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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삼각지대로 간
    국군 패잔병과 그 후세대
    [국공내전-68] 마오쩌둥, 소련 방문
        2021년 03월 31일 09: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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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12월 9일, 국민당 윈난성 정부 주석 루한이 기의를 선언했다. 그러나 국군 제8군과 26군은 기의에 반대하였다. 국민당 총재 장제스는 육군 참모 부총장 탕야오(湯堯)를 육군 부총사령관에 임명하여 8군과 26군, 다른 부대 등 3만 3천 병력으로 윈난성 성도 쿤밍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구이저우에서 출격한 해방군과 기의부대에 패하여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12월말 패전한 국군 부대는 카이위안(開遠), 젠수이(建水), 멍쯔(蒙自)로 물러났다. 장제스는 이 부대를 8병단으로 개편하여 탕야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해방군은 4병단 사령원 천겅이 2개 사단을 이끌고 광저우에서 윈난으로 이동하였다. 천겅은 탕야오 부대를 추격하여 1950년 1월 11일 난시(南溪), 허커우(河口)를 점령하였다. 천겅은 윈난 남부와 베트남을 잇는 도로를 차단하여 탕야오 부대의 퇴로를 끊었다. 천겅의 부대는 1950년 1월 1일, 난닝에서 출격하여 16일에는 멍쯔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1월 17일 해방군은 탕야오 휘하 국군 26군과 38군을 섬멸하였다. 탕야오는 패잔병을 이끌고 도주하여 중국과 버마 국경지대로 가고자 하였다. 해방군은 국군을 계속 추격하여 1월 25일 국군부대 대부분을 섬멸하고 탕야오를 포로로 잡았다. 천겅의 4병단은 윈난의 국군 잔존부대를 50일 동안 추적하여 2만 7천명을 섬멸하였다. 이로써 윈난의 국군 세력이 모두 소탕되었으며 공산당은 윈난성을 모두 평정하였다.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아편 밀수꾼으로 전락한 국군 패잔병

    ‘골든 트라이앵글 (황금의 삼각지대)은 북쪽의 미얀마 국경에서 서쪽의 샬윈(Salween)강, 남쪽의 태국의 치앙마이(Chiangmai)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뒤집힌 삼각형 모양으로 면적은 20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한반도 면적이 22만 평방킬로미터이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마약 생산기지로 유명하였다. 처음에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군 패잔병이 자리를 잡았다가 생존을 위해 아편을 재배하게 되었다. 윈난성에서 후퇴한 패잔병들은 어떻게 아편 재배와 밀수에 손을 대게 되었을까?

    골든트라이앵글 지역

    1950년 1월 25일, 국군 제8군 주력이 섬멸당하고 병단 사령관 탕야오와 6,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때 잔여 병력이 미얀마로 도주하였는데 모두 합하여 1,500여명 정도였다. 1950년 4월 국군 잔존부대는 미얀마 동북에서 ’부흥부대‘의 깃발을 내걸었다. 국군 연대장 출신의 리궈후이(李國輝)가 총지휘를 맡았다. 얼마뒤 윈난에서 도주한 패잔병과 토비, 지주 무장세력이 차례로 와서 합류하자 부대는 곧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대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이 된 것이다.

    버마 정부가 토벌대를 보내어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내전에서 단련된 국군 패잔병들을 당할 수 없어 미얀마 정부군은 여러 번 패배하였다. 그로부터 20년간 이 부대는 미얀마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 부대는 생존을 위해 아편 무역에 손을 대게 되었지만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미얀마 정부는 한때 12,000명의 대군을 토벌대로 보냈으나 3,000명을 당하지 못하였다.

    1950년 9월, 고무된 장제스는 국군 8군단장 리미를 미얀마 북부로 보내 패잔병들을 규합하게 하였다. 리미는 미얀마 경내에 있는 국군을 ’윈난 인민반공구국군‘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윈난성 남부로 기세 좋게 쳐들어갔다. 장제스가 염원하는 ’반공대륙‘의 선봉이 된 셈이다. 처음에는 국군의 공세가 신속하고 맹렬하여 윈난의 4개 현성을 잇따라 빼앗았다. 하지만 해방군 3개 사단이 출동하자 중과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포위되어 고전하던 리미의 부대는 다시 미얀마로 퇴각하였다.

