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드의 우울한 유언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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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07일 0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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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이 가끔 왜 나에게 프랑스로 유학을 갔느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얘기들로 말을 돌리지만 ‘운동권 학점’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진실일 것 같다. 그렇지만 프랑스에 가서 좋았던 점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면, 사실 별로 없다.

    내가 프랑스로 유학 간 이유

    하지 않았어도 좋을 고생을 더 많이 했고, 원래도 비주류인데 평생 비주류로 살 구실을 찾았다고 하면 오히려 솔직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 지그문트 프로이드
     

    그래도 그 어두운 기억 한 구석에서 좋았던 점이 있다면, 수학을 많이 공부할 수 있었고, 인류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프로이드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꼽을 것 같다. 내가 프로이드를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은 스물 세 살 때의 일이다. 후기 프로이드의 저서는 동구가 무너지던 시절에 그나마 마음을 붙일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셈이다.

    동구가 무너지면서 서울에도 충격이 심했다고 하지만 파리는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사회와 대학가에 던져진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수학 문제 푸는 것과 독서로 허무한 마음을 달래면서 살아갔고, 보통의 20대가 그렇듯이 내 눈으로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에 알뛰세나 푸코가 서울에서는 한참 유행했지만, 당시 파리에서는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데리다 열풍이 지금도 서울에서는 만만치 않지만 실제로 내가 지냈던 90년대 초반의 프랑스 학계 특히 좌파 학계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듯이 후기구조주의의 단일한 흐름과 대오를 형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난 여전히 시대착오적이었다

    EU 통합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통합파인 사회당과 비통합파인 공산당이 논쟁 중이었고, 60% 이상의 핵발전 국가인 프랑스의 에너지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당과 녹색당이 논쟁 중이었다. 그 와중에 “개인의 복귀”를 외치는, 나름대로 신자유주의 철학이 화려하게 등장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 와중에 프로이드를 읽던 나는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었고, 주류와는 상관없는 외톨이의 길에 혼자 서 있던 셈이다.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이드 독서가 끝났지만, 나는 결국 프로이드로 박사 논문을 쓰지는 못했다.

    ‘맑스와 프로이드’, 이런 주제는 지나치게 우파들이나 좌파들을 모두 자극하게 되는데, 1년을 다시 헤매다가 조안 로빈슨,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힐퍼딩 같은 고전들을 끄집어내서 겨우 박사논문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프로이디안’인가라는 질문을 가끔 나에게 한다. 나는 프로이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프로이드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토템과 타부>에서 <동일화>를 거쳐 <문명의 병>까지 이어지는 후기 프로이드 저작은 아직도 풍성한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기 프로이드는 너무 염세적이다. 열심히 읽다보면 자살에 아주 적합한 핑계거리를 찾아내기 딱 좋은 책들이다.

    염세적인 프로이드의 평화 사랑

    ‘평화’에 관한 단어가 요즘은 유행인가 보다. 그런 말을 많이 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은 간디에서 유래한 생각이 강하다. 물론 모든 평화파가 간디주의자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하여간 최근의 유행은 간디식으로 해석한 “용감한 자들의 선택”이라는 것이 평화 혹은 내 표현대로 하면 ‘극렬 평화주의자’들의 기본 뿌리를 형성한다.

    지금 탁발순례 중인 도법스님의 경우가 그렇고 녹색평론의 많은 저자들도 간디의 생각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뿌리대로 올라가면 서양 근대 사상에서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면에 꺼낸 사람은 베트란드 러셀과 지그문트 프로이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 다 평화의 사상가들은 아니지만, ‘반전’이라는 흐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다. 러셀과 반전시위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냉전 시기에 핵위기로 달려가던 미국의 그 심장부에서 반전 시위를 하면서, 스퀘어 가든을 매웠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의 반핵이라는 흐름의 후반부로 가면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따로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종교와 세속적인 힘들이 모두 “핵폭탄을 없애라!”라는 구호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일종의 ‘공멸’에 대한 두려움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 영화 <크림슨 타이드> 포스터
     

    헐리우드 영화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논쟁을 이끌어내고 사회적 변화까지 만들어낸 영화를 꼽으라면 난 <크림슨 타이드>를 꼽는다. 존 웨인으로부터 시작된 미국 극우파의 마초들 중에 으뜸 마초라면 역시 잠수함 함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는 핵잠의 함장이 미사일 발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잠수함이 작전을 나간 동안에 교신이 두절되었고, 통신교란된 상태에서 접수된 전문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미사일을 발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함장과 부함장 사이의 이 작은 함상 쿠테타에는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운명이 사실상 달려 있는 셈이다.

