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스와 밀, 그리고 시급 3천원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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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7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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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제 10년도 넘은 일이다. 재벌 시절의 현대그룹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일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현장에서 화학설비에 벤젠을 마시는 일을 하면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비정규직인 여공에게 이 일을 시키는 일이 소위 ‘관행’처럼 굳어져 있던 시절의 얘기이다.

    열 여덟에서 스물을 갓 넘은 가임여성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 친구가 나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연락을 했던 일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그 당시의 나의 상사는 이제 국회의원이 되어있고, 나에게 그 말을 했던 친구는 그의 보좌관이 되어있다.

    그 당시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서 몇 년 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건실태 특히 생태적 질환에의 노출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는 귀찮은 일들을 많이 해야했기 때문에, 몇 달 그러다가 포기했다.

    진짜로 그 일을 포기한 이유는 이미 현장에서 그렇게 위험한 일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넘어가 있고, 그들이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야말로 사람들의 ‘감성’이 움직이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위험한 유독물질에 중독이 되거나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다들 바빠서 그런지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물론 나도 바빴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크고 건장한 40대와 50대 남자들보다는, 10대와 여성들이,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인 외국인들이 위험하고 귀찮은 종류의 일에 노출될 위험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한은 한 사회가 의도적으로 줄이거나 제도화시키기 전에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약자에게 유독 강하고, 가혹한 사회라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 사람들의 감성도 움직이지 않을 때이다. 어쩌면 야망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놀랄만한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2. 알바비, 3천원…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내 주위에는 소위 ‘알바’라는 일을 하는 친척이나 지인이 한 명도 없다. 과잉 영양섭취가 문제가 되고, 지나친 사교육이 망쳐버린 친척들이 있을지언정, 알바 시장에 들어가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알바생들의 애환과 삶에 대해서 잘 모른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알바’라는 범주가 지워져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드디어 내 주위에 ‘알바’가 등장을 했다.

       
     ▲ 청소년아르바이트 권리찾기 캠페인 (사진=양산노동민원상담소)
     

    그가 들려주는 세계의 모습은 너무 끔찍한 것이었다. 이 얘기의 압권은 B사에서 손님이 없는 오후 시간이 되면, 알바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급이나 월급이나 노동을 구매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계약된 시간에 대해서 소위 고용주가 임의로 시간을 빼기 위한 이런 방법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손님 많을 때만 잠깐 돈을 주고 일을 시키고, 보다가 손님이 없으면 “나가 있으라”는 이런 종류의 노동방식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점심 시간부터 저녁 시간까지 8시간을 꼬박 서서 일을 하면 2만 1천원을 받는데, 중간에 3시간 동안 나가 있는다면 1만 5천원이 된다. 물론 사실상 여덟시간을 노동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렇게3시간 동안 나가 있는 동안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PC방이라도 가거나 뭐라도 잠깐 사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10대들이 이렇게 삶을 보내고 있다는 건 황당한 일 같아 보인다.

    3. 그나마도 떼먹는다…

    더 황당한 일은 그나마도 떼먹는다는 사실이다. 청소년을 고용하기 위해서 부모동의서 같은 걸 받아와야 근로계약서 같은 걸 쓸 수가 있지만, 그야말로 배부른 이야기란다.

    부모 몰래 방황하는 아이들이나 결손가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운 아이들의 약점을 잡고, 그나마 3천원짜리 시급도 떼어먹는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보면 겉만 멀쩡하지,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조금만 어두운 곳으로 돌아서면 밀림과 너무 똑같은 야만의 시대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4. 10대 여공들과 경제학자들

       
       ▲ J.S Mill
     

    존 스튜어트 밀과 맑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밀이 맑스보다 조금 연배가 높고, 그 시대는 맑스보다 훨씬 유명했었다. 여러 가지 저작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맑스가 아담 스미스에서 리카아도에 이르기까지 혹은 푸르동이나 생시몽과 같은 바로 그의 앞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까지 부담 없이 ‘팍팍’ 씹었던 것과 비교하면, 밀한테는 상당히 점잖게 대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는 한다.

    밀은 이제는 자유주의자들의 대빵이 되었고, 맑스는 좌파들의 대빵이 된, 그래서 유시민 같이 ‘웃기는 짬뽕’들이 자꾸 자기와 존 스튜어트 밀을 비슷하다고 우겨대는 곤란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착각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하는데, 유시민은 아마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맑스의 『자본론』2권과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론』은 필체와 스타일이 상당히 비슷한데, 특정한 몇 부분만을 비교하면 맑스가 밀을 아주 열심히 읽었고, 좀 베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하다. 나는 밀의 책을 자본론보다 아주 몇 년이나 지난 다음에나 읽었는데, 마음에 손을 얹고 고백하면, 재미있기는 밀의 책이 훨씬 재미있다.