    그후 ’반공 구국군‘은 다시 중국대륙에 발을 딛지 못하였다. 그 정도 병력으로는 내전이 종식된 중국에 작은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반공대륙‘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지만 생존은 현실이었다. 처음 1년은 쉬기도 하고 타이완의 원조도 충실하여 지낼 만하였다. 그후 패잔병이 합류하자 미얀마 국군 부대는 만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국군 잔존부대는 미얀마 북부에서 세력을 계속 확대하였다. 위협을 느낀 미얀마는 인도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국군 잔존부대를 공격하였으나 악전고투 끝에 국군이 미얀마 인도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반공 구국군 사령원 리미

    무력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미얀마 정부는 UN에 제소하였다. “그들은 미제 병기를 보유하고 있다. 10년 동안의 군벌 혼전, 8년의 항일전쟁, 그리고 3년 내전을 경험한 부대이다.” 그후 UN에서 결의하여 국민당 잔존부대는 타이완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사령관인 리미는 노약자를 먼저 철수하게 하고 주력은 남겨 두었다. 노약병사 3,300여명이 타이완으로 철수하고 남은 2,500여명은 ’반공대륙‘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반공대륙은 장제스의 허울 좋은 구호일 뿐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얀마의 병사들은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중국 정부도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50년대 말 중국 정부와 미얀마 정부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졌다. 중국군이 몰래 출병하여 미얀마 국군부대를 소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출병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국군 부대는 미얀마 국경지대를 여러 해 경영하여 지역에 익숙하였다. 출병한 해방군은 지리에 어둡고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토벌에 실패하였다. 해방군은 미얀마 국군을 추격하다 중국으로 돌아갔다. 달아났던 국군은 근거지로 다시 돌아왔다.

    60년대에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들에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폭발하였다. 미얀마 공산당과 정부군 사이에도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 국군 91사단 병사들은 미얀마 정부로부터 거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미얀마 공산당과 두 번 전투를 치렀다. 싸울수록 국군 잔존부대의 남은 병사가 줄어들었다. 윈난, 태국, 미얀마 국경에 국군 잔존부대를 포함하여 몇십 개의 무장집단이 형성되었다. 미얀마 정부는 일찍부터 국군 병사들을 자신의 전력으로 포함시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국군 병사들은 자신의 조국을 버리려 하지 않았으며 미얀마 국적을 원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간 전투에 지치고 보급도 끊긴 국민당 잔존부대는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에 아편을 심기 시작했다. 셰계 최대의 아편 생산 기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와 미얀마 국경에 남은 국군 병사들은 대부분 회갑을 넘기게 되었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여러 원인으로 중국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부득이 그들은 미얀마 정부에 요청하여 체류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는 미얀마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미얀마 국경에 남아 있던 93사단 장교와 병사들은 조국이 없는 군대가 되었다. 타국에서 그들은 매년 춘절, 단오, 추석 등을 쇠고 중국의 민요를 불렀다. 그리고 중국어로 이야기하였다. 생존을 위해 부득이 미얀마 정부군과 전투를 하거나 인도 미얀마 연합군과 전투하고 범죄집단과도 전투를 벌였다.

    골든트라이앵글의 국군 잔존부대

    풍우 속에 60년 세월이 흘렀다. 현재 태국, 미얀마에 있는 국군 병사의 후예들은 이미 3대째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태국 북부 13개 ’자립마을‘이나 ’난민촌‘에 거주하고 있다. 일부분은 태국 국적을 얻었다. 현재 황금의 삼각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국군 병사 및 그 후예들의 총수는 6만명이 넘는다.

