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미대륙 독립운동은 아직도 진행형
        2006년 11월 11일 05: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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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 나가! 싸우러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80년대 대학가의 술판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신독립군가’의 후렴이다. ‘민족해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막걸리 한사발을 걸치고 팔뚝을 휘저으며 독립군가를 부를 때만은 서로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반세기전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전사들의 함성이 오롯이 이 노래에 담겨있다.

    하긴 제국주의, 식민주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맞서 독립군가를 불렀던 것이 어디 조선의 민중들뿐이었겠는가. 압제로부터의 해방,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은 모든 식민지 민중의 꿈이었다.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던 모든 투사들은 그들 자신의 ‘독립군가’를 부르며 전선을 넘었을 것이다. 만주에서 베트남까지. 알제리에서 팔레스타인까지. 그리고 니카라과에서 캐나다까지.

    …캐나다?

    * * *

    살기 좋고, 공기는 더 좋다는, 그래서 삶에 지친 직장인들이 이민을 꿈꿀 때 1순위로 꼽는 나라들 중 하나라는 캐나다. 거기에도 민족해방운동이 있다. 뭐 이미 다들 눈치 챘을 것 같은데 바로 ‘퀘벡’주의 분리독립운동이다.

    퀘벡은 루이지애나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의 식민지로 개척됐지만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결과 1760년부터 영국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후 영국이 북미의 식민지를 캐나다로 재편하면서 퀘벡은 캐나다의 한 주로 편입됐다.

    퀘벡은 캐나다의 자치주 중 가장 크며 인구로는 두 번째다. 보통 캐나다의 수도라고 잘못 알고 있는 몬트리올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민의 90%가량은 여전히 프랑스어를 쓰고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역사, 문화적 배경이 퀘벡을 캐나다연방으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로 만들려는 구심력의 근원이다.

    분리독립 여부를 놓고 1995년에 치러진 퀘벡의 주민투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8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치러진 당시 주민투표에서 독립 찬성은 49.42%였다. 물론 투표기간 내내 연방정부가 팔짱끼고 바라만 보지는 않았다. 자치권을 확대해주겠다는 유혹부터 ‘독립하면 재미없다’는 노골적인 협박까지 모두 동원했음에도 간발의 차이로 부결되자 연방정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80년 투표에서 찬성은 40.44%였다.

       
    QUEBEC
    – 200 ans de resistace
    1970년대 제작

    앞면
    1. Poème Laure
    2. La fin de semaine
    3. Il en a Fallut
    4. Veillèe Québécoise

    뒷면
    1. Tannée
    2. Mon homme est au chômage
    3. 16 Octobre 70
    4. Hélène
    5. Québékiss

     

    95년 주민투표 후 얼마 안 지나서 우연하게 구한 것이 "퀘벡"이라는 간결한 제목이 붙은 레코드다. 부제는 ‘저항의 200년(200 ans de resistance)’이다. 커버에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광경이 그려져 있다. 시위가 한차례 지나간 길 위에 경찰의 헬멧과 시위대의 각목이 널브러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경찰 헬멧에 캐나다 국기가 아니라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낙엽은 한 구석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 한 장의 레코드 덕분에 퀘벡과 그들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역사를 들쳐보게 됐다.

    간단히 정리하면 우선 ‘200년간의 저항’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심하다. 퀘벡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뒤고 분리독립운동이 격화된 것은 60년대 이후다.

    역사가들이 퀘벡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된 출발점으로 지목하는 것은 1949년 아스베스토시의 석면 광산에서 벌어진 파업이다. 노조는 임금인상과 휴일근로수당 등을 요구했고 자본가들은 "퀘벡 역사상 유래가 없는 ‘급진’적 요구"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노조는 2월 14일 파업에 돌입했고, 광산 편에 선 주지사는 즉각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4개월간 지속된 파업은 결국 주지사가 공권력을 투입하면서 끝났다. 소폭의 임금인상 등이 이루어졌지만 수많은 조합원들이 광산에서 추방됐다.

    이 사건 이후 이어진 몇 건의 폭동 사건을 거치면서 퀘벡을 지배하던 보수정치인들과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됐고, 1960년대 내내 퀘벡인들이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라고 부르게 되는 개혁운동이 진행됐다.

    ‘조용한 혁명’ 시기에 퀘벡은 공교육 재정확대, 전력 국유화, 공공서비스의 집산화를 통해 연방정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복지국가’를 설립했다. 이런 개혁의 부산물로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 대신 ‘퀘벡인Québécois’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혁명’이 이름처럼 조용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63년 일단의 맑스주의자들이 ‘퀘벡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du Québec’을 결성했다. FLQ는 맑스주의자답게 주적을 캐나다정부가 아니라 영국제국주의로 파악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캐나다 경찰은 다름 아닌 영국제국주의의 하수인이었던 셈이다.

