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 내전 막바지
    '인민정치협상회의' 개최
    [국공내전-61] 해방군, 푸젠성과 서북지역 진격···미국, 중미백서 발간
        2021년 02월 10일 01:4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펑더화이는 인민해방군 부총사령이다. 주더가 총사령이었지만 화북의 스자좡 전투를 제외하면 전투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다. 주요한 전략과 전술은 마오쩌둥이 수립했으며 병력 배치도 사실상 마오의 몫이었다. 주더는 해방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이었다. 펑더화이는 부총사령인데도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1947년 후쫑난 부대가 30만 대군으로 홍색수도 옌안을 공격했을 때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방어 임무를 맡겼다. 펑더화이는 겨우 3만명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옌안의 당정군 인사와 가족들이 피난할 시간을 번 다음 섬북지역으로 퇴각하였다.

    중국에서 서북지역은 완전히 변방이다. 시안을 비롯한 산시성 일대를 섬북으로 부르며 간쑤, 칭하이, 닝샤, 신장성과 티베트 지역을 서북지역으로 불렀다. 서북은 면적이 광대하지만 인구는 적었다. 싸움에서 이겨도 별로 빛이 나지 않는 곳, 마오쩌둥은 이곳의 공략을 펑더화이에게 맡겼다. 1949년 5월 9일, 펑더화이는 제1야전군을 인솔하여 서북지역 원정에 나섰다. 제1야전군은 사령원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 부사령원 장종쉰, 부정치위원 시중쉰 등이 이끌었으며 총병력 34만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불과 2년 전 3만명의 병력으로 국군 주력을 피해다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5월 18일, 해방군은 후쫑난이 철수한 섬서성 성도 시안을 점령하였다. 7월 10일에는 동북지역에서 편입해온 양더즈(陽得志)의 19병단이 푸펑, 메이현 지역에서 후쫑난 부대 4개군 4만 3천여명을 섬멸하였다. 7월 21일에서 24일 사이 해방군 1, 2, 19병단은 빈현(彬縣), 창우(長武), 징촨(涇川), 핑양(平凉)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8월 10일에는 칭수이(清水), 친안(秦安), 우산(武山) 등을 점령했다. 해방군은 20일 동안 후퇴하는 국군을 질풍같이 추격하였다. 후쫑난 집단군은 서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왼쪽 원 표시부터 오른쪽으로. 우루무치, 시닝,, 란저우, 인촨 시안

    해방군, 란저우를 점령하다

    란저우는 간쑤성 성도이자 서북의 두 번째 도시이다. 국민당 서북 군정장관 공서 주재지이기도 하였다. 란저우는 칭하이와 신장으로 가는 길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어서 군사 지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간쑤성은 마가군(馬家軍)이 지배하고 있었다. 마가군은 간쑤, 닝샤, 칭하이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로 대부분 회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청나라 말기부터 권력을 세습해 온 마가군은 종교적으로 결속하여 전투력이 막강하였다. 해방군이 서북지역으로 진격하자 광저우에 피난 중이던 국민정부는 후쫑난과 마가군 지휘관들을 불러 ‘서북 연합방어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논의 끝에 ‘란저우 회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간쑤성 사령관 마부팡이 란저우성을 고수하며 해방군을 끌어들이면 마홍쿠이, 후쫑난 양 집단군이 협격하려는 작전이었다. 마부팡은 “란저우는 깨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다. 펑더화이가 공격해 오면 지형을 이용하여 결전하겠다. 천연의 지세를 이용하여 진지를 설치하면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란저우는 북쪽에 황허가 흐르고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공격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란저우성은 중일전쟁 시기부터 진지공사를 한 데다 마부팡군이 더 보강하여 두텁고 튼튼하였다. 원형의 보루는 폭이 6미터에서 10미터에 이를만큼 두터웠다. 외곽을 철조망으로 두르고 곳곳에 지뢰를 묻었다. 진지 사이는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화력을 보강하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8월 9일부터 제1야전군 3로 대군은 싸우면서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서북지역은 광대하여 머나먼 길을 행군해야 하였다. 인적도 거의 없는 데다 우기여서 도로가 진흙탕이었다. 식량과 군화, 양말은 물론 탄약조차 제대로 보급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해방군은 보리를 삶아 먹으며 힘겹게 나아갔다. 서북 고원의 한랭한 기후에서 장시간 황야에 노숙하여 감기와 이질, 말라리아 환자가 속출하였다. 란저우 인구는 현재 400만명이 넘지만 당시는 10만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보급할 곳도 마땅치 않은 해방군은 매 끼니조차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는 마오쩌둥이 전문으로 펑더화이를 독려하였다.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 충분히 준비하고 계속 진격하라. 란저우를 점령하여 마부팡군을 섬멸하라.”

