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⑬
    ‘반통일주의자’로 불리다
        2021년 05월 15일 08: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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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가치론을 배우다(12화)

    (13화) ‘반통일주의자’로 불리다

    김종찬과의 세미나는 육주 만에 종료되었다. 다른 대학들이 전년도 11월에 다음 해의 총학생회장을 선출하던 것과 달리 1987년과 1988년에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는 3월에 이루어졌고, 아마 그것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책 한 권을 공부했지만 그가 마르크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민수는 반복적으로 읽고 혼자 예를 들어보며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법이라고 생각하며 그 책을 다시 읽으며 반례를 스스로 들고 그것을 또 스스로 반박하는 방식의 공부를 하며 2월 말 삼월 초를 보냈다.

    3월이 되자 유정과는 일주일에 한 번만 보기로 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 유정은 혼자 살았고 그의 전화기는 자신만의 것이었다. 민수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밤늦게 집에서 그와 통화하며 연애를 이어갔다.

    김종찬을 대신하여 철학과 86학번 이명신이 민수가 속한 세미나 팀을 이끌었다. 이명신은 인문대에서 가장 학생운동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선배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그 당시 서울대에서 C. C.(combat cell)라고 불렸던 전투조의 가장 앞 선에서 화염병을 던지곤 했고, 모든 교내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항상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민수는 이 새로운 세미나 지도자를 기대 반 근심 반이 섞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민수는 그에게 경제학 학습이 중단되고 통일에 대한 학습이 삼주 동안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문서 하나를 배부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20분 정도 그 문건을 읽었다.

    토론이 시작되었다. 분단에 대한 역사적 사실 몇 가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고, 세미나는 분단의 원인과 극복 방법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이명신이 말했다.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고 소련이 북한을 점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고 부르는 것이 맞을 거야. 하지만 이것이 오늘의 논의 주제는 아니니 일단 둘 다 점령했다고 가정하자. 현재의 상황을 보면 소련의 군대는 북한에 없지. 미국의 군대는 아직도 남한에 있고. 만일 양자가 남북한을 점령했기 때문에 분단이 일어났다면, 통일은 양자가 모두 남북한에서 나가는 것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내가 미군이 철수하면 바로 통일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미국의 남한에 대한 지배력이 사라지고 남한이 자주적이 된다면 통일은 이루어질 거라는 애기를 하는 거지.”

    민수는 의문을 품고 그에게 말했다. “만일 어떤 이가 담배를 많이 피워, 단지 흡연 때문에, 폐암이 걸렸다고 가정해 볼게요.”

    “왜 지금 담배 얘기가 나오는 거지?”

    “형이 한 말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거예요.”

    모든 이들이 긴장했다.

    “담배를 피워서 폐암이 걸린 이가 담배를 끊으면 폐암이 나을까요? 총알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서 총알을 제거하면 상처가 사라질까요? 아닐 것 같은데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남과 북을 분단시킨 원인이 양국의 점령이라고 하더라도, 그 원인이 사라져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예요.”

    당황한 이명신이 말했다. “담배와 암과 점령과 분단이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원인과 결과를 논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지요. 원인이 어떤 결과를 낳고 나서부터 그 결과물은 다시 변화 발전하거든요. 그것이 암세포든, 사회든. 북한과 남한은 다른 체제가 되었고, 두 나라가 완전히 자주적이 되어도 그 체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통일은 어렵겠죠.”

    “체제가 다른 두 국가의 연방 공화국은 가능할 수 있어.”

    “그건 전 잘 모르겠는데 가능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갈라지거나 내전이 난다든지 하는 일이요.”

    체제가 다른 두 국가의 연방 공화국: 북예멘(예멘 아랍 공화국)과 남예멘(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
    그 두 국가의 통일의 결과.

    그 날 세미나는 산으로 갔고, 모두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며칠 후 그는 자신을 누군가가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쁘띠부르주아’라고 불렀다는 얘기를 어느 과 친구에게 들었다. 사실 민수는 쁘띠부르주아가 비난하는 말이라는 것도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 ‘말만 번지르르한’이 붙었으니 비난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민수는 한참을 생각한 후 이명신을 만나 당분간 팀 세미나에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고, 이명신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둘 다 당분간이 아님을 알았고, 어떤 의미에서 민수는 처음으로 ‘어른의 어법’을 구사했는지도 모른다.