    가장 힘겨운 사람들은 1950년에 미얀마에 진입한 국민당 노병들이다. 그들은 이미 회갑을 넘었지만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들은 타이완으로 가기를 원치 않았다. 소수가 아편을 팔거나 보석을 팔아 축재를 하였으나 대부분은 가난하기 짝이 생활을 영위하였다.

    과거의 패잔병들은 의지할 데도 없고 매월 150 태국 화폐의 생활비를 받고 있다. 인민폐로 21원 4각이다. 사람들은 늘 그들이 마을의 길가에서 구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완고하게 반공을 견지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마을 안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고 있으며 벽에는 장제스 초상화를 붙이고 있다.

    그들은 공산당을 욕하고 국민당이 의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고 욕한다. 또 국민당이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욕한다. 그들의 고국과 고향에 대한 생각은 절실하다. 중화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민족정서가 농후하다.

    주의를 기울일 것은 3대째이다. 이들은 50년대와 60년대에 미얀마, 태국 등에서 태어났다. 태국 북부에서 피부가 흰 남녀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그 후예들이다. 이들은 타이어를 쓰며 중국어를 쓰기도 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중국과 미얀마, 중국과 태국인 사이의 혼혈이다. 소수의 고급 장교 자녀들은 대학에 가거나 미국에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사회의 하층에 속해 있다. 그들 중 중국어 신문사의 인쇄공이나 교열공으로 일하는 이도 있다. 어떤 사람은 점원이 되기도 하였다. 3세대의 정치색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생활을 낫게 할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년 들어 태국 정부는 국군 패잔병의 후예들에 대하여 태국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4세대나 5세대는 완전히 태국화가 될 것이다.

    태국에서 식사중인 국군

    마오쩌둥, 경제문제를 처리하다

    1949년 10월 1일 개국행사가 끝난 뒤 마오쩌둥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우리는 28년 동안 큰 일을 해냈다. 3개의 큰 산을 옮긴 것이다. 이제 시급한 문제는 해결하였고 다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다른 임무도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큰 국가를 건설하려면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1950년 6월 마오쩌둥은 중공 7차 3중전회에서 “국가 재정경제 상황의 호전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보고”를 하였다. 이때 마오쩌둥 앞에 놓인 임무는 매우 절박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국민당 잔여 군사역량을 신속히 소탕하고 전 중국을 ’해방‘해야 하였다. 경제회복에 힘써 인민생활을 개선해야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국제환경을 개선하는데 특히 소련과 우호 동맹관계를 구축해야 하였다. 마오쩌둥은 개국대전후 2,3개월동안 이와 같은 힘겨운 업무를 처리해야 하였다.

    마오쩌둥은 ’인민 민주독재를 논한다.‘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잘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전문가들에게 경제 부문을 배워야 한다. 3년 남짓한 시간에 국민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이뤄야 한다.”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난제들을 남겨 주었다. 농업생산의 감소, 교통의 장애, 물자 결핍, 물가상승, 실업자의 증가 등이 그것이다. 신생 정권은 강력한 경제적 압박에 직면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은 군사적으로 백점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는 팔십점을 받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빵점을 받을 것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양백일흑(两白一黑)만 장악한다면 공산당을 대도시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양백일흑이란 쌀과 면화, 그리고 석탄을 뜻한다. 즉 생필품을 해결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마오쩌둥은 민생 문제가 심각한 것을 보고 단안을 내렸다. 상하이를 주전장으로 삼아 투기자본이 물가를 올리는 것을 타격한 것이다. 매점과 투기 등 불법행위로 규정하여 타격하였다. 11월 25일, 중앙의 통일된 방침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식량과 면사, 석탄을 조달하여 베이징, 텐진, 상하이 등 대도시에 공급하였다. 폭등하던 물가가 일시에 하락하였다.