    두편의 영화, <탑건>과 <크림슨 타이드>

    해군으로부터 항공모함까지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탑건>과는 달리 <크림슨 타이드>는 해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해군에서는 정 안되면 시나리오의 변경이라도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하여간 해병대를 가지고 있는 미해군의 최고 엘리트들이 근무하게 되는 핵잠에서 벌어지는 선상 소요사태는 간단하지만 매우 어려운 질문을 던진 셈이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해 핵잠 함장에게 주어지던 핵미사일 발사권이 사라졌다. 냉전의 마지막 시대는 한 사나이가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는 공멸의 직전에 서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2.

    이 공멸에 대한 얘기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프로이드이다. 거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문명의 병>의 결론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결국 인류는 서로 전쟁으로 죽이면서 종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생태주의자들은 보통은 지구온난화 혹은 기타 자원과 환경의 문제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런 걸 조금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희망론이 있기도 하지만,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종말론이 강하게 자리 잡는다.

    노동하면 파괴적 본능이 강해진다?

       
      ▲ 칼 맑스
     

    이런 점에서 맑스나 레닌과 같은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해결된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과 프로이드나 생태주의자들은 생각이 좀 다르다.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재림’에 의한 ‘구원’의 철학과 종말적 염세론의 기본 시각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려운 생각은 아니지만, 프로이드의 얘기가 좀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그 근거를 끌어오기 때문에 생각보다 골치 아프다.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생산’이라고 하는 일이라는 것이 다 뭔가를 찢고 쪼개고 부수는 일이기 때문에 일을 오래 하다보면, 결국 ‘파괴적 본능’이 강해질 것이라는게 프로이드 의 기본적인 생각인 셈이다.

    (생산에 대해서 시비를 붙은 사람은 루마니아 출신의 경영학자인 조르죠스큐-뢰겐이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었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는 맑스나 스미스가 이야기한 ‘생산’이 엔트로피라는 눈으로 보면 결국 에너지의 순수한 소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일하는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경구 위에 세운 노동의 사회에서 프로이드의 지적한 얘기가 좀 생뚱맞기는 하다. 신성한 노동이 결국은 ‘파괴의 본성’을 일깨우고, 이렇게 사람들이 점점 더 파괴와 살육에 익숙해져서 인류가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라니…

    그러나 하여간 프로이드는 세상을 그렇게 보았고, 그게 그의 마지막 결론이니까 학자로서의 프로이드의 마지막 결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섹스나 사랑 혹은 최면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과 살육에 대한 예언인 셈이다.

    3.

    프로이드는 연애는 정말 못하는 사람인데, 말년에 루 살로메에 대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했다. 유럽의 지성 중에는 살로메가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도저히 와닿는 바가 없는 말이기는 한데, 프로이드의 결론을 살로메와의 짝사랑과 연결시키면 좀 재밌는 얘기가 나오기는 한다.

    프로이드가 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

    프로이드가 공식적으로 맑스에 대해서 지적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대체적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본 것 같다. (이건 케인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프로이드는 혁명은 당연한 것이고, 언젠가는 노동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서 더 이상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사람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도 열렬한 혁명의 지지자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프로이드가 맑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불만은 혁명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라지고 나더라도 노동 과정에 대한 변화가 특별하게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을 재생산하는 노동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점이 프로이드의 걱정인 셈이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별 걸 다 걱정한 셈이다.)

    프로이드의 제안은 ‘사랑의 노동’인데, 별 특별한 건 아니고 부부가 같은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프로이드의 경우에는 같이 일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루 살로메였기를 열렬히 희망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김빠지는 얘기 덕분에 인류와 사회의 기원에서 종말에 이르는 프로이드의 거대한 생각은 “사실 별 볼 일 없다”는 걸로 완전히 폄하되었다. 후기 프로이드는 철학사에서나 인식론에서나 완전히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고, 그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심리학자 정도로 이해되게 되었다.

    4.

