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조리극, 일상의 평화로움 비틀어 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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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6일 09: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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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

    우리는 최대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이성을 가진다는 데에서 합리적이다(이성reason과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말은 모두, ratio라는 공통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율’ ‘균형’이라는 뜻이다).

    합리적이지 않으려면 금수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사무실에, 더디든, 각자의 일터에 들어설 때 확실해진다: 모든 것은 질서정연하고 정리되어 있고… 요컨대 무난하다. 무난하다… 싱겁기는 하겠지만. “무난”… 고난이 없다, 브라…보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고난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리라. 평범한 일상을 요란하게 뒤흔드는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혈행은 교통정리를 포기하고, 벽은 흘러내리고, 공기는 마비된다.

    마치 다른 세계에 유배된 외계인이 된 느낌이랄까. 무난한 생활의 레퍼토리를 뒤흔들어 깨운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빛 속으로 나오면, 거리, 사람들, 자동차들, 빌딩들이 온통 거짓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방금 스크린 위에서 보았던 것이 더욱 진실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느낌은, 일상만큼이나, 오히려 일상보다도 더, 일상적인 것이다. 다음 ‘일상적인 듯 보이는’ 대화를 보자: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중에서

    “맛있어요?”
    “아직 맛도 보지 않았어.”
    “이게 뭔지 모르죠?”
    “아니 알아”
    “그럼 뭔데요?”
    “튀긴 빵”
    “맞았어요.”
    침묵……..(해롤드 핀터, <생일파티> 중에서 인용.)

    …무난함 속에 잠자고 있는 근본적인 불일치감, 합리성 속에 24시간 잠복 근무하고 있는 근원적인 비합리성이 있는 것이다(不일치, 非합리성…항상 ‘부정형’으로밖에 못 말하는 것은 필자의 책임은 아니다.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대답해보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말이라는 이성의 도구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렬한 것이 아니었나).

    이 불일치, 비합리성, 불균형을 드러내려고 했던, 영화에서보다도 더 전투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했던 작가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위에서 예시된 작품을 썼던 해롤드 핀터와 같은- <부조리극> 작가들이다(“부조리absurd”란, “불합리한”, “모순적인”, “비논리적인”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부조리극>의 주요 타겟은 일상적 무난함, 평화로운 합리성이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비틀었을 때 -마치 비틀어진 빵으로부터 슈크림이 찍 삐져나오듯- 그 틈새 사이로 삐져나온 것이, 그들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것”, 보이진 않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부조리(그러나 이것이 단지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부조리극 사조도 모순의 책임 소재를 사회와 구조로 돌리는 정치적 버전을 가지고 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린 이미 충분히 그러한 무의미에 적응해 있고, 심지어는 대상화해서 비웃을 줄도 알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른바 ‘니뽄 망가’(일본 만화)는, 위에서 인용된 대화에서 엿보이는 허무함 만큼의, 심지어는 그보다 더한 정도의 허무함을 가지고 유머를 조직하며, 더 가까운 예로는, 최근 한국 공중파 개그 역시, 근거 없는 불일치, 근거 없는 변화, 근거 없는 상황 역전, 심지어는 근거 없는 자기 소진 등, 무의미로부터 유머의 엑기스를 추출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무난하게’ 즐기고 있지 않은가.

    부조리극

    부조리극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루마니아 출신의 이오네스코는 영어를 공부하다가 부조리극을 시작했다고 한다. 즉 모국어를 쓸 때는 보이지 않던 언어 내의 모순을, 자신이 낯선 외국어로 유배돼서야 발견한 뒤, 그것을 폭로하러 다시 모국어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업들인, <대머리 여가수>, <수업> <코뿔소> 등에서 그는 언어들을 비틀고 구기고 메다치고, 하여튼 별 짓을 다해가며, 그 속으로부터 무의미란 것을 끄집어내고 있다(정말이지,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중엔 안 웃을 수가 없다. 의미를 잃은 말들이, 자신이 발가벗겨진 줄도 모르고 공중을 누비는 꼴이란, 꼭 정치가이든 누구이든, 꼭 누군가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오네스코에게 무의미란, 추론할 수 있는 것, 즉 추론의 끄트머리에서 사유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비이성적 결론 같은 것이었다. 고로 논리를 극단적으로 연장하면, 우린 무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수업>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덧셈 뺄셈을 가르치는 과정, 급기야는 <코뿔소>에서 코뿔소로 ‘추론당한’ 논리학자).

