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남전역② 공산당,
    중국 대륙을 석권하다
    [국공내전-67] 해방군, 서남지역을 점령하고 국군 90만명을 섬멸하다
        2021년 03월 24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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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명장 쑹시롄, 해방군의 포로가 되다

    쑹시롄은 중일전쟁 때 상하이 방어전과 난징 방어전에 참전하였다. 1938년에 쑹시롄은 3개 사단을 이끌고 따베산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여 항일의 의기를 드높였다. 중일전쟁 말기에는 윈난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구이저우와 쓰촨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국군의 여러 항일 명장들이 갔던 길을 피하지 못하였다. 장제스의 엉터리 지휘 속에 끝내 해방군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1949년 11월 1일, 해방군이 후난성과 쓰촨성 경계에서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그러자 쑹시롄은 부대를 급히 뒤로 물려 우장(烏江)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는 휘하 14병단으로 펑수이와 우링선에 제2방어선을 쳤다. 11월 14일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충칭으로 날아왔다. 다음날 쑹시롄은 장제스의 전보를 받았다. “오늘 구이양이 떨어졌다. 전방의 지휘관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구나. 이 밥통들이 당국의 사업을 망쳐 버렸다.” 장제스는 친필 편지를 써서 아들인 장징궈에게 들려 쑹시롄에게 보냈다.

    장제스는 중요한 시기에 곧잘 편지를 써서 지휘관들에게 전하는 일이 많았다. 장제스의 편지를 받은 쑹시롄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즉시 부대를 바이마산(白馬山)으로 옮겨 해방군의 공세를 막으려고 하였다. 바이마산은 충칭 방어의 동대문이라 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장제스는 난촨 지역에 있던 뤄광원의 15병단까지 이동시켜 바이마산을 고수하게 하였다. 장제스는 쑹시롄과 뤄광원의 부대로 해방군과 결전하여 자신이 마지막 거점으로 선택한 충칭을 지킬 생각이었다.

    11월 22일 새벽, 해방군이 바이마산에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3일간 국공간에 시산혈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병력과 사기에서 압도당한 국군의 참패였다. 해방군은 이 전투에서 국군 사살 3만여명, 포로 1만 2천명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국군은 섬멸적 타격을 입고 충칭 부근 난촨으로 후퇴하였다.

    그날 저녁 쑹시롄은 휘하 지휘관들을 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오늘 우리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졌다. 뒤에는 수십만명의 공산군이 추격하고 바로 앞에는 충칭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부하 지휘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 모양으로 패하였는데 무슨 낯으로 충칭에 가겠습니까? 서남을 지키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총재는 때가 되면 비행기를 타고 떠날 것입니다. 우리도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공산군에 투항이라도 하자는 말이오?” 투항이라는 말이 나오자 122군단장 딩수중(丁樹中)이 견결하게 반대하였다. “그건 안될 말이오, 공산군에게 속을 셈이오? 지금은 죽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알겠소?” 그는 과거에 많은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살해한 경력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산당이 자신을 용납할 것 같지 않았다. 몇 사람이 입을 열어 의견을 내었으나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그래도 결정은 해야 했다. “삼십육계밖에 없소. 퇴각합시다.” 충칭을 버려두고 남쪽으로 퇴각하는 것이 그날 회의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쑹시롄이 세 가지 안을 내었다. 시창(西昌)으로 바로 후퇴하는 안과 버마 국경으로 가는 안, 그리고 어메이산(峨眉山) 서쪽으로 가서 시창을 거쳐 윈난으로 가는 안이었다. 그들은 인마를 나누어 세 갈래로 각각 후퇴하기로 하였다. 대병이 움직이면 속도가 늦어지고 해방군이 추격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후퇴를 시작한 쑹시롄 부대의 병력이 쓰촨 남부의 험준한 산으로 들어가자 무전이 끊겼다.