    란저우 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하는 해방군

    1948년 8월 4일, 제1야전군 사령원 펑더화이는 란저우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18병단은 바오지와 텐수이 지역에서 후쫑난 집단군을 견제하게 하여 측익과 후방의 안전을 지키게 하였다. 제19병단은 마홍쿠이 집단군을 견제하게 하였다. 제1병단은 우산(武山)과 룽시(龍西)지역을 공격한 후 황허를 북으로 건너 칭하이성 성도 시닝을 위협하게 하였다. 1병단은 란저우 수비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이었다. 2병단과 9병단은 총 15만명의 병력으로 란저우 정면 공격을 맡게 하였다.

    8월 21일, 정면의 2병단과 9병단은 9개 연대 병력으로 란저우에 시험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준비 부족으로 참담한 손실을 입었다. 몇 개 진지도 빼앗지 못하고 2,500여명이 사상당했다. 해방군은 공격을 멈추고 적정을 관찰하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해방군은 3개 병단 병력을 동원하여 전력으로 란저우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해방군이 대군을 움직이자 마부팡은 사세가 이롭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후방이 허전하다고 판단하여 란저우에서 2개 기병여단을 시닝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후쫑난과 마훙쿠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후쫑난과 마홍쿠이는 자신을 지키기에도 급급하여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였다. 마부팡은 8월 24일 비행기로 시닝에 갔다가 충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부대지휘를 아들인 마지원(馬繼援)에게 맡겼다.

    8월 25일, 서북 야전군 공성부대가 란저우 성을 공격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북 야전군은 란저우 주변의 고지인 선자링(沈家岭)과 고우와산(狗娃山) 등을 모두 점령하여 성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마지원은 성이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을 알고 마부팡에게 상황을 알렸다. 마부팡은 마지원에게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한밤중에 시닝방향으로 탈출하게 하였다. 주력이 후퇴하자 남은 병력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다음날 란저우가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란저우 전역은 서북지역에서 가장 큰 전역이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해방군은 마부팡 집단군 주력을 섬멸하고 칭하이, 닝샤와 신장으로 가는 관문을 활짝 열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12,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마부팡 집단군은 2만 7천명이 섬멸당했다. 그중 1만 3천명이 사상했으며 1만 4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란저우 전투를 보도한 신화일보 기사

    서전에서 란저우를 깨뜨린 1야전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9월 5일, 왕쩐(王震)이 지휘하는 1병단이 칭하이성 성도인 시닝(西寧)을 점령하였다. 9월 9일, 18병단은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닝샤(寧夏)로 진격했다. 9월 19일에는 마훙빈이 지휘하는 국군 81군이 기의했으며 마훙쿠이는 충칭으로 도주하였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쓰기로 한다.

    마부팡 집단군을 섬멸한 뒤 다음 목표는 닝샤의 마홍쿠이 집단군이었다. 펑더화이는 이 임무를 양더즈(楊得志)가 지휘하는 19병단에게 맡겼다. 양더즈는 내전 이래 줄곧 화북지역에서 싸워왔다. 공산당이 승기를 잡은 후 마오쩌둥이 서북지역 병력증강을 위해 1야전군에 배속한 바 있었다. 양더즈는 스쟈좡 전투를 비롯하여 화북지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그는 나중에 한국전쟁에도 19병단 사령원으로 참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으로 중국군을 지휘하였다.

