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 ‘양보’ 아니라 ‘투쟁’ 호소해야
    By
        2006년 11월 17일 12:2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커다란 죄악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이간질이었다. 노 대통령은 입만 열면 ‘노동귀족’이니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간질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단결된 투쟁을 막아서 소수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유지하려 했다.

    정말이지 정규직의 양보로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즉 윗돌 빼서 아랫돌 괴자는 노 대통령의 논리는 지긋지긋할 정도다. 이런 논리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구속하고 탄압한 자에게 나왔다는 점은 역겨움을 더한다.

    하지만, 이 사악한 논리의 파급력은 꽤 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였다. 심지어 노동운동 내의 일부에서도 이런 논리가 스며든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는 고소득 노동자의 양보를 통한 사회적 연대 주장도 마찬가지다.

       
      ▲ 정기국회에서 정당 대표연설을 하고 있는 권영길 의원단 대표 (사진=민주노동당)
     

    지난 11월 10일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가 ‘고소득 노동자의 소득세 인상과 미래 급여 인하를 통한 저소득 노동자 지원’을 연설한 후 이런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런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민주노동당 당직 선거 때 정책위의장 윤영상 후보도 대기업 노동자 양보론을 폈었다. 특히 산별노조 시대의 과제를 더 크고 강력한 투쟁과 파업 속에서 찾기보다 협상과 정책 대안에서 찾는 동지들이 이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예컨대 민주노동당 내 정파인 ‘전진’의 주요 이론가인 장석준 동지가 그렇다. “대공장 노조 조합원이 임금을 일정부분 양보하고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어야 하며(7월 21일 ‘산별노조 시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망과 과제’) “노동자들은 세금 더 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레디앙> 9월 15일)

    당의 ‘진보정치연구소’가 얼마전 발표한 ‘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 전략의 모색’ 보고서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었다. 즉 ‘당이 양대노총에게 근로소득세 인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 이를 미끼로 자본과 부유층의 양보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 변화된 점은 ‘양보’의 통로가 임금에서 세금과 연금으로 바뀌었다는 점 정도이다. 문성현 당 대표, 장상환 진보정치연구소 소장, 오건호 정책전문위원 등도 비슷한 주장들을 하고 있다.

    당 지도자들이 직접 노조를 설득하러 돌아다니겠다는 말도 나오고 있고, 우려스럽게도 12월에 구체적 입법안을 제출하고, 내년 대선에서 주요 정책으로 내걸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물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주장하는 동지들의 의도에서 이해할 부분은 있다. 사회복지라는 것이 없다시피한 이 나라에서 국민연금에도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 빈곤층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도 말이다.

    정말이지 가난한 노인들의 처지는 비참하다. 쪽방에 살면서, 폐지를 주워서 근근히 목숨을 잇거나 자살하는 게 이들의 현실이다. 더구나 4대보험에서 제외된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반을 넘고 있다. 이들은 아무런 노후 대책이 없다.

    냉혹한 사기꾼

    이 때문에 기성 정당들도 ‘기초연금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사기극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한나라당은 부자들과 기업주들의 세금을 10조 원이나 깎으면서 10조 원이 들 기초연금제를 도입하겠단다. 열우당은 저소득 노인들에게 기껏 7~10만 원의 ‘용돈’을 주고 이마저 점차 깎자고 한다.

    이런 냉혹한 사기꾼들에 맞서서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과 저소득 노동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일부 노동자의 양보가 돼야 하는가?

    이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대립시켜 정규직의 양보를 주장했던 노무현의 논리를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인지 11월 14일 국회에서 현애자 의원의 제안에 총리 한명숙은 “기본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이 나라 사회복지와 국민연금 제도의 진정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면서 이런 대안을 내놓을 수는 없다. 이 나라 사회복지와 국민연금 제도는 부의 재분배 구실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내는 세금, 연금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주어지는 복지나 사회보장은 보잘 것 없다. 노동자들은 월 소득의 거의 5%를 국민연금으로 내지만 지급되는 것은 ‘용돈’ 수준이다. 기성 정당들은 이마저도 “보험료를 더 내고 연금을 덜 받자”며 개악하려고 한다.