    장제스는 쑹시롄을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목표를 잃은 해방군도 쑹의 부대를 추적하였다. 1949년 12월 11일,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마침내 목표물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그 무렵 해방군 18군은 구이저우에서 쓰촨 남부의 요충지인 이빈(宜賓)에 접근하고 있었다. 마침 이빈을 수비하던 국군 72군단장 궈루구이가 기의했다. 궈루구이는 화이하이 전역 때만 하여도 국민정부 국방부 작전청장으로 작전을 입안하던 요인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국군 안에 심은 오래된 첩자로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음날 18군은 쑹시롄이 6일 전에 이빈에서 민장(岷江)을 도하하여 서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충칭에 입성 행진하는 해방군

    그때는 해방군이 이미 충칭을 점령한 후였다. 충칭에 있던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이 소식을 듣고 마주보고 웃었다. 덩샤오핑이 한마디했다. “중이 달아나 봐야 절간에 있겠지. 뛰어봤자 벼룩이오.” 덩은 한마디 더했다. “조만간 우리 손바닥 안에서 무릎을 꿇을 거요.” 류보청이 수하를 불러 명령하였다. “52사단은 즉시 추격에 나서라. 쑹시롄을 산 채로 잡으라고 전하라.”

    12월 6일, 해질 무렵 쑹시롄과 병사들은 이빈 동쪽 뉴시창(牛喜場)에 도착하여 쉬고 있었다. 한밤중에 경호병이 쑹에게 달려와 급보를 알렸다. “이빈을 수비하던 궈루구이 부대가 1개 연대를 출동시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행동이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궈루구이가 한밤중에 병력을 보냈다고? 총재가 우리를 해치우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병력을 즉시 출발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궈루구이가 기의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궈루구이는 기의하는 김에 쑹시롄을 잡아 전리품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12월 8일, 쑹시롄은 비로소 궉루구이가 공산당에 투항한 것을 알았다. 크게 낙심한 쑹시롄은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병사들을 부서진 사당에 집합시킨 뒤 마지막 훈화를 하였다. “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 처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지난 싸움에서 우리는 완전히 패배하였다. 우리의 앞날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대설산(大雪山)을 넘어 머나먼 곳으로 가려고 한다. 나를 따라 어려움을 함께 할 사람은 같이 가자..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가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헤어져 각자 살 길을 찾으라.” 병사들이 울기 시작하자 쑹시롄도 눈물을 흘렸다.

    12월 14일, 쑹시롄을 추격하던 해방군 1개 대대가 낙오한 쑹의 참모 한 사람을 잡았다. 심문하니 불과 5킬로미터 거리에 쑹의 부대가 있다고 하였다. 해방군 대대는 밥을 먹다 말고 무기를 챙겨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쑹시롄은 이미 두 시간 전에 떠나고 없었다.

    쑹시롄, 따두허(大渡河)에서 자살을 기도하다

    12월 15일 오전 해방군 155연대가 칭수이시(清水溪)에서 쑹시롄의 후위 부대를 포착했다. 한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후위 부대는 모두 섬멸되었다. 쑹시롄은 경호 소대와 함께 도주하였다. 그후 며칠 동안 해방군 1개 연대와 경호 소대간에 추격전이 벌어졌다.

    12월 19일 오전, 쑹시롄 일행은 어볜현(峨邊縣)의 따두허옆 샤핑진(沙坪鎭: 진은 우리의 면에 해당한다) 에 이르렀다. 본래 샤핑진은 쑹시롄이 부대를 나누어 후퇴할 때 합류 지점으로 정한 곳이었다. 그중 한 부대는 쑹이 도착하기 6시간 전에 도착하여 있었다. 나머지 부대는 12월 15일 해방군에 포위되어 섬멸당하였다. 다행히 쑹시롄 병단의 보급대장이 몇십량의 트럭과 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쑹시롄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해방군 2야전군 16군이 어볜에 도달하여 1개 연대에 출동을 명령하였다.

