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학교민주시민교육'의 시사점
    [기고] 크릭보고서(Crick's Report)와 ‘적극적 시민’
        2021년 02월 14일 03: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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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독일 ‘학교민주시민교육’>의 시사점

    북서유럽 <학교민주시민교육>은 진보정당이 집권했을 때 시작했거나 추진력을 얻었다. 1985년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 정부, 1966년 핀란드 사민당의 집권과 70년대 교육개혁, 1969년 독일 사민당의 집권과 70년대 초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그러하다. 영국 역시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의 집권과 동시에 <학교민주시민교육>을 시도하였다. 영국은 다른 북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학교민주시민교육>이 좀 늦은 편이다.

    2000년 노동당 집권 시절 <학교민주시민교육>(이하 <시민교육>)이 국가교육과정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2002년부터 학교현장에 적용되었다. 따라서 영국 사회에 <시민교육>이 실행된 지 올해로 19년째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에 이어 2005년 노동당 고든 브라운 총리가 재집권하였다. 그 결과 <시민교육>이 연속성을 잃지 않으면서 학교현장에 서서히 안정적으로 정착하였다. <시민성 citizenship>교과가 정규 과목으로 채택되고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실현되었다.

    다만 영국 초등학교 <시민교육>, 즉 <시민성>교과 채택 여부는 학교장 선택사항이다. 7학년 ~ 11학년까지는 반드시 이수하게 했다. 바로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기간에 <시민성>교과를 ‘독립 교과’로 개설해 의무적으로 공부하게 했다. 그런데 노동당 집권 시절 필수과목이었던 <시민성>교과가 보수당이 집권하고 2015년부터 선택과목으로 바뀌는 불행을 겪고 있다.

    영국 사회에서 90년대 <시민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배경엔 다른 유럽국가와 비슷한 특징이 있다. 맨 먼저 청소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은 걸 꼽을 수 있다. 특히 영국은 1997년 총선에서 청년층 투표율이 매우 낮았다. 당시 총선 최종 투표율은 71.4%였는데 18-24세 청년들은 54.1%만 투표에 참여했다. 이는 영국 선거 역사상 매우 낮은 투표율로 기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 범죄의 증가와 학교폭력, 그리고 반사회적 혐오와 차별이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이민자 문제와 함께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회갈등도 심상치 않았다. 그러자 토니 블레어 내각은 기존 보수당 집권 이래 유지해온 ‘좋은 시민’(good citizen)을 넘어서서 ‘적극적 시민’(active citizen)을 학교교육의 목표로 추구했다.

    블레어 내각 교육부장관 블런킷(D. Blunkett)은 대학 시절 은사였던 버나드 크릭(B. Crick)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시민교육 자문단을 즉시 발족시켰다. 그리고 1년 뒤인 1998년 <시민교육>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의 본래 명칭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과 학교에서 민주주의 가르치기」이다. 일명 크릭보고서(Crick’s Report)로 부른다.

    이 보고서엔 세 가지 <시민교육>의 목표를 명시하고 있다. 영국 청소년들로 하여금 ‘정치적 문해력’을 갖춰 ‘사회적‧도덕적 책임감’을 간직하게 하고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수백 명의 희생자를 초래한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는 <시민교육>에 또 다른 전기로 작용했다. 이 테러 사건을 계기로 학교교육에서 <시민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고 영국 사회는 이슬람으로 추정되는 극단적 종교 갈등 내지 인종 갈등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 <시민교육>은 크릭보고서에서 추구한 세 가지 교육목표에다 ‘정체성과 다양성을 지닌 시민성’을 첨가했다.

    영국은 1988년 「교육개혁법」이 통과된 이후 학교와 교육청에 분산돼 있던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면서 국가교육과정이 생겨났다. 그러나 영국 국가교육과정은 우리나라처럼 구속력이 강하지 않다. 대강의 국가교육과정 틀 안에서 학교는 교과목 수를 조정하거나 교과별로 수업시수를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별 학교마다 교육과정 편성에서 자율성을 크게 존중받고 있다. <시민교육> 역시 얼마나 비중 있게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학교교육과정에서 결정된다.