    60년대 수많은 좌익집단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무장투쟁을 통한 퀘벡의 독립과 노동자국가의 건설을 추구했다. 연방정부는 당연하게도 FLQ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지만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그러던 중 FLQ는 1970년 10월 5일 몬트리올에서 영국 무역대표부 대표를 납치했다. 5일 후에는 또 다른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주정부는 연방정부에 전권을 위임했다.

    10월 16일,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아스베스토 파업을 지원했으며, 퀘벡출신으로 연방수상까지 오른 피에르 트뤼도가 이에 화답해 ‘전시관계법’을 발동했다. 다음날 군대가 퀘벡 전역에 배치됐고 경찰은 영장 없이 사람들을 체포했다. 결국 납치 사건은 인질 한명이 ‘처형’당하고 영국무역대표는 석방된 후 12월 3일 FLQ지도부 일부가 쿠바로 망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 경찰 헬멧에는 캐나다 국기가 아니라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낙엽은 한 구석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다.
     

    캐나다 현대사에 ’10월 위기’라고 기록된 이 납치사건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10월 위기 동안 군대와 경찰이 보여준 무자비한 모습은 퀘벡인들의 목표를 캐나다 안에서의 자유에서 캐나다로부터의 자유로 돌리는 계기가 됐다.

    * * *

    레코드 커버의 경찰 헬멧에 그려진 영국 국기는 퀘벡인들에게, 최소한 이 레코드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독립’이라는 과제가 영국제국주의자들의 지배로부터 단절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영어를 쓰는데 우리는 프랑스어를 쓴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또 캐나다 연방정부의 선전처럼 독립운동이 프랑스 민족주의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레코드 커버의 뒷면에 보면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을 추진하는 코르시카 섬의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퀘벡인들이 보내는 인사가 적혀있다. ‘프랑스는 우리 편이 아니야’라는 선언인 셈이다.

    그러나 대서양 건너편의 사정까지 챙기는 세심함과 달리 이 레코드는 정작 내용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불친절하다. 프랑스어로 된 노래제목만이 적혀있을 뿐이다. 누가 불렀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조차도 확인할 수가 없다. 게다가 언어의 장벽은 노랫말도 확인할 수 없게 만드니 정작 음반을 손에 쥐고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 이 사람이 마리 사바르, 캐나다 사람에 대한 정보가 제3세계 인물 보다 더 구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 얼마 전에야 ‘엘렌느Hélène’를 제외한 뒷면 4곡을 부른 주인공이 마리 사바르Marie Savard라는 여자 가수임을 확인했다. 1936년 퀘벡에서 태어난 사바르는 1965년 시인으로 데뷔했다.

    방송작가로도 일하면서 이후 창작의 영역을 연극으로 확장했고 페미니스트 극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퀘벡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권, 그러니까 프랑스를 비롯해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에도 소개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사바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곡과 노래에도 재능을 보였다. 1965년 자신의 시에 직접 곡을 붙여 만든 앨범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5장의 음반을 발표했는데, 그중 1971년 선보인 앨범 ‘퀘벡키스(Québékiss)’의 수록곡 중 4곡이 이 레코드("QUEBEC")에 실린 것이다. 따라서 이 레코드는 최소한 1971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내 남자는 실업자(Mon homme est au chômage)’라는 노래는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퀘벡 지역의 노동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퀘벡은 캐나다 안에서도 산업화된 지역이고 60년대 ‘조용한 혁명’을 통해 복지제도를 정비했지만 소득수준은 낮은 편이다. 퀘벡의 GDP는 캐나다 전체 GDP의 85% 수준이며 가장 잘사는 주와 비교하면 35%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차이가 어쩌면 분리독립에 대한 경제적 동기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70년 10월 16일(16 Octobre 70)’는 앞서 이야기했던 10월 위기 중 연방정부가 전시관계법을 발동한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71년에 발표된 마리 사바르의 원래 앨범에서는 ’10월 16일의 밤(La nuit du 16 octobre)’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됐다. 이쪽이 좀 더 드라마틱해 보인다. 마지막 곡인 ‘퀘벡키스’는 정치적인 노래가 아니라 아름다운 발라드다.

    나머지 노래들 중 ‘주말La fin de semaine’, ‘무언가가 필요하다Il en a Fallut’, ‘엘렌느’ 이렇게 3곡은 장-피에르 클레르몽Jean-Pierre Clermont이라는 작곡자 이름까지는 알아냈지만 도대체 누가 부른 건지, 무엇에 관한 노래한 것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레코드를 손에 넣고 10년이 지나서야 ‘마리 사바르’라는 존재를 확인했으니 앞으로 10년 후에는 이 레코드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쯤이면 퀘벡도 독립국가의 꿈을 이루었을지 궁금하다.

    * * *

    대서양 반대편에는 퀘벡과 마찬가지로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며 해방을 꿈꾸는 또 다른 독립군들이 있다. 800년(!)이 넘게 영국과의 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는 아일랜드다. 다음에는 기나긴 저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아일랜드의 민중가요와 노래에 얽힌 이야기들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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