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과 전쟁 트로피'
    커터 칼로 옛 사진을 발굴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 마치며···'컬렉터의 서재'로 다시
        2021년 03월 15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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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 없는 세상을 누리고 있다.
    (Only the dead have seen the end of war)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전쟁은 자연의 본성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인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인간은 평화를 추구하는 만큼 전쟁으로 치달았고, 한없이 관용을 베풀고 이타적이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남들을 배척하고 잔인하게 말살하였다. 테렌스 맥릭(Terrence Malick) 감독의 영화 <더 씬 레드라인(The Thin Redline)>에 나오는 다음 독백은 그래서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

    빛과 어둠, 사랑과 증오 서로 달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Light and dark, love and hate look diffent but….. Wasn’t there one source?)

    이번 글은 두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전쟁 이야기다. 흔히 옛 사진들은 앞뒷면에 관련된 정보가 적혀 있지 않으면 제3자가 그 사진의 내용과 맥락을 알기 어렵다. 이럴 경우 사진 속에 우연히 담긴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구호나 물건을 통해 끙끙대면서 사진을 해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사진에 날짜와 장소를 포함하여 여러 정보들을 써 놓았다면 사진과 무관한 이들도 그 사진의 내용을 보다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정보들을 기록학에서는 ‘메타데이터(metadata)’라고 한다. 사진에 적어 놓은 메타데이터는 우리가 사진 속의 시대와 접속할 수 있는 일종의 패스워드인 셈이다.

    적의 철모를 쓰고

    몇 년 전 나는 한국전쟁 때의 낡은 사진 두 장을 수집하였다. 두 사진은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데 사진들은 사이좋게 서로 정보를 보완해 주고 있다. 한 장의 사진만 있었다면 몰랐을 내용들이 다른 사진에 담겨 있었다. 두 사진은 편의상 <사진1>, <사진2>로 지칭한다. <사진1>에는 한 명의 군인이, <사진2>에는 두 명의 군인이 찍혀있는데, 세 명은 모두 다른 인물들로 서로 겹치지 않는다. <사진1>은 가로 5cm, 세로 6.5cm의 작은 크기이고, <사진2>는 가로 6.5cm, 세로 9cm로 <사진1>보다 대략 2배 정도 크기다.

    먼저 <사진1>.

    한 군인이 장교 복장으로 보이는 군복에 철모를 쓰고 앉은 자세로 사진을 찍었는데, 오른쪽 손에는 M1 소총을 쥐고 있다. 소총에는 무운장구의 염원이 가득 적힌 낡은 태극기가 달려있다. 왼쪽 허리춤에는 와플 모양의 표면을 가진 수류탄도 하나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이 사진의 주인공이 누군지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

    [사진] <사진1>의 앞면과 뒷면 (박건호 소장)

    사진 뒷면을 보자. 여기에는 펜으로 ‘화랑 보병 제11사단 제13연대 제3대대 장교계 시대’라고 한글과 한자를 섞어 써 놓았다. 이를 통해 사진 속 인물이 화랑부대 소속의 장교였음을 알 수 있다. 소속 부대를 기록한 부분 왼편 위에는 ‘邑 駐屯 記念(읍 주둔 기념)’이라고 써 놓았다. 큰 도시가 아니라 읍 단위의 소규모 지역을 점령하고 찍었음을 밝혀 놓았지만,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읍 주둔 기념’ 밑에는 희미하게 시간 정보가 적혀 있다. 자세히 봐야 보이는데 ‘4283. 11.22’이다. 이를 통해 이 사진이 한국전쟁 발발 후 5개월 뒤인 1950년 11월 22일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늦가을로 곧 추운 겨울이 시작될 즈음이다. 사진 속 군인들이 입은 두꺼운 외투가 11월 말의 한기를 증언해주고 있다. 사진 앞면의 인물 왼팔 어깨에 붙어있는 사단 마크는 반사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화랑부대 마크일 것이다. 지금 현재 11사단 마크는 푸른색의 방패 위에 ‘11’을 상징하는 두 개의 흰색 사선을 넣어 형상화한 것인데, 이 방패 마크는 1951년 9월 2대 사단장 오덕준 준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10개월 전에 찍은 <사진1>의 사단 마크는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렇게 앞면만 보았을 때는 몰랐을 내용들이 뒷면에 담겨 있는 메타데이터를 통해 훨씬 많은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여기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이제 <사진2>를 보자.