    교과서 발행과 채택에서도 교사의 자율성을 매우 중시한다. 영국은 프랑스, 핀란드처럼 교과서 자유발행제 국가이다. 교사 또한 교과서 사용에서 자율성을 존중받는다. 교사가 교과서를 주교재로 써도 되는데 실상은 학교에서 교과서 사용비율이 매우 낮다. 이유는 교과서에 대한 교직사회의 저항이 상당히 커서 학교에서 교과서를 직접 주교재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출판된 교과서를 직접 주교재로 사용하기보다 교사 스스로 다양한 자료를 연구하여 학습 자료로 재구성해 쓰는 게 대부분이다. <시민교육>의 경우 ‘시민교육협회’나 시민교육관련 단체들이 제작한 학습 자료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교수-학습 장면 역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끌기보다 교사가 다양한 통계자료와 시각 및 이미지 자료를 제시해 주고 학생들의 자발성을 기다린다. 다시 말해 제시된 다양한 자료를 접하고 학생 스스로 자료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현상을 이해하도록 이끌어 준다. 해석과 판단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생의 몫인 것이다.

    이는 ‘정치 문해력’을 통해 정치 관련 지식을 쌓고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사회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적 시민성’(active citizenship)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교과서 목차 제목 가운데 ‘정체성’, ‘사회에 변화 만들기’, ‘정치적 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정치적 변화 만들기’, ‘시민성 행동에 옮기기’ 등은 모두 <적극적 시민>을 만들기 위한 학습 주제이다. 모두 크릭보고서가 강조한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이다. 사회현안을 이해하는 지식의 측면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공공의 시각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책임의식 속에서 정치적 행위를 지향하도록 학습한다. 바로 ‘적극적 시민’의 탄생을 <시민교육>의 목표로 추구한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 사회에 <시민교육>이 도입된 이래 청소년들에게 일정 부분 주목할 만한 변화를 불러온 게 사실이다. 『이코노미스트』지 2014년 7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영국 사회에서 <시민교육>의 효과는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 「오! 이쁜 것들」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학교현장에 <시민교육>이 뿌리를 내린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청소년 범죄 비율을 비교한 내용이 소개되었다. 2002년 처음으로 <시민교육>이 시행되고 학교현장에 <시민성>교과가 뿌리를 내린 2013년에 영국 청소년 범죄 비율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2007년 대비 무려 84%나 감소한 것으로 조사돼 나왔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2007년 발생한 10세~17세 청소년 범죄가 111,000 건이었는데 2013년엔 28,000건 정도로 급감했다. 이는 청소년 범죄 발생 건수가 1/4로 급감한 것으로 2002년 <시민교육>을 실천한 지 10년이 지났을 시점에 영국 <시민>교육이 교육적 효능감을 보여준 중요한 사례였다.

    ‘학교민주시민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향후 입법과제’라는 주제로 2020년 7월 22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토론회 포스터(출처 : 강민정 의원실)

    우리나라는 다가오는 2022년에 교육과정이 전면 개정된다. 한국 사회 역시 영국처럼 청소년의 낮은 투표율과 청소년 범죄의 증가, 그리고 차별과 혐오로 표현되는 사회갈등은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 이주민이 늘어나면서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모습 또한 매우 비슷한 형국이다. 그 밖에 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교육은 더 이상 주입식 ‘입시경쟁교육’으로 지속할 수도 없는 형국이다.

    자신의 안목으로 다양한 사회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도덕적 책임을 간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아가 타인과 상생하도록 존중과 연대를 생활화하는 것은 미래 <시민교육>의 핵심 가치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 위에 공익적 관점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동하는 ‘능동적 시민성’은 오롯이 <학교민주시민교육>을 통해서 길러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크릭보고서의 ‘시민성’ 교육, 바로 <적극적 시민>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 이 글은 <한겨레 온>에도 실렸습니다. 

    필자소개
    학교시민교육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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