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봉화척곡교회,
    민족독립의 선구적 의지
    [그림 한국교회] 1909년 건립 역사
        2021년 03월 15일 11:3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에 뜻깊은 순례를 하였습니다.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고초를 겪은 봉화척곡교회를 가기 위해 3월 4일, 청량리역에서 풍기행 기차를 탔습니다. 객석은 텅텅 비어서 외진 지역으로 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이문동교회에서 고등부 전도사로 섬길 때 부목사로서 많이 도와주신 최갑도 목사님(풍기 성내교회 원로)과 이번 순례를 기획한 교회사학자 임희국 교수님(장신대 은퇴교수)을 만나 우선 천주교 우곡성지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안광덕 목사님(봉화 반야교회) 부부가 우곡성지를 안내해주었습니다. 유학자 홍유한은 우리나라 첫 천주교인으로 기림을 받고 있습니다.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실의>와 <칠극>에 감동받아 스스로 주일을 정하여 지키며 천주교인으로 살았던 농은의 묘지와 순교한 그 후손 13명의 가묘가 있었습니다. 뒷산 묘지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15처 표지석’들을 살펴보며 그의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척곡교회의 명동서숙 앞에서 작년에 부임한 박영순 목사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한옥 예배당으로 들어가니 김영성 장로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립자 김종숙 목사의 손자인 장로님은 사라질 뻔한 척곡교회를 되살린 분입니다. 연세가 96세인데 잠시 기도회를 가질 때 악보도 없이 피아노 반주를 하셨고, 척곡교회 역사를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봉화척곡교회문헌사료집”(2013년 발간)에 손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글씨를 적어 우리에게 선사하셨습니다.

    김 장로님은 2003년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명동서숙 교장이셨던 선친의 유언에 따라, 교장으로 은퇴한 후 미국에서 잘 지내던 중 80세를 바라볼 나이에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척곡마을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고, 명동서숙에서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 많은 기록을 하고 자료를 챙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경북도청, 봉화군청, 영주노회 등에 수시로 찾아가 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이 문화재로 인정받도록 했으니 감추어진 한국교회의 보물들을 발굴한 것입니다.

    척곡교회는 대한제국 탁지부(오늘의 기획재정부)의 관리였던 김종숙(1872~1956)이 관직을 내던지고 처가의 고향에 내려와 세운 한국인 토착교회입니다.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줄기 사이에 있는 오지 산골입니다. 김종숙은 서울에서 관료 생활을 할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야소교(예수교)를 및어야 조국을 개명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봉화군으로 낙향해 전도사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김종숙은 1919년에 장로가 되었고, 해방 후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배당에 앞서 1907년, 사설 교육기관인 명동서숙 건물부터 지었습니다. 규암 김약연 선생이 북간도에 세운 명동서숙과 명칭이 같습니다. 봉화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북간도로 전달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일부러 같은 이름을 썼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산골까지 배우고자 찾아온 청년들이 꽤 많았으며 한 칸은 여학생 기숙사였다고 합니다. 명동서숙은 정식 학교가 되지 못한 채 운영되다가 1943년 폐교되었습니다.

    척곡교회는 설립부터 독립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김종숙의 처남 석태산은 봉화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었으며, 그와 정용선, 김명림 등 독립투사들은 척곡교회를 중요한 회합장소이자 만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경상북도 일대의 주재소를 습격하고, 친일 부자들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한 다음 김종욱을 통해 만주에 보냈습니다. 그래서 척곡교회는 처음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지만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김종숙은 1920년대에 일경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해방 직전에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고, 봉화 의병장 석태산은 소백산에서 잡혀 현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림=이근복

    척곡교회 예배당은 190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지역의 부자 최재구가 땅을 내놓았고 김종숙의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예배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15평 정도) 미음(ㅁ)자 기와집으로 세워졌다. 초창기 한국교회가 기역 자 또는 한 일 자(一) 초가집이었던 점에 비추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습니다. 출입문은 왼쪽과 오른쪽에 작은 솟을대문처럼 지어졌는데 남녀 출입구를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뒷산으로 연결된 뒷문은 예배 인도자가 드나드는 문이자 독립운동가들이 발각될 경우 피신시키기 위한 용도였다고 합니다. 1921년 5월, 안대선(Wallis J. Anderson)선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면려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공경과 섬김을 받으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귀한 먹거리를 주시니, 때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敬事天父 賜我食物 每番不忘 阿們).”

    척곡교회에서 드리는 이 식사기도문은 중국 용정의 명동교회와 명동서숙의 식기도와 같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식기도 소고”(월간 가정예배 1994년 7월호 칼럼)에서 김영성 장로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에서의 식기도 때에는 굶주리는 북한동포의 밥 한 그릇을 위하여, 더 시간이 있을 때의 식기도에는 굶주리는 세계의 인류를 생각하며 진정한 감사의 식기도를 드리기를 부탁한다.”(봉화척곡교회문헌사료집 427쪽)

    독립운동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척곡교회는 온갖 핍박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에 역사적 가치와 교회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명동서숙과 함께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 5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07년부터 1955년까지의 세례인 명부, 1921년의 면려회 회록 등입니다. 이 밖에도 1910년대~1930년대에 간행된 서적들이 있습니다. 2009년 7월 예장통합 총회는 척곡교회를 한국기독교사적 제3호로 지정하는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2019년 5월 17일, 창립 112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드리고 교회당 복원 헌당식을 가졌습니다. 110년 만에 담장과 솟을대문도 복원하면서 일본군 접근을 감시하려고 뚫은 담장구멍도 재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2020년 5월 18일에는 제6대 박영순 담임목사 취임축하예배로 오랜만에 활기를 띄었습니다. 최갑도 목사님은 이 취임식에서 “약한 자 위해 헌신한 예수님을 닮아 지역사회를 섬겨가길”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큰 봉화척곡교회지만 몇 년 동안 담임목사 없이 어려움을 겪었고, 잠시 부임했던 목사와 성도들이 갈등으로 예배를 따로 드리며 법적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상담학 전공인 박영순 목사와 10여 명의 교우들, 그리고 15명의 교회학교 학생들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산골교회에 15여명의 학생들이 출석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15여명의 학생들의 부모님이 비신자라는 점이랍니다.

    퐁기를 떠나기 전, 커피샵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에 많은 도움을 주신 최갑도 목사님과 임희국 교수님이 이 지역의 교회들의 오랜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로 한다니 기대가 큽니다. 봉화척곡교회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 경북 봉화를 새롭게 밝히는 믿음과 삶의 터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을 품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필자소개
    이근복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