    이오네스코의 관심사는, 이러한 극단적 연장에 유용한 수사학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예컨대, 질문하지 않았는데 대답하기, 반대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하기, 바꿔치기, 훔치기 등등이다.

    이오네스코는 모순의 수사학들을 수집하고 그것으로 문법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온당하게 부조리극의 창시자이다. 이오네스코의 이러저러한 저작들이 좋은 번역을 통해 한국에도 출판되었는데, 무의미한 언어들의 페스티발을 보고 싶다면, 강추. 정말이지 이렇게 무의미로 도배하기도 힘들 것 같다(첨언하자면, 난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지하철에서 혼자 웃다가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그야말로 지하철 안에서 부조리가 연출된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부조리극은 여러 가지 변주를 탔다(이럴 때일수록 정말 신기하다. 예술에 있어서, 한 창시자의 후예들은 반드시 그를 넘어서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정치에선 그게 안될까? 난 단지 예술보다 속도가 느릴 뿐이라고 믿고자 한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많은 현대 부조리극 작가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해롤드 핀터라는 유태계 영국작가는 주목할 만하다(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바로 그 사람!). 그는 -이오네스코와는 달리-사실주의적인 대화, 즉 논리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하지만 어딘가 삐끗한 것 같은 대화를 구성하고는 잠깐잠깐 쉬는 것으로 유명하다(그는 그것을 “말해지지 않은 침묵unspoken silence”라고 명명했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소통 뒤에는, 그 삐긋함을 증명하고 요약이라도 하는 듯, 무대 위에서 잠시 간의 침묵이 흐르는 것인데, 그 빈도수가, 마치 그러한 침묵이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모든 대화 사이사이마다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롤드 핀터에게 무의미란, 넓이(이오네스코의 ‘추론’)로는 환원되지 않는 정지된 점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추론이 연장되는 넓이로는 완전히 재현되지 않는, 단지 반지름의 길이나, 그것의 회전 모멘트 등으로만 측정되는 “폭풍의 정지된 중심”(이 표현은 부조리극의 가장 강력한 비평가인 마틴 에슬린에게서 인용한 것이다: 그의 주저인 <부조리극>이 우리나라에, 역시 훌륭한 번역으로 출판되어 있다)의 강렬도 같은 것이다.

    이성을 가로지르는 폭풍우는, 그 중심이 보내는 암호문을 수신하며, 이 암호문은 마치 메아리처럼 흔들리는 말과 사물들에게로, 심지어는 다음 폭풍의 중심에게로 전달된다(두 인물이 나누다가 그만두는 대화체가 남기는 잔향을 생각해보라: 흔히들, 우리는 그런 경우를 “귀신이 이 자리에 있다”고 말하곤 한다).

    핀터의 작품의 주연이 정지pause인 이유(핀터는 초기에 탈정치적인 작품들을 쓰다가, 이후에 정치화되었는데, 필자의 생각엔, 이러한 전환에서 정치화된 것은 그 중심이 아니라, 바로 이 폭풍우인 것 같다). 고로 더 이상 무의미란, 논리의 끝에 달라붙어 있지 않다.

    그것은 논리의 옆에 달라붙어 있는 것, 즉 논리적 지각에 대한 비논리적 통각 같은 것으로서, 논리 내에 있긴 하지만 논리로 포착되지 않는 빗나감에 대한 느낌, 혹은 그러한 합법적이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빗나감이 증명하는 빈곤에 대한 아슬아슬한 공포이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라고 분노하며 소리질러보자. 여기서 불일치는 문장의 끝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서 헤죽헤죽 쪼개고 있는 것이다(소통하는 우리는 모두, 위험을 무릅쓴 복화술사다).

