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지혜’를...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
    [그림책 이야기] 『한 마리 여우』(케이트 리드. 이루리 옮김/ 북극곰)
        2021년 03월 10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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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리 여우

    표지에 한 마리 여우가 있습니다. 붉은 여우는 하늘빛 배경 덕분에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여우의 얼굴은 옆모습이지만 눈을 독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우는 고개를 들고 있는데도 올라간 입꼬리를 감출 수 없을 만큼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여우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긴 걸까요?

    표지를 넘기면 여우 발바닥에 잉크를 찍어서 만든 것 같은 배경이 보입니다. 그리고 표지에 나왔던 한 마리 여우가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넘기면 판권 페이지와 속표지가 나옵니다. 하얀 배경 위로 여우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여우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숫자로 만든 스릴러 그림책

    마침내 본문입니다. 본문에는 페이지마다 숫자가 쓰여 있습니다.

    1. 한 마리 배고픈 여우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뭔가를 염탐하고 있습니다.
    2.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여우는 자세를 낮춥니다. 바닥에는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습니다.
    3. 세 마리 통통한 암탉을 노려봅니다. 하지만 암탉들은 여우가 나타난 줄은 꿈에도 모르고 길바닥의 지렁이만 바라봅니다.
    4. 네 발로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이 장면은 파노라마처럼 대화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대하고 긴 화면에 보이는 건 여우의 가늘고 긴 네 다리와 붉고 풍성하고 신중한 꼬리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배경 속에 더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긴장감을 점점 더 높여줍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1, 2, 3, 4, 5, 6, 7, 8… 이렇게 숫자를 따라 진행됩니다. 1부터 10까지 숫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작가 케이트 리드는 누구나 아는 숫자를 가지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드라마를 완성해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누구나 아는 숫자는 목적이 아니라 공감대다!

    케이트 리드는 우리에게 숫자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으로 수학을 가르치려는 분을 말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관점에 따라 이 책은 분명 훌륭한 수학책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술가로서 케이트 리드는 숫자를 공감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독자와 소통하려면 서로 알고 있는 대상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독자와 공유한 대상입니다. 여우, 여우 발자국, 암탉, 깃털, 지렁이, 그리고 1, 2, 3, 4, 5, 6, 7, 8, 9, 10.

    그럼 다 아는 이야기를 누가 보느냐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누구나 여우와 암탉과 숫자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여우가 세 마리 통통한 암탉을 만났을 때, 1부터 10까지 세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케이트 리드 그림책의 아주 영리하고 흥미진진한 매력입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

    정말 1 다음엔 2가 나올까요? 아침이 오면 일어날까요? 밥을 먹으면 화장실에 가게 될까요? 학교에 가면 재미있을까요? 공부를 열심히 하면 행복해질까요? 집을 사면 안심이 될까요? 돈을 많이 벌면 인생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까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우리는 살아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이 올 것을 몰랐습니다. 2021년에도 이렇게 어려운 상황이 계속될 줄 몰랐습니다. 사실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 마리 여우 그리고 세 마리 암탉

    그런데 이 책을 보는 여러분은 한 마리 여우의 입장입니까? 아니면 세 마리 암탉의 입장입니까?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하거나 강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여우의 입장일 것입니다.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거나 약자의 편에 서고 싶은 사람은 암탉의 입장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여우가 암탉을 잡아먹는 행위입니다. 여우가 암탉을 잡아먹는 일은 자연에서는 섭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여우 같은 강자가 암탉 같은 약자를 잡아먹는 일을 살인이라고 하고 살인을 저지른 자는 법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이 또한 법을 다루는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가 양심적인 사람일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에서는 군부 쿠데타와 폭정이 날마다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자민당이라는 탈을 쓰고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을 살해한 친일파와 쿠데타를 일으킨 전임 대통령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한국 역사의 승자는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살인을 막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케이트 리드의 『한 마리 여우』에서 단순하지만 분명한 지혜를 얻습니다. 쉽고 재미있는 그림책 『한 마리 여우』에서 여러분 모두 약육강식이라는 잔인한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평화의 지혜’를 발견하시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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