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쪽방촌의 사회적 삶,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책소개] 『동자동 사람들』 (정택진/ 빨간소금)
        2021년 02월 06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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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자동 쪽방촌은 서울역 맞은편에 위치한 대표적인 빈민 밀집 거주 지역이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전설의 베스트셀러 『인간시장』(김홍신)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뒤 판자촌-사창가-쪽방촌으로 변신해온 동자동에 주민을 돕기 위한 각종 시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무연고 공영 장례가 제도화되었고 서울시는 저렴쪽방 사업을 시작했다. 수많은 단체가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소매를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 매년 동자동 쪽방촌을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돌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여전히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한다. 범죄와 질병으로 일상이 파괴되며, 도움의 손길에도 인격과 자존감 박탈을 경험한다. 사람으로서의 필요와 욕망, 세계 안에서의 위치와 존재 방식은 부정 당한다.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 것일까?

    쪽방촌 주민들의 ‘지금, 여기의 모습’을 담아낸 문화기술지

    서른 살 젊은 연구자 정택진이 글을 썼다. 정택진은 연세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같은 대학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쪽방촌의 사회적 삶 :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2020)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 논문으로 ‘연세대학교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동자동 사람들』은 이 논문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 시대의 ‘가난을 쓴다는 것’에 관해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타인의 고통과 가난을 쓰는 일은 괴로웠다. 타자의 고통을 지적 유희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론적 기여, 학문적 참여, 지적 개입 등 그럴싸한 수사를 앞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내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무엇을 쓰는지, 왜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증명해야 했다. 벽장을 마주하고 난 오멜라스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면서 점차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연구자이자 저자로서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 답을 찾는 일이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다.”

    학술논문이 뿌리지만, 책 안에 서사가 풍부하고 흥미롭다. 9개월 넘게 현장에서 주민들과 생활하며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두고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문영 교수는 “『동자동 사람들』은 서사화의 위험을 위태롭게 감당하면서 쪽방촌 주민들의 ‘지금, 여기의 모습’을 담아낸 문화기술지이다”라고 평가한다.

    정영희 이야기 : 돌봄의 역설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정영희(45세)는 늘 머리를 짧게 밀고 다닌다. 그녀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자 기초생활수급자이며 아들 하나를 둔 이혼녀이다. 그녀의 큰언니 정민희가 오래전부터 주기적으로 만나 정영희의 일상적 삶을 돌보아왔다. 정영희는 2019년 7월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에 당첨되어 서울시 강북구에 있는 공공임대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동자동 쪽방촌을 ‘벗어났다.’ 그러나 동자동으로 다시 돌아와 동거남 홍인택의 쪽방에서 대부분 생활한다.

    국가는 정영희에게 기초생활수급이라는 형태의 돌봄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돌봄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멈춘다. 일상적 돌봄은 제공하지 못한다. 게다가 51만 2,000원의 생계급여로는 생활이 어려워 많은 쪽방촌 주민이 명의 도용 범죄나 졸피뎀 같은 약물의 불법 거래 유혹에 빠진다. “일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쪽방촌에는 고령에다 아픈 사람들이 많다. 정영희도 비슷하다.

    따라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제공하지 못하는 돌봄의 공백을 메꾸는 큰언니 정민희를 비롯한 가족의 일상적 돌봄이 꼭 필요해 보인다. 가족은 정영희가 선천적인 정신지체 장애를 갖고 있어서 가난하며 ‘비정상적’ 삶을 산다고 여긴다. 그래서 힘들지만 돌봄을 꾸준히 실천한다. 가족의 목표는 정영희기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가족과 정영희를 계속 연결하려 애쓰며, 그녀가 쪽방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치료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나 시설 생활을 권하기도 한다.

    한편, 매달 20일 수급이 들어오면 동거남 홍인택은 관리비 명목으로 정영희의 수급비 중 30~40만 원 이상을 가져간다. 정영희는 이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를 휴대폰 명의 도용 범죄에 연루시킨 사람이 바로 동거남이다. 정영희는 자기도 모르는 자신 명의의 휴대폰 3대의 미납금 660만 원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다.

    이러한 삶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정영희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동자동을 벗어나거나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다. 각종 범죄에 연루되면서도 동거남과 헤어지지 않는다. 가족은 정영희의 이런 납득할 수 없는 태도가 정신지체 장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다르다. 장애가 아니라, ‘폭력의 경험과 기억’이 원인이다.

    그녀의 이혼 사유는 전남편의 폭행이다. 그런데도 아이에 대한 양육권은 전남편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수급비를 받는 부양 무능력자이기 때문이다. 이때 기초생활수급권은 ‘부양 능력 없음’을 입증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또한 정영희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을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성희롱과 성추행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말한다. 성희롱과 성추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그녀는 머리를 짧게 민다. 그리고 불평등한 관계와 범죄 연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동거남과 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분리불안에 가까운 증상을 보인다. 동거남이 이런 폭력의 경험과 기억, 현재진행형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정영희가 가장 의지하는 돌봄의 주체는 국가나 가족이 아닌 동거남이다.

