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절한 학정·수탈의 실상
    강원도 영월군민, 기록으로 고발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 '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
        2021년 02월 10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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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의 토호국 트라반코르에는 ‘물라카람(Mulakaram)’으로 불린 유방세(breast tax)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카스트 제도상 낮은 계급의 여성들은 가슴을 가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만약 가리고 싶다면 유방세라는 비싼 세금을 내야 했다. 세금을 내지 않고 가슴을 가리고 다니다가 걸리면 더 비싼 벌금을 물어야 했다. 유방세 자체도 그렇지만, 세금 징수 방법은 더 괴이했다. 세금 징수원이 유방을 일일이 만져서 크기를 측정하고, 그 크기에 따라 세금 액수를 달리 부과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이 없었을 리 없다. 조선 후기 가혹한 군포 부담에 분노한 한 농민이 자신의 생식기가 화의 근원이라며 낫으로 잘랐다는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의 이야기기처럼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트라반코르의 케랄라(Kerala)에 난겔리(Nangeli)라는 하층 계급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세금 징수원이 가슴을 측정하고 유방세를 부과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찾아오자 난겔리는 이 부당한 세금에 맞서 자신의 가슴을 칼로 도려낸 후 이를 징수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그녀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아내가 죽자 그의 남편 치루칸단(Chirukandan)은 깊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난겔리의 장례식 날 불 속에 뛰어들어 따라 죽었다. 이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세는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가 살던 곳을 사람들은 ‘물라치파람부(Mulachiparambu)’로 불렀는데, 그 쪽 말로 ‘젖가슴 여인의 땅(land of the breasted woman)’이라는 뜻이라 한다.

    인도의 이 전설 같은 난겔리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120년 전인 1900년대 초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의 영월 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록 ‘유방세’는 아니었지만, 세금 같기도 하고 벌금 같기도 한 괴이한 명목으로 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수탈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자.

    [사진] 난겔리의 실화를 다룬 인도 영화 ‘Mulakaram-breast tax’의 한 장면. 아래 유튜브 주소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s://youtu.be/Bg0h7XM_7zA

    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

    金樽美酒千人血 금 술잔의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 화려한 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촛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 사또의 잔칫상 머리에서 읊은 이 시는 우리 역사상 탐관오리 수탈을 비판하는 최고의 시로 기록될 것이다. 운(韻)도 운이지만, 기막힌 비유를 통해 변사또의 학정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탐관오리는 우리 역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문학 작품에는 『춘향전』의 변 사또가 대표적 인물이라면, 역사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고부 군수 조병갑이 대표적일 것이다. 한국사 수업 시간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을 다룰 때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불효세, 불목세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면 잡아가서 불효세를 걷고, 부부 싸움이라도 벌어질라치면 잡아다가 가정이 화목치 못하다하여 불목세를 걷기도 했단다.”

    학생들은 조병갑이 필요도 없는 만석보를 만들어 놓고 비싼 물세를 걷었다는 사실보다 불효세와 불목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였고 또 분노했다. 아무리 수령이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는 임무를 띠었다고 하지만, 불효·불목세는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런 해괴한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농민들의 봉기에 대해서도 쉽게 수긍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업을 하면서도 나는 불효세, 불목세를 실제 걷었는지 반신반의했다.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이런 저런 개설서에서 본 것이지 스스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효세, 불목세는 분명히 존재했다.

    2008년 4월 수집한 자료 중에 흥미로운 장부가 한 점 있다. 표지 가운데 세로로 ‘光武九年甲辰十月十六日(광무 9년 갑진년 10월 16일)’이라고 적혀 있고, 그 왼쪽에 역시 세로로‘寧越郡守姜鳳元勒奪民贓記(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로 되어있다. 제목만 놓고 보면 영월군수 강봉원이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수탈한 내용을 기록한 장부다. 실제 장부에는 불효세, 불목세를 포함하여 별의별 내용의 수탈상이 나온다. 대략 50페이지 정도의 책자 형태로 묶여 있는 이 장부 안에는 수탈의 내용이 모두 한문으로 필사되어 있는데, 극히 일부분의 경우에는 한글도 섞여 있다. 글씨체는 일정하여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인다.

    [사진] 『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의 표지. 가로 19cm, 세로 25cm 크기다. (박건호 소장)

    나는 흥미를 끄는 이 정체불명의 장부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그 진위 여부부터 검토해 보았다. 옛 기록물들을 다룰 때 제일 먼저 거쳐야 될 과정이다.

    먼저 강봉원이 실존인물이었는지의 여부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안타깝게도 ‘강봉원(姜鳳元)’ 이름으로 단 한 건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 이 문서의 신빙성을 의심했던 이유다. 그런데 나중에 본 『승정원일기』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다. 『승정원일기』가 『조선왕조실록』보다 방대한 기록이라더니 정말로 그랬다. 강봉원, 그는 실제로 1904년경 강원도 영월군수로 재직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강봉원은 단종릉인 장릉(莊陵) 참봉을 지낸 후 홍릉 이전을 위해 설치한 천릉도감 감조관(遷陵都監 監造官)을 거쳐 비서원 승(丞)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임인년, 즉 1902년 고종 39년 6월 23일(양력 7월 27일) 영월군수에 임명되었고, 2년 뒤 갑진년인 1904년 고종 41년 12월 13일(양력 1905년 1월 18일)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영월군수로 근무한 기간은 대략 2년 6개월 정도 되는 셈이다.

    이 장부가 작성된 시점은 강봉원이 영월군수를 거의 마칠 즈음이었던 광무 8년 갑진년 1904년 10월 16일인데, 이 날짜가 음력인지 양력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관행상 음력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음력 10월 16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1904년 11월 22일이다. 그러므로 이 장부는 영월군수 강봉원이 임기를 마치기 대략 두 달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표지에 기록된 작성 시기에 오류가 있다. 이 장부 표지에 ‘광무 9년 갑진년 10월 16일’에 작성했다고 썼는데, 광무 8년이 1904년 갑진년이고 광무 9년은 1905년 을사년인데, 서로 맞지 않다. 정황상 이 장부 표지의 ‘광무 9년’은 ‘광무 8년’의 오기로 보인다.)