    기분이 나빴지만 민수는 크게 이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김종찬이 없는 세미나라면 그도 별로 참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철학과 선배는 김종찬 만큼의 설명 능력은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1988년은 많은 이들에게 서울 올림픽의 해로 기억될 것이지만 민수에게 올림픽과 관련된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 올림픽을 통하여 그가 좋아하던 허재와 이충희가 얼마나 대단한 농구선수였는지가 세계에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수는 나중에 블라데 디바치와 토니 쿠코치 등이 이끌던 강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이충희가 38득점을 기록하고 허재가 23득점에 무려 7개의 스틸을 기록하였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었다. 88 올림픽 남자 농구에서 금메달은 소련이, 은메달은 유고슬라비아가, 동메달은 미국이 받았었다. 이 대회에서 ‘농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구긴 미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드림 팀’이라는 것을 만들어 금메달을 탈환하게 된다. (관련 동영상)

    서울대의 운동 세력은 크게 둘로 나뉘었고 민중민주계열이라고 불리던 세력이 주로 노동자들과의 연계와, 노조나 빈민단체 등의 민중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을 폭로하고 저지하는 것에 신경을 모은 반면 민족해방 계열은 통일 문제를 전면으로 떠오르게 하려 애썼다.

    대부분의 영문과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지지했던 민족해방계열이었던 철학과의 총학생회장 후보는 3월 29일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발표한 ‘김일성대학 청년학생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북한 국토종단순례 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체육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민수는 아크로폴리스, 줄여서 대개 아크로라고 불리던 계단에서 그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리고 왜 3월의 세미나 주제가 통일 문제였는지 감을 잡게 되었다.

    영문과 선배들의 바람과 달리 선거는 민중민주계의 승리로 끝났다. 전년 대선에서의 후보단일화 전술이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많은 학생들이 그 비판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민수는 생각했다. 제안자가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총학생회에는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조통 특위)’가 설치될 수 있었다.

    4월 4일에는 김일성대학 학생위원회에서 3월 29일의 제안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서울대 조통 특위는 남북한 국토종단순례대행진과 청년학생체육대회를 위한 실무회담을 6월 10일에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민수는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선생님 한분은 통일이 되면 자신은 평양에 가서 물장사를 하겠다고 했었다. 순진했던 고2의 민수는 봉이 김선달을 떠올렸으나 계속 듣다보니 평양 여성들을 고용하여 기생 장사를, 혹은 룸살롱을, 혹은 성 매매업소를 하겠다는 얘기였다. 통일은 북한 여성들을 괴롭힐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통일의 결과는 장밋빛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민수가 더 어렸을 때 그랬듯 많은 이들은 노래에 세뇌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진짜로 믿는 것 같았다. 민수의 입장은 이제 달라졌다. 남한 정부가 얘기하는 것 정도로 북한이 나쁜 것이 아닐지라도 북한은 어쨌든 나쁘며 남한도 나빴다. 나쁜 놈 둘이 합치면 어떤 괴물이 등장할지 민수는 걱정했다.

    그는 영문과 선배들과 함께 하는 정치적 활동을 모두 접기로 했다. 사실 그전에 뭐 별로 한 것도 없었으니 이것 또한 별 게 아니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통일운동에 나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뿐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는 했지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구호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탄압을 받겠지. 그럼 탄압을 받으며 노태우 정권을 반 통일세력으로 낙인찍는다? 그럼 다른 투쟁의 저변이 넓어진다? 이런 의도인 건가. 오히려 친북 세력이라고 역공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인데.’

    민수의 고민은 거기서 끝났다. 그에게는 더 이상 생각을 전개할 만큼의 경험은 없었던 것이다.

    사월 말에는 총선이 있었고 민수에게는 아직도 투표권이 없었다. 그는 개표 결과만을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가 3년 전에 흥분하게 만들었던 지역구 1당에게 전국구 2/3이 가는 규정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그것은 1/2로 변화되어 존속했다. 그 도움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이 선거에서 민정당은 125석, 평민당이 70석, 통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차지했다. 평민당과 통민당의 의석을 합치면 민정당보다 많았고, 신민주공화당이 민정당의 편을 드는 경우 과반수를 넘는 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유신 잔당’ 김종필은 자신은 유신 본당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선거에서의 지역 구도가 정착하게 된다. 노태우 정권은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대연합과 더 나아가 통민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을 은밀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정은 직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민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유정이 민수에게 물었다.

    “로맨티스트는 내가 무슨 일에 어울릴 것 같아?”

