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지배 엘리트들의 눈물겨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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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7일 03: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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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에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거대담론과 맞물려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이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 관여하던 지배계급의 의식을 엿보는 일일테고, 또 그런 통치과정에 의해 일방적으로 훈육된 수동적인 인간상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런 밥 맛 떨어지는 일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다. 그렇다고 크게 분노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어짜피 음식이야 맛으로 먹는 것이고, 그 맛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의 역사를 만들어가니 말이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음식 중에 칼국수와 돈까스가 있다.

칼국수와 돈까스, 이 생뚱 맞은 조합이 어떻게 국민국가 형성과 관련있는 것일까? 먼저 말하자면, 칼국수는 한국의 근대화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돈까스는 일본의 근대화와 연관을 맺고 있다. 국민국가, 즉 동양에서 근대화란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였고, 그런 서구화를 통해서 세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 체제에서는 국가 단위, 즉 자국과 타국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배경은 국가가 음식이란 지극히 전통적이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개입할 여지가 있음을 뜻한다. 즉 지배계급은 서구화의 지표로써, 또는 서구와 경쟁의 척도로서 국민의 키와 몸무게와 같은 신체영역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개인의 키와 몸무게까지 국가의 관리 영역이었던 셈이다. 국가는 음식 하나 하나의 영양 단위를 계산하였고, 그에 기반하여 새로운 권장 음식을 만들어 나갔다. 아울러 그 음식 섭취의 증대를 위해 끊임없이 이데올로기를 유포해 나갔다. "우유를 먹어야만 키가 커진다", "밀가루가 영양에 좋다"라는 이데올로기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매년 발표하는 국민 평균 신장과 몸무게가 그것이다. 지금이야 단순한 외모적 척도를 넘어 체력이라는 질적인 면으로 발전했으니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지금은 과잉 영양에 대한 걱정을 해주고 있다. 세삼 세상 많이 변했다.

일본 국민국가 형성과 돈까스

일본 음식문화에서 돈까스는 참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적인 일본 음식에는 육고기에 대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돈까스는 서양 음식이 ‘일본화’ 과정을 거쳐 어느덧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전통적인 일본 음식으로는 혼젠(本膳)요리와 그 현대적 표현인 가이세키(會席料理)가 대표적이다. 보통 이 요리는 국과 요리의 수에 따라 구분되는데, 즉 1즙3채(一汁三菜)·2즙5채(二汁五菜)·3즙7채(三汁七菜)(즙은 국을 뜻하는 말이며, 채는 반찬을 의미한다) 등을 기본으로 한다.

예를 들어 3즙7채의 상 차림을 보면, 첫번째는 미소시루, 밥, 니모노(조림), 고노모노(일종의 장아치), 사시미로 구성되며, 두번째 상은 스마시지루(맑은 장국), 아에모노(무침), 니모노, 스노모노(초회)이고, 세번째 상은 또 다른 국물 요리,아케모노(튀김 요리) 등이 올려진다.

즉 1즙3채라면, 매 상마다 하나의 국물과 요리 3개가 올려진다. 이때 서로 다른 국물과 맛이 다른 요리를 올려지는 것이 기본이다.

일본에서 육고기 음식 문화가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1,200여년 동안 일본을 지배한 불교였으며, 이를 기본으로 음식문화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 이후, 육고기 문화의 도입은 일본인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왜 메이지 정권은 674년 덴무왕에 의해 ‘불경스럽다’라며 금지된 육식을 해제하고 국민들에게 권장하였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메이지유신이라는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이 그 기본 배경일 수 밖에 없다.

메이지 정권의 지배 엘리트들은 서양인들에 비해 크게 왜소한 일본인의 체격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열등감의 극복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정치적, 사상적으로 이어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한다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일본의 개화와 근대화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조선을 통합하여 제국의 토대를 구축하고 이런 연후에 서양 제국에 대항하자"라는 이른바 ‘정한론’이다.

이런 논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게이오 대학 설립자)에 와서 아시아에서 벗어나서 아시아인들을 침략적인 서구문명의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탈아론으로 발전된다. 이는 결국 ‘서양의 것을 따라하자’ 현실적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와 맥락 속에서 돈까스는 탄생된다. 그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서양의 스테이크 문화가 그대로 일본 음식문화에 이식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오히려 혐오감을 주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초창기 돈까스는 고기를 두드려 얇게 편 후, 그 위에 튀김 옷을 입혀 튀겨내어 일본식 소스를 뿌리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일본인의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조리법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어쩌면 일본의 놀라운 성장의 이면에는 메이지 유신의 지배엘리트의 눈물겨운 ‘육고기 장려운동’의 탓일지 모르는 일이다.!?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과 칼국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오찬으로 ‘칼국수’를 내 놓는 일이다. 이전 정권과 차별화하여 청빈과 깨끗함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맛을 다른 개인에게 강요한다는 점에게 권위와 몰상식의 다른 발로는 아니었을까? 하여간 그 칼국수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반죽해 고소한 면발에 사골 국물에 끓여내는 안동식 칼국수였다. 이후 이 안동식 칼국수 집이 시내 곳곳에 개업했다 하는데…

   
 

본래 칼국수는 그리 대중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밀의 생산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조리법 역시 발전하지 못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면 밀가루 음식은 언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원조를 받은 이후 일 것이다. 일제 식민지에서의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쌀을 비롯한 곡물 생산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경제적 악조건 속에 미국의 밀가루 원조는 밀려들어왔다. 쌀과 밀가루의 공급 불균형은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참으로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였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음식문화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도리가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분식장려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강제적으로 우리 음식 문화를 뒤바꿔 놓는다.

이렇게 시작된 분식 예찬론은 ‘밀가루를 먹으면 키도 커지고 머리도 좋아 진다’거나 ‘밀가루는 쌀보다 영양이 많다’는 식의 이데올로기적 홍보에서, 밀가루를 이용한 다양한 조리법의 개발 및 보급을 하고, 학교에서 도시락 검사, 분식 먹는 날 지정, 심지어 관공서의 구내식당에서는 쌀밥으로 밥을 짓지 못하게 하는 행정지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분식장려 운동은 정권의 선전과는 달리 국민의 영양과는 무관하게 쌀이 부족한 상황에서 넘쳐나는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먹어치우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강력하게 추진된 근대화는 서양인처럼 키가 커지기 위해, 머리가 좋아지기 위해서라는 서구화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근대화와 관련되어 이 분식장려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 강화라는 효과를 낳는다. 원조된 밀가루의 대대적인 소비 운동은 쌀 생산을 기반으로 토지의 결박되어 있던 농민을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나아가 저임금 정책과 맞물리면서 노동자들이 당시 막 개발된 라면을 주식삼아 먹게 되는 현상까지 초래하였다. 즉 한국의 근대화에서 분식문화는 그 과정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성격의 실질적인 내용까지 관여하게 된다.

칼국수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사회의 하나의 음식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에 맛보았던 수제비나 칼국수에 대한 진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만약 토요일 날 오후에 칼국수를 먹는 회식문화가 있다면 그 사람의 직업은 공무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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