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藝)의 구도자,
    기타니 미노루의 운명
    [현대바둑 사이드스토리②] 신포석
        2021년 05월 13일 03:2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혼인보의 탄생과 조치훈(1화)

    바둑은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기타니 미노루의 아버지는 일본 관서지역 작은 시골마을의 이발사였다. 시골마을의 이발소들이 의례 그렇듯 문 앞에는 작은 평상이 놓여 있었다. 동네 토박이들이 둘러앉아 낮술을 하거나 삼삼오오 쇼기(일본장기)를 즐기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도 단골메뉴는 바둑이었다. 이발소를 들락거리던 기타니의 눈에 흑백의 돌을 쥐고 사력을 다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신기한 장면이었다. 이따금 ‘아타리(단수)’를 외치며 득의의 웃음을 짓는 광경에 묘한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은 순식간에 동네 아저씨들과 호선으로 바뀌었다. 동네 바둑으로는 20년을 두어야 한다는 5급을 소년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도달하자 사람들은 새로운 기재가 나타났다고 소란을 떨었다. 기타니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당시 관서지방에서 떠오르는 별은 구보마쓰 가쓰키요 4단이었다. 아직은 젊은 나이였지만 구보마쓰는 기타니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3년이 지난 후 구보마쓰는 소년이 자신을 뛰어넘을 재목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구보마쓰는 소년을 동경의 스즈키 다메지로 6단의 문하생으로 보내며 “세상을 바꾸어 보라”는 작별의 말을 남겼다. 소년은 첫 스승의 말을 평생 잊지 않았다. 기타니는 새로운 도장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14살에 입단에 성공하며 면장을 고향 아버지 이발소로 보냈다. 아버지는 볕이 잘 드는 이발소 한쪽에 액자를 한 면장을 내걸었다.

    지고쿠다니 여행과 신포석

    입단 후 기타니는 거칠 것이 없었다. 도쿄니치니니 신문(동경신문)이 주최하는 신예전에서 10연승을 거두며 동시대 유망주들을 단숨에 평정했다. 그가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24살이던 1933년, 기타니는 오청원(우칭위안)과 기고쿠다니로 역사적인 여행을 떠났다. 기고쿠다니는 처갓집이 온천을 겸한 여관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곳에 온 목적은 휴양이 아니었다.

    온천을 옆에 두고 두 사람은 바둑에 몰입했다. 타이틀도 상금도 걸리지 않은 이 대국은 현대바둑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혁명이었다. 두 사람은 승부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기존의 바둑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포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기타니와 오청원의 ‘신포석’이 등장한 것이다.

    오청원과 지고쿠다니 여행 후 기타니가 둔 첫 대국. 일곱번째 수가 초반 행마에 역행 할 뿐만 아니라 실리로도 상당한 손해라 공식대국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는 수였다. 이 위대한 실험은 그의 제자 다케미야가 ‘우주류’라는 포석을 들고 나와 세계를 제패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기타니는 첫 대국에서 신포석을 들고 나와 일본기원을 경악에 빠트렸다. 타이틀보다는 도전이 생의 전부였던 중국 출신인 오청원의 행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일본바둑의 차세대 주자가 혁명을 시도하자 일본기원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바둑 팬들은 기타니가 오청원처럼 이단아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1937년 기타니는 명인전 인퇴기(은퇴기념대회) 결정전에 올랐다. 21대 혼인보 슈사이가 더 이상 명인 칭호를 세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생긴 대회였다. 공교롭게도 대국 상대는 첫 스승이었던 구보마쓰였다. 기타니는 스승을 이기며 당대 최강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1938년 혼인보 슈사이의 은퇴를 기념하는 대국이 일본기원 주최로 열렸다. 제한시간 40시간, 대회기간 6개월이라는 초유의 대국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 누가 당대 최강인지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대국은 기타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일본기원의 양대산맥, 기타니 미노루 도장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기원의 모든 대국 일정은 파행을 거듭했다. 기사들도 공습을 피해 지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기타니는 처갓집 인근에 은거하며 세월을 낚았다. 종전 후 돌아온 집은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기타니는 가진 재산을 털어 새로 집을 짓고 도장을 열었다. 36살, 아직은 후학을 양성할 나이는 아니지만 기타니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자신이 위대해지기는 것보다 후학을 길러 세상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전히 첫 스승의 작별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기타니가 도장을 연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청원과 지고쿠다니 여행 이후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문하생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는 본격적인 도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소수의 기재들을 두고 함께 바둑의 새로운 세계를 연구하는 결사체에 가까웠다. 그 기재가 어떤 출신인지는 기타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1934년 기타니는 중국을 방문한 후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을 겸해 조선을 경유해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경성에 머무르는 도중에 조선에 어린 바둑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왔다. 조선 전역의 자칭 국수(지방 최고수를 부르는 호칭)들이 10살 소년과의 대국에서 전전긍긍한다는 소문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기타니는 소년과 지도대국을 자청했다. 대국 후 기타니는 소년에게 자신의 도장에 입문할 것을 제안했다.

