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전』 1장
    열 살 아이의 어떤 의식화
    [1회~5회] 국민학교에서 고교까지
        2021년 04월 29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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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50대 초반의 남자 김민수의 이야기이다. 그의 삶의 이야기이면서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자의 자전적 성격이 일부 담겨 있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다만 시대와 사회의 어떤 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록이기도 하다. 총 24회 분량의 소설인데, 앞부분 10대 김민수의 삶을 다루는 5회까지는 한 번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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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문

    이 글은 1969년에 태어나 박정희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니고 전두환 시대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생이 되었던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러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다가 언젠가부터 성장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 남자가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며 독자들이 무엇이라도 얻거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가의 바람입니다.

    이 글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할 많은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욕설들이 나오고, 철학과 경제학과 문학 용어들이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다는 것을 끝까지 읽으시는 분들은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글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글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특정 정치 세력이나 과거의 운동권 세력을 비난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소설이란 그런 것을 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설은 어떤 이의, 혹은 어떤 이들의 삶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 사람의 삼십년 동안의 삶을 책 한 권으로 묘사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그가 겪었던 가장 강렬한 에피소드 몇 가지, 혹은 몇 십 가지들로 그것을 그 묘사를 대신합니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은 그 남자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의미들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 재미는 단지 유머만은 아닙니다. 1979년부터 2008년까지의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재미만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재미 또한 느끼게 될 것이라고 저는 기대합니다.

    즐거운 감상을 바랍니다. 저는 ‘즐감^^’, ‘즐감하소서.’와 같은 식으로 쓰는 것을 쑥스럽게 여기는 50대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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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열 살에 의식화되었던 아이

    1회차

    1980년대에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었다. 그 단어는 ‘의식화’라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사전에도 등재되는 말이 되었다. 어느 인터넷 사전에 따르면 그 정의는 이러했다.

    명사 [어떤 사람을]

    사회 현상이나 어떤 대상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각성된 의식을 갖도록 이끄는 것. 또는, 그런 의식을 갖게 되는 것.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계급의식을 갖게 하거나 갖게 되는 것을 이름.

    “운동권 대학생들의 ∼ 학습”

    만 열 살의 나이에 의식화의 과정 한 단계를 경험했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1969년생이었고, 일 월생이어서 1975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고, 1979년에는 5학년이었다.

    그해 시월에 이 아이 김민수는 여러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다. 시월 초 서울 서대문구의 안산 기슭에 있는 학교의 아이들은 가을 소풍에 나섰다. 홍은동 논골로 가는 소풍 길에 김민수가 좋아하던 한 여자아이의 바지가 갑자기 피로 물들었다. 민수의 옆에 있던 정욱이가 말했다. “야, 민선이가 피똥 쌌어.” 어린 시절 이미 전설적인 도둑이었던, 보통 ‘뽀리꾼’이라고 불리던 경수가 말했다. “아니야, 오줌 싼 거야.”

    담임인 정한광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옆 반의 김미자 선생님이 이민선을 안고 어딘가로 향했다. 민선은 그 날 이후로 항상 어두운 얼굴로 살았고, 잔인한 아이들은 그를 ‘똥싸개’나 오줌싸개라고 놀리곤 했다.

    당시에 만 열한 살에 초경을 하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민선은 소위 조숙한 아이였다. 정신적으로도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키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15cm는 더 컸고 가슴도 부풀어 올랐었다. 아이들에게 ‘한광이’라고 불리던, 벗겨진 머리에서 진짜 광이 나던 담임선생 정한광은 어느 날 복장 검사를 한다더니 민선의 등 뒤에 있던,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어떤 끈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민선의 비명이 터졌다.

    그 날 민수는 집에 가서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누나의 브래지어를 몰래 입어 보았다. 그리고 뒤쪽의 끈을 잡아당겼다가 놓아 보았다. 아팠다. 엄청나게 아팠다. 만 열 살의 어린 나이, 그가 다른 인간에게 적의를 품은 경험이 있었겠는가. 그는 이 날 처음으로 정한광이라는 인간에게 적의를 품었다.

    민수는 이제 다른 아이들처럼 담임선생 정한광을 ‘담탱이’나 ‘한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소위 모범생이고 반장이었고 공부를 제일 잘 하는 민수가 그 말들을 사용하자 아이들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홍제동 유진상가에 옷을 훔치러 다니던 ‘뽀리꾼’ 무리들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민수는 ‘선생님’을 ‘담탱이’로 바꿔 말한 것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 놀랐고, 공부 안하고 무언가를 훔치러 다니는 아이들의 말들을 익히게 되었다.

    1979년 시월 이십칠 일에 민수는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 있음을 보았고 동네 어른들의 표정도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시월 이십구일에 학교로 가는 길에 뽀리꾼 경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대.”

    민수는 ‘서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학교에 게양된 태극기는 평소보다 낮게 걸린 상태였다. 그것을 조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민수는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담임 정한광은 조회 시간에 일장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을 이렇게 끝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들이 먹고 살게 만든 분이고, 조국이 다시금 웅비하게 만들었던 훌륭한 분입니다. 나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 순간 민수의 마음에 의혹이 일었다. 그는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좋아했고,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아이였다. 그는 1977년 백만 불 수출 기념식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박정희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 이후 그가 조국의 위대한 지도자임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박정희는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 꽃 피고 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 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
    영롱한 아침 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 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 모두 정성 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의 새 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민수는 특히 “영롱한 아침 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이라는 부분을 아주 좋아했었다. 어린 그에게도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부분은 왠지 좀 어색하게 느껴졌고, 고대 삼국 중 고구려를 좋아했던 그의 취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그는 삼절을 제외한 이 노래를 많이 좋아했다.

    그런데 여학생을 브래지어 끈을 당겼다 놓아 괴롭히고 아이들의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하루에 서너 명을 때리던 정한광이 박정희를 훌륭한 사람이라 했고 그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닐 거야.’ 이렇게 민수의 첫 의식화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제 어른들의 말을, tv 뉴스를 무조건 신뢰하는 아이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생활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친구들과 찜뽕을 했고 야구를 했다. 플라스틱 방망이로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치는 변형된 야구 놀이를 그 동네 아이들은 찜뽕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단어를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어 꽤 놀랐었다.

    6학년 생활은 단조로웠다. 이제 찜뽕은 졸업했고 중견식 공이라고 불리던 고무로 만든 딱딱한 야구공과 나무 방망이를 사용하는 야구를 했다. 포수가 헬멧을 쓰고 가슴 보호대와 다리 보호대도 착용하는 등 상당히 실제 야구와 비슷한 모습으로 경기를 하게 되었다. 민수는 1번 타자에 삼루수였다. 그는 다이빙 캐치까지 할 수 있었고, 아주 정확한 타자였다.

    이 해에 그는 두 번의 싸움을 했다. 한 번은 야구를 하다가 ‘뚱땡이’라는 별명으로 그가 부르고 있던 신동식과 싸웠다. 신동식은 자기가 투수를 할 때에는 누가 봐도 볼이 분명한 것을 스트라이크라고 우겼고, 타자를 할 때는 한복판 공도 볼이라고 우겨댔다. 민수가 나섰다. “야, 눈깔이 뼜냐? 그게 어떻게 볼이야. 한복판에 꽂혔잖아. 내가 앞으로 너 같은 동태 눈깔 새끼랑 야구를 하면 내가 병신이다.”

    신동식은 주먹을 날렸고 민수는 어찌어찌 피하긴 했으나 그의 육중한 팔에 잡혔고, 쓰러졌다. 쓰러진 그에게 동식은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내려쳤다. 민수는 두 팔로 방어했지만 얼굴에 몇 대를 맞았고, 피를 흘렸다. 아이들이 말려서 둘은 떨어졌다. 민수는 아팠고 무서웠지만 기세는 잃지 않았다. 그의 강점 중 하나는 어디선가 들은 말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밤길에 뒤통수 조심해라.”

    동식은 그것을 들으며 코웃음을 치면서도 ‘저 새끼는 무슨 깡이 이렇게 좋아.’라고 생각하며 다시 타자석으로 갔다. 민수는 삼루로 돌아갔다. 민수는 다음 회에 주자 만루에서 상대편 삼루수와 삼루 베이스 사이를 뚫는 타구를 날렸고, 공은 영천중학교 운동장 끝까지 굴러갔다. 그라운드 만루 홈런이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동식을 실실 웃으며 바라보고 홈으로 들어왔다. 민수 팀은 뚱땡이 팀을 15: 5 오회 콜드게임으로 이겼다.