    “죽어라고 일하면 행복해진다”는 사회적 테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종종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맑스의 사위였던 폴 라파그(Paul Lafargue)라는 사람인데, 감옥에서 ‘노동권’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등장할 때 여기에 불만을 품고 ‘게으름의 권리’에 대한 책을 썼다. 우연한 일이지만 베트란드 러셀도 비슷한 책을 쓴 적이 있다.

    부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 노동이 행복해진다? 글쎄올시다

    <게으름의 권리>라는 책은 오랫동안 잠 자고 있다가 68혁명 이후에 높아진 임금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던 70년대 초반 다시 복권되었고, 이 때 서문을 달았던 사람이 바로 알랭 리피에츠이다.

    프로이드는 부인 혹은 애인과 같이 일을 하면 그래도 노동이 좀 행복해지고, 사람들의 폭력에의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 잠시 정지될 것이라고 생각한 셈인데, 이건 좀 "글쎄올시다" 되겠다. 아마 부인과 직장에서도 붙어있다가 일과 가정 모두 파탄날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고, 부인 몰래 직장에서 바람 피는 사람들의 인생도 내가 짧게 지켜본 것으로는 행복하게 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어쨌든 프로이드도 엄청난 낭만파는 낭만파다. 혁명에 관한 얘기가 별 볼 일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부인과 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라고 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프로이드가 없어지기를 바랬던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후 200년이 흐른 뒤 사람들은 더 위험한 일이라도 시켜주기만을 바라는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프로이드에서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스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철학이나 문학을 나름대로 시도했다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블랙 사바스의 모티브도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다.)

    묘하게도 2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나서는 전쟁에 대한 반성보다는 “부국강병”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뭐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5.

       
      ▲ 지그문트 프로이드

    프로이드가 다시 복권되는 일이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게다가 줄기세포도 모르던 시절의 어느 촌놈 의사가 사회학과 인류학 그리고 철학 같은 걸 너무 하고 싶어서 의사생활 때려치고 호주의 캥거루에 얽힌 신화부터 다시 공부하면서 혼자 생각해낸 얘기들이라서 화려한 철학사에 대한 얘기도, 화려한 인문학에 관한 얘기도 프로이드에게는 없다.

    프로이드와 경제학자 파레토

    무미건조한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전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찬 프로이드가, 게다가 ‘남근주의자’로 몰려 마초들의 두목처럼 비쳐지는 지금, 프로이드가 다시 복권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프로이드가 촌놈이라면 이보다 한 술 더 뜨는 촌놈이 바로 파레토였다. 근대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경제학의 기본은 왈라스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왈라스도 사회주의자였고, 그래서 하에이크가 왈라스의 일반균형 이론이 바로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입만 열면 “그건 아니야”라고 외쳤었다.

    그 왈라스가 스위스의 로잔느 대학에 경제학과 학과장으로 자기 후임으로 이탈리아까지 가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파레토인데, ‘파레토 최적’의 그 파레토가 또 당시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파레토가 스위스 기슭에서 20년 이상 혼자서 연구하다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의 비밀을 풀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산에서 내려와서 파리에 왔는데, 프로이드의 책들을 보고는 한탄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쓰려고 했던 말들이 이미 다 책으로 나와있는 걸 보고 파레토가 낙담을 했었다고 한다.

    6.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질 때 혼자 틀어박혀서 읽기 좋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프로이드의 <문명의 병>이다. 가만히 보니까 인류는 죽어라고 일 해서 결국은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면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어느 한 노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슴 한 구석에 그야말로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오게 된다.

    돈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는데

    몰락한 집에 줄줄이 달린 형제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생물학과에서 의사로 전업하고 개업했던 그 집안의 아들이 전쟁을 겪고, 독일 사회와 유럽 전역의 전쟁의 광기로 달려가고 있던 시절을 살아내면서 유언 대신에 세상에 남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마약이 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 마약에 홀린 것처럼 ‘화페물신론’에 흠뻑 빠져있고, 노동의 의미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그야말로 월급과 승진 혹은 ‘안정성’이라는 그게 그 말인 얘기에 흠뻑 빠져있다.

    노무현 정부가 “2만불 경제”를 외치던 그 시절에 그게 문제 있다고 얘기하던 인문학자가 아무도 없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다. 돈이 인류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나?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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