    이 사진은 <사진1>과 함께 수집된 것으로 사진의 낡은 상태, 구도와 내용 그리고 ‘태극기가 걸린 소총’과 ‘철모’라는 동일한 오브제가 등장하는 점 등을 보았을 때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여기에는 두 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찍었는데, <사진1>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앉아 있는 왼쪽 인물의 복장은 <사진1>의 인물과 흡사한데 다만 그가 든 소총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지 않다. 서 있는 자세로 사진을 찍은 오른쪽 인물이 철모를 쓴 점은 <사진1>의 인물과 동일하지만, 입은 옷은 나머지 두 명과 다소 다르다. 그들과 계급이 다를 수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오른쪽 인물이 든 소총에도 태극기가 걸려있는데, 자세히 보면 태극기에 적힌 글자 중 몇몇은 읽을 수 있다. 태극 문양 둘레에 쓰인 글씨로 ‘必勝(필승)’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또한 ‘38선’이라는 글자도 보이는데, 아마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통일 이루자’는 내용일 것이다. ‘너와 나’로 시작하는 글도 적혀 있는데, 여기 이어지는 말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너와 나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자’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 인물은 무용을 과시하듯 탄띠를 X자로 둘러메고 있고, 연하게 색이 들어간 안경도 쓰고 있다. 군복 왼쪽 어깨에 붙어있는 화랑부대 마크 역시 <사진1>처럼 빛 반사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사진2>의 앞면. 사진 왼쪽에 세로로 ‘적의 철모를 쓰고’라는 글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고맙게도 이 사진에는 <사진1>이 말해주지 않는 정보들이 담겨있다. 먼저 사진 앞면 왼쪽 아래에 세로로 “敵(적)의 鐵帽(철모)를 쓰고, 00 占領 記念(점령 기념)”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 글은 사진 소장자가 펜으로 쓴 것이 아니라 군인들의 요청으로 아예 사진관에서 인화하면서 박아 준 것이다. 처음에는 점령한 ‘00’이 어딘지 해독이 잘 되지 않아 ‘적의 철모’에 착안하여 ‘평양’이 아닌가 생각했다. 국군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한 기념으로 찍은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이 사진에 호기심을 가지고 수집한 이유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입성에 관련되는 사진들을 익히 알고 있던 나는 국군이 평양에 입성해서 이런 기념사진도 찍었나 해서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기적으로 11월 22일 평양에서 이런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은 10월 19일이었다. 그리고 중국군이 개입한 것이 10월 말, 그때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12월 4일 결국 평양에서 철수했다. 11월 말이면 한참 중국군의 위세에 밀려 후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렇게 여유롭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사진1>에서 말한 ‘읍 주둔’이라는 설명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00’의 글자를 다시 면밀히 따져 본 결과 이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소도시 ‘高敞(고창)’을 흘려 쓴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군인들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민군이 장악했던 후방 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 전북 고창을 장악하고 그 기념으로 이 사진을 찍은 것이다. 실제 국군이 고창을 수복한 날짜는 이 사진을 찍기 이틀 전인 11월 20일로, 이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늦게 수복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은 늘 북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후방 곳곳에도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립된 38선 이남 지역에서 인민군과 구 빨치산 세력은 지리산 등 산악 지역을 이용해 저항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랑부대 11사단 소속의 군인들이 전북 고창을 점령한 후 노획한 인민군의 철모를 쓰고 한껏 무용을 과시하는 사진을 촬영한 것이다.

