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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훈 정책이 이래서는 안된다
    [기고]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동학농민군을 푸대접하는 보훈 행정을 돌아보며
        2021년 02월 25일 1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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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은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3월 반봉건을 기치로 내걸었다. 반면에 2차 동학농민전쟁은 그해 6월 일본 제국주의가 경복궁을 점령하자 이에 분노해 9월에 봉기하여 싸운 반외세 농민혁명이었다. 1차 동학농민전쟁은 4월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했다. 반면에 2차 동학농민전쟁은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화력 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그런 점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항일독립운동이었다. 1895년 1월 일본군 미나미 소좌에게 취조를 당할 때 전봉준 장군은 “너희 일본군을 경복궁에서 물리쳐 없애고자 군대를 일으켰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서울로 압송돼 이노우에 일본 공사 앞에서 취조를 당할 때도 전봉준 장군은 거병 이유에 대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것에 죽음으로 맞서 싸워 일본병을 물리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고 의연하게 응대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사 8종 교과서 모두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한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2차 동학농민전쟁을 지휘한 총사령관 전봉준 장군과 최고지도자 최시형 선생은 순국선열로 서훈을 받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127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질 못하고 있다. 하물며 함께 싸우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평민들인 동학농민군들 누구도 서훈 되질 못했다. 반면에, 1895년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의병, 그리고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던 양반 유림들은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무려 2671명에 이른다.

    똑같이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국권침탈에 맞서 싸우다 일본군의 만행에 도륙당했던 역사적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왜 보훈처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 희생자들을 모두 외면했을까? 농민과 양반이라는 계급의 차이 때문일까? 그런 성격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보훈 정책에서 드러난 관료 행정의 낡은 관행 탓이라 생각한다.

    2021년 1월 올해 펴낸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책 표지 (출처 : 인간과 자연사)

    홍범도 장군 :
    홍범도는 전봉준 장군이 이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에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떴고”, 그해 의병 투쟁에 나섰다.(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1세대 역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1962년에 만든 독립유공자 내규 탓이다.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라는 독립유공자 내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에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과 이를 지휘하고 지도한 전봉준, 최시형조차 서훈에서 제외돼 있는 것은 그런 이유가 무엇보다 크다. 그래서 보훈처 답변조차 “독립운동으로서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황당한 이유 아닌 이유를 부끄러움도 없이 들이대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친일부역혐의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그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 ‘폭동’, ‘동학당의 난’으로 서술했던 반역사적인 인물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2세대 일부 역사학자들조차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기술했던 게 우리 역사학계의 참담한 현실이다. 2005년도까지 서울대 국사학과 홈페이지에는 이병도를 찬양하는 글로 도배되었을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그들이 만든 서훈 내규를 59년이 지나가는 오늘날까지 신주 모시듯이 하는 보훈처 심사위원들과 행정 관료들의 태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던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는 보훈처 심사 결정에 대해 왜 잘못된 결정인지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리고 다시 재심을 신청하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언론에 호소하는 등 고군분투하고 있다. 박용규 박사는 지난해 5월 국회에서 열린 「국민 중심 보훈을 위한 과제와 개혁 방안」 정책토론회에서 보훈처 관료들과 심사위원을 질타하며 단호하게 일갈했다.

    “ 똑같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했는데, 1895년 을미의병 참여자인 양반 유생들은 서훈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평민 출신 농민들과 전봉준, 최시형 선생은 누구 하나 서훈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중략)… 59년이 지난 지금도 낡고 잘못된 내규를 고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은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있으니 독립유공자 내규를 당장 고쳐야 한다.”

    2021년 1월 올해 박용규 박사는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인간과 자연사)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다양한 1차 사료를 인용해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항일독립운동이었음을 밝히면서 이는 오늘날 한국근현대사학계의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전봉준 장군에게 사형 선고를 언도한 판결문은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 유력한 자료가 아닐 수 없어 여기에 소개한다.

    “ 피고(전봉준)는 일본 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하고자 하는 뜻인 줄 알고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 일본 거류민을 국외로 몰아낼 마음으로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이하 생략)”

    불행 중 다행으로 촛불시민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2019년 동학농민혁명을 국가기념일(5월 11일)로 지정했다. 장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추모기념행사 당일 국무총리가 정부를 대표해 참석했고 국가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렸다. 그렇다면 이젠 보훈처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당장 독립운동가에 대한 낡은 내규를 뜯어 고치고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을 비롯해 제2차 동학농민군들을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전했던 농민들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풀잎처럼 참혹하게 쓰러져 갔다. 심지어 일본군은 농민들을 체포해 잔혹할 정도로 작두형과 화형으로 처형하기까지 했다. 박용규 박사는 치밀한 연구 끝에 그들 일본군의 만행으로 순국한 열사들 가운데 일부 명단 119명을 입수해 꼼꼼하게 정리해 놓기도 했다.

    본래 보훈 전 단계인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훈발굴은 보훈처 공훈발굴과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국가가 해야 할 그 일을 한 역사학자가 맹렬히 연구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보훈처가 마무리할 일밖에 없다. 그것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국가보훈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보훈처의 보훈 심사와 행정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용규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한 전봉준, 최시형을 비롯해 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서훈 재심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찾아가는 모습(출처 : 박용규 박사 제공)

    필자소개
    학교시민교육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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