    노동자들의 부담이 이처럼 늘어나는 동안 부자들과 기업주들의 부담은 오히려 줄어왔다. 최저소득층은 소득의 25%를 세금, 연금으로 지출하는 반면, 최고소득층은 겨우 소득의 13%를 지출하고 있다.(2004년 통계)

    지난 20년간 최하위 10% 계층의 세금 부담은 10.1배나 올랐지만, 최고위 10퍼센트 계층의 세금 부담은 7.3배 느는 데 그쳤다.(한국조세연구원)

    국민연금을 봐도 마찬가지다. 현재 제도에서는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와 삼성 이건희 회장이 거의 같은 보험료를 내게 돼 있다. 월 소득이 3백60만 원 이상이면 누구나 똑같은 보험료를 내는 ‘보험료 상한선’ 제도 탓이다.

    왜 이런 진정한 문제점들은 놓아둔 채 노동자들끼리 ‘윗돌 빼서 아랫 돌 괴는’ 일을 해야 하는가. 진정 양보해야 마땅한 것은 부자들과 기업주들 아닌가.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이야말로 ‘왕창 더 내고 아예 안 받아’도 시원찮을 자들 아닌가.

    ‘소득세 인상’과 ‘미래 급여 인하’는 사실상 ‘더 내고 덜 받자’는 것이다. 왜 노동자 정당이 이런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노동자들에게 ‘덜 내고 더 받자’고 호소하고 싸움을 이끌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 건설운송노조 총파업 3일차 상경투쟁 (사진=민주노총)
     

    미끼와 무기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 양보하자는 게 아니라, 이걸 미끼로 부자들과 기업주,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자는 것’이라고. 진보정치연구소는 “(우리의 양보를) 무기로 자본과 부유층을 압박해 소득세 누진율 강화 및 법인세 자산 과세 강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순진할 수는 없다. 세상에 어떤 멍청한 기업주나 지배자가 그런 어설픈 미끼를 덥석 물고 순순히 양보한단 말인가. 노무현의 부동산 보유세 찔끔 인상에도 ‘세금 폭탄’이니 난리법석을 떨면서 결국 껍데기로 만든 게 저들이다.

    임금 삭감과 명예퇴직까지 양보했지만 결국 정리해고로 쫓겨나서 1년이 넘게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는 코오롱 노동자들의 경고가 들리지 않는가. 포스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을 위한 임금 동결을 요구했던 포스코 자본이 포항건설노조에게 휘두른 무자비한 폭력과 하중근 열사의 주검을 보라.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는 부자들과 기업주들의 양보를 낳기는커녕,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하향평준화만을 낳을 것이다.

    반면, 이같은 양보 제안이 낳을 부정적 효과는 명백하다. 이것은 저소득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의 책임이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낼 것이다. 그것은 고소득 노동자와 저소득 노동자들 사이를 분열시킬 것이다.

    저소득 노동자는 자신들에게 제대로 된 복지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고소득 노동자의 양보가 부족해서라고 느낄 것이다. 고소득 노동자는 자신들의 보험료는 올라가지만 연금은 줄어드는 것이 저소득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느낄 것이다. 보수 언론과 지배자들은 이 틈을 파고들면서 온갖 이간질로 틈을 더욱 벌려놓을 것이다.

    이런 분열은 결국, 부자와 기업주들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라는 우리의 진정한 ‘무기’를 녹슬게 할 것이다. 따라서 당 지도부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노동자 양보론은 빨리 거둬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무기이기는커녕 족쇄일 뿐이고, 미끼에 걸리고 있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다.

    더구나 지금 비정규직 개악안과 노사관계로드맵에 맞서서 민주노총 소속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파업에 들어가려 한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 당 지도자들의 구실은 파업을 호소하고 선동하는 것이지, 일부 노동자의 양보를 주장해 투쟁을 김빠지게 하는 게 아니다.

    빈곤층과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위한 재원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당장 노무현 정부 3년간 집부자들이 번 부동산 양도차익만 64조 원이다. 이건희 회장은 세금도 제대로 안내고 아들 이재용에게 수십조 원의 재산을 물려줬다. 론스타는 노무현 정부의 지원 속에 4조5천억 원을 먹고 튀고 있다. 노무현은 이라크 전쟁 지원에 수조 원을 썼고 앞으로 수백조 원을 들여 군비를 증강하겠단다.

    왜 이런 돈들이 노동자, 민중의 복지를 위해 쓰여질 수 없는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이미 부유세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라는 훌륭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정책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무기, 즉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 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