    강봉원이 1904년 갑진년 즈음 영월군수로 근무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이하 『늑탈민장기』)에 적힌 수탈 기록에 대한 신빙성 여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일 꾸미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불철주야 군민의 일을 살폈던 영월군수를 모함하는 장부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민중이 항상 선한 존재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강봉원은 억울하게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역사 기록들을 찾아서 면밀히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그 결과 내린 결론!

    이 장부 속 수탈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단순히 군수를 음해하기 위해 지어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총 7개면, 57개 마을, 227명의 사람들이 당한 수탈의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다. 그리고 수탈 내용을 기록할 때 각 마을마다 이름 밑에 마을의 책임자인 ‘존위(尊位)’와 ‘두민(頭民)’의 이름을 먼저 밝힘으로써 마을 책임자들의 확인을 거쳐 기록된 것임을 드러냈는데, 일종의 이런 ‘증언 실명제’는 기록의 신빙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둘째. 당시 영월군수 강봉원에 대한 치적평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1900년대 초반 당시 신문들에는 관찰사의 관할 지역 군수에 대한 간단한 치적평과 함께 상중하의 근무 평가가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영월군수 강봉원에 대한 평가는 1902년, 1903년, 1904년 해가 거듭될수록 평이 나빠지고 있다.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부임 첫 해를 결산하는 평, 즉 1903년 2월 19일자에 실린 평은 “정귀유항(政貴有恒)하고, 치고무자(治固無疵)”라 하여 꽤 좋은 편이다. ‘정치는 항상성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고, 다스림은 본디 흠이 없다’는 뜻이다. 다만 그 보도 일주일 전 신문기사를 보면 영월에서 중앙에 납부해야 할 세금 납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1개월 감봉 처분에 처한다는 탁지부 공고가 실려 있기는 하다. 전국적으로 영월군수를 포함하여 6개 지역의 군수가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근무에 대한 전체 평가는 괜찮은 편이니 저 정도는 봐주기로 하자.

    1903년을 결산하는 1903년 11월 12일자 신문에는 어떤 평가가 실려있을까? 여기에서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비옥지망(緋玉之望)이 자별(自別)’하다라고 하여 그의 출세지향적인 성향의 한 단면을 암시하고 있다. 해석하면 ‘당상관 관복에 대한 꿈이 본디부터 남다르다’는 뜻이다. 강봉원의 이 해의 근무 성적은 신문에는 없고 『승정원일기』에 따로 실렸데 이에 따르면 이해 강봉원의 근무성적은 중(中)으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내부 대신서리(內部大臣署理) 김규홍이 황제에게 1903년 그 해 전국적으로 근무 성적 중(中)을 받은 군수를 보고하고 있는데, 영월군수를 포함하여 전국 23개의 군수명이 실렸다. 군수 대부분의 근무 성적이 상(上)인데 중(中)은 그렇게 흔치 않았으므로 이를 따로 보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후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1904년의 근무 성적은 의미 심장하다. 1905년 3월 4일자 [황성신문]에는 강원도 군수 총 27개군의 군수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7명의 군수는 상(上), 6명의 군수는 중(中), 1명의 군수만 하(下)이다. 나머지 3개 지역은 군수가 부임하지 않은 곳 2개 군, 봉고(封庫) 처분을 받은 상태의 1개 군으로 평가에서 배제되었다. 그런데 성적을 받은 24개 군 중 유일하게 하(下)의 평가를 받은 군수가 우리 글의 주인공 영월군수 강봉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단 8자의 짧은 평은 『늑탈민장기』가 결코 조작된 것이 아님을 증언해주고 있다.

    “可畏非民 惟患不公”

    두려워할만한 것은 백성이 아니겠는가. 오직 공정하지 못한 것을 걱정할 뿐!

    도대체 영월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평가 점수 중(中)을 받기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강봉원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혹평과 함께 유일하게 하(下)의 평가를 받은 것일까?

    [사진] 『황성신문』 1905년 3월 4일자 ‘강원도 관하 군수 치적’ 부분. 붉은 테두리에 강봉원에 대한 ‘可畏非民 惟患不公’라고 쓴 평가가 보인다. 제일 마지막의 ‘下’는 근무 성적이다.

    그렇다면 『늑탈민장기』는 누가 만들었고, 또 무슨 목적으로 작성했을까?

    어떤 형태로든지 영월군민들은 당시 군수로부터 가혹한 수탈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부에는 7개면 약 57개 마을의 수탈 내역이 나온다. 내용을 보면 수탈한 자가 아니라 수탈당한 자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 분명하다. 마을마다 책임자인 두민(頭民)과 존위(尊位) 2명의 이름을 앞세워 수탈 내용을 적고 있다. 일부 마을은 두민과 존위를 합친 듯한 명칭인 ‘두존(頭尊)’의 이름으로 한 명만 적힌 곳도 있다. 각 마을에서 피해를 본 개인 개인의 수탈 내역뿐만 아니라 그 마을 전체에 대한 수탈 내역도 동시에 기록했다.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수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항목은 ‘熊獵時洞中浮費(웅엽시동중부비)’라 하여 곰 사냥 시 소요된 비용을 마을 전체에 부과한 것이다. 이 항목은 대부분의 마을에 공통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총 227명의 개인별 수탈 내역이다. 227명은 대부분 본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름이 그 사람의 직업으로 불린 이들도 여럿 보인다. 예를 들면 용연리의 ‘김가(金哥) 바듸쟝이’, 양연리의 ‘김오위장(金五衛將)’, 군하의 ‘도우탄(屠牛坦; 소를 잡는 백정)’, 진동리의 ‘兩沙工(양사공;두명의 사공)’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경우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늑탈민장기』는 영월군 관내의 7개면, 57개 마을의 책임자들인 두민과 존위들이 나서서 공동으로 수탈 내용을 조사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주동자가 어떤 인물인지 역시 알 수 없다. 그가 평범한 농민이었는지, 아니면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처럼 그 지방의 몰락 양반 신분의 지식인이었는지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장부를 작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장부를 군수에게 올려 시정을 요구하기 위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수탈 내역이 너무 적나라해서 군수에게 올렸다가는 다시 이것을 빌미로 더 수탈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군수 위의 어떤 인물에게 바쳐 수탈상을 고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구였을까?