    이 학교의 6학년 아이들은 거칠었고, 1등부터 30등까지의 싸움 서열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가끔은 별 이유 없이 서열을 지키기 위해 혹은 뒤집기 위해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런 서열을 가소롭게 여기던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민수였다. 이 아이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명예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또 한 번의 싸움은 학교 건물 뒤뜰에서 벌어졌다. 6학년 2학기 반장이었던 그는 담임이 어딘가로 출장을 간 사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있었다. 반의 싸움 랭킹 2위인 윤정수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민수의 랭킹은, 한 번도 학교에서 싸운 일이 없어서인지, 이십칠 위였다.

    “네가 반장이면 반장이지 무슨 담임처럼 행동하는 거야. 존만한 새끼가 반장은 무슨 반장이야.”

    민수는 그 당시 150cm에 육박하는 키를 가졌던 정수에 비해 10cm 이상 작았다. 일 년 일찍 학교에 들어왔던 그는 항상 작은 편에 속했다. 이 어린 아이는 잠시 후 쉬는 시간에 옆 반에 가서 친구 동민의 축구화를 빌려 신고 돌아왔고,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를 경악하게 하는 발언을 했다. “윤정수 이 개새야. 뒤뜰로 따라 나와.”

    그는 앞서갔고 어이없어하던 윤정수가 뒤를 따랐다. 거의 모든 남학생과 일부 여학생들도 뒤뜰로 따라 나왔다. 민수는 아무도 몰래 손에 흙을 쥐었다. 보통 싸움 전에는 몇 마디의 말들이 오가곤 했다. 일종의 전통일 수도 있었고 명분 쌓기일 수도 있었다. 정수가 “이 새끼가 무얼 잘못 먹었나. 형한테 형이라고 부르면 용서해주마.”라고 입을 여는 순간 민수는 흙을 그의 얼굴에 뿌리고 튀어 나갔다.

    민수는 눈에 들어간 흙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정수의 목을 팔로 감아 헤드록을 했고 풀지 않았다. “이거 안 풀어, 새끼야.” 민수는 풀지 않았고 정수가 그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목이 꽉 낀 상태였으므로 그의 주먹에는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민수는 헤드록을 풀며 정수의 코를 축구화 신은 발로 강타했다. 코피가 터졌고, 그걸로 끝이었다.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는 이 학교에서 코피는 곧 패배를 의미했다.

    민수는 의기양양하게 교실로 돌아와 다시 옆 반으로 가서 축구화를 자신의 신으로 갈아 신고 돌아왔다. 민수는 아이들의 존중을 얻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가끔 그를 귀찮게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20위 후반이 2위를 이겼으니 그 중간에 있던 아이들 중 일부가 민수와 붙어 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11월의 어느 날 랭킹 5위 김한수가 민수에게 싸움을 걸었고, 또 다시 어디선가 들은 말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민수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형이 지금 바쁘니까 집에 가서 애기 닦고 발이나 봐라.”

    “발 닦고 애기 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애기 닦고 발 보라.”는 말은 처음 들은 김한수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전의를 상실했다. 민수는 그 날 이후 영원히 주먹이나 발로 싸우지 않았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는 말과 글로만 싸우게 되었다.

    비명 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수의 옆집에서 피투성이가 된 옆집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민수는 밖으로 나갔고 많은 동네 사람들도 그랬다. 집 밖에서도 옆집 아저씨의 폭행은 계속되었고 민수가 놀라게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은 남의 집안 문제나 남녀 간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는다고 했다. 시퍼렇게 부은 아주머니의 얼굴이 민수의 눈에 새겨졌다.

    그들은 재혼한 부부였다. 아주머니가 데려온 남자아이는 민수에게 자기 성은 원래 홍 씨인데 김 씨로 바뀔 것 같다고 말하며 운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주머니는 홍중표를 데리고 도망갔고 중표는 홍 씨를 유지했다. 민수는 아주머니와 중표 모두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민수는 옆집 아저씨를 보는 것을 피했고, 보는 경우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1981년에 그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의 생각에 달라진 것은 교복을 입게 되었다는 것과 찜뽕과 야구 대신 탁구와 농구를 많이 하게 되었다는 점뿐이었다. 사실 더 크게 달라진 것은 학교에 남학생들만 있다는 점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거나 않았다. 선생님들이나 남자 아이들에게 여학생들이 괴롭힘을 받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 이성이 주위에 없다는 아쉬움보다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서의 첫 중간고사에서 민수는 흡족한 결과를 얻었고, 매우 기뻐했고 자신감을 얻었다. 다만 그는 중간고사 때 필기시험에서 전교 이등의 성적을 얻었으나 음악 미술 체육 점수가 합쳐지자 전교 팔등으로 밀리는 경험을 했고, 돈 없는 집 자식의 비애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는 미술은 좀 못했지만 음악과 체육은 매우 잘했다. 같은 반의 노래도 못하고 몸도 비실거리는 이상균이 음악과 체육 실기 점수에서 자신보다 앞서 석차를 뒤집은 것에 그는 화가 났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새 학기가 되면 어머니들이 학교를 한 번 쯤 방문하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고 민수는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자신은 부모의 원조, 속칭 치맛바람 없이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아이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해에 이 일을 제외하고는 그의 기억에 남을 만한 별다른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네 형들과 그보다 여덟 살이 많은 고종사촌형이 전두환이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에게 그 얘기들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1982년이 되었고 프로야구가 생겼다. 그는 원래 좋아하던 타격왕 윤동균과 홈런왕 김우열이 한 팀이 되었다는 것에 기뻐했고 박철순이라는 투수를 알게 되어 더욱 기뻤다. 그가 좋아하던 OB 베어스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선두를 질주했고 그는 야구에 푹 빠져들었다. 그가 박철순과 다리를 쭉 뻗으며 송구를 잡아내던 일루수 신경식에 매료되고 있던 중학교 이학년의 봄에 그는 또 다시 끔직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1982년 독립문전철역 공사장 붕괴사고

    1982년 사월의 어느 날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공사장에서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지하철 3호선의 사직터널에서 무악재를 잇는 구간에서 지하 굴착 발파작업 중 흙더미가 무너졌고, 지하철 공사구간 위에 차량 통행을 위해 설치되었던 철판들이 내려앉았다. 이곳을 지나던 시내버스가 추락하여 몇 명이 숨지고 또 몇 명이 실종되었다.

    아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비극에도 신이 났는지 무너진 공사장을 보러 달려갔다. 서울구치소와 무악동의 상가 건물들 사이의 대로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민수는 최대한 도로 가까이로 다가가 찡그리며 붕괴현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틀 전 바로 그 위로 버스를 타고 구파발에 다녀왔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며 인생이란 참 고통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현장 관리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아이들을 물러나게 했다. 민수는 뒤로 물러났고 도둑놈 경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물러난 그는 무악동의 상가 건물 계단에 앉아 붕괴현장을 이번에는 멀리서 바라보았다. 어느 아저씨가, 지하철 공사로 땅을 파헤치면서 깊이 잠든 원혼들이 깨어났고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놈들에게 죽었던 원혼들의 저주로 사고가 난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는 미친놈 보듯 아저씨를 본 후 건너편의 서울구치소를 바라보았다.

    2회차

    그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도 그 건물에 1950년대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서대문형무소로 불렸고 1950년대에는 서울형무소라 불린 그곳에 할아버지가 갇혀있었던 이유를 그는 가족들에게 듣지 못했었다. 동네에는 세 가지 설이 돌아다녔다. 첫 번째는 독립운동을 하다 그랬다는 설이었다. 가장 연세가 많은 동네 어른들은 그 얘기에 코웃음을 치곤했고, 게다가 시기도 맞지 않았다. 아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술 먹고 사고 쳐서 들어갔다는 설이 있었다. 워낙 전설적인 술꾼이어서 돌아가신지 이십년 후까지 그 전설이 동네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그럴듯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곳은 ‘잡범’들이 가던 곳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거기 수감된 대부분의 인물들은 ‘좌익’ 정치범들이었다. 민수는 몇 년 전에 박정희를 죽였던 김재규도 거기에서 사형 당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세 번째로 민수가 얼굴을 본 일이 없었던 그의 큰아버지, 다시 말해 할아버지의 장남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쉬쉬하던 얘기였는데, 그의 큰아버지는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했다. 민수는 이십대가 되었던 해의 어느 날, 세 번째 설이 유력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날은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다음날이었다. 상가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 보면 금기시되는 이야기를 꺼내는 친척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1982년 당시에는 서울구치소가 정식 명칭이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그것을 영천 교도소라고 불렀다. 이 지역을 영천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지만 21세기가 되어서도 ‘영천시장’에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민수는 상념을 멈추고 집으로 가려고 계단에서 일어섰다. 경수가 어떤 노래를 시작했고 민수도 따라했다. 둘은 이 지역 아이들만 알던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살던 고향’으로 제목을 잘못 알고 있는 ‘고향의 봄’을 개사한, 무악재와 독립문 로터리 사이에 살던 아이들의 애창곡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영천 교도소. 꽁보리밥에 된장찌개 그립습니다. 울긋불긋 형무소 담장 펼쳐진 동네. 그곳에서 놀 던 때가 그립습니다.”