    공격해온 해방군과 국군이 조우하여 잠깐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새로 합류한 보급부대 병력 천여명이 먼저 섬멸되었다. 줄기차게 추격하느라 독이 오른 해방군은 곧바로 쑹시롄 부대 지휘부를 급습하였다. 경호 소대가 순식간에 섬멸당하고 쑹시롄은 고립무원으로 첩첩히 포위되고 말았다. 쑹시롄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권총을 빼어 들었다. 포로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깨끗이 자결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경호 소대장이 그의 팔을 잡아 막는 바람에 둘 다 포로가 되었다.

    다음날, 쑹시롄은 어볜현에 있는 해방군 155연대 지휘소로 압송되었다. 쑹은 연대장인 인파탕(陰法唐)을 보고 물었다. “당신이 군단장인가?” “아니다.” “그럼 사단장인가?” “아니다.” 인파탕은 덤덤히 웃더니 대답하였다. “나는 18군 52사단 155연대장이다. 8일 동안 당신을 추격했다.” 잠시 후 인파탕이 덧붙였다. “추격한 병력이 800명뿐이다.” 쑹시렌은 의자에 앉은 채 길게 탄식하였다.

    14병단 사령관 쑹시롄이 따두허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부사령관이던 종빈은 1949년 11월에 이미 포로가 되었다. 그는 12월 말에 베이징에 압송될 때 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다른 부사령관 천커페이는 1949년 12월 24일 쓰촨에서 기의했다. 그는 해방군 50군 부군단장에 임명되었다가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포로가 된 쑹시롄은 전범관리소에서 10년간 복역했다. 그는 1959년 1차 석방 때 풀려나 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위에 쓴 포로 관련 기록은 그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쓰촨 군정인사, 대거 기의하다

    해방군은 군사적 공격과 함께 정치공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적극적으로 기의 공작을 펼쳤다. 11월 21일, 그들은 서남의 ‘국민당 군정 인사들에 대한 4가지 충고’를 제기하였다. “저항을 중지하고 광명을 찾을 것, 자신을 개조하고 공을 세워 속죄할 것, 정책적 경계를 분명히 규정할 것, 기의하거나 투항한 부대에 대하여는 잠시 개편을 중단하고 무기를 회수하지 않을 것이니 지정된 장소에 모여 처리를 기다릴 것” 등이었다.

    쓰촨기의의 주역 3인

    12월 9일, 국민정부 윈난성 정부 주석 겸 윈난 수정공서 주임인 루한(盧漢)과 국민정부 시캉성 주석 류원후이(劉文辉)가 기의를 선언했다. 또 국민정부 서남 군정장관 공서 부장관인 덩시후(鄧锡侯), 판원화(潘文華) 등이 윈난의 쿤밍, 시캉의 야안(雅安), 쓰촨의 펑현(彭縣)에서 전문으로 기의를 선언하였다. 그중 류원후이의 기의는 대세에 밀려서 선언한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류원후이는 일찍부터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쓰촨의 군벌 중 비교적 진보적인 인사로 중국 민주동맹이 설립될 때 자금을 보낸 일이 있었다. 자신은 1944년 9월 민주동맹에 가입하였다. 그후 류원후이는 저우언라이와 예젠잉 등 공산당 인사들과 연결되었다.

    1949년 8월, 류원후이는 저우언라이에게 기의 준비에 관한 보고를 하고 지침을 달라고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전문으로 지침을 보내왔다. “대군이 곧 서쪽으로 향할 것이다. 적극 준비하여 기회를 엿보라. 너무 빠르면 손실이 크니 조기 행동을 삼가라.”

    마침내 중공 남방국이 회담을 하자고 요청하자 류원후이는 민주동맹 중앙위원인 쩡슈판(曾庶凡)을 전권대표로 보냈다. 쩡슈판은 홍콩에서 공산당 남방국 요원과 류원후이 등의 기의문제를 상의했다. 류원후이는 또 참모장을 덩시후에게 보내 쓰촨과 캉지역에서 함께 기의하자고 제의했다.