    먼저 중앙에서 지방관들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한 암행어사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지방관들의 수탈이 심할 때마다 정부는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암행어사에게 전달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장부가 만들어진 1904년 당시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33년(1896년)에 나이 74세의 정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암행어사의 마지막 기록이다.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1899년 윤현섭을 충청남도 어사에 임명했다는 봉서가 존재한다. 봉서가 진품이라면 실질적으로는 윤현섭이 마지막 어사인 셈이다. (위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인용)

    그렇다면 이 장부는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하는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릴 목적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찰사는 수령을 감독하는 자리이자 수령의 직속 상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부 내용은 관찰사에게 실제 보고된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위에서 본 1903년과 1904년 근무 평가의 변화 때문이다. 1904년 10월 16일 작성된 이 장부 이전에 강원도 관찰사의 영월군수에 대한 근무평가가 중(中)이었다가, 이 장부 이후에 이례적으로 하(下)로 바뀌게 된 것은 이 장부에 담긴 적나라한 수탈 내용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지어 관찰사가 군수에 대해 “可畏非民 惟患不公”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평가를 한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든 관찰사에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근거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영월군수에서 물러난 강봉원의 이후 행적도 이상하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영월군수를 마치고 한성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중추원은 당시 황제의 자문기구였다. 임명 날짜는 1905년 고종 41년 갑진(1904) 12월 13일(양력 1월 18일)이었다. 그런데 단 3일 뒤인 12월 16일(양력 1월 21일) 그를 ‘의면(依免)’ 즉 의원면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옥지망(緋玉之望)이 자별(自別)’하다고 평가받았던 그가 왜 3일 만에그 자리를 그만 두었던 것일까? 혹시 그가 자행한 가혹한 수탈 행위가 관찰사를 통해 어떻게든 중앙정부에 의해 인지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 속에서 불안함과 불편함을 느꼈던 그는 스스로 자리를 던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다양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영월 군민들이 작성한 『늑탈민장기』가 실제 책임있는 자리에 있던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여부와, 전달되었다면 그것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장부가 영월군수의 근무 평가와 인사 조치에 실제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탈, 그 기발함에 대하여

    『늑탈민장기』는 대한제국기 군수의 백성 수탈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명목으로 수탈이 이루어졌다. 장부에는 영월 군내의 백성들을 면 별로, 그리고 그 아래 마을 별로 분류하여 수탈 내용을 기록했는데, 모두 227명이다. 개인별 수탈 내용 기록 방식은 제일 위에 수탈당한 액수를 적고, 그 밑에 사람 이름이 적혀 있고, 이름 밑에는 수탈 내용 혹은 수탈 이유가 적혀 있다. 수탈 내용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勒以(늑이)…..’로 시작하는데, ‘勒(늑)’은 ‘강압하다’, ‘억압하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런 명목으로 강압하여 걷어갔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예를 들면 천상면 거산리에 살던 박응천은 ‘勒以不孝(늑이불효)’, 즉 불효했다는 죄목으로 엽 610량, 비 250량을 수탈당했다. 같은 마을의 박원대는 ‘勒以不睦(늑이불목)’, 즉 화목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엽 450량, 비 200량을 내야 했다.

    [사진] 『늑탈민장기』의 천상면 거산리 부분이다. 붉은 테두리 부분에서 박원대는 불목했다는 이유로 엽 450량, 비 200량을 네 번째 인물 박응천은 불효했다는 이유로 엽 610량, 비 250량을 바쳤다는 부분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이 생겼다.

    위의 박응천과 박원대의 수탈된 양에도 나와 있듯이 항상 항목을 둘로 나누어 ‘엽(葉) 000량’과 ‘비(費) 000량’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거의 대부분이 두 개의 항목으로 되어있고, 엽만 나오고 비가 없는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엽’은 엽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비’는 무엇일까?

    필자가 자문을 구하고 유추해 본 세 가지 가능성이다.

    먼저 ‘엽’은 현금, ‘비’는 현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데 최대 문제는 그러면 왜 항상 ‘엽’보다 ‘비’가 적은가 하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물로 뺏어간 것이 더 많을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엽’이 없이 ‘비’만 있는 경우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없다.

    두 번째 가능성은 ‘엽’은 걷은 돈의 액수이고. ‘비’는 ‘사용한 비용’으로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수탈한 것 중에서 군수가 사용해버린 액수로 볼 수 있지 않겠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엽’이 100냥, ‘비’가 50냥이면 100냥을 걷어 그 중 50냥을 비용으로 써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도 큰 허점이 있다. 그것은 군수가 사용 내역이나 비용을 아는 것이지 백성들 입장에서 그 정보에 접근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군민들은 수탈당한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내역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는 당시 조선시대 세금 징수 관행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조선시대 세금을 걷을 때는 흔히 원래 내야 하는 세금 이외에 ‘정비(情費)’라고 수수료 명목으로 일정 액수를 따로 걷는 것이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수수료를 ‘인정(人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필자는 이 세 번째 설명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세금을 걷을 때 걷던 일종의 부가세 혹은 수수료 관행을 백성들을 수탈할 때 그대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물긴 하지만 ‘엽’보다 ‘비’가 많은 경우가 있어 세 번째 경우도 확신할 수는 없다. 이 부분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과 질정을 바란다. 일단 아래의 논의는 이 세 번째 가설을 전제로 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월군수의 지방민 수탈 내용을 살펴볼 차례이다. 수탈 내용이 너무 많아 편의상 몇 가지 양상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첫 번째. 『늑탈민장기』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수탈 형태는 향직(鄕職)을 맡기고 그 명목으로 돈을 걷는 것이었다. 그 자리는 주로 ‘진신(縉紳)’, ‘장의(掌議)’, ‘원장(院長)’, ‘통정(通政)’, ‘향장(鄕長)’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직위라도 가격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좌수(座首)를 뜻하는 ‘향장(鄕長)’의 경우 옥동리의 방학경은 엽 100량, 비 30량인데 비해, 신천리의 김양운은 향장을 엽 50량, 비 30량, 옹산리 서학철은 엽 80량, 비 50량이다.