    경수는 재미로 불렀고 민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불렀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여학생 둘이 다가와 사고가 난 곳을 물었다. 둘은 알려주고 길을 갔는데 경수가 약간 무서워했다. 민수는 “왜 그래?”하고 물었다.

    경수는 “쟤들 동명 야간 애들이야. 왜 면도날 쪼가리 씹어 얼굴에 뱉고 목장갑 끼고 문지른다는 애들 있잖아. 서대문에 금화 국민학교 옆에 허 산부인과라고 있지? 거기에 걔들이 허구한 날 애 떼러 와서 돈을 존나 많이 벌었대.”라고 말했다.

    민수가 반박했다. “야, 이 멍청아. 쪼가리 씹는 게 뭔지나 알아? 목에 입으로 쪽쪽 빤 자국 남기는 거야. 그리고 면도날을 어떻게 입으로 씹어? 자기 혀가 나가겠다. 그리고 동명 야간이면 우리 강수연 누나가 다니는 학교인데 어떻게 그런 거지같은 말을 하는 거야? 강수연 누나 알지?”

    “응. 알지. 이 동네에서 강수연 모르면 간첩이지. 예전에 <오성과 한음>에 나왔었잖아. 요즘에는 민비 아역으로도 나왔고.”

    “민비가 아니라 명성황후야. 너는 쪽발이들이 조선을 비하하려고 만든 표현을 쓰는 거야,”

    “비하가 뭔데?”

    “업신여기고 낮춘다는 뜻이야. 하긴 이렇게 애기해도 너는 모를 수도 있지. 개 ㅈ…”

    그 때 경수가 외쳤다. “어, 조용원이다.”

    그들이 동명여고 야간 얘기를 하던 그 때 동명여고 주간에 다니고 있던 조용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둘은 숨이 멎었다. 그 순간 민수가 사랑하는 이는 강수연에서 조용원으로 돌변했다. 민수의 눈에 비친 당시의 하이틴 스타 조용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 그가 자신이 사는 무악동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 민수는 신이 났다. 민수는 나중에도 열 번 넘게 길에서 그를 보았다. 그보다 나이는 세 살 많고 학년은 두 해 위인 천사인지 선녀인지 모를 이 여고생은 예쁠 뿐 아니라 친절하고 지적이기까지 했다.

    끔직한 사고를 본 일과 할아버지 생각은 싹 잊어버리고 민수는 그 선녀 같은 여고생 배우를 생각하며 행복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이 만 열세 살 중학생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린이날 다음날 학교에 간 그는 일교시가 끝났을 때 복도에 엎드려뻗친 아홉 명의 아이들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수군댔다.

    이 교시는 체육 시간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체육 선생 ‘말대가리’는 운동장 대신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가 조심해야 할 세 가지 끝이 있다고 내가 애기했었지. 첫 번째가 뭐라고 했지?”

    아이들이 외쳤다. “혀끝이요.”

    “그래 혀끝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 두 번째가 붓끝이다. 함부로 글을 쓰면 신세 망칠 수 있다는 얘기다. 세 번째는 뭐라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을 선생님의 허락 하에 쓰게 되어 좋다고 외쳤다. “좆 끝이요.”

    “새끼들아. 칼끝이라고 하는 거야. 비유와 상징도 모르냐, 이노무자식들아. 남자들은 칼끝을 잘 놀려야 하는 법이다. 저 물총 강도 새끼들 좀 봐라. 물총 잘못 놀리면 저 새끼들처럼 되는 거야.”

    민수는 그가 체육 선생 치고는 비유와 상징을 잘 구사한다고 생각했다. ‘물총 강도’는 민수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민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알 것도 같았다. 그 아홉 중에 유승준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승준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었다. 나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리고 성장도 늦은 편이었던 민수에게 그의 성기는 거대해 보였고 털은 무성해 보였었다. 그리고 유승준은 가끔씩 “어제는 미진이랑 콩 깠어. 뜨끈뜨끈한 게 죽이더라.”와 같은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은 날에 민수는 그가 허풍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이학년이 무슨 성교를 한단 말인가. 민수가 누군가와 콩을 깠다는 유승준에게 말했다. “웃기고 있네. 어디서 딸 치고 오고는. 뭐, 콩을 까? 좆이나 까라.” 승준은 하지만 민수를 비웃었고 친구들은 민수가 옳은지 승준이 옳은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승준은 민수보다 10cm 넘게 키가 컸고, 다른 조그만 아이에게 이런 욕을 들었다면 십중팔구는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는 당시 아이들의 큰 관심사였던 농구를 잘했고 승준이 특히 좋아했던 야구도 잘했다. 승준은 독립문 국민학교 출신이었고 민수는 안산 출신이었는데, 무악동에 살던 두 학교 아이들 간의 야구 시합에서 승준은 민수를 인정하게 되었고 둘은 야구를 매개로 6학년 때 친해졌었다. 동네에서 보기 드문 강속구 투수 승준의 공을 총알 같은 타구로 받아치는 이 조그마한 놈을 승준은 귀엽게 여겼다.

    복도에 엎드려뻗치기 전 날 유승준은 여덟 명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역시 중학교 이학년이었던 소희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폭행당한 소희는 얼마 후 부모님과 함께 독립문 국민학교 옆의 동네에서 사라졌고 성폭행을 했던 아이들 아홉은 정학을 당했고 일곱은 한 달 후에 학교로 돌아왔고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승준은 둘 중 하나였고 학교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민수는 소희와 아는 사이였다. 다니던 국민학교는 달랐지만 소희 아버지와 민수의 아버지가 같은 친목 모임에 속해 있었고 그 모임은 일 년에 한 번씩 가족동반 여행을 갔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바다에서 같이 놀며 친해졌었다. 그는 소희의 아픔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슬펐고 많이 울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국민학교 오학년 때 똥싸개로 불리며 힘든 학교생활을 했던 민선이나 윤간을 당한 소희나 다 착한 아이들이었다. 왜 착한 아이들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이주가 지난 어느 날에 그는 짧은 13년 인생 최고의 공포를 준 어떤 일을 당하게 되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걷고 있던 그에게 뽀리꾼 경수가 다가왔다. 경수는 민수를 좋아했지만 민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몇 년 전에 도둑질에 민수를 이용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민수에게 백 원을 주며 문방구에서 샤프심을 사달라고 했다. 민수는 그렇게 해주었고, 문방구 주인의 신경이 민수에게 가 있는 순간 경수는 천원이 넘는 무언가를 훔쳤었다.

    민수가 말했다. “야. 따라오지 좀 마. 야구도 못하고 농구도 열나게 못하는 게 왜 따라오고 지랄이야. 야, 요즘은 뽀리 안치냐?”

    “손 씻었다.”

    “좆 까고 있네. 발도 안 씻는 새끼가 무슨 손을 씻어.”

    민수는 소위 모범생이었지만 말투는 거칠었고 욕을 매우 잘했다. 잘했다는 말도 무색한 게 그가 또래와 대화할 때는 거의 모든 문장에 욕이 담겨 있었다. 이는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에 홍제동 안산 자락과 무악동 인왕산 자락에 살던 남자 아이들은 거의 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 대화했다.

    옥신각신하며 걷고 있던 둘의 앞에 커다랗고 까만 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차의 유리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안에는 턱이 튀어나온 중년 여성이 있었고 그는 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손을 흔들자 황당했던 경수가 ‘뭐 이런 미친 여자가 있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씨발 뭐야.”

    민수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저 여자는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 한다는 그 대머리 남자의 아내였다. 뽀리꾼 경수 이 새끼는 자신마저 죽음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언덕으로 뛰었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경수도 따라 뛰었다. 그들은 차가 닿을 수 없는 인왕산 높은 곳을 향해 그들의 표현을 빌면 ‘좆 나게’ 뛰었다.

