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에 저항함으로
    부흥한 충남 강경성결교회
    [그림 한국교회] 100년 한옥예배당
        2021년 02월 15일 1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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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두 가지를 모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품을 예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요, 상품을 추구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거부에 그치지 않는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이웃이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실체를 꾸준히, 훈련받은 대로,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복 있는 사람, 167, 168 쪽)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 사회현상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국면에서,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저서 <안식일은 저항이다>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코로나 시대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가 바닥이지만, 지역사회의 변화에서 교회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정치사회학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반성적 성찰을 통해 관점을 바르게 세우고 예언자적 저항정신을 살리면,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극도의 경쟁주의,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와 빈번한 산업재해, 차별과 혐오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인 저항은 원천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에서 나올 것이기에,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주장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그의 논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으로 깊이 새길 때 저항정신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장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상품 소비 시스템이 삶을 지배하고 경쟁이란 미명 하에 약탈과 착취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대안적인 삶의 가치를 세울 수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여 제대로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나머지 6일을 대충 살 수 없는 까닭입니다.

    독일 본회퍼 목사는 예언자적 저항으로 히틀러 제거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사형당하였습니다. 그가 베를린-테겔 감옥에 갇혔을 때, 동료 수감자였던 이탈리아 과학자 가이따노 라뜨미랄(Gaetano Latmiral)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요, 목사인 자가 독재자의 생명을 노리는 음모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본회퍼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사람이 쿠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 베를린의 번화가)에서 자동차를 인도로 몬다면, 그렇다면 나는 목사로서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유족들을 위로나 해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저항의 가치가 소중한 때인지라, 일제의 통치에 저항함으로 부흥을 경험한 강경성결교회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을 뒤흔들 때, 일제 경제침략의 폐해를 직접 겪고 있었던 강경주민들은 3월 12일에 논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100여명이 시위를 벌였고, 3월 21일 장날에는 1천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만세운동을 계속 이어갔는데 거점은 옥녀봉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강경교회의 새 자리를 답사하던 동양선교회의 영국인 토마스(J. Thomas) 선교사가 일제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만세를 부르며 지나갈 때, 일경은 선교사 일행을 시위대로 여기고 선교사가 여행증명서를 보여주었음에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영국과 일본 사이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고 영국공사는 긴 소송 끝에 총독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 냈습니다. 배상금 5만 달러는 북옥리에 새 예배당을 짓는 기금이 되지만, 본국에 돌아간 토마스 선교사는 구타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924년, 일제는 강경 사람들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훼손할 의도로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옥녀봉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이 신사에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참배시킬 때,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의 김복희 선생과 학생 60여명이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3·1운동 직후 항일비밀조직 ‘애국부인회’의 결사대장으로 옥고를 치룬 백신영 전도사가 1922년에 강경교회에 부임하여 영향을 끼친 결실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신앙적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일제의 통치와 문화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서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이 결합된 것입니다.

    1925년 3월에는 주일학교 윤판석 학생을 중심으로 일본 역사교육을 거부하며 항거하였고, 1943년 6월에는 이헌영 목사가 “천황도 심판받는다.”고 천황심판론을 주장하여 구타를 당한 후 수감되고 교회가 잠시 폐쇄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련의 저항사건들은 강경주민들이 교회를 우호적으로 보도록 만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튼실한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새해 1월 29일, 호남선 무궁화를 타고 강경에 가던 날, 일찍 일어나 한겨레신문을 펴들었을 때 때마침 강경과 관련한 책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정연태 지음, 푸른역사 2021)는 개교 이래 25년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한·일 학생 1489명의 학적부를 분석한 결과, 민족차별이 신입생 선발로부터 졸업과 이후 취업까지 일관되게 대단히 세부적이고 일상적으로 자행된 것을 밝혀냈다는 글이었습니다.

    논산시 금강 하구에 터를 잡은 강경은 해운교통의 요지로 상업이 활발하여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상권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관공서가 많이 세워졌고, 교육이 발달하고 종교도 왕성하였습니다. 일제 때는 논산, 호남평야의 쌀을 착취하여 실어 나르던 대표적인 항구였지만, 지금의 강경 시내는 온통 젓갈과 새우젓 가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림 =이근복

    강경성결교회는 1918년 김달성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로 1930년대에는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성결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인범 전도사가 설계한 한식목조양식의 예배당은 1924년에 완공되었고, 2002년 9월에 등록문화재 42호로 지정되어 ‘논산 근대화골목’이라고 명명한 좁은 골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건축한 지 100년이 되어가는 한옥 예배당을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천정의 많은 목재들이 아직도 튼튼하게 보였고, 흥미로운 사례라는 정사각형의 36평의 예배당은 단순한 구조미를 잘 드러냈습니다. 예배당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강경성결교회 환원소사”를 새긴 특이한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강경성결교회가 흥왕하여 1957년에 홍교리의 옛 은행건물로 이전하며 한옥예배당의 소유권이 감리교로 넘어가 북옥감리교회가 된 것을 옛 예배당 환원운동을 통하여 되찾은 기념물이었습니다. 2011년 성결교 총회에서 매입을 결의하고 추진하여 성도들과 교회의 후원으로 2012년 12월 20일에 하나님 앞에서 환원예배를 드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란 표지판에는 한옥예배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옥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시기 건축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옥교회의 현존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거의 1:1인 정방형의 평면으로, 중앙 부분이 있는 나무 주초 위에 세워진 두 개의 고주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한 칸막이 교회이다.”

    예배당을 찍은 후 논산 근대화 골목 끝에 있는 유서 깊은 옥녀동에 올랐습니다.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강경 시내가 훤히 들어왔는데, 유난히 큰 규모의 교회당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추웠지만 화사한 햇살에 들판과 금강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냈습니다.

    히틀러 나치에 온 몸으로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는 고뇌도 깊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지만, ….. 나는 도대체 어떤 자일까? / 침착하게, 미소지으며, 자랑스럽게,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 불행한 나날을 내가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도 한다. //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만하는 것과 같은 자일까? /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하략)
    <옥중서간, 대한기독교서회, 212-213쪽, 시 “나는 어떤 자일까”에서)

    지금은 한국교회가 일제에 저항하며 신앙과 민족을 지키려고 애쓴 강경성결교회를 기억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본회퍼 목사처럼 깊이 고뇌하며 저항정신을 살려 자신과 사회를 새롭게 열어가려고 힘쓴다면, 비로소 교회의 존재이유가 공유될 것입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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