    향직 파는 것과 비슷한 유형으로는 공명첩을 팔고 돈을 걷는 경우도 있다. 상동면 녹반리의 신봉민은 ‘勒以參奉空名帖紙(늑이참봉공명첩지)’, 즉 참봉 공명첩지를 강제로 떠맡으면서 엽 250량, 비 150량을 뺐긴 경우이다. 조선후기 백골징포는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장부에는 이와 유사한 사례도 보인다. 신천리의 최성포는 ‘身死白骨勒以通政(신사백골늑이통정)’ 즉 최성포는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인데, 통정을 떠맡겨 그의 남은 가족들이 엽 100량, 비 50량을 수탈당한 경우이다. 외직리의 이덕수와 윤흥화는 ‘勒以通政不給帖紙(늑이통정불급첩지)’,즉 통정 자리로 돈을 뜯어가면서도 그 임명장인 첩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고, 평동리의 홍성택은 ‘再次勒以縉紳(재차늑이진신)’인데, 진신을 두 번이나 팔아 먹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엽 300량, 비 50량이었는데, 두 번째는 미안했던지 엽 50량을 걷어갔다. 이런 직위 장사의 경우 사람을 가리지 않고 팔았음을 암시하는 내용도 있다. 용연리의 이춘일은 ‘使令之子勒任鄕長帖(사령지자늑임향장첩), 즉 사령의 자식에게 향장첩을 떠맡겨 엽 100량, 비 50량을, 역시 같은 용연리의 송학계는 ’賣酒人勒任鄕長帖(매주인늑임향장첩)‘ 즉 술 파는 사람에게 향장 첩지를 팔아 엽 50량, 비 50량을 뜯어 갔다는 내용이다.

    자리 장사로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양리의 엄성배는 ‘勒以掌議闕焚香(늑이장의궐분향)’, 즉 장의로서 분향을 안했다 하여 엽 400량, 비 300량을, 화라리의 김병식도 ’院長帖紙出給還收勒以闕焚香(원장첩지출급환수늑이궐분향), 즉 원장 첩지의 발급과 환수 시에 분향을 빼먹었었다 하여 엽 200량, 비 80량을 납부해야만 했다. 어떤 첩지를 받거나 내놓을 때 향교나 서원 같은 데서 분향을 하는 풍습이 있었던 듯한데, 그걸 빠뜨렸다고 돈을 강탈한 경우다.

    두 번째. 풍속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수탈하는 양상이다. 불효와 불목으로 수탈한 사례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그냥 넘어간다. 불효와 불목 말고도 많이 등장하는 것이 ‘음행(淫行)’ 혹은 ‘음행잡기(淫行雜技)’이다. ‘음행’은 음란한 행동을 의미하고, ‘잡기’는 투전이나 골패 등 잡스러운 여러 가지 노름을 의미한다. ‘음행잡기’는 요즘말로 ‘주색잡기’로 보면 될 것이다. 묵동리의 정무홍은 음행잡기로 엽 600량, 비 250량을 바쳐야만 했다. 영월의 보덕사란 절도 이 수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보덕사의 승려 봉주와 처안은 ‘勒以用色(늑이용색)’의 죄목으로 각각 엽 400량·비 200량, 엽 600량·비 200량을 뺐겼다. 여기서 용색은 남녀의 성관계를 의미한다. 같은 절의 일성은 ‘勒以白米(늑이백미)’, 승려로서 백미 먹은 것이 잘못이었는지 엽 500량을 뺐겼다. 유전리의 최성집은 ‘勒以外孫奉祀(늑이외손봉사)’ 즉 외손인데 제사를 모셨다는 죄목으로 엽 2977량, 비 600량을 바쳐야만 했다. 녹반리의 최우현은 ‘勒以婢子與成事(늑이비자여성사), 즉 천민인 노비의 아들과 함께 어울려 일을 꾸몄다 하여 엽 500량, 비 200량을 뜯겼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 이미 10년이나 지난 때였는데, 신분를 나누는 관습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음행 또는 음행잡기를 이유로 정계현과 정무홍(왼쪽 사진), 외손봉사를 했다고 최성집(가운데), 용색과 백미를 빌미로 보덕사 산승들이(오른쪽 사진) 수탈당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과부 보쌈’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

    ‘과부 업어가기’로도 불리는 ‘과부 보쌈’은 남정네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는, 일종의 약탈혼 풍습이다. 과부 보쌈에는 과부 본인이나 과부의 부모들과 내약 끝에 보쌈해가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합의 없이 보쌈하여 약탈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은밀히 과부와 정을 통해오다가 혼인을 하기 위하여 보쌈의 형식을 빌려 주변의 이목을 속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강제로 보쌈할 때는 사전에 과부의 거처를 탐지해두었다가 밤중에 침입하여 보쌈한 뒤 억지로 정을 통하여 배우자로 삼는다. 이럴 때 가끔 가족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는다. 이 밖에 소박맞은 여인이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른 새벽에 성황당에서 기다리다가 보쌈해가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과부 보쌈은 유교적 영향으로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여성의 경우 비록 남편과 사별하였다고 해도 재혼하지 말고 수절할 것을 강요당한 결과 파생된 풍습이다. 이렇게 보쌈이 과부의 재혼금지제도 속에서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진 이유는 노총각이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거나, 과부가 죽어 원귀가 되면 가뭄이 자주 들게 된다는 믿음이나, 노총각이 많으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관에서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쌈이 행해졌다고 해서 재혼금지의 제도가 실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부의 재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그러나 갑오개혁 10년 이후에 작성된 『늑탈민장기』에도 과부 보쌈이 ‘縛寡(박과)’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상동면 녹반리 김수여는 ‘勒以縛寡(늑이박과)’로 엽 1300량, 비 400량을 내야 했으며, 용하리 김사원은 ‘沿軍縛寡勒以進不告(연군박과늑이진불고)’, 즉 연군이 과부를 업어갔는데 관에 알리지 않았다 하여 엽 400량, 비 300량을 수탈당했다. 이 두 사례를 보면 ‘과부 보쌈’이 아무리 관행이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용하리 김사원이 과부 보쌈을 관청에 고하지 않은 걸로 처벌받았다면, 덕전리의 남일원도 무슨 일인가를 보고하지 않았다하여 처벌받았다. 남일원은 ‘逢賊進不官告勒以私獄(봉적진불관고늑이사옥)’ 즉 도둑을 만났는데 관에 고하지 않고 사사롭게 가두었다 하여 엽 1500량, 비 300량을 뜯겼다. 무슨 일이든 관청에 보고할 일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관의 먹이감이 되었던 것이다.