    다행히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그 여자나 경호원들이 “씨발 뭐야.”를 듣지 못했거나 귀엽게 여겼거나 관대하게 넘겼던 것 같았다. 민수는 관대하게 넘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들은 전두환의 이야기들은 두려운 얘기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숨을 헉헉대며 경수가 말했다. “씨발놈아, 왜 이렇게 빨리 뛴 거야?”

    “야 이 개새끼야. 네가 욕한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아, 아까 그 턱 나온 아줌마? 주걱턱!”

    도둑질을 일삼는 아이였지만 경수도 그 여자를 아는 것 같았다. 아홉시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그 뒤에 이순자가 나오던 ‘땡전 뉴스’의 시대였고, 그도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오늘.”로 시작하여 “한편 이순자 여사께서는.”으로 이어지는 뉴스들을 보며 그 여자의 얼굴을 익혔을 것이다.

    그는 민수만큼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공부 잘하고 똑똑한 민수가 이렇게 무서워한다면 그것은 무서워할 만한 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씨발. 좆 될 뻔 했네.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지?”

    민수가 한참을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는 상황과 관련 없는 얘기를 했다. “그 승준이 있잖아. 물총 강도 새끼 말이야.”

    “승준이가 뭐?”

    “소년원에 갔대. 또 물총 강도했나봐.”

    민수는 잠시 그의 야구 라이벌이었던 승준을 생각했고, 이어 소희를 생각하며 그를 자신의 머리에서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다시 경수를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빨리 손 씻어 새끼야. 뽀리치다 빵에 간 선배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민수의 말은 약간 허풍이었지만 경수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경수는 말했다. “너는 뽀리친 적 없냐?”

    “있기는 있지. 떡볶이 먹을 때 우리 쪽으로 아줌마가 열 개 밀어주면 아줌마 딴 데 볼 때 서너 개 쯤 슬쩍 가져온 일은 있었잖아.”

    “새끼야 그게 무슨 뽀리냐? 나처럼 오리털 파카나 나이키 신발 정도는 업어 와야 뽀리지.”

    “잘났다 새끼야. 이제 그만 내려가자. 이쯤이면 그 아줌마 갔겠지.”

    그해가 저물어가던 날 그는 잠자리에 누워 그 해가 인생 최악의 일 년이었다고 생각했다. 조용원을 몇 번 볼 수 있었고 야구에서 OB가 우승한 것 말고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래도 자신은 쿤타 킨테보다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E. T.>의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을 생각하다 조용원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3회차

    1983년이 되었다. 그해에는 프로 축구가 생겼다. 첫 해 우승 후 하위권을 맴돌고 있던 OB 베어스에 실망하고 있던 그에게 또 다른 재밋거리가 생긴 것이었다. 그는 김영덕과 김성근이 박철순을 혹사시켜 OB가 망했다고 생각하며 둘을 저주했고, 야구 대신 축구와 배구를 열심히 보았다.

    ‘돌고래’ 장윤창을 좋아하던 그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자매 고등학교가 배구 명문이었고, 불세출의 세터 김호철이 그 학교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 자매 고등학교 출신의 류중탁과 그 라이벌 학교 출신의 장윤창이 한 유니폼을 입은 고려증권 배구팀은 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민수는 그 해 봄과 여름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린이 명작동화>라는 MBC 만화 프로그램에 심취했다. 푸른 수염, 성냥팔이 소녀, 백설 공주, 호두까기 인형 등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방영되었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즐겁게 만화들을 보았다. 사실 그가 이 만화를 열심히 보게 된 계기는 그 만화 시리즈의 주제가를 당시의, 그러니까 중3 때의 국어 선생님이 작사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 주제가는 이 학교에서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그러나 민수도 아이들도 그 노래를 평범하게 부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원래 가사는 이러했으나 민수와 친구들은 그것을 개사했다.

    달려온 어린이들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즐거워 손뼉 치며 함께 보는 명작동화
    해처럼 밝게 커라 정의의 새싹들아
    손짓들 사랑 주는 어린이 명작동화
    신 난다 재미난다 어린이 명작동화

    달려온 애새끼들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즐거워 딸을 치며 함께 보는 명작 포르노
    내 꺼처럼 크게 서라 정의의 새싹들아
    손장난 도움 주는 어린이 명작 포르노
    뿅간다 뿅뽕간다 어린이 명작 포르노

    그는 자신에게 시인의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흡족해졌다. 학기 초부터 연합고사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라는 선생님들의 얘기가 들려왔지만 <몇 년 간 총정리>만 풀면 된다는 옆집 형의 목소리에 그것은 묻혀 버렸다. 남들보다 작은 키를 키우겠다는 생각으로 민수는 농구장에서 수직으로 뛰고, 뛰고, 또 뛰며 1학기를 보냈다.

    여름 방학이 왔고 그도 연합고사 준비를 시작했다. 연합고사는 여러 고등학교의 입학 자격시험으로 쓰였다. 선린상고와 덕수상고, 서울여상 등은 대개 200점 만점에 150점 이상을 받아야 갈 수 있었고 일반적인 고등학교들은 140점 정도를 받아야 입학이 가능했다. 그 아래 점수를 받은 아이들은 덕수, 선린, 서울여상 등을 제외한 상고들과 공고, 야간 고교에 들어갔다. 가장 점수가 낮은 아이들은 전수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거나 다음해를 기약하거나 학업을 중단했다.

    연합고사 준비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이 시험에서는 예전에 출제되었던 문제들과 유사한 문항들이 다시 출제되곤 했고, 그래서 <OO년간 총정리>라는 일종의 기출문제집만 공부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을 풀 수 있었다. 여름방학 내내 피서도 가지 않고 농구와 포르노도 끊으며 열심히 공부하던 민수에게 강력한 타격이 다가왔다. 그해 9월 그는 몸이 안 좋았는지 연합고사 체력장에서 18점을 받았고 연합고사 만점은 이미 물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최선을 다해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다.

    연합고사 당일에 그는 그래도 열심히 풀었고 190점을 받았다. 민수의 첫사랑이었던, 여섯 살의 사랑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동네 여자애 소현이가 199점을 받았고 민수가 싫어하던 ‘뚱땡이’ 신동식이 192점을 받았다. 네 살 때부터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리던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갔지만 그는 이것을 빨리 잊었다.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았다면 분명히 200점 만점을 받을 수 있게 공부를 했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집안 어른들의 신뢰를 가득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정신세계는 어렸을 때부터 좀 특이했다. 그는 국민학교 이학년 때 삼학년 선배에게 4월의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었다. “형. 모나리자를 누가 그린 줄 알아?”

    “모르겠는데. 누가 그렸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야.”

    그리고 그 다음해 사월의 동일한 날에 그는 그 동네 형에게 물었다. “형. 모나리자를 누가 그린 줄 알아?”

    “모르겠는데.”

    “내가 작년에 형한테 가르쳐 줬었잖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그 날 그는 그 형에게 맞았고 그는 왜 맞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그의 짝이었던 경민이가 그에게 말했다. “김민수, 너는 연대쯤 가겠다.”

    민수가 화가 나서 외쳤다. “뭐 이 새끼야?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연대?”

    순간 자기가 너무 막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민수는 말의 분위기를 슬쩍 바꾸었다. “그런 돈 처발라야 갈 수 있는 학교를 누가 간대. 우리 집은 가난해서 연대 못 보낸데. 난 꼭 서울대를 갈 거야.”

    민수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버스를 타면 차멀미가 심했던 그는 그 멀다는 서울대학교까지 어떻게 버스를 타고 갈 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하기에는 참 이상한 고민이었다.

    1984년이 되었고 그는 그가 다녔던 중학교와 운동장을 공유하고 있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민수는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다. 뽀리꾼 경수를 비롯해 그와 잘 알던 아이들은 거의 야간고등학교나 공업고등학교에 갔고, 그가 싫어하던 뚱땡이와 같은 아이들만 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에는 역촌동과 갈현동 아이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금호동 옥수동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안산 자락이나 인왕산 자락의 아이들보다 순했고 욕을 훨씬 적게 했다. 선생님들은 그것이 “연합고사가 한 번 걸러낸” 결과라고 말했다. 민수의 말투도 순화되기 시작했다.

    1984년 전반기부터 8월까지는 교장 선생님의 표현으로는 “에루 에이로 가는 길.”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한국 정부와 체육계는 이 엘 에이, 그러니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혼신을 다해 준비했고, 한국 선수단은 지난 모든 올림픽에서 거둔 금메달 하나라는 누적 성과의 여섯 배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올림픽을 향한 전력투구는 프로야구, 프로축구, 농구의 점보리그 출범 등에서 드러났던 전두환 정권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겠지만 만 열다섯, 열여섯의 아이들이 그것을 알 리 만무했다.

