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일랜드 독립전쟁 또는 민족 vs 계급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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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11일 03: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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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후 개봉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원제: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은 <랜드 앤 프리덤>,  <빵과 장미>에 이어 내가 접한 켄 로치의 세 번째 영화이다. 한 때 ‘예술영화’들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류(類)의 영화들을 상영하는 극장은 썰렁하기만 하다.

    지금 필름포럼에서 단관 상영하고 있는 뮐러 감독의 데뷔작 <대통령을 죽여라>도 그렇지만, ‘거장’ 켄 로치가 만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술영화’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볼만한 영화, 썰렁한 영화관

    1920년대 초 영국의 지배 아래 있는 아일랜드. 형 테디(페드레익 딜러니 분)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강인한 전사이지만, 동생 데미언(킬리언 머피 분)은 런던에 가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인 그저 평범한 청년이다.

       
     

    데미언은 연인 시네이드(올라 피츠제랄드 분)의 동생이 헐리(아일랜드의 ‘國技’)를 하는 것조차 집회금지를 어긴 것이라며 탄압하는 영국군에게 영어가 아닌 게일어로 항의하다 맞아 죽는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함께 싸우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뒤로한 채 ‘꿈의 런던’으로 떠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런던 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나간 데미언은 기관사 단(리암 커닝햄 분) 등 철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영국군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꿈을 접은 채 돌아와 전사로서 서약한다.

    독립을 위한 투쟁은 고조되고 이 와중에 데미언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료 크리스(존 크린 분)를 밀고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게 된다. 그는 "우리를 바쳐 싸우는 이 아일랜드가 그럴 가치가 있길 바란다"는 말을 동료 단에게 읊조린 후 방아쇠를 당긴다.

    총을 던지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 속에서 보리밭은 또 한번 미세하게 흔들린다. 격화되는 독립투쟁은 저항의 주체들에게, 그리고 그 사나운 바람 속에서조차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는 그들의 부모형제, 이웃인 노동자, 농민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들을 남긴다.

    결국 1922년 영국은 평화협정을 제안하게 되고 이에 동의하는 자치주의자와 ‘독립공화주의자’ 사이의 갈등은 점차 깊어진다. 데미언은 아일랜드 남쪽이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남아 여전히 국왕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 북아일랜드는 예전처럼 영국에 그대로 복속된다는 협정 내용에 분노한다.

    바람, 밖에서 불어오거나 내부의 숙명이거나 

    이 협정이 그 동안 전개한 대영 투쟁의 성과이며 아일랜드의 미래를 담보할 기회라고 역설하는 테디는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힘이 쌓이면 이 협정문을 찢어버릴 것”이라며 자치정부군에 참여한다. 하지만 양자의 고조된 갈등은 더블린의 자치정부군이 독립공화파 지도부에게 무력행사를 함으로써 폭발하게 되고 이런 국면 속에서 데미언은 무기 확보를 위해 자치정부군의 막사에 숨어들었다가 총격전 끝에 사로잡히게 된다.

    형 테디는 데미언에게 "네가 의사가 되어 시네이드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꿈"이라며 무기 은닉처를 알려달라고 설득하지만 데미언은 이를 거절하고 테디의 사형집행 구령에 따라 총살당한다.

    바람이 불면 보리밭은 운다. 때로는 그 바람이 너무도 거칠어 뿌리가 뽑히고 꺾이기도 한다. 서로가 뒤엉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잔잔해지기는 하지만 그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단지 바람이 ‘보리밭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은 그것이 아무리 미풍일지라도, 보리밭 그 자체에 담겨 있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켄 로치는 제국주의 영국의 억압과 수탈이라는 외부의 거친 바람을 선명히 드러내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아일랜드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담겨 있는 울림, 즉 ‘계급의 문제’,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3파운드를 위해 한 달 내내 일을 해도 남는 것은 1씰링인 빈주머니의 노동자, 땅뙈기 한 조각 없는 농민, 영양실조에 걸려 죽어가는 어린 아이.

    하지만 이 문제들은 ‘민족’이라는 이름에 가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는 ‘제국’을 꿈꾸는, 아니 ‘제국’ 이전에 이미 제국이 된 자본이 숨쉬고 있다. 애초 태생적으로 국경이 없는 자본은 그 본성을 ‘양심적 자본’, 혹은 ‘민족자본’, ‘국민자본’이라는 이름 등으로 달리 표현하면서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 왔다.

       
     

    ‘민족’과 ‘전쟁’이 억압한 가치들  

    그렇기에 ‘민족’을 앞세운 그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약속된 번영’보다는 고통과 분열, 반목이 숨쉰다. 테디는 ‘민족자본’ 또한 노동자, 가난한 농민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호주머니만이 지금 당장 영국과 전쟁을 할 무기구입 대금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옹호한다.