    두 명 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서 서술하는 부분이 바로 영국에서 10대 여공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조건에 관한 일들이다. 간이 선반으로 만들어진 작은 다락방에 올라가 아래의 직물기계로 실타래를 내려주는 먼지 투성이의 작업조건에서 일했던 이 소녀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조건과 성인 남자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임금에 대해서 이 시대를 풍미했던 두 경제학자들은 자신의 저술에서 매우 긴 공간에 걸쳐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후세 사람들이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두 학자를 해석하고, 사실 이런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 한 줄도 제대로 해석해주지 않거나, 아니면 ‘휴머니스트’라든가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얘기들을 달아주지만, 이 사람들이 시대를 살아갔고, 시대의 고민 속에서 생각들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흔적, 그리고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나름대로는 고통 속에서 살아갔던 시간들 속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와 풀고 싶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난 『자본론』2권이 문학적으로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보통은 ‘자본주의 전개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라는 작은 코멘트와 함께 “바쁜 사람은 넘어가시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정치적 전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푼 꿈을 잠시 접고 자본론 2권을 읽는다면,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시대의 드라마 같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보다 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책이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론』이다. 읽고 나면, 어렵고 따분한 고문체의 고전 한 권을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일제 시대의 여공들의 삶 혹은 구로동 시절 같은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짐을 느끼는 책이다.

    5. 다시 알바, 시급 3천원에 대하여…

       
      ▲ Karl Heinrich Marx
     

    나는 밀이나 맑스 같은 A급 경제학자가 아니라 그저 그렇고 그런 C급 경제학자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건강이 말씀이 아니라서 하루에 열 다섯 시간은 자고, 밥 먹고 약 먹는 시간 빼고 나면 아주 잠깐 예전에 읽은 책들을 뒤적이며 건강을 추스리는 환자에 가깝다.

    그래서 시급 3천원 알바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아는 것은 사회적 약자이자, 사실은 다음 세대의 우리 사회의 주인공이 될 10대들이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밀려난 것인지 아니면 시대의 모순이 그 어깨 위에 전부 얹혀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마구 방치돼서는 안 된다는 하나마나한 생각 정도가 내가 해낼 수 있는 생각이 전부이다.

    맑스의 ‘노동가치’ 얘기를 라면에 비유하던 박영호 선생의 비유를 따르자면, 하루에 짜장면 다섯 그릇을 버는 그들의 생계비를 계산하면, 짜장면 두 그릇에서 두 그릇 반, 혹은 간짜장 두 그릇을 벌어가는 셈이다. 좀 고상하게 얘기하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간다”라고 표현할 수 있고, 정치학에서 사용하는 ‘과잉대표’라는 개념을 가지고 응용하면 ‘과소대표’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나마 시급 최저생계비가 적용되어서, 3,100원이라는 돈이라도 확보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최저생계비를 올리면 문제가 나아질 것인가 아니면 청소년 알바 상담센터 같은 것들이 제대로 운영이 되면 조금 나아질 것인가, 아니면 혁명 없이는 답 없는가?

    그렇지만 청소년 알바 문제를 해결하자고 혁명의 깃발을 올리자고 하는 것도 좀 거시기하기는 하다.

    일본의 알바 문제 상황을 좀 찾아봤더니,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가까웠다. 정상적인 알바들은 우리나라 정규직 공무원보다 급여가 높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알쏭달쏭하다…

    하여간 맑스는 영국의 15세 여공들의 황당한 문제는 자본주의가 끝이 나야 풀린다고 했고, 밀은 ‘사회적 원칙’이 변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확실한 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일본 사회는 아직도 이런 정도로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국민소득을 올려야 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노동조합이 깨어야 하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시민사회가 각성해야 하나? 그런 건 더더군다나 아닌 것 같다.

    하여간 알바비 3천원을 둘러싼 야만스런 일에 대해서 국민소득 1만 6천불이라는 이 사회가 눈을 감고 있는 건 꽤나 이상해 보인다. 이 이상한 사회적 공모에 공모자나 조력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이상한 알리바이라도 만들어서, 나는 “무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출구가 보이지가 않는다 (사람이라면 이 알바 시장에도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세 시절 귀족들이 지껄이던 농지거리와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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