    레슬링에서 둘, 유도에서 둘, 권투에서 하나, 양궁에서 하나의 금메달이 나왔다. 민수는 ‘다 싸우는 종목들이네. 우리나라 인간들은 싸움박질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라고 생각했다. 유도의 업어치기나 권투의 주먹질은 아이들을 크게 다치게 할 수 있었고, 양궁을 학교에서 할 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학교 복도는 레슬링 경기장이 되었다.

    여름방학이었지만 보충수업의 명목으로 학교로 끌려나온 아이들은 그 울분을 풀려고 하는 듯 복도에서 레슬링을 하기 시작했고, ‘빠떼루’라는 말이 최고의 인기 단어가 되었다. ‘바닥에서’ 정도의 의미인 그 용어가 불어 ‘par terre’의 일본식 우리말 발음임을 민수는 밝혀내었고 ‘terre’가 땅을 뜻함을 알게 되었다. 영어에도 그것을 담은 말들이 있다는 것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한 친구의 별명 이 티(E. T.)는 ‘extra terrestrial’의 약자였다.

    민수는 조사를 마치고 ‘par terre’는 파테르라고 발음하거나 빠떼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아직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를 비하하는 용어를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던 그는 이렇게 속으로 말했다.

    ‘아 이 쪽발이 새끼들은 정말 다 마음에 안 들지만 발음도 병신 같아. 런닝을 란닝구라고 하고 적시타를 다이무리 히또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근데 이 일본 말 가져다 쓰는 한국 사람들이 더 문제야. 걔들은 발음이 안 되니까 도마도라고 하는 건데 왜 토마토도 말할 수 있고 토메이토로도 발음할 수 있는 우리가 도마도라고 하는 거야. 트랜스 발음이 되는데 왜 도란스라고 하는 거냐고.’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들은 도마도를 토마토로, 란닝구를 런닝으로, 도란스를 트랜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어서도 파테르는 여전히 빠떼루로 불렸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저 선수 빠떼루 줘야합니다.”는 말을 유행시킨 어느 해설자가 그것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빠떼루 아저씨’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어 1982년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영화 <E.T.>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1980년대 전반기에 서울의 많은 학교들에서 이 티라는 별명을 얻게 된 아이들이 비 온 후의 대나무 싹들처럼 생겨났다. 한 학교에 적어도 서너 명은 그 별명을 얻게, 혹은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 티와 ‘악어’와 ‘메기’와 레슬링을 하며 그는 억압적인 이 고등학교에서 숨을 쉬며 버텨낼 수 있었다. 1학년 학생 전원이 ‘자율적으로’ 7월 말 8월 초의 방학 기간에 보충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고 그 배경에는 폭력이 있었다.

    이 학교는 들어갈 때부터 사람을 약간 두렵게 만들었는데 소위 깍뚜기 머리를 하고 있던 수위가 공포감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수위는 건달 출신이었다. 한 술 더 떠 교장도 건달 출신이었다. 건달 출신이 어떻게 교장이 되었는지 궁금할 수 있겠지만 그는 설립자의 아들이었고, 1960년대 초반에는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대학교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어느 대학을 나와 교육대학원은 연세대를 갔고 연세대 출신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이십대 후반에 교장 대행이 되었고, 한 번 물러났다가 삼십 대 후반에 다시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장은 선생님들의 뺨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때렸고 연단으로 올라오는 아이들의 배를 차서 굴러 내려가게 만들었다. 폭력적인 선생들은 교장뿐이 아니었다. 어떤 지리 선생님은 엄청나게 웃겼는데 아이들이 웃으면 그 아이들을 때렸다.

    “야. 이 새끼들아. 잘 들어. 지리는 지지다. 지리는 지지다. 아, 지리가 지지고 지지가 지리고. 어떤 새끼가 웃었어. 나와.”

    어느 날 그는 아이 하나를 불러 때리려다가 종이 울리자 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돌아오더니 그 아이를 패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못 참겠다.”

    그의 말투는 너무나 웃겼고 아이들은 50분 내내 입을 꽉 닫고 어떤 아이들은 혀까지 깨물며 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통의 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시험 성적이 나오는 날 그가 담임이던 1학년 8반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키도 작고 몸도 작은 사람이 무슨 힘이 그리 넘치는지 60명에게 180여 대를 때리면서도 그는 지치지 않았다. 민수는 8반에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한 해를 보냈다. 이 고등학교는 나중에 기록을 세우는데, 1986년에 있었던 학력고사에서 전국 고교들 중 지리 선택 비율 꼴찌, 세계사 선택 비율 1위를 차지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니 아이들은 무섭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이 무서웠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무서워하는 선생님들이 그를 좋아하고 귀여워했다는 점이었다. 지리 선생님은 1학기 중간고사에서 지리를 다 맞은 그를 귀여워했고 심지어 교장도 그를 예뻐했다. 교장은 자기 아들이 자기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포르노 비디오를 보여주며 “이거 우리 아빠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도 모른 채 민수를 예뻐했다.

    ‘아, 이 인간은 깡패 출신이고 아들 새끼는 지 애비 포르노 본다는 걸 자랑스럽게 밝히고, 정말 골 때리는 집안이네. 근데 이 새끼도 혹시 나중에 교장 되는 거 아냐?’

    민수의 친구였던 교장의 아들도 결국 나중에 사십 대에 또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띨‘한 아이는 나중에 축구부 출신으로 조작되어 명문대에 갔다. 그 때 모 국회의원 아들도 축구부로 조작되어 명문대에 갔다. 둘은 축구에는 완전히 젬병인 아이들이었다.

    두려움으로 ‘자율적으로’ 보충수업에 참가한 아이들에게 다행스럽게도 그 기간은 12일이었다. 나머지 방학 기간 동안 아이들은 신나게 놀았고 한 두 명의 아이들을 빼고는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 차라리 보충수업이 없었다면 한 반에 대여섯은 새 학기 준비를 위해 공부했을 것이다. 민수는 보충수업이 없었던 중3 겨울방학에는 하루에 두 시간은 <성문기본영어>와 <기본 수학의 정석>을 보았는데, 그게 생기자 삼국지와 ‘도색’ 소설들만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율과 억압의 동기 부여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러다 생각을 정리하고 소설 <뼈와 살이 타는 밤>을 집어 들었다.

    이제 아무도 복도에서 레슬링을 하지 않던 그 해 11월의 어느 날 담임선생이 들어와 일장 연설을 했다. “너희들 요즘 칼라 테레비 보지? 에루 에이 올림픽을 인공위성을 통해 실시간에 칼라로 보는 거, 이런 거 나 어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 테레비며 인공위성이며 이게 다 과학기술의 산물이야. 그러니까 늬들은 모두 이과로 가는 게 좋아. 문과 나오면 별로 먹고 살 일도 없어. 웬만하면 다 이과로 가는 걸로 하자. 반장 이거 나눠줘.”

    인문계 자연계 신청서가 아이들에게 배부되었다. 민수는 한참 고민하다 자연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다음 날 담임이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교장은 이과와 문과를 9:6으로 맞출 것을 지시했었는데 일부 담임들이 너무 이과로 몰아가는 바람에 비율이 10:5가 되었다. 교장은 문과로 60명을 돌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래서 담임은 다른 얘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양이 있어야 하고 문화를 즐기며 살아야 하는 거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게 다 교양을 이루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런 교양 있는 삶을 살고 싶은 학생들은 문과로 가라. 오늘 다시 기회를 줄 테니 문과로 바꿀 사람은 빨리 바꿔라.”

    철학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문학과 역사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가 초등학교 이학년이었던 1976년에 아버지는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라는 100권 구성의 전집을 가져왔고, 동서문화사 최고의 성과물이었던 이 전집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1권은 <곶감과 호랑이>이였고, 2권은 <플루타크 영웅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사랑하게 된 아이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3권은 <삼국사기 이야기>이였고 4권은 <삼국유사 이야기>이였다. 5권은 안데르센의 작품들을 담았고 6권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개작한 글들을 담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 이미 그리스 신화를 접했고 시튼의 <동물기>와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게 되었다. 심지어 <흰 고래 모비딕> 같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책도 읽었다. 그가 커서 다시 <모비딕>을 읽고서야 그 책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했었지만 아이는 어쨌든 100권의 책을 이년 동안에 다 읽었고 초등 시절 내내 읽고 다시 읽었다. 아마 <서유기>는 오십 번은 읽었을 것이다.