    소년의 이름은 후일 한국바둑의 창시자이자 대국수 호칭을 가지게 되는 조남철이었다. 제안은 곧바로 성사되지 않았다. 식민지라는 현실은 부모들의 결단을 망설이게 했고, 일본의 분위기도 냉랭했다. 기타니는 개의치 않았다. 틈틈이 조남철 부모들에게 서신을 보내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강조했다.

    3년 후, 기타니의 진심이 통했는지 부모들이 결단을 내렸는지 조남철은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기타니 도장에서 신포석의 변화도를 연구하는 데 참여했다. 다시 3년 후, 조남철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일본기원에 입단했다. 일본기원의 파행이 계속되자 고민에 빠진 조남철은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기타니는 조남철을 떠나보내며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며 장도를 당부했다.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들이 차지한 타이틀은 2백회를 넘었고 총 단수는 3백단을 넘었다.

    피의 가마쿠라 10번기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기원이 개점휴업 상태에 놓이자 기사들은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기사들은 차디찬 삿포로로, 남쪽의 후쿠오카와 같은 지방을 전전하며 지도대국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당대의 최고수들은 그동안 차지한 상금을 바탕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전국으로 흩어져 휴양 아닌 휴양을 취했다. 기타니와 오청원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1939년 기타니와 오청원은 이른바 칫수 고치기 10번기를 시작했다. 프로기사들은 10연패를 하더라도 다음 대국에서 당대 최강자와 대국에서 호선(흑선 덤 5집반, 현재는 6집 반)이라는 규정은 변하지 않는다. 열판을 두어 한판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프로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인데 호선이라는 규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두 사람은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일본기원이 정상적인 상태라면 가능하지도 않을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일탈이었다.

    3년에 걸쳐 진행된 10번기는 기타니가 1승을 거둔 데 비해 오청원이 5승을 올리면서 둘의 합의대로 칫수가 ‘정선’으로 변경됐다. 기타니가 흑을 잡아야 하고 5집 반의 덤을 백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을 잡고 먼저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 바둑이기 때문에 흑은 5집 반이라는 가공의 집을 백에게 제공하는 것이 호선이다. 정선은 흑을 잡고 덤을 제공하지 않는 칫수다. 이를테면 당대의 기타니가 오청원에게는 한수 아래라는 결과가 등장한 것이다.

    기타니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1국 도중에 기타니는 코피를 흘리며 반상 위에 돌을 놓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4국에서는 갑작스런 각혈이 터지며 반상 위를 피로 적시고 쓰러졌다. 그도 모르는 지병이 확인됐다. 위험한 수준의 고혈압이었다. 수백 가지 변화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지우며 한수 한수에 집중해야 하는 바둑기사에게 고혈압은 치명적이었다.