    베케트

    인간의 내면, 혹은 인류나 사회구조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그러한 말썽꾸러기를 주연 삼아 무대를 꾸린다는 것이 너무 비인간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럴 줄 알고 부조리극 사조는, 좀 더 인간적인 버전을 유산으로 남겨놓았는데, 그가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불행히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더 유명한-사무엘 베케트이다.

    그는 다른 어떤 부조리극 작가보다도, 동정이라는 약한 모습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인간을 어루고 달랬던 작가였다. 그는 언어와 그 논리적 모순(이오네스코), 혹은 소통의지와 그에 기생하는 빈곤이나 공백(핀터)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를 떠받들고 있는 감정(그것은 슬픔일 수도 있고 유머일 수도 있다)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막연한 기다림’으로서 <고도를 기다리며>에 표현되어 있다.

    기괴하게 말라 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이 연극 무대의 전부이며, 그 밑에서 두 명의 부랑자가 ‘고도’라는 오지도 않을 사람을, 다시 막연하게 기다린다(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와 한 약속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희망이 있다면, 고도가 끝내는 오기 때문이 아니라, 오거나 오지 않거나, 기다릴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심지어는 그들에게 고도가 왔더라도 그들은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베케트는, 이오네스코의 ‘끝’과, 핀터의 ‘옆’을 ‘밑’으로 대체한다. 무의미함은 인간이성의 끝에 있지도, 옆에 있지도 않으며, 단지 그 밑으로부터 깊이를 가진다(<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하늘을 향하다 말라 탈진한 나무, <나는 아니야>에서 어둠에 잠긴 입 등은 언더그라운드에 있다).

    고로 베케트에게 있어서, 언어의 논리를 대체한 것은 행위의 논리라기 보다는, 특정 행위의 논리이다: 예컨대 기다리기, 눕기, 실망했을 때 옆으로 달아나기 등. 우린 인간의 행위를 봄으로서, 무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깊이 속에서 인간적 좌절 혹은 희망을 보는 것이다. 또는 둘 다 아니거나.

    “떠나자!”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이 대화는 연극 내내 반복된다. 이 반복은 절망과 희망 사이를 가로질러 간다. 끝내 우린 누구 손을 들어주어야 하나?(그래도 베케트는 마지막 증언을 남긴다. “이게 전 인류야!”)

    신촌과 홍대 사이에 위치한(그래서인지, 홍대 지하철역에서 내리나, 신촌 지하철 역에서 내리나,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을 절약하는 정도는 똑같다) 산울림 소극장에서, 저명한 작가, 임영웅 씨의 연출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다시 막을 올렸다.

    주연보다도 유명한 조연인 <포조>의 캐릭터가 단순화된 것 같아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리고 비록 내가 다른 버전들을 보고나서 비교해본 것은 아니지만, 베케트의 무의미에 대한 연민과 애수, 그리고 초연하는 척하면서 농담을 거는 여유 등이 코 끝에서 냄새를 피울 정도로 정교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연출되었음이 틀림 없다(질투가 날 지경. 부조리 영화는 없을까? 부조리를 순수하게 영화적인 방법으로 물질화한 영화!).

    희곡을 읽을 때도 그렇지만, 몸으로 암중모색할 때는, 공포든 기쁨이든 배가 되는 법이다. 그것은 아예 나 자신을 비워낸다. 다시 한번, 극장 밖으로 나올 때, 난 이 세계에 대해 부조리를 연출했다. 다시 벽이 흘…흐…흘러…ㄴ..ㅐ…리..ㄱㅗ…..공기….가 ㅁㅁㅁ…ㅏㅂ….ㅣ..ㄷㅚ…ㄴㄷ…….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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