    “내 연인.”

    “그건 당연하고, 직업 얘기하는 거야.”

    “솔직히 무어라고 할 지 모르겠어. 다 잘 할 것 같거든. 공부를 해서 교수가 되어도 좋을 것 같고 영어 선생님을 해도 될 것 같고 회사에 들어가도 될 것 같고.”

    “근데 교수가 되려면 아마 유학 갔다 와야 할 거야. 내가 미국에서 살긴 했지만 그건 중학생 때 일이고. 넌 나를 육칠년 간 못 봐도 돼? 아니면 같이 유학 갈 수 있어?”

    민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둘 다 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 유정이 민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우리아기가 힘들었구나. 누나는 민수 놔두고 가지 않아. 오늘 얘기는 내가 무얼 할지를 몰라서 한 번 물어본 거야.”

    “유치원 선생님 해. 아기가 기분이 되게 좋아졌거든.”

    “그래. 민수 유치원 원장 할게.”

    둘은 웃고 껴안았고 입을 맞추었다. 유정은 외국계 은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민수는 그 날 그가 당시에 알던 유일한 외국 은행인 씨티 뱅크 외에도 아주 많은 은행 이름들을 들을 수 있었다. 민수도 직업 생각을 난생 처음 하게 되었다.

    “근데 너무 빨리 생각하는 거 아냐? 우린 아직 2학년 초인데.”

    “민수야.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네가 싫어할지 모르는 얘기해도 돼?”

    “응.”

    “나는 서울대생이 아니고 너는 서울대생이야. 우리는 취업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어. 너희들은 입도선매일 수 있고 우리는 아니거든.”

    민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유정이 걱정하며 말했다. “내가 너 화나게 한 거야? 그랬으면 미안해.”

    민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잘 모르던 걸 네가 가르쳐준 거야. 고마워. 내가 화낼 일이 뭐가 있어.”

    “휴. 다행이다. 우리가 이런 안 낭만적인 얘기를 하다니. 우리도 이제 나이가 드는 건가.”

    유정은 얼마 후 만 스무 살이 되었다. 민수는 무엇을 선물할지 며칠을 고민하다 시를 썼고 장미꽃 스무 송이를 샀다. 둘은 서울대공원으로 갔다.

    민수가 말했다. “올해는 윤년이야.”

    “그게 뭐?”

    “나는 너를 작년 5월 9일에 처음 만났고, 나는 그 날 이후 하루하루를 다 감사하며 살았고 그러다 보니 윤년이 좋아졌어. 하루를 더 너를 생각할 수 있잖아.”

    “로맨틱하기는 하지만 네 평소의 말솜씨보다는 별로야.”

    민수는 나름대로 생각한 말이 별 효과가 없자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내가 생각했던 비밀이 있는데 얘기해도 돼?”

    “응.”

    “나는 내가 만 스물이 되는 날까지는 순결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었어. 잘 지키고 있고.”

    “그럼 내년 일월에는 나랑. 음.”

    “네가 싫으면 더 오래 지나도 돼.”

    “그 때 가서 생각하자.”

    “응.”

    둘 다 흥분했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민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급조한 시여서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옷이나 신발보다는 나을 거라 믿었다.

    모든 게 우연이라지만 그 우연에 감사합니다.
    오월 구일 당신을 처음 보았고 넋이 나갔고
    정신을 차린 후 사랑에 빠졌습니다.

    모든 게 우연이라지만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오월 칠일 당신을 보니 또 넋이 나가려 합니다.
    이번엔 그걸 잡았지만 또 사랑에 빠졌습니다.

    민수는 걱정했지만 유정은 좋아했다. “이제 평균 이상, 아니 너무너무 잘했어. 고 민수야. 내가 받은 최고의 생일선물이야.”

    오월에는 대학 축제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서는 축제라는 말 대신 대동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었다. 1984년에 고려대 학생들이 자신들의 축제를 석탑 대동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1988년에는 서울대에서도 그 용어가 정착되었다. 그 해부터 대학가의 언어생활은 많이 달라진다. 이제 서클 대신 동아리라는 말이 많이 쓰이게 되었고, 아크로 집회에서 1987년에 ‘써연’으로 참가했던 동아리들의 연합체는 이제 ‘동연’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신입생을 ‘새내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열찬 투쟁’에서 볼 수 있듯 ‘가열차다’라는 새로운 용어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 대동제 행사에 참여한 인문대 학생들은 5동 건너편 잔디언덕에서 술자리를 갖고, 그 후 신림동에 있는, 주로 신림2동의 녹두거리에 있는 술집으로 이동해 술자리를 이어가곤 했다. 술자리에서는 가끔 사고가 터지기도 했고, 오월의 어느 날 민수는 거기에 연루되었다.