    청두에서 마지막 군사회의를 주재하는 장제스

    1949년 11월 30일, 해방군이 충칭을 점령한 뒤 장제스가 청두에 왔다. 장제스는 절박하였다. 충칭을 빼앗긴 후 청두는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장제스는 쓰촨의 지휘관인 장췬과 류원후이, 덩시후를 불러 격려했다. 다음날 장제스가 류원후이를 다시 찾아 그의 태도를 살폈지만 류원후이는 침착하게 응대하였다. 의심을 풀지 못한 장제스는 후쫑난과 장췬을 류원후이의 공관에 보내 덩시후와 함께 만나게 하였다. 장제스는 후와 장을 통해 기관을 통합하여 업무를 볼 것과 가족들을 타이완으로 보내고 해방군과 싸우라고 요구하였다. 가족들을 인질로 삼겠다는 의사였다. 류원후이와 덩시후는 중앙군이 자신들을 배제해 온 것에 대하여 크게 화를 내며 불평하였다. 장제스의 지시에 어물쩍 불응하려는 것이었다. 후쫑난이 떠나지 않고 계속 설득하려 하자 류원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왜 믿지 못하는 거요? 무산계급 혁명을 하는 공산당이 나를 용납하겠소?” 이 말에 후쫑난과 장췬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는 다시 류원후이와 덩시후에게 청두의 북 연병장에서 보자고 연락하였다. 류원후이와 덩시후가 보기에 자신들을 체포하려는 수작이었다.

    12월 8일, 류원후이와 덩시후 그리고 판원화가 두장옌(都江堰: 도강언. 진나라 이빙(李氷) 부자가 주도하여 쓰촨성에 건설한 수리를 위한 보. 쓰촨성 두장옌시에 위치해 있다.)에서 만났다. 그들은 마오쩌둥과 주더에게 전문으로 기의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류원후이, 덩시후, 판원화 및 휘하 부대는 즉시 국민당 반동파와 관계를 끊고 중앙 인민정부 및 마오 주석, 주 총사령에게 성의를 다해 복종할 것입니다.”

    류원후이와 덩시후의 기의로 공산당은 쓰촨성과 캉지역 입성에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되었다. 12월 10일, 윈난과 쓰촨의 군벌들이 잇따라 기의를 선언하자 장제스는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장제스는 아들인 장징궈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 타이완으로 갔다.

    청두에서 국군부대의 기의가 잇따랐다.

    국군 기의를 알리는 인민일보

    후쫑난 집단군, 완전히 무너지다

    12월 11일, 제2야전군 3병단과 5병단은 쓰촨 동부와 쓰촨 남부에서 서진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 해방군은 쑤이닝(遂寧), 메이산(眉山), 단링(丹陵), 총라이(邛崃), 따이(大邑) 선에 진출하여 국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와 함께 18병단은 친링 지역에서 후쫑난 부대를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다.

    장제스가 해방군의 대우회 작전을 깨달은 후, 후쫑난은 부대를 이끌고 청두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그러자 후쫑난 집단군을 양공하며 잡아두던 1야전군 허룽 부대가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해방군 18병단은 허룽, 저우스디(周士第)의 지휘 아래 후쫑난 부대를 추격하였다. 허룽 병단은 1949년 12월 3일부터 세 갈래 길로 밤낮없이 후쫑난 부대를 맹추격했다. 해방군 추격부대는 12월 27일 장유(江油), 몐양(綿陽), 바중(巴中)에 도달했다. 청두와 주변 지역에 집결했던 후쫑난 집단군 수십만명은 완전히 포위상태에 빠졌다.

    허룽 휘하 18병단 병사들이 청두방향으로 진군하고 있다.