    닝샤를 수비하는 회족 국군부대는 마홍쿠이 부대와 마훙빈 부대 4개군이었다. 마훙빈은 마홍쿠이의 사촌형으로 한 집안이었으나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중일전쟁 때 마훙빈이 공산당의 “내전중지, 일치항일”의 주장에 공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훙빈은 쑤이워안의 푸쭤이와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펑더화이도 이런 점을 사서 내전 초기 자신에게 붙잡힌 마훙빈 부대 연대장 한 명을 풀어준 일이 있었다. 펑더화이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마훙빈에게 전하게 하였다.

    일찌기 마오쩌둥은 서북 원정군 지휘관들에게 정치적 해결지침을 하달하였다. 1949년 8월 6일 마오는 펑더화이, 허룽, 쉬샹첸 등 수뇌부에게 전보를 보내어 “문제를 신속하고 철저하게 해결하려면 정치적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전투는 보조수단으로 써라. 전황이 유리하므로 정치적 방식에 이익이 많다. 마부팡군을 해결하면 양더즈에게 닝샤로 진격하게 하라. 마홍쿠이 부대에 섬멸적 타격을 입히라. 잔적들이 물러서면 푸쭤이를 통해 정치방식으로 해결하라.”

    마오쩌둥이 예상한 것처럼 마훙빈은 기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양더즈는 즉시 전권대표를 보내 “기의를 환영한다.”고 전하였다. 그는 “해방군은 기의부대 전 장병의 생명과 개인 재산을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9월 19일 19병단 대표인 쩡스위(曾思玉)와 마훙빈의 81군 대표 마둔징(馬敦靖)이 만나 ‘닝샤 평화해방협정’에 서명하였다. 국군 81군은 해방군 1야전군 독립 제 2군으로 개편되었으며 마둔징이 군단장을 맡았다.

    마훙빈 마가군중 기의를 선언하였다

    이때 마홍쿠이는 닝샤 회족 자치주 성도인 인촨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휘하 병력은 7만명이 채 안되었다. 마훙쿠이는 “한 명이 남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호언했지만 인촨(银川)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49년 9월 1일, 마홍쿠이는 충칭의 긴급 군사회의에 참가한다는 핑계로 전투지휘권을 아들인 마둔징(馬敦靜 : 마훙빈의 아들과 동명이인이다.)에게 맡겼다. 마둔징은 9월 5일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물을 터뜨리고, 불을 질러 태워 없애라.”는 방침을 정했다. 마둔징은 황허를 경계로 방어선을 쳐서 해방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마오쩌둥은 9월 3일 다시 펑더화이와 허룽, 시중쉰에게 전보를 발송했다. “마홍쿠이는 수많은 섬북 인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

    9월 9일, 양더즈는 병단을 삼로로 나누어 닝샤로 진격했다. 해방군은 첫 번째 방어선을 순조롭게 돌파하고 제 2방어선에 도달하였다. 마둔징은 진즈(金積)와 칭통샤(青銅峡) 부근의 험준한 지역에서 해방군과 결전을 꾀하였다. 그러나 제 1 방어선이 돌파되자 인촨으로 후퇴하여 수비에 임하였다.

    9월 19일 오전, 해방군 2개 사단이 국군 방어진지에 돌격하고 다른 부대가 황허를 건너 인촨으로 진격했다. 마둔징은 공병부대로 하여금 황허 제방 수십리를 허물어 해방군의 진격을 멈추려 하였다. 그리고는 전선 지휘를 휘하 128군단장인 루종량(盧忠良)에게 넘기고 충칭으로 달아났다. 마홍쿠이 부자가 달아나자 부하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사병들도 달아났다. 장교들은 해방군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전보를 잇따라 보냈다. 9월 19일 마홍쿠이는 충칭에서 닝사의 부하에게 무전으로 연락하여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인촨 수비를 맡긴 아들 마둔징이 충칭에 와 부자가 상봉했다. 두사람은 할 말을 잊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9월 23일 오후 닝샤병단 대표와 해방군 19병단 사이에 ‘닝샤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마홍쿠이가 몇십 년 동안 경영해온 닝샤가 해방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9월 26일 해방군 19병단이 인촨에서 입성식을 거행하여 닝샤 해방을 선포하였다.