    네 번째, 『늑탈민장기』에 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勒以査問(늑이사문)’, ‘勒以存問(늑이존문)’이 있다. 예를 들면 상동면 녹반리의 안철호는 ‘勒以存問不應事(늑이존문불응사)’, 존문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엽 600량과 비 300냥을, 하동면 와인리의 황서집과 김서일은 모두 ‘勒以査問(늑이사문)’으로 각각 엽 60량·비 20량, 엽 50량· 비 20량을 바쳤다. 그렇다면 존문과 사문은 무엇일까?

    존문은 고을의 수령이 민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 지방 백성을 방문하던 일을 말하고, 사문은 수령이 어떤 사실을 밝히기 위해 조사하여 캐어 묻는 것을 말한다. 존문과 사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수령들이 이 존문과 사문을 백성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영월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학초 박학래(朴鶴來, 1864∼1942)가 쓴 『학초전』이 있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그의 자서전 성격의 이 책에는 조선후기 지방 수령의 수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존문과 사문이 그 한 형태임을 잘 보여준다.

    당시 조선국 정부에서 사람 쓰는 법은 돈이 있는 자에게 돈을 받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과 세록(世祿)이 주된 방법이었다. 나라에서 여러 대를 거쳐 관리를 하는 세록지가(世祿之家)에게 돈을 안 바치고 수령으로 오는 사람은 오백에 하나쯤 되었다. 인민의 원(怨), 불원(不怨)을 마치 고질병 보듯이 하거니와, 그 외 모두는 탐학이요, 겉모습은 관장이나 실제는 강도라 하기에 충분하였다……심지어는 사령과 장교를 비롯하여 군뢰, 면주인과 대주인까지 나서서 족쇄를 채우니 끝내는 잡힌 백성의 살림까지 힘닿는 대로 없는 것을 있는 대로 강탈하였다. 하다못해 얽을 방법이 없는 살림이 넉넉한 요부(饒富), 신사(紳士)는 사문사(查問事)니 존문(存問)이니 하여 불러 강탈하였다.

    다섯 번째. 동물과 관련된 수탈 사례도 다수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보자.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곰사냥 비용이다. 군수는 곰사냥에 소용되는 비용 명목으로 마을마다 정기적으로 돈을 걷었다. 다만 외직리의 경우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稱以猪皮價勒以洞中(칭이저피가늑이동중)’, 즉 돼지가죽 값으로 마을에 40량을 걷어갔다. 개인 수탈 사례도 보자. 예미촌의 정선오는 ‘雪中得獐勒以廘胎鹿尾鹿腎(설중득장늑이녹태녹미녹신)’, 즉 눈 속에서 우연히 노루를 주워 녹태, 녹미, 녹신을 취하였다 하여 엽 500량을 내야했고, 삼옥리의 정삼여도 ‘山豹食獐勒以鹿茸(산표식장늑이녹용)‘, 즉 산표범이 죽인 노루를 발견했는데, 녹용을 가져갔다 하여 엽 400량, 비 250량을 납부했다. 거석리의 김영근은 ‘砲手勒以猪皮不納(포수늑이저피불납)’, 즉 포수로 돼지가죽을 납부하지 않았다 하여 엽 240량을 빼앗겼다. 녹반리의 이성문은 ‘穽虎納官時勒以拔鬚事(정호납관시늑이발수사)’ 즉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잡아 바치면서 수염을 뽑았다 하여 엽 50량, 비 250량을 바쳤다. 호랑이 수염은 약용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기 이성문은 이를 뽑았을 것으로 보인다. 서면 용정상리의 손경필은 ‘小犢縊死勒以私屠(소독액사늑이사도)’ 즉 송아지가 목졸려 죽었는데, 그것을 사사롭게 도살했다하여 엽 200량, 비 600량을, 삼옥리의 정경화는 ‘사사아경늑이살인(死蛇兒驚勒以殺人), 즉 죽은 뱀으로 아이를 단순히 놀라게 한 일을 살인죄로 몰아 엽 2000량, 엽 500량을 걷어갔다.

    여섯 번째. 특별한 이유 없이 수탈한 경우도 꽤 있었다. 이럴 경우 보통 ‘무고늑탈(無故勒奪)’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수를 세어보니 녹반리 김재성 1건, 연중리 김이숙·유성오 2건, 연하리 장인서·엄남중 2건, 팔계리 유덕일·신사일 2건, 월휴리 신윤집 1건, 옹산리 엄치운 1건, 후평리 엄양숙·고성기·엄진여 3건, 북포리 엄의섬 1건, 북포하리 엄성후 1건, 세곡리 임홍근·신의서·엄사명·성명 미상자 2명 포함 총 5건, 공기리 고운서·김경관 2건으로 총 21건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은 늘 그런 것이었고, 백성들은 매(鷹) 앞에 던져진 새앙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학초전』에서 박학래가 토로한 다음 구절은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관청이 인민의 부모란 말은 거짓말이요, ‘맑은 하늘이 죄 지은 자 벼락친다’는 말도 거짓으로 벼락 치는 것 보지 못하였다……..방백 수령이라 하는 사람은 때를 가리지 않고 백성을 털어먹는 강도의 괴수이다.

    일곱 번째. 족징(族徵)의 사례도 몇 건 보인다. 보통 어떤 이가 세금을 못내고 도망가면 이웃에 세금을 떠넘겨 걷는 것이 인징(隣徵), 친척에게 떠넘기는 것이 족징(族徵)인데, 이 장부에는 인징은 한 건도 보이지 않고, 족징도 2건밖에 보이지 않는다. 연중리의 김면숙은 족징으로 엽 1000량, 비 400량을, 연하리 원화숙도 족징으로 엽 500량, 비 200량을 빼앗겼다. 연좌제가 적용된 인징, 족징은 조선후기 백성을 괴롭힌 대표적인 폐단이었는데, 대한제국기 영월에서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이것이 이 영월 지방의 특수성인지 아니면 대한제국기 전체적인 현상인지는 좀 더 살펴볼 일이다.

