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념이 없다고? 우리에게 없는 건 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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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04일 08: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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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은 오늘부터 북 매니아들이 즐겨 읽는 월간 <텍스트>와 함께 ‘토요연재-책읽기’를 싣습니다. 멋진 기획과 다양한 책읽기 경험을 독자들께 전달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어느 곳에도 없는 곳’(ou+topos, Utopia)을 꿈꾸는 사람들이 몽상가라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들이 바로 몽상가일 것이다. 이곳의 좌절과 이곳의 패배가 저곳을 꿈꾸게 하고 몽상가를 절박하게 만든다. 게다가 꿈은 현실에 가까이 내려앉지 않음으로써 꿈꾸는 사람들을 가장 치명적으로 배반하는 데도 불구하고.

    헌데 좌절과 패배, 혹은 치명적인 배반보다 더 지독한 것은, 다 알면서도 이곳에 주저앉지 못하는 당신과 나. 그래서 또 읽는다.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일까.

    68세대 삼촌들의 꾸지람과 팍팍한 21세기 젊음들

    “그때 우리들이야말로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지. 요즘 젊은 것들이랑은 달랐어. 머릿속에 신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허풍쟁이들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뭐 하나 싸워서 지키려고 하는 것도 없고!” (p.233) 1968년을 거리에서 살았던 삼촌 세대의 꾸지람은 새겨 들을만 하다.

    그의 말대로 그 시절, 그들은 “서민을 대변하고, 부르주아적 법과 사회에 대항” (p.232)했던 게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레니엄을 살고 있는 클라우디오나 알레시오의 세대는 어떤 인터넷 사이트가 더 많은 음악 파일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맥도날드에서 어떤 햄버거를 주문할지 심사숙고 한다.

    그렇지만 68세대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진실! 그게 바로 ‘요즘 젊은 것’들에게 있어서는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고민이라는 것. 왜냐? 삼십오 분 짜리 음반 하나에 우아한 포즈로 지갑을 열어 22유로를 지불할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맥도날드에서 고심 끝에 토스트와 환타를 주문할 때도 마음은 심란하고 송구하기까지 하다. “2유로 60센트만 써서 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친절하게 생기셔서 달라면 캐비아에 샴페인까지도 주실 것 같지만, 아니요, 다른 건 됐어요” (p.51)라고 말해버리고 싶을 만큼.

       
     
     

    이탈리아판 인터넷 소설 『천 유로 세대』 (안토니오 인코르비아·알레산드로 리마싸 지음, 김효진 옮김, 위즈덤하우스)의 작가들인 안토니오와 알레산드로의 인터뷰에 따르면, ‘천 유로 세대’란 단지 25∼35세 사이의 젊은이들이 벌어들이는 한달 소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1천유로가 아니라 일자리

    “문제는 천 유로 세대라는 이름처럼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용계약의 종류에 있다. 단기 계약이나, 프로젝트 계약과 같은 고용 계약으로는 인생 설계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런 계약을 악용해 협박의 도구로 써먹는 고용주들도 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젊은이들의 CPE(최초고용계약조항) 반대 시위가 아직 이탈리아에 없는 이유는 단지 이 세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인터넷 소설화하여 유명해진 작가들은 천 유로 세대들이 놓인 자리를 신랄하게 성토한다. 천 유로라면 한국돈으로는 100만 원 남짓. 유럽과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무자비한 자본주의 논리로 점철된 동시대를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골치 아픈 경제 분석을 거치지 않고도 이렇게 간단하고 명백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천 유로, 혹은 백 만원, 이것은 문화적·사회적·경제적 고찰과 분석 따위를 충분히 제압한다.

    『천 유로 세대』의 네 인물들의 고민이란 사실 별다를 게 없다. 가령, 컴퓨터 부품회사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클라우디오는 언제 정규직이 될 지, 아니면 언제 급여가 오를 지 등으로 노심초사한다. 그의 당면 과제는 물론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이다.

    로셀라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으나 현재는 베이비시터, 전단 붙이기 등의 잡다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녀의 최고 목표는 안정된 직장을 마련하여 고정된 월급을 받는 것. 그녀는 한달에 700유로를 가까스로 번다.

    평생 영화관이나 다니며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사는 게 목표인 영화잡지 객원 기자 알레시오가 그나마 조금 번듯한가? 그렇지만 그 역시 우체국 정규직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생활전선을 버텨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게다가 영화 기사 지면은 누가 평생 보장해주기나 한다던가.

    마테오는 개중에 구질구질한 고민이 없는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친구들의 월수입을 웃도는 1,500유로의 용돈으로 몸매관리와 클럽에서 여자 꼬시기를 취미로 삼고 있으니.