    쑤이위안과 신장지역 기의로 공산당에 가담하다

    1949년 9월 19일 쑤이위안성 주석인 둥치우가 기의를 선언하고 공산당에 가담하였다. 쑤이위안성은 베이징에서 기의했던 푸쭤이의 오랜 근거지였다. 따라서 둥치우와 푸쭤이의 관계는 긴밀하고 서로 신뢰관계가 있었다. 쑤이위안의 기의는 푸쭤이의 방조와 마오쩌둥의 원려 속에서 준비를 해왔다. 해방군이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접수한 뒤 둥치우는 비행기로 베이핑에 왔다. 그는 푸쭤이에게 쑤이위안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3월 23일부터 화북 인민정부와 푸쭤이는 대표를 파견하여 베이핑에서 담판을 가졌다. 그들은 둥치우의 동의를 얻어 6월 8일 ‘쑤이위안 화평협정’에 서명하였다. 쑤이위안의 군대는 정해진 구역에 주둔하기로 하였다. 핑쑤이 철도(베이핑-쑤이위안)의 통행 및 통상, 우편문제에도 합의하였으며 쑤이위안에 인민폐를 사용하고 서로 연락원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7월 하순, 중공은 구이쑤이(현재의 후허하오터)에 연락처를 설치하였다. 둥치우는 쑤이위안에 혁신운동을 전개하고 혁신위원회가 기의 준비작업을 진행하였다. 둥치우는 국민당의 위협과 저지를 무릅쓰고 기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8월말 중공 중앙은 푸쭤이와 덩바오산을 쑤이위안에 보내 기의 실현을 가속화하였다. 9월 19일 둥치우를 대표로 한 쑤이위안 군정 수뇌와 각 민족 각계 대표 39인이 전문으로 기의를 통보하였다.

    신장의 타오즈웨 10만 병력 이끌고 기의 선언

    1949년 9월 25일에는 신장 경비 총사령인 타오즈웨(陶峙岳)가 병력 10만명을 이끌고 기의를 선언하였다. 타오즈웨는 신장성 주석인 빠오얼한(包爾漢)과 함께 기의를 모색하여 왔다. 그의 기의는 내전의 대세를 살핀 처신이 아니었다. 일찍이 그는 평화와 민주를 주장해 왔다. 1946년 여름 타오즈웨는 베이핑 담판의 국민당 대표 중 일원인 장즈중(張治中)과 협력하여 감옥에 있던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대거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석방한 인사들을 옌안까지 호송하여 공산당 지도부의 믿음을 샀다. 그는 지연전술을 통해 신장성의 내전 참가를 회피하여 왔다. 타오즈웨는 전문으로 기의를 선언한 뒤 선무활동에 주력했다. 기의에 불만을 품고 소요를 일으키는 세력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10월이 되자 해방군이 신장성에 진입하자 기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해방군은 진주하자마자 ‘신장의 장사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포하였다. 이로써 서북과 신장의 광대한 지역이 모두 공산당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해방군, 타이완과 마주한 푸저우(福州)를 점령하다

    1949년 8월 쑤위 휘하의 해방군 3야전군이 푸젠성 성도인 푸저우를 공격하였다. 해방군이 난징과 상하이를 함락한 뒤 장제스는 푸저우 및 동남부 도서지역에 수비병 18만명을 배치하였다. 푸저우는 푸젠성 성도이다. 민장(閩江)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푸젠성은 해협을 사이로 타이완과 마주하고 있다. 타이완을 단숨에 점령하려는 마오쩌둥과 타이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장제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푸저우 수비군은 푸저우 수정공서 주임인 저우샤오량(朱紹良)과 리옌녠(李延年) 병단 등 모두 6만여명이었다. 그들은 지형을 이용하여 해방군에게 저항하였다.

    장제스는 푸저우 비행장에서 대대장 이상의 장교들을 모아 훈화를 하였다. “푸저우와 샤먼은 타이완의 문호다. 중국의 전략적 요지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아도 요지이다. 현재는 전진기지이며 앞으로는 반격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금년 9월이면 세계 정세에 대변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이 기지를 사수해야 한다.” 하지만 장제스는 푸저우 수비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해방군의 기세에 10만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맞서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장제스는 고급 장교들을 따로 모아 이런 말을 하였다. “형세가 불리하고 고수할 수 없다면 연해 도서로 퇴각하라. 연해 도서를 기지로 하면 된다.”