    이렇게 ‘고창 점령기념’이라고 쓴 <사진2>를 통해 <사진1>의 ‘읍 주둔 기념’이라고 했던 그 ‘읍 지역’이 비로소 ‘고창읍’임을 알게 되었다. 사진 촬영 시기는 <사진1>과 같은 시기 즉 1950년 11월 22일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사진1>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통상 사람의 행동 패턴은 비슷한 것이어서 <사진1> 뒷면에 펜으로 뭔가 기록을 남겼다면, <사진2>에도 비슷하게 글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진 2>에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뒷면에 사진 인화지와 구별되는 누런 갱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혹시 이 누런색 종이 밑에 혹시 사진의 또 다른 메타데이터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메타데이터를 찾기 위해 사진 뒷면을 ‘발굴’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 땅 속에 묻혀있는 유물을 발굴하듯이 누런 종이 밑에 있는 글자를 발굴해보기로 한다.

    사진을 발굴한다? 근사하지 않은가?

    나는 뒷면에 붙어있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칼로 떼 내기 시작했다. 파고 쓸고, 파고 쓸기를 반복하기를 5분여 만에 드디어 예상한 대로 첫 글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한다.

    처음에 나온 글씨는 ‘朴 下士(박 하사)’

    ‘아하 그렇다면 두 명 중에 한 명은 박 하사구나’

    그리고 그 바로 왼쪽 옆에 ‘情報係(정보계)’라는 글자! 박 하사는 정보계에서 일했다. 조금만 더 발굴해보자. 신라의 최치원이 계원필경(桂園筆耕), 즉 붓을 쟁기 삼아 계원을 갈았듯이 나는 커터 칼을 삽으로 삼아 사진 뒷면을 조심스럽게 파 내려간다.

    ‘金昌市(김창시)’!

    왼쪽 인물의 이름도 드러났다. 김창시 옆의 다섯 글자는 더 이상 발굴이 어려워 발굴을 중단하여 정확한 내용을 알기 힘들지만, <사진1>에 쓰여 있는 ‘장교계 시대’의 오른쪽 절반과 글 모양이 동일하므로 이건 더 이상의 발굴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왼편의 인물은 ‘장교계 시대의 김창시’가 되는 것이다. 김창시 복장은 <사진1>의 인물 복장과 동일하다. 두 사람이 같은 장교계 소속의 장교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사진2>의 오른쪽 인물(‘박 하사’)의 복장만 이들과 다른데, 장교계 소속의 군인 두 명과 달리 소속이 ‘정보계’ 소속이고 계급이 하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이름 위에 1, 2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조금만 더 발굴해보자. 숫자 위에는 ‘S’라는 글자도 보인다. 군대용어로 S는 ‘squad’ 즉 분대의 의미이므로 박 하사는 1분대 소속, 김창시는 2분대 소속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진 한 가운데 큰 글씨로 ‘00기념’이라는 썼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기념한 사진일까? 이 사진의 마지막 발굴지이다. 조심스럽게 칼로 누런 종이를 긁어낸다. 두 자 중 아래 글자로 ‘友(우)’자가 먼저 보인다. 그 위 글자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戰友(전우)’. 이제 이 사진 두 장이 주는 모든 정보가 수집되었다.

    [사진] <사진2> 뒷면 발굴 과정. 종이를 조금씩 떼어 낼 때마다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이 사진을 처음 찍었을 당시 사진 두 장을 소장했던 주인은 독사진인 <사진1>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자기 사진에 자기의 이름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인물은 자신의 전우 김창시와 박 하사가 찍힌 <사진2>를 얻어 ‘전우기념’이라고 쓰고 두 명의 이름을 사진 뒷면에 나란히 써 놓은 것이다. 두 사진 뒷면의 글씨체는 동일하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진을 간직했던 주인공(<사진1>에 담긴 인물)은 두 전우의 이름만 써 주고, 정작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이로써 사진 두 장에 대한 발굴 작업은 끝났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발굴 아닌가?

    그런데 <사진2> 뒷면에 누런 종이가 덧붙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어떤 이유 때문에 저 뒷면을 가려놓은 것일까? 혹시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지만 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인민군 철모 그리고 트로피 사진

    사진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적의 철모를 쓰고’라는 설명이다.

    인민군 철모라….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철모를 쓴 인민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천으로 된 전투모를 쓰고 있다. 철모를 쓴 인민군은 생소할 수밖에 없다.

    당시 인민군도 국군처럼 철모를 썼던 것일까?