    ‘민족’과 ‘전쟁’이 그 외의 삶의 문제와 가치를 주변화하고 배제시킨다. 이에 데미언과 단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영국에 저항하는 것은 단순한 독립을 넘어 노동자, 농민 등 대중이 겪는 고통을 해소, 극복하는 것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무기이자 투쟁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는 너무도 익숙한 이러한 인식들 속에는 앞으로 그들이 걸어야 할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22년 영국과의 ‘평화협정’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일 뿐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모든 것은 더욱 선명해 진다. 무릇 하나의 문제 해결과정은 그것과 착종되어 있는, 혹은 그것에 가려 희미했던 여타의 문제들을 더욱 확연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서 있는 지점을 유보 없이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톨릭교회의 사제는 평화협정이 전체 교회, 전체 신문, 전체 사회 각층, 즉 아일랜드 전체의 의견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그에게 협정을 거부하는 비정규군은 아일랜드 전체를 파괴시키는 자들이다.

    같은 민족, 다른 계급, 더 큰 고통

    교회는 그들을, 데미언을 파문시킨다. 하지만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은 그 ‘신성한 교회’에서 사제를 향해 소리친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영광스럽게도’ 또 다시 부자들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이제 그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대중을 억압하는 ‘시민사회의 또 다른 국가기구’에 불과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전체를 이야기하는 자’를 의심하라고 가르쳐 준다. ‘전체의 실체는 일부이다.’ 그것도 타자의 배제, 억압을 전제로 하는 ‘그 어떤 동일성’이다. 따라서 ‘자치공화국’은 ‘그들만의 공화국’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기원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모든 희망을 상징하였던 ‘민족’이라는 준거는 순식간에 모호해 진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은 허상’인 것이다. 자치정부군은 제국의 군대가 그랬듯이 ‘가난한 동포’, ‘같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위협한다.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던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며 어머니는 외친다. 오히려 ‘같은 민족’이라는 그 사실이 고통을 더욱 배가 시킨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전설적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1916년 신페인당의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이후 대영 게릴라전, 테러전을 주도하고, 아이러니하게도 1922년 협상의 아일랜드 측 대표였던 마이크 콜린스의 이름을 타이틀로 한 영화, 닐 조단 감독의 <마이클 콜린스>와는 다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시각에서 본 그것의 자매편 혹은 후속편이기도 하다. <마이클 콜린스>가 한편으로 콜린스의 영웅적 투쟁, 다른 한편 그들 내부의 ‘권력투쟁과 음모’를 두 축으로 하여 구성되었다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대중, 그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변방 투사들의 고뇌와 삶을 담고 있다.

    <마이클 콜린스>가 보여준 1922년 자치협정의 의미, 콜린스의 영웅적 투쟁과 그에 대한 평가는 분명 흥미로운 것이지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위로부터의 협상’이 대중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가의 문제이다.

       
     

    노동자는 왜 여전히 켄 로치의 희망인가 

    켄 로치는 그것이 ‘아일랜드의 해방’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농장노동자이자 동료였던 크리스의 처형은 완전한 독립과 가난한 자들의 해방을 위한 공화국 건설이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목표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데미언이 크리스를 죽이며 반문했던 것은 "아일랜드가 이렇게 할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기은닉처를 알려달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형 테디에게 “내가 크리스의 심장을 쏘았어, 왜 그런 줄 알잖아.”라는 말로 거절한다.

    만일 그 협정이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깃발을 놓는다면 크리스의 목숨을 앗아간 이유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죽을 차례이다. 데미언의 죽음은 그것을 다시 확인하는 의식이다.

    데미언의 죽음과는 반대의 모습이지만, 자치정부군의 사령관 <마이클 콜린스>가 자치협정에 반대하는 비정규군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역사 변증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진정 희망의 빛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켄 로치에게 있어 희망의 이정표는 데미언이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투쟁을 열어갈 세력을 상징하며 그 중심에는 노동자가 있다. <마이클 콜린스>에서도 대중은 존재하지만, 그 내부의 상이한 결은 보이지 않는다.

    항상 대중은 뭉뚱그려져 있으며 그들은 연설하는 콜린스와 그의 상관이자 그와 정치적 긴장관계에 있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 발레라의 발아래 잠깐씩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서 대중은 ‘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전사(戰士)들’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독립이 가난한 자 해방과 함께 오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와 달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켄 로치는 대중의 중심에 노동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데미언은 그들을 대변한다. 그가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와 전사가 된 계기도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짓밟히는 광경을 본 후였다.