    후쫑난은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장제스는 구쭈통과 후쫑난에게, 구쭈통은 후쫑난에게 서남지역을 사수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들은 피신한 셈이 되었다. 후쫑난에게 20만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해방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은 바위에 계란치기나 마찬가지였다. 해방군 3개 야전군 병력이 협공하는데다 사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12월 20일, 후쫑난은 군정장관 공서를 쓰촨성 서남부의 시창(西昌)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말이 좋아 이동이지 쓰촨에 있던 자신의 20만 대군을 버려둔 피신이었다. 겹겹이 둘러싼 해방군의 포위를 뚫고 어떻게 20만 대군을 시창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12월 23일, 공황에 빠진 후쫑난은 은밀히 비행기로 하이난섬 싼야(三亞)로 날아갔다. 사실상 혼자 피신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지휘하던 후쫑난마저 사실상 피신하자 남은 지휘관들은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졌다. 쓰촨에 남아있던 후쫑난 집단군 3개 병단은 전부 전장 기의를 선언하였다. 표현하기를 기의라고 하였지만 마지못해 선택한 투항이었다.

    12월 26일부터 인민해방군의 군사적 압력 속에서 포위된 국군이 차례로 기의를 선언했다. 국군 제7, 15, 16, 20병단이 기의를 선언 해방군에 투항했다. 국군 제5병단은 시창(西昌)으로 탈출했으나 일부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총라이, 따이에서 해방군에 포착되어 섬멸당했다. 12월 27일, 국군 제18병단이 청두 동쪽 지역에서 기의를 선언했다. 그날 인민해방군은 청두를 점령하여 서남전역이 끝이 났다. 티베트를 제외한 중국 전 대륙을 공산당이 석권한 것이다.

    서남전역은 모두 57일이 걸렸다. 인민해방군은 쓰촨, 캉지역, 윈난, 구이저우를 모두 점령하고 후난, 후베이, 섬서, 간쑤 등에 위치한 마지막 50개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 전역은 전략적 결정과 과정이 잘 부합된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인민해방군은 대우회와 대포위 전략을 구사하였다. 기공과 정공을 병용하여 주공부대가 광시 전역의 엄호속에 신속하게 행동하였다. 일거에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였으며 쓰촨과 섬서에 위치한 허룽의 18병단이 교묘하게 양공작전을 구사하였다.

    국군은 해방군의 주공방향을 쓰촨 북부로 오인하여 후쫑난 집단군이 친링지역에 묶이게 되었다. 주공부대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퇴각하는 국군을 강력하게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작전 중 해방군은 강력한 군사적 공격과 유효한 정치공세를 결합하여 전역의 진전을 가속화하였다. 이 전역은 중국 전쟁사에서 가장 많은 적을 섬멸한 작전이 되었다. 인민해방군은 국군 10개 병단 49개군, 133개 사단 총 93만명을 섬멸하였다. 그중 국군 정규군과 지방 보안부대가 70여만명, 지방부대가 20만명을 넘는다. 구체적으로는 포로가 196,100명, 전상자가 8,830명, 기의가 401,660명, 투항이 95,640명이다. 해방군은 서남지역 여러성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장제스가 꾀했던 서남지역을 기반으로 권토중래하려던 계획을 파탄내었다.

    12월 31일, 마오쩌둥은 “전선의 장사들과 전국 동포들에게 드리는 신년 축하인사”를 발표했다. 그는 글에서 1950년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타이완과 하이난섬을 해방하고 장제스 비적의 마지막 잔당을 섬멸하여 통일 중국의 사업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서 미제국주의 침략세력이 우리 영토에 다시는 발을 딛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오는 또 “이제 차츰 평화건설로 전환해야 하며 전쟁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전후의 재정경제 곤란을 극복하고 공업생산과 교통사업을 회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1950년 원단, 청두 전역이 끝난 지 5일째 되는 날 류보청은 충칭에서 열린 서남해방 경축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쓰촨성에 입성한 뒤 처음으로 긴 연설을 하였다. 류보청은 서남 전체 부대에게 호소하였다. “간고하고 막중한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기의하거나 투항, 포로가 된 부대가 90만명이다. 우리는 시급히 이들을 개조해야 한다. 7,000만명의 군중들을 대상으로 토지개혁을 내년 봄까지 완성해야 한다. 비적과 국민당 특무를 소탕해야 하며 치안 확립과 곡물 수집 업무를 시급히 해야 한다. 이 모두 군대가 참가하여 완성해야 한다. 우리는 장제스 집단을 패배시킨 후 철저하게 봉건제도를 소멸해야 한다. 이런 전략적 임무가 우리들의 일정에 놓여 있다.”