    정영희가 진짜 필요로 하는 돌봄과 국가와 가족이라는 ‘정상적’ 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돌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돌봄의 역설’이다.

    박현욱 이야기 : 사회적 버려짐

    동자동 안에 위치한 G교회는 ‘사랑의 짜장면 나눔 행사’를 통해 한 달에 한 번씩 주민에게 특식을 제공한다. 짜장면을 먹기 위해 반드시 G교회에 찾아갈 필요는 없다. 젊은 신도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동자동 전체에 짜장면을 배달하기 때문이다. 봉사자와 마주친 주민이라면 누구나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

    어느 날 봉사자와 마주친 주민 박현욱(60세)은 짜장면을 단호히 거절한다. 거듭된 제안에도 끝내 짜장면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주민자조조직에서 운영하는 ‘사랑방 식도락’에 가서 밥을 사 먹는다. 여기는 밥값이 1,000원이다. 짜장면을 든 봉사자들이 사라지자 박현욱이 한 말은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였다.

    증여가 상호 인정의 한 형태라고 할 때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줌’에서 주민은 인정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주는 자와 받을 수밖에 없는 자 사이의 구분에서 주고받음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주민은 결코 돌려줌에 참여할 수 없다. 증여의 관계에 참여하지 못할 때 주민은 체면과 인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이러한 경험은 “거지”라는 모욕과 자존감 박탈의 언어로 이어진다.

    얼굴을 찌푸리며 짜장면을 거부하는 박현욱의 행위는 인정의 기회와 응답을 박탈당하는 일반적 관계를 거부하는 몸짓이다. 지원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되는 물건을 받거나 식사를 대접하는 일은 쪽방촌 주민의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마치 “거지” 취급을 받는 듯한 인격 손상과 자존감 박탈의 경험 속에서 주민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반면 ‘사랑방 식도락’의 천 원의 밥값은 식사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자 자신이 받은 것을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다. 천 원은 비록 쪽방촌 주민들이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태에 있다 하더라고 큰 부담 없이 낼 수 있는 금액이다. 받은 것을 천 원의 형태로 되돌려줄 수 있는 식도락에서 이들은 “거지”가 아니다. 천 원을 지불함으로써 주고받음의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행위에 응답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은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과 공동의 사회를 구성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

    이처럼 공짜 짜장면은 봉사자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봉사자와 주민 사의의 연결을 만들어지 못한다. 오히려 두 존재의 세계는 더욱 더 분리된다. IMF 이후 폭증한 무료 물품 지원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상호 인정의 의례에 참여하지 못한 채 자존감과 인격의 박탈을 경험한다. 무료 물품 지원 사업에서 쪽방촌 주민들은 켤코 ‘우리’의 구성원이 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일 뿐이다. 계속되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한다.

    쪽방촌의 사회적 삶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는 아무런 출구가 없다. 시민들의 행복이 벽장에 갇힌 아이의 불행 속에 있는 한 시민들의 행복을 해치지 않은 채 아이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구 없는 세계에서 과연 어떤 윤리적 응답이 가능할지, 그 응답의 형태는 무엇일지 쉽게 결론내리기 어렵다. 이를 두고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포비넬리 또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삶은 어떤 구원적 미래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this is what is)’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동자동의 ‘지금, 여기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이 책에서 동원하는 서사는 네 가지다. 이것은 동자동 주민들이 공유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①기초생활수급, ②죽음과 장례, ③무료 물품 지원 활동, ④쪽방촌을 상징하는 9-20번지 건물. 앞에서 말한 정영희 이야기는 기초생활수급과, 박현욱 이야기는 무료 물품 지원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책에는 이밖에도 죽음과 장례, 9-20번지 건물과 관련한 서사가 들어 있다. 이 서사들이 동자동 쪽방촌을 ‘새롭게’ 이해하는 키워드로 작동한다.

    동자동 쪽방촌은 낡고 해진 건물이나 열악한 위생 상태 등 공간의 물리적 특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초생활수급, 무연고 사망과 장례, 물품 지원 활동, 저렴쪽방 사업과 같이 주민의 삶에 개입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동자동 쪽방촌을 정의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간 형성된 다양한 모습의 제도적·비제도적 개입은 주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물리적 공간’보다 쪽방촌의 ‘사회적 삶’이다.

    쪽방촌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는 경제적 측면을 넘어 주민들의 ‘사회적 삶’에 대한 개입이기도 하다. 개입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우리’에 대한 감각, 정치적 연대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 책은 쪽방촌을 위한 여러 개입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다. 이를 두고 『여공 1970』을 쓴 김원 교수는 “가난/돌봄에 개입하는 다양한 형태의 실천 과정에서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이 맺는 연결을 ‘사회적 버려짐’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역작”이라며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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