    여덟 번째. 무덤, 비석 등에 관련하여 돈을 뜯어낸 경우들도 보인다. 효가 최고의 가치였던 당시 조상의 무덤을 명당에 모시는 것도 효의 실천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의 묘자리에 몰래 투장하는 일이 잦았고, 그로 인해 묘자리를 둘러싼 소송인 산송도 많이 일어났다. 『늑탈민장기』에도 이런 세태가 나타나 있다. 서면 용정상리 김응도는 ‘勒以山訟(늑이산송)’, 즉 산송을 이유로 엽 400량, 비 400량을 내야 했다. 하동면 내리의 정인용은 ‘他人偸塚自官掘去而勒捧堀價官又置塚而又受人之賂使之偸塚’ 즉 어떤 사람이 투장한 것을 정인용이 관으로부터 비용을 받고 이장을 했는데, 무덤을 그대로 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다시 뇌물을 받고 그 무덤을 몰래 쓰게 했다는 이유로 엽 100량, 비 60량을 냈다. 북면 마곡리의 전씨 문중은 비석에 글을 새기는 작업 중에 실수로 그 비석이 깨지자 그것을 꼬투리 잡아 글자 새기는 사람에게 돈을 뜯었다는 죄목으로 엽 400량, 비 200량을 내야 했다. 하동면 내리 마을 주민들은 엽 1000량을 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洞中木碑過客昏畵而勒奪(동중목비과객혼화이늑탈)’, 즉 지나가는 과객이 저녁에 마을에 있는 나무 비에 그림을 그려 비가 훼손되었다는 이유였다. 나무로 된 비가 어떤 비인지는 알 수 없다. 승당리의 유치언은 ‘以他人破碑反搆子孫勒奪(이타인바비반구자손늑탈)’로 엽 230량, 비 150량을 빼앗겼다. 다른 사람이 비석을 파손했는데도 도리어 비석과 관련된 자손이라는 이유로 엮여 돈을 뜯긴 경우이다. 비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였을까?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무덤과 비석은 보통의 기물이 아니라 특별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아홉 번째. 『늑탈민장기』에는 가혹한 수탈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비극적 결과에 대한 부연 설명도 하고 있는 대목도 간혹 보인다. 가혹한 수탈로 백성의 삶이 파탄에 이르렀음을 적극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용하리의 김사원은 연군(沿軍)이 과부를 보쌈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처벌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연 설명에서 ‘그 집의 가산을 뺏고 가혹하게 장을 쳐서 죽음에 이르렀다’로 되어있다. 그는 결국 돈만 뺏긴 것이 아니라 곤장을 맞고 죽었던 것이다. 묵동리의 정주보는 족징으로 돈을 수탈당했는데 이후 ‘재산을 탕진하고 구걸하고 돌아다니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적혀 있다. 외직리의 박상근은 ‘향장’ 첩지를 사느라고 500량을 뺏기고, ‘丐乞移去(개걸이거)’, 즉 동냥하다가 살던 곳을 떠났다. 북면 제하리의 엄일원은 이중보와의 농사일 관련 소송을 이유로 엽 500량, 비 300량을 뜯기고 역시 ‘개걸이거’하였다. 이런 수탈을 보노라면 가난이 죄인지, 아니면 죄를 지어 가난한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마지막 열 번째. 기타 눈에 띄는 몇 가지 황당한 사례들이다.

    하동면 대야리의 김운경은 엽 150량, 비 750량을 냈는데 ‘勒以諺文告祝(늑이언문고축)’, 즉 한글로 된 고축문을 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김운경의 경우 드물게 엽보다 비가 훨씬 많은데 엽 1500량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덕리의 문덕노는 ‘三十少年勒以壽帖(삼십소년늑이수첩)’ 즉 30세 소년인데 수첩을 팔아 엽 300량, 비 100량을 뜯겼다. 수첩(壽帖)은 축수(祝壽)하는 글을 모은 시첩(詩帖)을 말하는데, 당시 문덕노의 나이는 고작 30세였다. 30세가 당시로는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님에도 의도적으로 ‘소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흥미롭다. 수첩을 사기에는 터무니없는 나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강조한 것이다.

    『늑탈민장기』에서 제일 황당한 수탈은 와인리의 주여옥· 김경보의 사례일 것이다. 이들이 수탈당한 이유는 장부 전체에서 가장 긴데 아예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自己掘破之畓川漁隨水以生故捉漁數尾矣러니傳令內汝矣兩人善漁應知水國之事矣黿參軍鰲主簿卽爲率待云하고勒奪.”

    해석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주여옥과 김경보 두 사람이 자신들의 논옆 개천에서 물고기를 많이 잡았던 모양이다. 이에 관청에서 내려온 전령에 이르기를, “너희 두 사람은 물고기를 잘 잡으므로 마땅히 수국(水國)의 일을 잘 알 것이므로 원참군과 별주부를 즉시 데려와 대령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원참군과 별주부는 토끼전에 나오는 동물로 각각 남생이와 자라를 의미한다. 어떻게 데려올 수 있었겠는가? 이리하여 주여옥과 김경보는 합쳐 엽 140량, 비 70량을 뜯기고 말았다. 그 기발함의 끝은 어디였을까?

    [사진] 왼쪽은 한글로 된 고축문을 읽었다는 이유로 수탈당한 김여행, 가운데는 30세 나이에 수첩을 강매당했던 문덕노, 오른쪽은 물고기를 잘 잡는다고 수국에 가서 원참군과 별주부를 대령해오라는 지킬 수 없는 명령으로 수탈당한 주여옥과 김경보에 대한 내용이다.

    도대체 얼마나 수탈한 것일까?

    지금까지 『늑탈민장기』 속의 기막힌 군민 수탈상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공식적인 역사 어디에도 강봉원의 수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직책으로 근무했는지만 나온다. 이 엄청난 수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별 대수롭지 않게 전해져오는 이 장부 한 점은 공식적인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영월군민들이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대한제국기 영월군에서 자행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백성 수탈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월군민들은 기록을 통해 수탈자를 응징한 것이다. 누구의 말처럼 최고의 응징은 기록이다.

    이제 수탈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늑탈민장기』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는 영월군수의 수탈 총액이 집계되어 있다. 총 엽 75,817량, 비 25,343량이다. 이를 다 합치면 99,660량, 대략 10만량이다. 그렇다면 1904년 기준 10만량 정도의 돈의 가치는 대략 어느 정도일까?