    청두를 점령하여 해방군은 사실상 중국 대륙을 석권하였다. 공산당이 아직 평정하지 않은 지역은 티베트, 하이난다오 등 푸젠성 연안도서, 시창으로 탈출한 후쫑난 부대 일부, 광시성과 윈난의 국경지대 등에 흩어진 국군 패잔병 등이었다. 하지만 대륙을 놓고 다툰 전쟁은 이미 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된 셈이었다. 공산당에게는 광대한 땅에서 펼쳐진 내전의 뒷정리가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국군의 마지막 주력부대 후쫑난 집단군 시창에서 섬멸되다

    1949년 12월 7일, 장제스는 행정원을 타이완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서남 군정공서를 시창(西昌)에 설치하고 구쭈통을 서남 군정장관으로, 후쫑난을 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시창이 대륙에서 국군의 마지막 저항거점이 된 셈이었다. 1949년 12월 28일, 후쫑난이 하이난다오에서 시창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이난다오로 도주했다가 구쭈통이 설득하자 마지못해 되돌아온 것이다. 시창에는 시창성 경비사령관 허궈광(賀國光)과 쓰촨에서 퇴각한 국군 27, 56, 2, 124군등 잔여부대, 시창 경비사령부 소속 1개 사단등 소수의 병력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시창을 중심으로 하여 유격 근거지를 세우는 것이었다.

    시창은 쓰촨성 서남부에 있는 작은 도시로 지금은 량산(凉山) 이족(彝族)자치주의 행정 중심지이다. 남쪽으로는 윈난성과 경계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구이저우성에 닿아있었다.

    구쭈통은 본래 시창에서 윈난성을 기반으로 삼아 계속 저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류원후이, 덩시후, 루한 등이 기의하는 바람에 마지막 등불마저 꺼져버렸다. 후쫑난이 돌아왔을 때 청두에서 퇴각한 병력은 겨우 1개 연대였다. 나머지는 대부부 쓰촨에서 기의하여 공산당에 투항했으며 일부는 퇴각 도중에 섬멸되었다. 후쫑난의 부대는 시창 남쪽에 있는 호수 총하이(邛海)의 신춘(新村)마을에 주둔하였다. 그곳은 본래 장제스의 시창 행원(행원은 이동지휘부 같은 군정기관이다) 이 있던 곳이었다.

    후쫑난은 시창에 도착하자 각지에서 탈출해온 패잔병과 지방부대들을 규합하였다. 병력을 끌어모아 7개 종대로 편성했는데 합하니 3만명에 이르렀다. 그는 시창 방어계획을 수립하여 장제스에게 보고하였다. 장제스는 쓰촨에서 퇴각한 후쫑난에게 큰 불만을 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장제스는 곧 후쫑난에게 전문을 보내 짧은 시간에 부대를 재편한 노력을 칭찬했다. “부대를 다시 편성한 공이 있다. 그대로 실행하라. 시창을 3개월은 고수해야 한다. 국제형세가 변화할 것이다. 쓰촨 각지에서 퇴각하는 부대를 수습하여 재편하면 서남을 보위할 수 있을 것이다.” 후쫑난은 어떻게든 장제스가 지시한 3개월은 고수할 생각이었다. 쓰촨에서 퇴각하며 잃은 장제스의 신임을 회복해야 하였다. 하지만 해방군은 국군 주력 모두를 섬멸하여 한숨 돌리고 있었다. 시창에 주둔한 후쫑난 부대 정도는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해치울 수 있었다. 후쫑난 부대는 해방군이 방치하는 바람에 3개월 가까이 시창에서 자리를 잡았다.