    기타니의 투혼, 그리고 낙화

    1954년 기타니는 도장에서 졸도하면서 쓰러졌다. 고혈압이 다시 재발한 것이었다. 모두가 시타니의 시대는 끝났다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그의 투혼은 멈추지 않았다. 1957년 49살의 나이에 최고위전의 도전권을 획득한 후 최고령 타이틀 보유자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1963년 혼인보 대국 도중에 키타니는 다시 쓰러졌다. 1964년 명인전 대국 도중에 바둑돌을 손에 쥔 채 다시 혼절했다. 1968년 팬들이 뽑은 20인 바둑기사에 뽑혀(14위)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기념대국을 마친 후 반상 위를 떠났다. 1975년 그의 아내와 일본바둑을 풍미할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타니 도장의 바둑 훈련을 총괄한 사람은 가지와라 다케오였다. 가지와라는 자신의 성적보다는 도장 운영에 모든 것을 쏟은 기타니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기타니는 제자들의 대국기보를 보고 가끔씩 방향이나 가져야 할 철학을 주문했다. 실리파인 조치훈(44회 우승)에게는 행마보다는 침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치훈은 실리를 차지한 후 적진에 침투해 세력을 허무는 기풍으로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을 얻으며 세계를 제패했다.

    조치훈보다 더 극단적인 실리파인 고바야시 고이치(36회)은 ‘지하철’이었다. 가토 마사오(31회)는 전혀 다른 기풍이었다. 실리보다는 상대의 돌을 약하게 만든 후 상대방이 손을 빼면 여지없이 응징해 ‘대마킬러’, ‘살인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타케 히데오(18회)는 실리도, 공격도 아니었다. 돌의 모양을 중요시했고, 행마에 대한 철학을 강조했다. 오타케의 별명은 ‘미학자’였다.

    신포석을 연구하던 젊은 날의 기타니와 가장 닮은 제자는 다케미야 마사키(12회)였다. 흑을 쥐면 언제나 3연성 정석을 시도했고 모두가 공배의 영역이라고 하는 중앙에 집이 있다는 철학을 추구했다. 다케미야의 별명은 ‘우주류’였다. 이시다 요시오는 행마와 후반 형세판단, 그리고 끝내기에 강했다. 이시다의 별명은 ‘계산기’였다. 22살에 혼인보 타이틀을 차지한 기록은 아직도 50년 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기타니 도장의 안주인, 미하루

    일본의 바둑도장들은 하숙비 성격의 수업료를 받았다. 하지만 기타니 도장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수많은 제자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배우들이 꿈이 무대 위에서 쓰러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타니는 피를 토하더라도 반상 위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죽음의 사신이 눈앞에 찾아왔을 때도 바둑돌을 쥔 것은 철학만은 아니었다. 도장을 운영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자신의 다른 임무였다.

    기타니의 아내 미하루는 기타니가 쓰러지고 다시 투혼으로 싸울 때 만류하지 않았다. 묵묵히 도장 뒤에 마련된 밭에서 새벽부터 일하며 제자들의 먹을거리를 마련했다. 둘은 그렇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던져 살아가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가난했던 김인이 조남철에 이어 두 번째로 기타니 동장에 유학을 떠나는 결단을 내린 이유는 수업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인이 도장에 적응을 하면서 지켜보니 제자들이 상금이나 수입이 생기면 미하루에게 주고 필요할 때 용돈을 받아쓰는 식이었다. 김인은 “수업료가 없는 대신에 이렇게 운영되는 구나”하고 생각하고 2년 동안 상금과 수입을 미하루에게 주고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2년 후 국내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날, 작별인사를 하는 김인에게 미하루는 통장을 내밀었다. 김인이 쓴 용돈을 제외하고 통장에는 그동안의 수입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도장을 나서던 21살의 청년 김인은 말없이 떨어지려는 눈물망울을 참아야만 했다. 1982년 김인 등 기타니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미하루가 나이든 도장의 제자들의 삶이 궁금해 한국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게 되었다.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원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던 바둑기자가 “여사께서 유독 한국 제자들을 챙겨주었다고 (제자들이) 말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라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미하루는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항상 가슴이 아팠다”라고 답변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배석한 조남철, 김인, 하찬석, 윤기현 등 기타니의 제자들 눈시울도 함께 붉어졌다.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