “식물인간이 여기에 누워 있어요. 그의 속성은 ‘의식성’인가요? 그의 속성이 의식성이 아니라면 그는 인간이 아닌가요?”

    민수의 공격적인 질문 공세와 설명으로 세미나는 파탄이 났다. 함께 참가한 동아리의 학생들 중 일부는 민수에게 감탄했고, 일부는 지도 선배를 바보로 만드는 그의 모습에 분개했다. 그 날 참가했던 87학번 학생 다섯 중 둘이 동아리를 탈퇴했다. 민수는 책임을 느꼈다. 그는 이 동아리에서도 짐을 챙겼다.

    민수는 그 문건을 도서관에서 읽었다. 집에서 읽다가 아버지가 보면 문제가 될 것이었고 과 사무실이나 과 독서실에 가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동아리에서는 이미 짐을 챙기고 나왔다.

    그는 다음을 읽고 의문을 품었다.

    혁명운동, 공산주의운동에서 지도문제는 다름 아닌 인민대중에 대한 당과 수령의 영도 문제입니다.(5)

    ‘당과 수령의 영도라.’ 당과 수령이 같은 위상에 놓여 있었다. 민수는 이 이론은 결국 이상하게 흐를 것임을 예감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김정일이 수령이란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령이 인민대중의 뇌수라. 그럼 인민대중은 손발이네.”

    그는 왜 개인숭배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사상이 자기 주변에서 퍼지고 있음에 경악을 느꼈다. 물론 그가 이 사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악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그는 동아리 선배 김철중을 우연히 만났고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니?”

    “별 계획 없어요. 그냥 우리 과 85에 김종찬 선배라고 있는데 그 분하고 얘기나 좀 해 보려고요.”

    김철중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안 만나는 게 더 나을 거야. 왜냐하면. 아니다. 나중에 기회 있으면 술 한 잔 하자.”

    민수는 똑똑한 아이였고,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종찬이 형도?’ 카이사르가 말했는지 후에 셰익스피어가 창작한 것인지 모를 그 말 “브루투스 너마저?”를 떠올리며 민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계속>

    <각주>

    1, https://ko.wikisource.org/wiki/번역:공산당_선언 에서 인용함. 괄호 안의 글은 필자가 추가.

    2. https://ko.wikisource.org/wiki/주체사상에_대하여 에서 인용함.

    3. 위와 동일한 곳에서 인용. 일부 띄어쓰기와 북한식 표현 수정함.

    4. 위와 동일한 곳에서 인용. 일부 띄어쓰기 수정함.

    5. 위와 동일한 곳에서 인용.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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