    켄 로치는 데미언에게 묻는다. “왜 너는 ‘공화주의’ 위에다가 항상 ‘노동자신문’을 올려놓느냐.”라고. 그리고 그의 뒤에는 과거 시민군이었으며, 아마도 1916년 봉기에도 참여했을 철도노동자 출신 단이 존재한다. 데미안과 단은 아일랜드의 독립이 노동자, 농민 등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함께하지 않으면, ‘사회공화국’이 아니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독립이 아니라면, “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영국과 자본가와 영리단체들일 것이다.” 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노동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때, 그 온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오히려 켄 로치를 무색하게 만든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노동자, ‘노동자계급’이라는 이름은 이미 식상한 것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계속 노동자에 주목하고 그들을 불러온다.

    역사상 노동자라는 용어, 혹은 그 개념이 이처럼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된 시기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이름을 걸었던, 그 ‘역사적 사회주의’의 붕괴가 상징하듯 패배했고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회주의’는 뼈만 앙상하다.

    객관적 적대 관계를 선명히 드러내주는 게 진보

    그렇지만 이것이 비아냥거림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역사를 외면하거나 거리낌 없이 부정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속에서 ‘출중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거나 현재를 미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분명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현재의 비대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관계들, 그로부터 필연화하는 적대들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뼈를 깎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그 적대를 뭉뚱그리고 그 어떤 ‘중도의 합의’를 최선인 것인 양 말하면서 사안을 둥그스름하게 만드는 ‘부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과 행태는 대중이 ‘극단의 정치적 대립’을 원치 않는다는 말로 교묘히 대치된다. 형 테디는 교회문을 박차고 나간 데미언에게 간곡히 말한다. "현실을, 세상을 직시하라"고.

    정녕 대중은 ‘그 적대들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외면하는가. 그것을 ‘극단의 정치적 대립’과 동일시하는가. 이 지점에 이르면 켄 로치가 계속 부여잡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긍정성은 사라진다. 미래를 재구성하는데 기여해야 할 노동자계급은 현재의 그 적대를 구태의 관계 속에서 변형시키는데 일조하는, 따라서 미래를 어두운 그늘 속에 가두는 퇴영적 존재로서만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바로 이것이 1922년 아일랜드 ‘평화협정’에 담겨 있는 노회한 보수정치의 음험함일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진보정치의 미래는 살아나기 힘들다. 왜냐하면 진보는 객관적인 적대를,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만이 생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켄 로치를 다시 본다. 왜냐하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그 어디에서도 지금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과 같은 노동자들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켄 로치에게 노동자들이 걸어온 길은 그것이 희망이든 기쁨이든, 아니면 아픔, 슬픔, 좌절, 고통이든 그 모두가 그들 역사의 소중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와 싸우는지는 알기 쉽지만, 왜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에게는 죽기 직전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면서 자신을 밀고자로 만든 고용주의 옆에 함께 묻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크리스도, 그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그를 가슴에 안고 죽은 데미언도,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오열하는 ‘마이크 콜린스’의 분신인 그의 형 테디도 노동자 역사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붕괴된 ‘역사적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외부에서 이입된, 그들과는 무관한 그 어떤 이물질인가. 80년대 한국의 ‘급진적인 변혁운동’은 노동자들의 욕구와는 다른 길을 걸은 철모르는 지식인들이 그린 하나의 삽화(episode)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기에 그것들은 노동자계급의 역사 속에서 지워버려야 할 어두운 그림자들인가. 그렇기에 그것은 오직 참회와 고해의 대상인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현재이다. 과거는 단지 현재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켄 로치가 보는 역사의 눈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끊임 없이 재구성되는 현재의 관계들 속에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 서 있어야 할 좌표는 ‘긍지와 부끄러움의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 ‘애욕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부여잡고 씨름하는 자만이 다시 볼 수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변절의 과거’를 변명하거나, ‘과거 투쟁의 영광’으로 현재를 미화하려는 그 어떤 모습들도 그려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역사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낼, 또 다른 바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데미언의 죽음을 접한 시네이드의 오열도 잠시, 짙은 안개 속 저 너머에서 점점 크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노래 소리와 함께 엔딩 자막을 올린다. 그 언젠가 신새벽에 데미언과 테디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보리밭 사이 길을 걸어가며 투쟁의 의지를 담아 불렀던 바로 그 익숙한 노래 소리이다.

    그런데 지금 거기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억압과 수탈이 있는 한,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에서든 투쟁의 주체가 계속 재구성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 그렇게 묵묵히 걸어 갈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가.

    데미언은 그가 신뢰하는 노동자 단의 말을 빌려 그들의 이정표에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싸우는 상대를 알긴 쉽지만, 네가 왜 싸우는지 알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고통스런 삶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삶의 관계들을 정면에서 응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이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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