    1950년 3월 7일, 시창에 두 사람이 찾아 왔다. 국군 참모총장 겸 서남 군정정관 구쭈통과 장제스의 큰아들 장징궈였다. 두 사람의 시창 방문은 극비사항이어서 후쫑난과 몇 사람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후쫑난은 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국군이 대륙에서 개최한 마지막 회의가 되었다. 회의는 일주일간 이어졌는데 내린 결론이 “윈난성 서부에 근거지를 준비한다. 시창을 고수하고 서남부를 보위한다. 부득이할 때는 윈난과 버마 국경지대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장제스는 버마 국경지대로 후퇴하자는 쑹시롄과 후쫑난의 진언을 물리쳤다. 이제 서남부에 남은 마지막 병력 150만명을 다 잃은 뒤에 버마국경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운 셈이 되었다.

    회의 일주일 째 참석자들은 두 통의 전문을 받았다. 한 통은 인근 한위안(漢源)을 수비하던 부하가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후이리(會理)를 수비하던 부하의 것이었다. 후쫑난이 곁에 있던 참모장을 시켜 좌중앞에서 읽게 하였다. “적이 이미 한위안을 맹공하여 빼앗겼습니다.” 참모장이 다시 다른 전문을 읽었다. “적이 이미 진사장(金沙江)을 도하하여 후이리를 맹공하고 있습니다. 후이리를 포기하고 윈난 서부로 이동할까 합니다.” 회의 참석자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러자 후쫑난이 한마디 했다.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벌써 했겠지. 지금은 아마 달아나고 있을 것이다.” 후쫑난은 마음이 급해졌다. 전문의 내용대로면 적이 이미 시창에 접근하고 있을 것이다. 비행장을 점령당하면 자신도 포로가 되는 길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구쭈통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이날 회의 결론이 정해졌다. “여전히 시창을 고수한다. 형세가 여의치 않으면 민활하게 처리하되 윈난 서부로 퇴각하거나 시짱(西藏:티베트)으로 이동한다. 후쫑난이 상황에 따라 결정하도록 한다.” 결국 일주일간 회의한 결론이 고수하거나 후퇴한다는 것이니 하나마나한 회의가 되었다. 산회를 선포하고 마음이 급한 구쭈통은 장징궈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하이난다오로 떠났다.

    원안 표시 지역은 왼쪽부터 청두 이빈 충칭 창사 우한. 별도 표시한 곳이 시창(량산 이족자치주)

    해방군, 국군의 마지막 거점 시창을 함락하다

    1950년 3월 12일, 마침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은 시창 공격에 서남군구와 2야전군 14, 15, 62군 일부등 모두 13개 연대 병력을 동원하였다. 3월 20일 길을 나누어 북진한 공격군은 진사장을 건넜다. 그들은 시창에서 퇴각하던 국군 124군 잔여부대를 섬멸하였다. 제62군의 남은 일부는 3월 17일 야안(雅安)에서 서진하여 루딩(瀘定)과 캉딩(康定)을 점령하고 국군 127군을 섬멸했다.

    3월 26일, 해방군 62군과 15군이 시창에 접근하였다. 두 부대는 시창을 남북으로 협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3월 27일, 후쫑난과 허궈광은 비행기를 타고 시창을 탈출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수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국군 27군과 56군이 시창 북쪽으로 퇴각했으나 해방군의 포위망에 갇혀 1949년 4월 5일 모두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서남 군정공서 부장관과 쓰촨 1로 유격 총지휘 탕스준(唐式遵) 상장이 전사하였다. 이 전역에서 국민당군 1만여명이 섬멸되었다. 공산당은 시창 등 18개 현성을 점령하였다. 시창에 남은 후쫑난 집단군이 섬멸되어 대륙에서 국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끝이 났다. 1946년 내전이 시작된 이래 5년만의 일이었다.

    <국공내전>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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