    [사진] 1975년 7월 어느 영화 촬영 현장을 찍은 사진이다. 천으로 된 전투모를 쓴 전형적인 인민군의 복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인민군 뒤로 보이는 국군은 모두 철모를 쓰고 있다. (박건호 소장)

    결론부터 말하면 인민군 역시 전쟁 당시 철모를 썼다. 인민군이 착용한 철모는 주로 소련제 M40이었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 속에는 철모를 쓴 인민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철모 쓴 인민군이 인공기를 들고 돌진하는 사진, 철모를 쓴 인민군이 대전을 떠나 남하하면서 ‘대전을 떠나면서 내일은 대구 부산!’이라고 벽에 글을 쓰고 있는 사진 등 꽤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제공권을 쥐고 있던 미 공군의 북한 지역 폭격이 거세지면서 다수의 군수 공장들이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철모 공급이 제대로 안되면서 대부분의 인민군은 이후 철모 없이 천으로 된 전투모를 쓰고 싸우게 되었다. 보급 순위에서도 철모는 무기나 탄약에 비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전쟁 후반기라면 몰라도 전쟁 초기 국면에서 인민군의 철모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진1>과 <사진2>의 인민군 철모는 전쟁 초기에 남하하여 고창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민군이 착용했던 철모였을 것이다.

    [사진] 인민군도 전쟁 초기 철모를 착용하고 싸웠다. 왼쪽은 인공기를 들고 돌진하는 인민군의 모습으로 모두 철모를 쓴 모습이다. 오른쪽은 한 철모를 쓴 한 인민군이 ‘대전을 떠나면서 내일은 대구 부산!’이라고 벽에 글을 쓰고 있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전쟁 초기에는 국군의 철모 보급률이 오히려 인민군보다 훨씬 낮았다는 사실이다. 이후 미국이 국군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철모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인민군의 보급률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 속 국군과 인민군의 복장은 이런 전쟁의 변화상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없다. ‘철모를 쓴 국군’과 ‘전투모를 쓴 인민군’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는 ‘철모를 쓴 인민군’과 ‘전투모를 쓴 국군’의 전투 장면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다. 사진 속의 군인들이 왜 굳이 적군의 철모를 쓰고 사진을 찍었나 하는 점이다. <사진2>의 두 군인이 쓰고 있는 것은 사진 설명대로라면 ‘적의 철모’ 즉 인민군의 철모다. <사진1>의 군인이 착용한 것도 그럴 것이다. 이 사진들 속 ‘인민군 철모’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철모의 원래 주인인 인민군들은 전사했거나 아니면 포로로 잡혔을 것이고, 그들은 철모의 원래 주인, 즉 적군의 이미지로만 이 사진 속에 남아있다. 개별 개별의 이름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사라지고, 그들은 ‘적군’이라는 이름 속에 용해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적군의 이미지로 사진 속 배경이 된 반면, 철모의 새로운 주인들은 그 모자를 쓰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사진은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이 사진 속의 인민군 철모처럼 전쟁 중 승자는 흔히 패자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으로 자신의 승리와 위용을 과시한다. 이를 ‘트로피(trophy)’라고 한다. 각종 대회에서 입상을 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컵, 기(旗), 방패, 상(像) 등의 기념품을 가리키는 트로피(trophy)에는 ‘전리품, 노획물’이란 뜻도 있는데,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패’라는 뜻의 그리스어 ‘trope’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 ‘trophy’는 전쟁에서 승리해 획득한 포로에서부터 각종 군사 관련 물품, 즉 전리품이나 노획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승리를 거둔 곳에 그런 전리품이나 노획물 등으로 세운 승전 기념비도 ‘trophy’라고 한다.