    가난한 총각들의 좀스런 가계부로 채워진 소설

    이들의 동거생활을 기록한 『천 유로 세대』에 이전 세대의 신념이 없고, 투쟁의 대상이 없고, 미래에 대한 이상적인 전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세상에 절박한 것이 어디 그것 뿐이랴. 이들의 좀스러운 가계부로 가득 채워진 이 소설은 새로운 소설적 가치나 비장한 신념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젊은 감수성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소설 세계를 열었다고 추앙받을 만하지도 않다. 다만, 그 가계부의 절박함만큼은 충분히 당신과 나의 현재를 충분히 사실적으로 또 충분히 소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천문학적으로 희박한 확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복권의 유혹은 언제나 뒤통수를 간질거린다. 복권의 사회적, 경제적 메커니즘이 제아무리 거창하고 복잡해도 복권의 다른 이름은 ‘사기’이거나 ‘농락’이다. 그러나 만약에, 정말 만약에 1유로를 투자하여 16,000유로짜리 복권에 당첨된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세계 자체가 단 번에 변할 것이다. 요행이 신념이 되는 세상이다. 아니, 합리적인 셈법을 제시하라면 할 수 도 있다. “1,000유로면 한 달은 어떻게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을 위해서건 미래를 위해서건 1센트라도 모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치과에 가야 한다고 해보자.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빚을 져야 할지 아니면 외출금지라도 내리고 퇴근하자마자 집에 틀어박힐지. 솔직히 내가 지금 16,000유로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한 1,000유로 정도. 은행 계좌에 좀 넣어둘 정도만. 그래, 결심했다. 한판 한다.” (p.100∼101)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은 혼자 세들어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왜냐하면 1,000유로는 집세 내고 융자금 갚고 나면 생활비만으로도 그냥 날아간다. 은행에서 융자금을 빌려준다 치자. 하지만 단기 계약직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은행이 더 힘들게 한다. 무슨 광고였더라, 문 하나만 가지고 가면 집을 주는 광고가 있었는데……. 그거 다 뻥이다.” (p.118) 세상의 뻥을 그나마라도 견디려면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안되면 주먹쥐고 거리로 나서라

    복권을 살 처지도, 결혼을 할 처지도 못 된다면 그때는 거리로 나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수습직 사원들이 고용안정 보장을 요구하며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거리를 가득 메웠을 때 클라우디오는 그는 “난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p.233)고 말한다.

    ‘수습사원 제도’, 혹은 수습 사원을 농락하는 제도. ‘6개월 수습 기간 동안 공짜로일해 줄 사람 구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교통비와 식대로 300∼400 유로를 지급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나마 휴머니즘의 기본적인 가치를 숭앙하는 회사다.

    “보장되는 것도 없고, 정신적 테러에, 공갈 협박, 시한부 계약은 옴짝달싹 할 수도 없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잘 되어봐야 또 한 번의 시한부 계약이 있을 뿐이다. 이 상태로는 미래는커녕 현재도 계획할 수 없다. 이것은 불안정한 일자리 때문이 아니라 불안정한 사회 때문이다. 이 사회가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계속해서 우리의 야심과 계획을 위협하고 있다.” (p.236∼237)

    상황이 이러하다면 “그때 우리들이야말로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지. 요즘 젊은 것들이랑은 달랐어. 머릿속에 신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허풍쟁이들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뭐 하나 싸워서 지키려고 하는 것도 없고!” 라는 일방적인 매도는 수정되어야만 마땅하다.

    ‘요즘 것’들도 끼니 하나까지도 싸워서 지켜야 하는 비애를 안고 산다. 밥 한 그릇의 존엄성 정도는 즐겁게 지켜져야 하는 것. 이전 세대들이 ‘요즘 것’들과 기꺼이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끼니 하나까지 싸워서 지켜야 하는 ‘요즘 것’들의 비애

    작가들의 인터뷰를 마저 엿듣자면, 그들은 임시직의 고용안정을 필두로 고령화 국가가 된 이탈리아 사회의 전반적이고 전면적인 변화와 개혁, 그리고 전 세대의 관심과 배려를 요구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 비교적 쉽게 직장을 구하고 안정된 가정을 일굴 수 있었던 그들 부모 세대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이제는 “부르주아적인 냄새를 풍길 정도”라고도 말한다.

    『천 유로 세대』의 누구도 유토피아에 홀려 있지 않고, 몽상에 헌신할 의사가 없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위기를 알 따름이다. 그리고 그 위기가 결코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라 동시대 젊은이들 또한 같은 처지인 것을 안다. 그리하여, 바로 그 때문에, 정치적이다.

    클라우디오에게 소설을 쓰라고 꼬드기며 로셀라는 말한다. “상상이 되지 않아? 그리고 나중에 이 소설을 무치노 감독이나 다른 유명 감독이 읽는 거지. 그러면 우린 영화 판권으로 백만장자가 되는 거고…….” (p.266) “우리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거라고 직접 말했잖아.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만 하면 돼. 먼저 컴퓨터 앞에 앉고, 그리고 쓰는 거야. 쓰고 쓰고 또 쓰고, 레퍼토리가 다 떨어질 때까지……” (p.267)

    실제로 『천 유로 세대』는 많이 팔리기도 했고, 곧 영화로도 만나 볼 수 있게 되겠지만, 그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쓰고 쓰고 또 쓰고, 레파토리가 다 떨어질 때까지” 라는 대목이다. 레파토리가 다 떨어질 때까지? 결국 내장 속까지 아니 한 줌의 영혼까지 팔아라? 맙소사! 미션 임파서블, 마이 라이프! 결국 미션 임파서블,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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