    그는 남자아이 치고는 드물게 <작은 아씨들>과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했고 <플루타크 영웅전>과 <로마제국 흥망기>를 읽으며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가 민수에게 가호를 내렸다. 담임의 말은 사실 별 영양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들은 순간 그는 문과로 전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회차

    1984년 말부터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억눌려 있던 야당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1980년부터 1981년에 걸쳐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던 많은 인사들이 정치계로 돌아왔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야당 인사들이 그해 11월에 무려 84명이나 ‘해금’되었다.

    그들은 관제 야당으로 평가받고 있던 민주한국당 대신 새로운 정당을 세우고자 했다. 김영삼 계와 김대중 계 등 구 신민당 출신 인사들은 1985년 초에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그들을 무력화하고자 많은 수작을 부렸는데, 먼저 신민당이라는 과거의 이름으로 창당하려는 것을 막았고, 이어 신한민주당을 신민당이라고 약칭으로 부르는 것도 금지했다. 그리고 보통 4월에 치러지던 국회의원 선거를 2월 12일로 앞당기기도 했다. 그래서 ‘동토 선거’라고 불리게 된 겨울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2월 8일 미국에서 김대중이 귀국했고 그것만으로도 신한민주당은 큰 힘을 얻었다. 유세장에는 대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유세장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신한민주당 인사들은 장영자 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등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각종 비리들을 폭로했다.

    2.12 총선 때의 김영삼 모습

    겨울방학과 봄방학 사이의 이월에는 선생들도 아이들도 학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의 이목이 선거로 향했다. 어떤 아이들은 유세장에 직접 가기도 했고 대학생들이 뿌렸다는 유인물을 들고 오기도 했다. 민수는 이 때 처음으로 장갑차 앞에서 군인 하나가 웃옷을 벗은 청년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그 유명한 사진을 보았다.

    유세를 보고 온 민수의 친구 박경은 신이 나서 전날의 얘기를 전했다. “와. 정대철이가 나오더니 이러더라고. ‘전두환 씨에게 경고합니다.’ 그때 정말 짜릿짜릿했어. 이민우는 예상보다는 좀 약했는데 어쨌든 당 총재 같기는 하더라.”

    그들의 학교는 종로구에 있었고 그 당시 종로구 중구 선거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선출하던 이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의 이종찬과 신한민주당의 이민우가 당선되었다. 정치인이고 관료였던 아버지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어머니 이태영의 후광을 입어 젊은 나이에 이미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정대철은 신한민주당 돌풍에 휩싸여 낙선했다. 이 중선거구제는 여당 하나 야당 하나가 당선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었고, 제일 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가져가는 희한한 제도와 함께 민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서울의 결과는 득표율만 보면 거의 천지개벽이었다. 당선자의 수는 민주정의당 13, 민주한국당 1, 신한민주당 14 명이어서 여당인 민정당이 살짝 밀린 것으로 보였지만, 민정당의 득표율은 고작 27.3%에 그친 반면 신한민주당은 43.9%의 득표율을 올렸다. 만일 1987년에 개정된 헌법에 근거한 소선구제 선거였다면 민정당은 서울에서 아마 전멸했을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민수는 민정당의 사실상의 패배를 즐겼지만 민정당이 여전히 과반수를 차지한 것에 짜증도 났다. 그는 박경과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민수가 말했다. “아, 이민우랑 정대철이 되었어야 하는데 이종찬이 되었네. 이거 뭔가 문제가 있는 방식이야.”

    “그게 중선거구제라고 하는 건데 여당 하나 야당 하나 먹으라는 의도래.”

    “그럼 민정당이 딱 절반이 되는 거잖아. 걔네들은 절반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하지 않을까?”

    “전국구 의석이 무조건 민정당에 삼분의 이가 가게 되어 있거든. 그래서 걔들 입장에서는 반반이 되어도 문제가 없어.”

    “그런데 도대체 이건 뭐야? 아니 서울 득표율이 신민당 44%에 민정당 27%인데 의석수는 14대 13이네. 비율이 말이 안 되잖아. 선거 관리하는 인간들 정말 개 같은 새끼들이네.”

    “그게 선거관리위 잘못은 아니야. 제도가 이상한 거지. 전두환 똘마니들 중에 허 씨 트리오라고 있어.”

    “세샘 트리오도 아니고 허 씨 트리오는 또 뭐야.”

    그는 ‘나성에 가면’을 불렀던 세샘 트리오를 좋아했었다. ‘나성’은 그가 좋아하는 농구 팀 레이커즈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를 뜻하는 음차어였다.

    박경이 말했다.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라고 있어. 다들 12. 12 때 대령이었는데 엄청 머리가 좋은가 봐. 걔들이 이런 걸 꾸몄다고 우리 외삼촌이 그러더라고.”

    민수는 주제와 맞지 않는 얘기를 했다. “근데 허 씨들은 외자 이름이 많던데 왜 걔들은 이름이 두 자지? 우리가 아는 허 씨들 이름은 허재, 허원, 허참, 허민, 이런 식이잖아. 아, 허참은 예명인가? 조선 시대에도 그랬네. 홍길동전 쓴 사람은 허균이고 동의보감 지은 사람은 허준이었잖아. 허 씨들은 나쁜 새끼들이 될 것으로 보이는 애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두 글자로 짓나?”

    “야. 무슨 헛소리야.”

    “암튼 장세동이 말고도 똑똑하고 무서운 놈들이 있다는 거네. 요즘 육사 가는 애들은 어벙한 애들이 많은 것 같은데 옛날에는 달랐나 봐.”

    “옛날에는 머리 좋은 애들이 육사 많이 갔었대. 일단 육사는 다 공짜잖아. 없는 집 애들이 공부 잘하면 지금도 지방에서는 육사 많이 보낸데.”

    “너는 공부는 진짜, 음, 최선을 다해 안 하는데 아는 건 되게 많네. 뚱땡이 같은 인간성 더러운 새끼들이 공부 잘하면 나중에 전두환 똥구멍 빨아주는 새끼들이 될 거야. 인간성 좋고 아는 게 많은 너는 공부 안 해도 된다. 장하다. 우리 박경.”

    “최선을 다해? 그냥 ‘존나게’라고 해도 돼. 근데 최선을 다해 안하는 거는 아냐. 대충 안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박경은 싱긋 웃었다. 둘은 얘기를 마치고 농구 코트로 뛰어갔다.

    84년에 고등학생이 되며 언어생활을 순화했던 민수는 다시 욕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주로 정치인들과 교장을 비롯한 선생님들, 그리고 뚱땡이 같은 그가 싫어하는 아이들에 그의 욕이 집중되었다.

    3월이 되어 2학년이 된 그는 신문기사를 스포츠면 뿐 아니라 정치면과 사회면까지 읽게 되었고,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하지만 그가 정치적인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제일 관심사는 사실 농구였다. 허재와 김유택을 화면을 통해 혹은 경기장에서 보며 즐거워했고, 오월부터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열두시 부근에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즈의 경기를 보고 그 후에는 농구를 하러 나가는 패턴으로 주말을 보냈다. AFKN을 통해 접한 미국 프로 농구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그에게 선사했다.

    주한미군을 위한 TV 채널 AFKN은 많은 것들을 민수에게 주었다. 중학생 때는 브룩 실즈와 마이클 잭슨이 팔짱을 끼고 그래미상 시상식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이는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백인과 흑인이 팔짱을 낀 것을 그는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과 ‘빋 잇’ 뮤직 비디오를 AFKN을 통해 접했고 마돈나와 프린스라는 참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음악인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 채널을 통해 만난 가장 큰 관심 인물들은 엘 에이 레이커즈의 카림 압둘 자바와 매직 존슨이었다.

    농구광들이 넘쳐났던 종로구 무악동의 인왕산 기슭의 한 동네는 보스턴 파와 엘 에이 파로 나뉘었다. 뚱땡이를 비롯하여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은 희한하게도 거의 보스턴 파였다. 그들은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나 케빈 맥헤일, 대니 에인지 같은 백인 선수들을 좋아했다. 민수와 다른 몇은 스카이훅 슛으로 유명했던 압둘 자바와 ‘노 룩 패스’로 유명했던 어시스트 마법사 존슨을 좋아했다. 그는 마법사처럼 농구를 잘했고 그의 원래 이름이 아빈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 정도로 ‘매직’이라고만 불렸다.