    [사진] 전쟁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는 군인들의 모습이다. 왼쪽은 영화 <조조 래빗>의 한 장면으로 독일 나치기를 들고 환호하는 연합군의 모습, 오른쪽은 한국전쟁 중 영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타이카 와이티티(Taika Waititi) 감독의 2020년 영화 <조조 래빗(Jo Jo Rabbit)>의 후반부에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이 나치기를 들고 환호하면서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는 나치 깃발이 트로피인 것이다. 한국전쟁 중 평양을 점령한 연합군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러므로 고창을 점령하고 적의 철모를 쓰고 찍은 기념사진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전쟁 트로피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인민군의 철모는 국군의 승리와 위용을 과시하는 하나의 훌륭한 기념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 트로피가 모두 이렇게 온건하고 점잖지만은 않았다는 데 있다. 전쟁이 남긴 수많은 전쟁 트로피 관련 기록과 트로피 사진들을 보노라면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할 정도로 끔찍한 것들이 많다. 다음 문단부터 이 챕터의 마지막까지의 내용은 마음 약한 독자들께서는 건너뛰기를 권한다.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던 테렌스 맥릭(Terrence Malick) 감독의 영화 <더 씬 레드라인(The Thin Redline)>를 기억하실 것이다. 이 반전(反戰)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2∼43년경 태평양의 섬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참혹했던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는 전투에서 승리한 미 해병이 승리의 기념으로 펜치로 일본군의 금니를 뽑는 장면이 나온다. 이 해병이 가진 주머니에는 이미 10여개의 금니가 들어 있다. 이 미군에게는 전쟁 트로피가 일본군의 금니였던 것이다.

    [사진] 영화 <더 씬 레드라인(The Thin Redline)>의 한 장면. 미 해군이 자신이 뽑은 일본군의 금니를 보고 있다. 오른손에는 펜치가 들려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단순히 영화적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를 묶어놓고 금니를 뽑거나, 입을 찢거나, 귀나 코 등을 자르는 등 신체를 훼손하여 ‘기념품’을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신체를 훼손하고 그 일부를 전리품으로 간주하거나, 장식품 및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그 중 금니 뽑기는 기념품 챙기기 중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진 행위였다. 비교적 거부감도 적고 약간의 금전적 이득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미 해병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 나오는 다음 내용을 보자.

    …….하지만 그 일본인은 죽지 않았다. 그는 등을 심하게 다쳤으며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을 테지. 일본인의 입은 커다란 금니로 빛났고, 그를 생포한 놈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그는 케이바 나이프를 이 뿌리에 고정시키고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일본인이 발길질을 하고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기에 칼날은 그의 입 깊숙이 파고들고 말았다. 해병은 욕설을 내뱉고는 칼로 귀 끝까지 일본인의 입을 찢었고, 그의 발을 일본인 아래턱에 받히고 다시 이를 뽑는 걸 시도했다. 피가 일본군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그는 끄르륵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나는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라’고 소리쳤으나 내가 대답으로 들은 것은 욕설뿐이었다. 다른 해병이 달려와 그 적군의 뇌에 총알을 박아 넣어 그의 고통을 끝내주었다. 그 수집가는 툴툴거리고는 개의치 않게 그의 기념품을 뽑아내려 했다.

    이러한 신체 훼손 행위는 기본적으로 황인종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증오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도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만 유독 잔악했을 리는 없다. 일본군의 잔학 행위 역시 미군의 그런 행위를 재생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영화로도 제작된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책에는 일본군이 포로가 된 미 해병을 죽이고 팔뚝에 있는 해병대 문신을 훼손한 이후 그 해병의 성기를 잘라 입에다 쑤셔 넣는 등 일본군의 끔찍한 미군 시체 훼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고,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는 법이다. 미군의 일본군 전사자에 대한 끔찍한 시체 훼손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더 큰 보복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사진]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일본군 두개골 트로피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 사진. (위키피디아)

    미군의 일본군 신체 훼손 행위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일본군 두개골 수집이었다. 이러한 두개골들은 ‘두개골 트로피(trophy skull)’로 불렸는데, 이미 백골화된 유골을 취득하기도 하였으나 유해를 훼손·절단하여 인위적으로 수집하기도 하였다. 목을 푹 삶아서 살점을 발라낸 뒤 유골만 떼 가기도 하였다. 미군으로 참전했던 찰스 린드버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어느 해병장교와의 대화를 기록해놓았다. 그 장교는 두개골의 경우 방금 죽은 일본군 시체에서 잘라내기보다는 대부분 부패되어 몸에서 떨어져 나갔거나 완전히 해골화된 시체를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1944년 미국 로드 아일랜드에서 기자로 일하던 윈필드 타운리 스콧은 한 수병이 신문사 사무실에 두개골 트로피를 전시한 걸 목격했는데, 그 수병은 기자에게 일본군 머리를 가공해 두개골로 만드는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피부가 벗겨진 머리를 구해서 그물에 넣어 함정 뒤에 매달아 놓아 바닷물로 씻어낸 다음, 광을 내고 마지막으로 가성소다를 사용해 문질러 씻는다고 말해 주었다.