    마오쩌둥은 전국 정치협상회의 2차 회의에서 재정예산을 깊이 분석하였다. 그는 각 항의 재정예산 중 군사비가 가장 큰 것을 보았다. “후년에 군대를 570만명에서 350만명 혹은 250만명으로 줄이면 좋겠다. 새를 다 잡았으면 좋은 활도 필요 없다. 활을 간수하는 게 아니라 생산에 써야 한다. 3년이나 5년은 회복을 하고 10년이나 8년에는 발전을 해야 한다.” 그는 다시 지적했다. “모든 인원들은 중앙이든 지방이든 업무 외 생산에 힘써야 한다.” “인민해방군도 생산에 참가해야 한다. 임시적인 것이 아니다. 건설의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여 국가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나다

    1949년 12월 5일, 마오쩌둥은 므스크바로 향하는 전용열차에 탑승했다. 마오쩌둥 평생에서 처음 있는 출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만나 양군 간의 정치와 경제에 대하여 중요한 회담을 진행하였다.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소련 정부와 국민당 정부가 조인한 ’중소우호동맹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얄타협정의 산물이었다. 얄타협정은 미,영,소 삼국 간에 이루어졌으며 중국이 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중국의 주권과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었다.

    소련 방문 시 마오쩌둥과 스탈린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크레믈린 궁에서 회담을 가졌다. 마오가 중소조약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제기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다. 1945년 체결한 중소 우호동맹조약을 유지해야 할 것인지, 수정할 것인지 되어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조약의 근거는 얄타협정에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조약의 체결이 미국과 영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조항을 고치더라도 법률적으로 미국과 영국에게 구실을 줄 것이다. 그들은 쿠릴열도와 사할린 섬의 문제도 개정하자고 요구할 것이다.” 스탈린은 이 조항을 형식적으로 유지하고 실질적으로는 수정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였다.

    마오쩌둥이 주장했다. “우리는 대중들이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잘 생각해야 한다. 중국 사회 여론에 이런 것이 있다. 원래의 조약은 국민당 정부가 조인한 것인데 국민당 정부는 이미 무너졌다. 원래의 조약은 이미 존재할 의미를 잃었다.” 마오쩌둥은 또 소련에 차관을 달라고 희망하였다. 그리고 타이완을 ’해방‘하기 위해 해군과 공군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흔쾌하게 차관 공여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해군과 공군에 대한 원조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원조를 제공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원조형식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차 회담은 24일 진행되었다. 회담 시간은 장장 다섯 시간 반이 걸렸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였으나 스탈린은 여전히 중소조약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모스크바로 부르는 게 어떠냐고 묻자 스탈린은 “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를 부르고자 한 것은 협정의 조약 및 기술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처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는데 스탈린이 부정한 것이다. 중소조약을 개정하지 않으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날부터 스탈린은 매일 전화를 걸어 마오쩌둥의 생활을 물었다. 하지만 보러 오지는 않았다. 소련 측 통역과 전문가그룹 조장인 코바류프가 마오를 문안했다. 마오는 화가 잔뜩 나서 말했다. “당신들은 국민당과 맺은 조약을 유지하려고 한다. 좋다, 나는 수일 내로 돌아가겠다. 내 현재 임무는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 말고 없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전한 것이다.

    이때 미얀마, 인도 등이 중국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와 저우언라이에게 전보를 쳐 그 소식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라고 하였다. 스탈린을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매체들은 오랫동안 마오쩌둥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스탈린이 마오를 연금하고 있다고 추측할 정도였다.

    스탈린을 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타스통신 기자를 마오에게 보냈다. 기자가 물으면 마오가 답하기로 동의를 얻은 것이다. 방소 일정에 대하여 마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소우호동맹 조약이 가장 우선이다. 또 소련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차관을 공여하는 문제, 양국의 무역과 무역협정에 관한 문제, 그리고 기타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

    스탈린이 마침내 양보했다. 신조약으로 구조약을 대체하기로 한 것이다. 1950년 1월 2일 저녁 11시, 마오쩌둥은 상쾌한 기분으로 중공 중앙에 전보를 쳤다. “스탈린 동지는 언라이 동지가 모스크바에 오는 것에 동의했다. 새로운 중소 우호동맹조약 및 차관, 통상, 민항 등 협정에 서명할 것이다.”

    <국공내전> 연재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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