    그 시대의 경제사가 전공이 아닌 필자는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1904년 토지 매매 문서를 검색하거나 필자가 소유한 문서들을 보고 토지 평균 매매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돈의 크기를 대략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당시 노비 매매 문서를 통해서 노비 가격을 계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저 토지 매매 문서를 분석해보자. 인터넷에서 ‘광무8년 갑진년’로 검색해서 꽤 많은 고문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토지 문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위 ‘두락(斗落)’은 우리 말로 마지기라고 하는데, 한 말(약 18리터)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뜻한다. 논 1마지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부분의 경우 200평으로 본다. 밭의 경우도 지역마다 다 다르나 200평을 한 마지기로 보는 지역이 43%, 100평을 한 마지기로 보는 지역이 24%로 지역별 편차가 다소 큰 편이다. 여기서는 논과 밭 모두 1마지기는 200평으로 계산해보겠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한 1904년 갑진년의 토지 매매 문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안동 삼산종가 절강별소(浙江別所) 토지매매 명문: 총 논 6마지기의 토지 30량에 매도
    안동 삼산종가 노비 화득에게 발급한 토지매매 명문: 밭 6마지기, 논 2마지기 총 230량
    안동 동선면 서흘동 돈승의 친형에게 발급한 토지매매 명문: 4마지기 350량
    안동 송천원의 김석이라는 인물이 탑동댁에 발급한 토지매매 명문: 1마지기 60량
    안동 서면 김찬경이 김석규에게 발급한 토지 매매 명문: 밭 14마지기, 논 6마지기 돈 440량
    봉화 상전 김씨가 노비 명금을 통해 발급한 매매 명문 (매수인 미상): 논 4마지기 250량
    고령 도암대종회의 토지 매매 명문(매수자 미상); 논 2마지기 80량
    청주 문의면 율현 논 3마지기, 밭 8마지기를 이생원에게 이순화가 발급한 문서: 450량
    진안 마령면 오덕윤이 방매한 토지 매매 명문: 논 2마지기 180량
    필자가 소장한 1904년 갑진년 토지 매매 문서도 몇 장 있다.
    필자소장 문서1. 정씨가 권씨에게 판 땅 밭 10마지기 170량
    필자소장 문서2. (익산지역으로 추정)한량 최만동이 매수자 미상에게 판 논 3마지기 350량
    필자소장 문서3, (익산지역으로 추정) 한량 최경칠이 매수자 미상에게 판 논 3마지기 350량
    필자소장 문서4. (익산지역으로 추정) 송국언이 매수자 미상에게 판 논 5마지기 400량

    이 문서들을 종합해보면 전체 79마지기에 총 3,340량인데, 이를 단순 평균하면 한 마지기당 42.27량이다. 한 마지기 200평 정도의 땅을 사는데 40량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10만량으로는 살 수 있는 땅은 당시 2,500마지기로 500,000평 정도가 된다.

    이어서 노비 혹은 인신 매매 가격이다. 노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도 그 이후에 거래된 노비 매매 문서도 종종 발견된다. 필자가 소장한 1894년 이후 관련 문서가 세 장 있는데, 먼저 광무 3년 1899년 차영평이란 주인이 12세 비(婢) 고판녀를 판 문서에는 그 가격이 450량으로 적혀 있다. 『늑탈민장기』가 작성되기 1년 전인 광무 7년 1903년 계묘년 박종하가 장천근에게 21세의 윤금이를 150량에 판 문서도 있다. 같은 해인 1903년 선산에 거주하던 이봉준이 자신의 여동생인 13세의 분순을 다른 이에게 120량을 받고 팔았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노비 매매라고 볼 수는 없다. 『늑탈민장기』에도 노비 매매에 대한 기록이 엿보인다. 직동리의 김상하는 계집종의 아들 한 명을 500량에 팔았는데 70량만 주고 430량을 떼먹었다 하여 엽 400량, 비 200량을 뜯겼다. 1904년 영월에서 팔린 노비 가격이 500량이라는 것이다. 많지는 않지만 위 문서 속 광무 연간 4명의 거래가격이 총 1,220량이니 한 사람의 노비 가격이 평균 305량쯤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토지 가격과 노비 가격은 당시 영월군수가 수탈한 10만냥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 위해서 매우 거친 방식으로 산출한 것이다. 토지의 위치, 토질, 등급도 고려하지 않았고, 노비의 나이, 성별 등도 고려하지 않았다. 정밀하게 1904년 당시 물가나 땅값을 구하는 것은 또 다른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

    [사진] 『늑탈민장기』가 작성될 무렵 작성된 다른 자료들을 통해 10만량의 가치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위는 필자 소장 자료로 1903년 광무 7년의 이봉준이 여동생 분순(오른쪽 붉은 테두리 부분)을 120량(왼쪽 붉은 테두리 부분)에 인신 매매한 문서이다. 아래는 1904년 갑진년 삼산종가 종택에서 노비 화득(花得)에게 발급한 토지매매 명문으로 밭 6두락, 논 2두락(오른쪽 붉은 테두리 부분)을 230량(왼쪽 붉은 테두리 부분)에 판다는 내용이 보인다. (https://blog.naver.com/hyuni1121/221530991877 자료)

    배견루(拜鵑樓)에 올라

    독자들은 『늑탈민장기』를 들여보느라 머리가 아프셨을 것이다. 장부 속에 적힌 많은 한자(漢字)들도 여기에 한몫 했을 것이다. 또 영월군수의 학정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식힐 겸 강원도 영월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영월은 군수 강봉원만 살았던 곳이 아니다. 영월에는 그 곳만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이 있고, 또한 그 곳은 삶을 억척같이 지탱해 왔던 평범한 영월 사람들의 터전이다.

    지금 영월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인 청령포부터 둘러보자. 청령포는 조선시대 단종이 유배된 곳이다.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밀려 강제 선위(禪位)하고 이듬해 15세의 나이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이곳으로 유배된 것이다.