    이런 미군의 끔직한 형태의 신체 훼손 행위는 하나의 유행이 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잡지와 신문에서 특집기사로 다뤄지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1942년 9월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은 “적군의 시체 중 어느 부위도 기념품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이 규정을 어기는 미군 병사는 단호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사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태평양 전역에서 계속 이어졌으며, 미군의 소지품 중에서 일본군의 시신에서 떼어낸 ‘트로피 두개골’이 발견되는 사례는 계속 일어났다.

    그런데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삼는 것은 비단 2차 세계대전 중 미군만의 만행만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전쟁에서 적의 머리는 승리의 가장 확실한 증표였다.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만든 대표적인 사례 하나만 덧붙이고 끔찍한 이야기는 마무리하자.

    아마존 인디언 중 히바로 인디언 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적의 머리를 기존의 3분의 1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쪼그라든 머리(Shrunken head)’라고 한다. 히바로 부족은 ‘찬차’라고 하는 이 ‘쪼그라든 머리’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차루타마’라는 마법의 힘 때문에 적의 머리가 자신의 전투력을 향상시켜준다고 믿었던 히바로 족은 적의 머리를 트로피처럼 가져왔다. 가져 온 머리에는 정복당한 희생자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이 진귀한 머리는 거의 죽음에 이른 사람으로 만든다. 때로는 이 처리 과정 때문에 죽기도 한다. ‘쪼그라든 머리’를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목 바로 아래쪽을 자른 다음 얼굴을 벗겨낸다. 피부를 뒤집어 깨끗하게 긁어내고, 눈, 입, 목 뒤쪽을 꿰맨다. 두개골과 뇌는 버린다. 냄비에 산딸기로 보존 처리한 물을 넣고 머리가 원래 크기의 3분의 1 정도로 쪼그라들 때까지 한 시간 반 가량 삶는다. 가열된 자갈, 뜨거운 모래, 빨간 씨앗을 속에 넣으면 피부가 촉촉해진다. 하룻밤 동안 불 위에서 연기를 쏘이고 피부를 숯의 재로 처리한다. 종종 쪼그라든 머리에 장식용 구술을 더하기도 한다.

    견벽청야 작전과 ‘골로 간’ 사람들

    이렇게 전쟁은 인간의 잔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이번 글에서 살핀 <사진1>, <사진2> 속에 등장하는 전쟁 트로피가 ‘적의 철모’ 정도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원래는 이쯤에서 사진 탐구를 마무리하려 하였다. 그런데 나는 문득 한국전쟁 당시의 고창 역사가 궁금해졌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점령한 기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국군이 고창을 언제 수복했는지, 어떤 부대가 주둔했는지 등등……. 그래서 자료를 이리저리 검색해 보았다. 검색어는 주로 ‘한국전쟁’과 ‘고창’, 그리고 ‘11사단’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고창 양민 학살사건’이라는 제목의 글들이 꽤나 많이 떴다. 처음에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고창 양민 학살 사건이 따로 있었다. 연관되어 검색된 사건으로 함평 양민 학살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3건의 양민 학살 사건이 모두 화랑부대 즉 육군 제11사단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사진1>과 <사진2>의 세 군인이 소속된 부대가 육군 제11사단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실 것이다. 왜 육군 11사단은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일까? 이번 글의 마지막 주제이다.