    원 표시, 위에서 아래로. 난징, 상하이, 푸저우, 대만

    해방군 3야전군 10병단 사령원 예페이(葉飛), 정치위원 웨이궈칭(韋國淸)은 7월 상순 부대를 푸젠으로 진격시켰다. 8월 11일, 쑤위가 총지휘하는 3야전군은 푸저우 공격을 시작하였다. 해방군 부대는 수비하는 국군의 우익으로 치고 들어가 육상쪽 퇴로를 차단했다. 다른 부대는 좌익으로 치고 들어가 해상쪽 퇴로를 차단하였다. 공격군 주력이 정면에서 공격하자 8월 16일 밤까지 격전이 이어졌다. 세에 밀린 푸저우 수비군은 성을 버리고 샤먼(厦門), 핑탄(平潭)쪽으로 퇴각하였다. 저우샤오량과 리옌넨은 비행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철수하였다.

    8월 17일, 해방군이 마침내 푸저우를 점령하였다. 해방군 주력은 승세를 타고 국군을 계속 추격하였다. 23일까지 저우샤오량군은 푸칭(福清)과 용타이(永泰) 북쪽지역에서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 3만 9천명이 섬멸되었다. 해방군은 푸저우 및 그 주위의 9개 현성을 함께 점령하여 푸젠성의 석권도 시간문제로 되었다.

    미국, 중미 백서를 발간하다

    1949년 8월 5일 미국 국무부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백서를 발간하였다. 이 백서는 1844년 후먼조약(虎門條約 Treaty of the Bogue : 미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조약이다.) 이후 1949년까지 중미관계를 서술하였다. 백서는 특히 중일전쟁 말기부터 1949년 5월까지 미국의 정책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백서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직접 글을 써서 비판하였다. 마오쩌둥은 ‘스튜어트를 보내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중국 인민들에게 미 제국주의의 위신은 이미 파산하였다. 미국의 백서는 그 파산의 기록이다.” 중국 공산당도 비판하였지만 백서로 실질적인 타격을 받은 이는 장제스였다. 백서에서 미국이 국민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백서는 장제스 정권이 패배를 거듭한 것은 부패로 인한 저항력의 약화 때문이라고 썼다. “국민당 지도부는 위기에 대하여 무력하였으며 군대는 이미 투지를 상실하였다. 국민정부는 인민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장제스는 백서 발간 소식을 들은 뒤 불같이 화를 내었다. 트루먼과 애치슨을 “돼먹지 못한 인간”이라고 욕하였다. 장제스는 하야했지만 여전히 국민당 총재 신분이었다. 장제스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한탄하였다. “미국이 입으로는 중국이 중요하다며 중공에 넘겨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지원하는 건 이토록 째째하고 온갖 트집만 잡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경제나 군사원조를 제대로 하였으면 우리가 이 모양이 되었겠는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책임을 우리에게 미루니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

    백서가 발간될 시점에 장제스는 한국을 방문하였다. 1949년 8월 1일, 장제스는 타이베이의 차오산(草山)에 ‘총재 집무실’을 설치한 다음 8월 3일 한국을 방문하였다. 장제스는 한국 대통령 이승만과 극동지역의 반공연맹 설립 문제 등을 상의한 뒤 연합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인류의 자유 및 국가의 독립에 대한 국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기필코 그것을 소멸해야 함을 인정하였다. 태평양 각 나라, 특히 극동의 나라들은 오늘날 국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아시아가 파멸하면 세계도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미국은 장제스가 필리핀과 한국을 방문한 직후인 8월 5일 백서를 발간하였다. 사실상 미국이 장제스를 포기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었다.

    8월 10일 장제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마샬과 애치슨은 중국 정책의 잘못과 실패를 가리기 위해 중미 양국의 전통적 우의를 해쳤다. 미국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장제스는 측근인 왕스제(王世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공개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적으로 우리만 나쁜 사람이 된다. 대륙실패의 팩임을 나 개인에게만 지우려 할 것이다.”