    약간 술이 취한 인문대 선배 하나가 민수가 잔디언덕에서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민수는 “통일이란 것이 다 옳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북한의 공유지들을 다 빼앗으려는 소위 실향민들이 있는 것 같고, 심지어 나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하나는 평양에 가서 거기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얘기를 수업시간에 떠들기도 했어.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한다면 그 ‘우리’가 누군지에 따라 통일 후 한반도의 모습을 서로 다르게 그리겠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민수에게 막걸리 잔이 날아왔고 민수와 옆에 있던 친구들 둘의 옷이 막걸리로 젖었다. 종이 잔이었으므로 상처 같은 것이 날 일은 없었지만 민수와 친구들은, 특히 민수는 굴욕감을 느꼈다. 민수가 나섰다. “지금 뭐 하신 겁니까?”

    “너 인마, 어느 과 몇 학번이야, 이 반통일주의자야.”

    민수는 이 말을 듣고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으면 꼭 나이 얘기를 하다가 “민증 까.”라고 말하곤 하던 이상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여성들이었던 두 친구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말했고 그들은 과 사무실로 갔다. 민수는 이 일이 폭력으로 이어질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여자사람친구들이 자리를 떠나자 민수는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냈다.

    “어이. 통일주의자. 통일주의자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써도 되나? 막걸리 든 종이컵 던지는 것도 폭력이야.”

    “너 이 자식아, 학번이 뭐야? 어린 것 같은데.”

    “87인데, 뭐. 학번이 그리 중요하냐? 옳고 그른 것을 따질 때?”

    “이게 그래도 반말이네. 너 이름이 뭐야, 과는? 밝히지 않으면 프락치로 간주할 수도 있어.”

    반통일주의자에 프락치까지. 민수는 분노가 치솟았지만 참으며 한 마디 했다. “취하신 것 같은데 주사 그만 부리고 집에 가서 애기 닦고 발이나 보슈.”

    ‘통일주의자’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민수는 “역시 ‘애기 닦고 발 봐’는 효과 만점이야.”라고 속으로 말하며 과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그 통일주의자가 자신의 말을 중의법으로 이해했음을 알지 못했다. 민수는 주사(酒邪)를 의미했으나 들은 이는 그것과 또 다른 주사(主思)를 민수가 동시에 의미했다고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그는 과 사무실로 간 후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쪽으로 가서 택시를 잡고 낙성대 역을 향했다. 민주가 말했다. “별 일 없었지?”

    “응. 옛날에 했던 일을 다시 해 보았더니 가만히 있더라고. 애기 닦고 발 보라고 하면 대개 사람들이 잠시 반응을 못해.”

    전년도에 민수에게 그 말에 얽힌 사연을 들었었던 민주와 미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민수는 둘이 내렸음에도 택시에서 내리지 않았다. “난 데이트 갈게. 내일 봐. 아저씨 공덕동이요.”

    민수는 일주일에 하루만 보자는 약속을 어기고 유정의 오피스텔로 갔다. 3월과 5월 사이에 ‘쁘띠부르주아’와 ‘반통일주의자’와 ‘프락치’까지 된 만 열아홉 살의 젊은이에겐 그것이 필요했다. 다행히 유정은 그를 반겼고, 두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집으로 향했다.

    민수가 프락치가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지만 5동 건너편 언덕에서 공공연하게 반통일적인 발언을 했다는 얘기는 떠돌아 다녔다. 그는 이상한 시선을 느끼기도 했고 수군거림을 듣는 것도 같았다. 민수는 수업 시간 외에는 인문대 쪽에 오지 않기로 했고, 그러려면 근거지가 있어야 했다. 그는 학생회관 건물로 가서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서클들의 혹은 동아리들의 이름을 확인해 보았고 ‘근대사상연구회’라는 간판을 보았다.

    그 동아리의 86학번 선배 하나와 얘기를 나눠보니 5월부터 8월까지는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엥겔스의 저작 몇 가지, 그리고 <매니피스토>를 강독한다고 했다. 민수도 이제 <매니피스토>가 무엇인지는 알 때였다. 그는 그 동아리에 들기로 했다.<계속>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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