    보스턴 파와 엘에이 파가 농구장에서 맞붙었다. 4: 4 반코트 경기였다. ‘뚱땡이’ 신동식은 골대를 등지고 계속 어깨와 팔꿈치로 민수 편의 정우를 가격하며 골대에 다가갔고 더 작고 힘이 약한 그를 상대로 손쉬운 골 밑 득점을 쌓아갔다. 드리블 돌파의 제왕 민수는 발이 느린 동식 팀 가드들을 빠른 스텝과 현란한 드리블로 가지고 놀며 레이업슛을 연속으로 성공했다.

    동식과 민수의 투맨 쇼 속에 다른 아이들도 가끔씩 점수를 보탰고 20점 경기는 19: 19까지 진행되었다. 동식의 골밑 슛이 보기 드물게 림을 빗나갔고 정우가 리바운드를 따냈다. 그는 즉시 에이스 민수에게 패스했고, 민수는 비하인드 백 드리블로 뚱땡이 팀 가드 우석이를 제치고 골밑으로 날았다. 그 순간 동식의 거대한 손이 민수의 얼굴을 강하게 때렸다. 민수는 쓰러져 나뒹굴었다.

    강한 파울에 열이 오른 민수는 그때까지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창의적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 민수는 뚱땡이 동식의 새로운 별명을 미리 지어놓고 기회를 벼르고 있었고, 그랬기에 그의 말은 물 흐르듯 터져나갈 수 있었다.

    “야 이 돼지부랄로피테쿠스 새끼야. 이게 농구야 격투기야. 정식으로 한 판 붙어볼까? 따라와 이 직립 호모 새끼야.”

    민수보다 몸무게가 20kg은 더 나가던 동식은 민수의 강한 기세에 겁을 먹었고, 꼬리를 내렸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민수를 괴롭혔었고 초등학교 때 한 번 그와 싸워 일방적으로 패기도 했었지만 이 날 그는 그러지 못했다. “미안해. 블로킹하려고 한다는 게 잘못 손이 나갔어.”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얼굴이 공이냐? 뭐, 블로킹? 문지방에 좆 박는 소리하고 있네.”

    5회차

    다행히 그날 일은 폭력 사태로까지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보스턴 파와 엘 에이 파는 헤어졌고, 민수는 정우와 음료수를 마시려고 구멍가게로 갔다. 그 길에 정우가 말했다. “너 아까 진짜 끝내줬어. 돼지 부랄로, 음, 그 다음에 뭐였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돼지부랄로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변형한 거지, 뭐.”

    “아, 그렇구나. 직립 호모는 뭐야?”

    “직립원인, 호모 에렉투스. 에렉트 혹은 이렉트(erect)가 ‘직립한’이라는 뜻이거든. 너 좋아하는 ‘꼴린’, 고상하게는 ‘발기한’이라는 뜻도 있고.”

    “새끼 진짜 말 잘한다. 그런데 이상해. 싸가지 없고 농구할 때 파울 존나 많이 하는 애들이 보스턴을 좋아하는 것 같아. 웃기지 않아?”

    민수가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우는 이어서 “근데 부잣집 새끼들이 또 보스턴을 좋아하는 것 같아. 왜 그 병원 원장 있지? 대선 때 민정당 똥구멍 빨아줬던 그 인간. 그 인간 아들도 셀틱스 팬이래.”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집이 광주에 있어 이미 광주의 1980년 일들을 알고 있던 정우는 광주 출신인 아버지에게 많은 정치 얘기를 듣고 있었고 국민학생 시절부터 민정당과 전두환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여기서 ‘대선 때 민정당 똥구멍 빨아줬던 그 인간.’은 1981년 2월 25일에 대통령을 선출했던 대통령 선거인단의 민정당 구성원들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12대 대통령 선거는 유신 때와 마찬가지로 간접 선거였고, 2월 11일에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5,278명의 선거인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았었다. 이 선거인단이 나흘 후 대통령을 선출했고 이 간접 선거 결과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각 지역의 ‘유지’들이 대거 선거인단이 되기 위한 선거에 나섰고 이 지역에서 잘 알려진 어느 병원의 원장도 민정당 대표로 나서 선거인단이 되었던 것이다.

    민수는 부유한 이들이 보스턴을, ‘싸가지 없는’ 아이들이 보스턴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잘 사는 아버지를 둔 애들 중에서도 특히 인간성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흑인보다는 백인 선수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거나 인성이 좋아서 흑인 선수들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가 보스턴보다 더 친숙한 도시였고, 카림 압둘 자바는 ‘쿨’해 보였고, 매직 존슨은 웃는 낯과 선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좋아했을 뿐이었다. 또한 그들은 의도적으로 거친 파울을 하지 않았다.

    보스턴 선수들은 민수가 보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그의 눈에 래리 버드는 멍청하고 순박해 보이는데 뒤에서 칼을 찌르는 캐릭터로 보였고, 케빈 맥헤일은 대놓고 폭력을 저지르는, 프랑켄슈타인과 K. K. K. 단원의 합체 같아 보였다. 그는 매우 거친 파울로 유명했는데, 1984년 N. B. A. 결승전 4차전에서는 프로 레슬링 기술인 ‘클로즈라인’으로 커트 램비스를 가격하여 쓰러뜨려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짧다고 생각하면 짧고 길다고 생각하면 긴 16년 몇 개월의 삶의 경험들을 통해 민수는 폭력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민선 대 정한광, 옆집 아주머니 대 아저씨, 소희 대 유승준, 학생들 대 교장, 1학년 8반 아이들 대 지리 선생, 자기 자신 대 뚱땡이 등의 대립 구도가 그의 머릿속에 항상 있었고, 그는 항상 약한 이들인 민선, 소희, 학생들, 그리고 자신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폭력 없이 평화롭게 승리하기를 바라고 꿈꾸었다.

    다행히 그는 ‘뚱땡이’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했다. 말 몇 마디로 그의 기세를 꺾었던 ‘돼지부랄로피테쿠스’ 사건 이후 그는 동식이 두렵지 않았고 동식도 그를 슬슬 피했다. 그는 그 새로운 용어가 자신의 별명으로 굳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엔비에이 결승 시리즈가 6월에 끝났고 7월이 왔다. 그 더웠던 7월에 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영국과 미국의 음악인들이 아프리카를 돕는다는 공연을 연 것이었다. 밥 겔도프라는 그가 듣도 보도 못했던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음악가가 추진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던 대부분의 영 미 음악인들이 이 공연, 라이브 에이드에 참가했다. 민수는 그 때 해산한 지 5년 째였던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처음으로 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로버트 플랜트는 그 날 노래를 예전에 비해 무척이나 못 불렀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을 본 것만으로 흥분했던 것이다.

    마돈나가 ‘할러데이’를 숨을 헐떡이며 부르는 것을 보았고, 엄청나게 격렬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거의 완벽하게 부르는 그를 보고 민수는 이 여자 가수가 립싱크하며 예쁜 표정을 짓는 댄스가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필 콜린즈를 보았고 퀸을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그들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하이라이트 합창 부분은 건너뛰었다. 그것을 실제로 부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수는 이 공연이 하나의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었고 아프리카의 불행의 커다란 원인을 제공했던 영국인들이 푼 돈 좀 모아 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였다. 그는 세계사 광이었고 아프리카가 영국과 프랑스에 양분되어 오랜 기간 그들의 통치를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아이보리코스트와 코트디부아르가 같은 나라의 영어식 명칭과 불어식 명칭임을 알았던 고등학생은 민수 외에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약간 이상한 논리로 이 공연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위선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노골적으로 성애를 묘사하는 노래를 부르던 가수 프린스는 이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것이 이 공연은 위선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농구 중계 시즌도 끝나고 야구에는 관심이 식어 별로 볼 방송이 없었던 그는 라디오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황인용, 김기덕, 김광한, 이종환과 같은 유명한 디제이들이 팝 음악을 열심히 소개했고 그는 점차 하드록과 헤비메탈로 빠져들었다. 그는 예전부터 레드 제플린을 좋아했었지만 이제 딮 퍼플과 블랙 사바스로, 아이언 메이든으로 점점 듣는 음악을 넓혔고, 그러다가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충격적인 기타리스트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빠른 기타 연주를 하는 그룹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주로 헤비메탈 쪽으로 관심이 가게 되었다.

    농구를 하며 음악을 들으며 시험 기간이 인접하면 공부하던 그는 그 해 12월에 큰 결심을 했다. 당분간 농구와 음악을 끊기로 한 것이다. 이는 그에게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해 12월에서 다음해 7월까지 두 가지를 끊었다.

    이제 밥 먹고 공부만 하는 아이가 된 민수는 1986년 전반기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학력고사 준비에만 집중했다. 그 해 4월 신림동에서는 두 학생이 분신하며 건물에서 떨어졌고 5월에는 인천 5.3. 사태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고3들도 그랬을 것이다.