    육군 1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후 후방 지역의 인민군 토벌을 위해 창설된 부대로 사단 예하에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두었다. 각 연대는 작전 지역을 나누어 제9연대는 지리산, 제13연대는 전라북도. 제20연대는 전라남도였다. 사진 속 군인들이 점령하고 사진을 찍은 고창은 전라북도에 속하니, <사진1>에 ‘제11사단 13연대’이라고 쓴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창설 직후 11사단 제13연대는 1950년 10월 18일 연대본부를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고, 10월 24일에는 연대 전방지휘소를, 11월 6일에는 후방지휘소까지 전주로 이동하여 전북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했는데, 주로 임실, 남원, 전주, 고창, 정읍, 무주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1월 20일 전라북도에서 마지막으로 고창을 수복했다. <사진1>과 <사진2>를 찍은 시점이 고창 점령 이틀 뒤인 11월 22일이었음은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고창 점령으로 오랜 기간의 작전이 큰 가닥을 잡았기 때문에 승리감으로 그러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잔여 세력의 저항은 이후에도 상당기간 이어졌을 것이다.

    11사단의 인민군 토벌작전의 특징은 철저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는 1950년 9월 25일 이 부대의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한 최덕신(崔德新) 장군이 제시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작전은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 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견벽청야 작전은 수많은 양민 학살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사단장 최덕신은 11사단이 창설된 후 초기에 수복작전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견벽청야 작전 개념을 적극 도입하였다. “100명의 공비에 대해서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는 그의 발언에서 보듯이 그가 제시한 견벽청야 작전은 주민들의 피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최덕신도 이에 대해 스스로 그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진] 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의 모습. 그는 이후 5.16 직후 외무부 장관과 서독 대사를 지냈으나 박정희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미국에 이민한 후 1986년 북한에 망명하였다. 1989년 북한에서 사망한 후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한국전쟁 중 후방 지역의 인민군 토벌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대변되는 영호남 지역의 양민 학살의 상징인 최덕신이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Life 사진)

    최덕신은 인민군과 구 빨치산세력이 산악지대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 아군은 지리적·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였고, 따라서 견벽청야가 빨치산을 유인하는 작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개념은 작전에 그대로 이용되어 자평하듯이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병은 물론 중간 지휘관들에게 이러한 작전은 생소한 것이었다. 따라서 최덕신은 사단참모회의 때 한지에 ‘堅壁淸野(건벽청야)’라고 써놓고 이 개념을 생소하게 생각하는 참모들과 각 제대 지휘관들을 상대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직접 교육했다.

    최덕신은 “일반 주민은 공산당 전술에 의해 이용되는 존재이며, 공산당 제거를 위해서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작전에 따라 군경은 총을 쏘면서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주민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켜 무차별 사살하거나 빨치산에 가담하거나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주민을 임의적인 기준으로 선별하여 총살하였다. 이 작전 중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가 총소리와 함께 죽어갔다. 우리말 ‘골로 갔다’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인민군과 국군이 자행한 학살이 대부분 골짜기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골(짜기)로 끌려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럼 11사단이 견벽청야 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세 건의 대표적인 양민 학살 사건을 시간 순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먼저 ‘함평 11사단 사건’으로 불리는 함평 양민 학살 사건이다. 관련 부대는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이다. 1950년 11월 20일, 이 지역 인민군 토벌을 맡고 있던 육군 제11사단 소속 20연대 2대대 5중대가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월야면·나산면 등에 투입되었다. 1950년 12월 2일 5중대는 인민군들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전사자를 냈고, 이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인민군과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해당 지역을 소멸시키는 작전을 폈다. 앞에서 언급한 견벽청야 작전이었다. 양민학살은 1950년 12월 6일경부터 시작되었다.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와 동촌마을에 진입한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80여 가구를 모두 불태운 것으로 시작된 양민학살은 12월 7일 월야면 월악리와 월야리를 거쳐 12월 9일 월야면 외치리로 이어졌다. 학살은 1951년 1월 중순까지 이어졌고, 마지막은 1951년 1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5중대 군인들은 10여 명의 주민을 총살했다. 1951년 1월 15일 나사면 면장 등의 항의로 중단된 양민학살은 5중대의 중대장이 교체된 1월 23일 이후로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이어서 고창 양민 학살 사건이다. 1950년 12월 22일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는 견벽청야 작전에 따라 해리면 동호리 선창가 주변과 심원면 고전리, 만돌리 해안가 등지에서 인근 지역에서 밀려온 피난민 200∼330여 명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이 밖에 1951년 1월 5일 토끼몰이식으로 붙잡은 피난민 150∼200여 명을 공음면 선동리 선산마을에서 새끼줄로 묶은 뒤 순환식 경기관총으로 집단 총살한 데 이어, 1951년 1월 6일 상하면 하장리 오룡마을을 집집마다 수색해 숨어 있던 마을 주민 12∼16명을 상하국민학교 주변 공터에서 집단 사살하였다. 또한 8중대는 1951년 3월 13일 상하면 용대리 택동 마을 부근에서 인민군과 교전 중 척후병 1명이 희생되자 인민군을 색출하기 위해 주민 50여 명을 총살하고,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 바닷가의 비둘기굴에 숨어 있던 피난민 60여 명을 4열 횡대로 세워 놓고 총격을 가했다. 고창은 인민군 잔여 세력의 활동이 활발했던 관계로 희생자가 어느 지역보다 많았다. 공음·무장·상하·해리·심원 등 5개면에서만 977명의 양민이 우리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는 공식적인 조사와는 달리 무장면 월림리 죽림마을과 해리면 동호리, 공음 선동마을 등지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사진] 고창 양민 학살 사건의 현장에 세워진 위령탑으로 고창군 공음면 선산마을에 2007년 건립되었다. (인터넷 사진)