    영월에는 청령포 말고도 낙화암이 있다. 유배된 지 2년 뒤인 1457년 가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단종은 영월 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겨 기거하고 있던 중 금성대군이 일으킨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나면서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가지고 온 왕방연이 감히 사약을 올리지 못하고 오열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던 공생(貢生; 향교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목을 졸라 단종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노산군을 모시던 다섯 시녀들이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낙화암은 부여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청령포와 낙화암을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장릉(莊陵)을 들러 단종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 도리겠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누구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용감하게 나서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은 강봉원이 참봉으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장릉 참배를 마친 후 둘러볼 곳은 그 인근에 있는 보덕사라는 절이다. 『늑탈민장기』에서 보덕사 3명의 승려가 백미(白米), 용색(用色)의 일로 수탈당했다고 앞에서 설명했던 바로 그 절이다. 보덕사는 686년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발본산 지덕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714년 혜각선사(蕙覺禪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1456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 오고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중종 연간에 동을지산 기슭에서 단종의 가묘(假墓)가 발견된 이후 절의 이름은 노릉사(魯陵寺)로 바뀌었다. 이름을 통해 단종의 원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보덕사는 숙종 31년인 1705년 단종 장릉(莊陵)의 원찰로 공식 지정되면서 이름이 보덕사로 바뀌었다. 한선선사와 천밀선사에 의해 단종의 명복을 비는 큰 범종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이 종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보덕사가 단종의 원찰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산신각이다. 이 절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산신각인데, 산신각에는 사후에 태백산 산신령이 된 백마를 탄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영월에 부임해 온 어느 수령이 업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백마를 타고 동쪽 숲 속으로 가던 단종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군수가 그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자, 단종이 대답하기를 산신이 되기 위해 태백산 가는 길이라고 했다. 백마를 탄 단종 영정이 그려진 이유다.

    영월에서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창절서원(彰節書院)이다. 창절서원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곳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박팽년·성삼문 등 사육신과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숙종 11년(1685)에 홍만종의 건의로 지어졌으며, 사육신 외에도 엄흥도, 박심문 그리고 생육신 중 김시습과 남효온 등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숙종 35년(1709)에는 영월 유생 엄야영 등의 소청에 따라 ‘창절사(彰節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사액서원이라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600여 서원이 철폐될 때도 창절서원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창절서원의 정문에 해당하는 문루가 배견루(拜鵑樓)이다. 배견루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2층누각의 팔작지붕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정문은 외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 창절서원의 정문은 특이하게 2층 누각 형태이다. 여기서 ‘배견(拜鵑)’의 뜻은 ‘두견새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단종이 죽은 후 두견새가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서원이 단종에게 충성과 절개를 지킨 이들을 모신 곳이기에 단종을 향해 머리 숙여 절한다는 문루 이름은 서원 명칭과 썩 잘 어울린다.

    그런데 독자들께서는 좀 의아해하실 것이다. 앞에서 영월군수의 학정을 고발하다가 갑자기 영월로 여행을 떠나 온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그건 단순히 머리를 식히거나 화를 삭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영월이 가진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만, 영월 여행의 진짜 목적은 이번 글의 주인공 강봉원이 남긴 한시 판각이 창절서원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이기도 하다. 이 한시를 보기 위해 허위허위 달려온 것이다. 이제 배견루를 마주보고 서서 지긋이 눈을 감아보자. 그러면 어느듯 117년 전 갑진년 그때로 돌아가 이 곳을 찾은 강봉원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쉿! 영월군수 납시었다.

    [사진] 창절서원의 문루인 배견루의 모습. (https://blog.naver.com/knsinc/221245732700)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904년 이른 봄 영월군수 강봉원은 창절서원을 찾았다. 해마다 봄 가을 이 곳을 찾아 제례를 지내는 것이 영월군수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해는 부임한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강봉원은 그동안 한 번도 제례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게다가 장릉의 비각을 개수하는 일에도 성심을 다했다. 얼마 전인 1903년 11월 군수 치적평에서 ‘비각동역(碑閣董役)은 가견각근지성(可見恪勤之誠)’이라는 평가도 받지 않았던가. 비각 개수의 역을 감독함에 있어 부지런히 힘쓴 정성을 가히 볼 수 있다는 흐뭇한 평이다. 영월은 충절의 고향이므로 청령포 비각의 수리·보수와 장릉· 창절서원을 찾아 제례를 지내는 일에 온 열정을 쏟았던 것이다. 봉원은 자신의 생을 뒤돌아 보았다. 장릉 참봉을 시작으로 명성황후 천릉도감 감조관을 거쳐 비서원 승에서 영월군수까지 고속 승진을 해 온 자신의 삶에 뿌듯함을 느꼈다. 오래 전 장릉 참봉으로 근무했던 영월 땅에 느즈막한 나이에 다시 군수로 부임해 오니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였다. 얼마 전에 인천 제물포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10년 전 갑오년의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을 둘러싸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더니 결국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정세가 이렇게 불안하니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은 중앙의 일, 봉원은 이 영월의 군수 임무에만 신경을 쓰기로 하였다. 궁벽한 영월 땅은 한성에서 너무나 먼 곳이었다.

    봉원은 창절서원의 문루인 배견루에 오른다. 두견새에 절한다는 뜻을 가진 곳이다. 배견루에 올라 고종 황제가 있는 한성을 향해 큰절을 하고, 이어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진 창절서원의 사당인 창절사(彰節祠)를 향해서도 예를 다한 후 그는 붓을 가져오게 하여 시 한 수를 짓는다. 그의 충성심을 오롯이 시에 담았다. 영월은 충절의 고향 아니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충절의 마음으로 쓴 시는, 한편으로는 백성의 고혈로 쓴 시였다. 그의 충성심은 위로는 향했지만, 결코 아래로 향하지는 못했다. 무릇 정치한다는 모든 사람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다.

    배견루에 올라 그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百越江山似蜀州
    無人不上拜鵑樓
    花巖細雨殘香淚
    德寺寒鐘故國愁
    左海遺民瞻日月
    先王寶簋侑春秋
    晩年恩荷偏多感
    東閣閒時坐譓流

    영월 땅의 산천은 중국 촉주와 비슷하여
    배견루에 올라 구경하지 않은 이가 없네.
    낙화암의 가랑비는 시녀들의 눈물이고
    보덕사의 쓸쓸한 종소리는 향수로구나.
    백성으로 조선의 해와 달을 올려다보고
    제기(祭器)로 선왕(先王)께 봄과 가을에 제(祭)를 지내네.
    늘그막에 성은(聖恩) 입어 감격스럽기만 한데
    한가할 때 동쪽 누각에 앉아 물 바라본다.

    [사진] 창절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강봉원의 한시 현판. 왼쪽 제일 마지막 줄에 ‘甲辰 孟春 姜鳳元(갑진 맹춘 강봉원)’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 『창절서원지』, 영월창절서원 2016년 )

    * 글 마지막 한시 번역은 임채명 한문학 박사가 해 준 것이다. 『늑탈민장기』의 번역이 어려운 부분도 도움을 받았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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