    모의고사 성적은 괜찮았고 그는 그가 초등학생 때부터 꿈꾸던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그는 지쳤고 방심했고 7월부터 농구도 하고 음악도 듣는 생활을 재개했다. 2학기 모의고사들에서 민수는 1학기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성적을 얻었고 불안한 마음에 사물이 겹쳐 보이는 증세를 얻었다.

    1986년 11월 19일은 학력고사 하루 전 날이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제발 국어가 어렵게 나오고 수학이 쉽게 나오게 해 주소서.’하고 빌었다. 누구에게 빈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는데 아마 하늘 그 자체에게 빌었을 것이다.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지 못하자 이상한 결단을 내렸다. 그와 함께 새벽 한 시 반에 인왕산에 오른 것이다. 아버지는 불빛으로 가득한 서울 시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불들이 켜 있는 곳들에서는 사람들이 자지 않고 일하고 있단다.”

    아버지가 무슨 의도로 무슨 의미로 그 얘기를 했는지 그는 몰랐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대학 진학 이후로 그는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잠시 후 멋진 말을 한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그는 새벽 두 시 반에 잠들 수 있었고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세 시간은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이 날은 따뜻했고 난로를 켜지 않아 그는 졸지 않고 시험을 치룰 수 있었다.

    천지신명이 도왔는지 1987학년도 학력고사는 정말로 국어가 어려웠고 수학이 쉽게 출제되었다. 그는 수학 문제를 풀기 전 세계사와 사회를 다 풀고 수학으로 옮겨갔다. 수학 문제 세 개를 못 풀었고 나머지를 다 푸니 110분 중 5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민수는 알았다. 세계사와 사회를 검토하고 수학을 검토했다. 이제 40분이 남았다. 그리고 세 문제에 매달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는 세 문제를 모두 틀렸다.

    영어와 독일어로 구성된 3교시에 그는 30분을 남기고 다 푼 후 잠을 자는 기행을 했고, 4교시에는 국어II에서 의외의 고전을 겪었다. 어쨌든 그는 기분 좋게 시험을 마쳤다. 국어가 어려웠고 수학이 쉬웠으니 그는 서울대학교 정문이 눈에 보인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마치고 서부역 뒤편의 환일고등학교를 나서며 그는 담임선생님을 보았고 활짝 웃으며 V자를 손가락으로 그렸다. 평소에 말이 없고 수줍음 타는 아이라고 민수를 생각했던 그는 민수의 의외의 행동을 보며 그는 분명히 시험을 잘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임선생님이 민수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그는 민수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재수 없게 담탱이가 여기 왜 온 거야.’ 어쨌든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옳았다. 민수는 310점이 넘는, 자신이 모의고사에서 전혀 얻지 못했던 최고의 성적을 얻었다. 희한하게도 다음 날부터 사물은 겹쳐 보이지 않았다.

    성적표가 12월에 나왔고 그의 가채점 결과보다 2점이 낮게 나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법대에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고, 다시 말해 그는 인문계의 어느 학과에나 진학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대에 갈만한 아이들을 직접 상담했다. 그의 앞 차례에서 교장을 만났던 이과의 조준용을 본 그가 말했다. “어디 쓰래? 연대 공대?” “아니 서울대 농대 쓰래.”

    이 학교는 서울대 숫자를 늘리기 위해 농대에 많은 아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다른 학교들도 많이 그랬었다. 농산물의 농자도 모르던 조준용은 얼떨결에 농대에 가게 되었다. 서울대 농대는 나중에는 농생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며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였고 소위 커트라인도 꽤 높아졌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수원에 있었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공대나 자연대에 비해 합격선이 꽤 낮았다.

    민수가 교장실에 들어갔다. 교장이 말했다. “법대 가야지.”

    민수는 “서양사학과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교장은 다시 부를 테니 더 생각하라고 말했다.

    교장은 짜증이 났다. 그는 310점을 훌쩍 넘은 두 명이 문과에서 나오자 법대 둘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등을 한 이명준이라는 놈은 경제학과를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민수가 법학과에 가면 법학과 하나, 경제학과 하나로 무언가 멋진 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이 학년의 놈들은 이과 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대를 갈 수 있는 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셋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 의예과보다 더 커트라인이 높았던 전자공학과나 물리학과 얘기를 꺼내는 아이도 없었다. 제일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계산통계학과나 그가 들어본 일이 없던 제어계측공학과를 얘기했고 전산기공학과를 얘기했다. 그는 ‘전산기 공학과’인지 ‘전산 기공학과’인지도 알지 못했다. 공학에 대한 소양이 없었던 그는 이과 아이들의 생각은 그냥 다 인정해 주었고, 문과라도 잘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다음날 민수는 다시 교장을 만났다. 교장은 “법대를 가는 게 좋겠지만 내가 경영학과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고 말했고 민수는 “저도 국사학과나 동양사학과까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떨이가 날았다. 농구로 단련된 강하고 민첩한 신체를 가진 민수는 잘 피했고 담임선생이 교장에게 읍소했다. “제가 다시 설득해보겠습니다.”

    담임선생과 대화를 나눈 민수는 사학 계열을 포기하고 영문학과를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담임은 교장을 만나 영문학과로 확정짓고 돌아왔다. 영문학과는 종로학원 배치표에서는 법학과와 경제학과에 이어 공동 삼위에 올랐고 대성학원 배치표에서는 단독 삼위에 오른 ‘인기학과’였기 때문이었다. 민수도 조준용이 농대에 간 것처럼 얼떨결에 영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서양사학과 진학이 무산되었지만 민수는 싫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팝 칼럼니스트라도 하지 뭐.’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때 주로 했던 일이 팝과 록 음악들의 가사를 해석하고 록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7년 이월의 어느 날 그는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고 서울대학교 영문과 학과장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조교들을 시켜 <좌경용공, 그 실상과 음영>이라는 무시무시해 보이는 겉표지를 가진 책자를 나누어 준 그가 이렇게 말하며 아이들을 협박했다.

    “데모라는 게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나는 그것에 반대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것이 선생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작년에 건대사태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봤을 겁니다. 우리 과 학생들이 무려 여덟이나 그 때 구속되었습니다.”

    신입생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민수는 속으로 웃기 시작했다. 이 엄숙한 표정의 학과장이 미리 계획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훤히 눈에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3, 4학년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다섯 명이 일학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학과장은 결정타를 날렸다. “우리 87학년도 신입생들은 참 여학생이 많네요. 그런데 남학생들만 구속된 게 아닙니다. 다섯 중 셋이 여학생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신입생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민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저 양반 연기력이 죽이는데. 기획력도 대단하고.’

    민수는 집에 가서 <좌경용공, 그 실상과 음영>을 읽으며 생각했다. ‘안기부 애들은 이 책 애들이 읽으면 쫄 줄 아나봐. 내가 보기에는 이 책으로 좌경 사상을 오히려 배울 것 같은데. 정리가 잘 돼 있네. 민족해방파와 민중민주파라. 민족민주파는 제헌의회파라고도 불린다. 영어 약자로는 NL, PD, 그리고 ND 혹은 CA라.’

    며칠 후 그는 지긋지긋한 육년간의 중고교 생활을 끝냈다. 여전히 밀가루를 뿌리는 애들이 있었고, 그걸 비웃으며 그는 지긋지긋한 건물과 선생들과 아이들과 헤어짐을 기뻐하며 가족들과 식당으로 향했다. 나가는 길에 그 깍두기 수위가 보였다. 그는 속으로 ‘안녕’하고 인사하고 회집에 가서 인생 처음으로 아귀찜을 먹었다. 인생 세 번째로 소주를 마셨다. 그는 만 열여덟에 불과했지만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교장에게 받은 표창장을 찢어버리고 역시 교장에게 받은 무슨 메달인가를 하수구에 집어던졌다. 이 폭력과 강간과 억압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그만의 귀여운 의식이었다.

    그는 3월에 대학에 입학해 그 때까지와는 다른 삶을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민선이도, 소희도, 뽀리꾼 경수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동식은 가끔 동네에서 마주쳤고, 지리 선생은 동네 술집에서 몇 번 볼 수 있었다. 교장은 이 년 간 두 번을 보았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가 사는 세상은 종로구에서 관악구로 이동했다.<계속>

    필자소개
    정재영(필명)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작가이다. 저서로는 「It's not Grammar 이츠낫 그래머 」와 「바보야, 문제는 EBS야!」 「김민수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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