    마지막으로 세간에 가장 잘 알려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다. 이는 제11사단 9연대 3대대와 관련된 사건이다. 제9연대장 오익경으로부터 사단의 작전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1951년 2월 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로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후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 8일 신원지서가 인민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 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대현리·와룡리·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 11일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후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 날 517명을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총살당한 주민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 60명으로 총 719명이었다.

    이러한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으로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골짜기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점은 함평과 거창 양민학살의 경우 각각 11사단 20연대와 9연대로 작전 지역과 일치하는데, 고창양민학살사건의 경우 13연대 작전지역인데, 20연대가 왜 학살사건의 주체로 등장하는지 알 수 없다. 당시 전쟁의 변화무쌍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능력 부족으로 그것까지는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은 이번 글의 주인공들인 <사진1>과 <사진2>의 군인들이 소속된 13연대와 지금까지 알려진 학살 사건들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대표적인 3건의 양민 학살 사건과 직접 관련된 연대와 대대였다면 이 글은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읽는 독자들도 이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 군인으로 참전하여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 다수의 평범한 군인들을 11사단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자’의 이미지를 덮어씌워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 글이 사진 속의 세 인물에게 뜻하지 않게 누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두 장의 사진을 통해 한국전쟁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두 장의 사진은 한국전쟁 중 전공의 세운 국군의 모습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 외에도 전쟁 트로피, 그리고 11사단이 후방에서 전개한 견벽청야 작전까지 아울러 증언해주고 있다. 그때로부터 벌써 70여년이 지났다. 70년 동안 억울한 넋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가 누구였든 동족상잔의 전쟁 중 희생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국가에 대한 권고 사항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는다.

    국가는 한국전쟁 당시 반란군 토벌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군인이 다수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에 대해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략)… 군은 과거 군인들이 토벌작전 과정에서 빨치산에게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법적인 절차 없이 현장에서 학살한 것에 대해 모든 피해 유족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할 필요가 있다. 또 희생자의 유족들이 매년 봉행하는 위령제에 참석하여 공개 사과하고 이들을 위로하여야 한다.

    -『호남지역 군 작전 중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2009 년)의 제7장 권고사항 중

    * 글 내용 중 전쟁 트로피에 대한 글은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다수 참고하였고, ‘쪼그라든 머리’에 대한 정보는 『문화로 재테크하다』 (토비 월른 지음· 김혜영 옮김, 이마고, 2011)를, 11사단의 양민 학살 부분은 『호남지역 군 작전 중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을 참고하였다.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칼럼 링크

    ** 이번 47회 글을 끝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종결합니다. 2018년 6월 1회를 시작으로 그동안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1회도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인데 마지막도 한국전쟁 이야기로 끝을 맺는군요. 그동안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조만간 시즌2 ‘컬렉터의 서재(가제)’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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