    8월 16일, 국민정부 외교부는 미국 정부가 발표한 중미관계 백서에 대한 외교부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국 정부는 정중하게 성명한다. 중미관계 백서의 내용 및 언급한 중요문제들에 대하여 인정할 수 없으며 심각한 이의가 있다. 우리는 양국 정부가 과거 문제로 논쟁하여 양국 간의 전통적 우의에 영향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의 성명에 대하여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제스도 국군이 동남쪽 연해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더 이상 신경 쓸 여가가 없게 되었다.

    공산당, 신중국 설립을 착착 준비하다

    1949년 8월 28일, 쑨원의 부인 쑹칭링이 베이핑으로 왔다.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의 베이핑행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중국의 민주세력이 모두 결집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쑹칭링의 베이핑행에는 전국 민주여성연합회 부주석인 덩잉차오가 동행하였다.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린보취, 둥비우, 리지선, 선쥔로우, 궈모뤄 등 요인 50여명이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열차가 도착한 뒤 마오쩌둥은 직접 열차에 올라 쑹칭링을 맞이하였다. 이런 환대를 받게 되자 쑹칭링은 감동하였다. 그날 저녁 마오쩌둥은 연회를 베풀고 쑹칭링을 초대하였다.

    베이핑에 도착한 쑹칭링 왼쪽은 덩잉차오

    1949년 9월 17일 충칭에서 양후청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 양후청은 장쉐량과 함께 서안사변을 일으켰다. 양후청은 사변 직후 사직하고 외국에 나가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양후청은 귀국하여 참전하려 하였으나 곧바로 장제스에게 체포되었다.

    1946년 충칭 정치협상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양후청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장제스가 거부했다. 1949년 장제스가 은퇴한 뒤 총통 대리인 리쫑런이 장쉐량과 양후청을 석방하려 하였으나 장제스의 방해로 집행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장제스의 살해명령을 받은 특무들이 양후청을 구이양에서 충칭으로 압송하던 중 살해한 것이다. 죽을 때 양후청은 56세였으며 그의 아들과 10세도 되지 않은 딸, 비서 부부와 비서의 아들, 부관도 모두 살해당하였다. 장제스는 충칭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충칭 광산 갱도 등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공산당원등 정치범들이 즉결처분되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신중국 설립 준비로 분주하였다. 1949년 9월 21일에서 30일까지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가 베이핑에서 거행되었다.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은 중공과 각 민주당파, 무당파와 민주인사, 각 인민단체, 해방군, 전국 총공회, 청년단, 전국 부녀연맹, 학생연맹 및 소수민족, 국외 화교, 종교계 대표등 662명이었다. 참가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관련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회의에서 180인으로 제1차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마오쩌둥이 전국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그리고 63명을 선거하여 중앙 인민정부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마오쩌둥은 중앙 인민정부 주석이 되었으며 주더, 류샤오치, 쑹칭링, 리지선, 장란, 가오강 등이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 천이, 둥비우 등 56명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대회 주석단 중 쑹칭링이 특별대표가 되어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 개막식에서 연설하게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 전체회의에서 발언하였다. 이날 대표들은 거수하는 방식으로 표결하였다.

    정치협상회의를 마친 요인들

    마오쩌둥은 개막사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인류 총수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인들이 일어섰다. 이제 우리 민족이 모욕당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회의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을 통과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격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며 노동자 농민 연맹을 기초로 각 민주계급과 소수민족의 인민민주주의 독재국가임을 밝혔다. 신중국의 정권기관과 군사제도, 경제정책, 문교정책, 민족정책과 외교정책의 총원칙을 제정하였다.

    회의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조직법’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 회의는 또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1) 중화인민공화국 수도를 베이핑으로 하며 베이징으로 개칭한다.
    2) 중화인민공화국은 서기 기년을 채택한다.(국민정부 시절에는 ‘민국’ 기년을 사용)
    3)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는 확정하기 전까지 ‘의용군 행진곡’으로 한다.
    4) 국기는 오성홍기로 한다.

    연재 칼럼 <국공내전> 링크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