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폭탄에도 '계급성'이 있다?
        2006년 11월 03일 09: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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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실험 이후 남한 진보진영 안에서는 핵을 둘러싼 입장의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한쪽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저버린 폭거로 규정하고 원칙적 입장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미국의 위협 속에서 북의 자위적 무장임을 인정해야 하고 더 나아가 북한의 핵무장이 민족을 방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놓고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은 ‘핵을 용인하는 진보주의자’도 있느냐며 통일운동 진영과 민주노동당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들의 속셈이야 뻔히 들여다보이지만 진보진영 스스로가 그런 비아냥의 꺼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보수진영의 그런 ‘공격’이 대중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핵을 둘러싼 진보진영의 핵분열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도 물론 아니다. 역사책을 뒤져보면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꽤 뿌리가 깊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북핵 논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평화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냉전이 시작됐고 이어서 터진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과연 핵무기를 사용하는지 여부를 전 세계가 긴장 속에서 바라봤다. 특히 소련 당국은 더욱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소련은 1949년 첫 핵실험에 성공했고 이후 계속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미국의 핵무장에 비하면 초보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 소련의 대륙간탄도탄 SS-20과 이동발사대.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낫과 망치를 들고 싸우지 않았다

    소련공산당 뿐만 아니라 각국의 공산당들은 반핵 캠페인을 시작했다. ‘평화’가 공산주의자들의 제1구호가 됐다. 해체된 코민포름을 대신하기 위해 소련이 1956년에 창간한 국제공산주의 이론지의 제목도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Problems of Peace and Socialism"였다.

    사실 반핵 또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운동은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의 가공할 위력에 놀란 양심적인 과학자들을 주축으로 시작됐다. 그들 중 상당수가 좌파와 연관되어 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운동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모스크바에 충성스러운 공산당들이 반핵-평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운동은 핵무기의 비인도적인 성격보다 핵무기를 통해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려는 미제국주의의 음모로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방어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소련의 핵실험은 서방의 핵위협에 맞선 소련 인민의 자위권으로 설명됐다. 대체로 이런 설명은 공산당원들 뿐만 아니라 일부 대중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는데 1955년 당시 소련과 미국의 핵무장은 소련의 미사일 수를 1로 볼 때 미국은 그 15배였기 때문이다. 파괴력으로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 커졌다. 소련의 핵무장은 방어용이며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당의 설명’에 당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은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전력이 있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핵무기를 쓰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공산당들은 미국은 여차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호전적인 국가인 반면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소비에트는 절대로 먼저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요컨대 "제국주의자의 핵과 사회주의자의 핵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수소폭탄의 상용화에 성공하고 이어서 1960년을 기점으로 핵무기의 생산량을 수직상승 시키자 이런 설명에 의문이 제기됐다. 더군다나 1962년 쿠바위기가 발생하자 소련의 핵무장은 방어용이라는 선전도 의문시 됐다. 소련의 선제공격에 의한 핵전쟁이라는 서방의 선전이 현실이 된 것이다.

    소련의 핵무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전히 소련 외교당국의 선전과 각국 공산당 대회의 무대에는 세계평화가 첫 번째 구호로 등장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미소 양국의 핵무기 경쟁, 특히 소련의 핵무기 증강은 서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을 당혹케 했다.

    이는 1956년 헝가리 시민의 민주화운동을 소련군이 무력 진압한 것과 맞물려 수많은 당원들이 공산당을 떠나게 만들었다. 특히 전쟁 중 레지스탕스 운동에 기반해 대중정당으로 성장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대규모 탈당사태가 벌어졌다.

    당시의 회고록들을 보면 헝가리 사태와 소련의 핵무장이 기층의 공산당원들에게 가져온 충격은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을 때와 맞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과 그 자매정당의 지도부는 소련의 핵이 사회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1964년. 사회주의 중국이 세계 다섯 번째 핵무장 국가가 됐다. 중국의 독자적인 핵무장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60년대 중국과 소련간의 수정주의 논쟁이 격해지고 마침내 두 사회주의 국가 간의 국경분쟁으로까지 번지자 자본주의의 공세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킨다던 핵무기는 이제 사회주의 형제국가를 향해 조준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제국주의자의 핵과 사회주의자의 핵은 무언가 다르다는 당의 설명을 마지막까지 믿으려 했던 수많은 공산당원들은 환멸을 안고 당을 떠났다. 1978년 소련의 핵무장은 마침내 미국을 추월했다. 소련 공산당과 군부 내에서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나토군을 끝장내자는 핵공격 강경파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모스크바를 끝까지 믿고 싶었던 당원들

    영국의 ‘핵무장감축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은 2차대전 후 가장 성공한 대중적인 반핵평화운동으로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버트란트 러셀, E.P.톰슨, 마이클 풋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가 되어 1958년에 시작된 이 운동은 냉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서구와 동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평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표현했다.

    이 운동은 종교계, 노동조합, 노동당원들, 학생운동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 속에서 급성장했다. 그러나 영국공산당CPGB은 운동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CND 운동을 ‘분열행위(divisive)’라고 비난했다.

    CND가 주장하는 핵무기 감축이 미국의 핵과 소련의 핵의 성격 차이를 무시하고 양비론에 빠져 결과적으로 미국과 서방의 의도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영국공산당은 1920년 건설 돼 1991년 문을 닫을 때까지 단 한번도 대중정당으로 성장한 적이 없는 소수파였지만, 지식인 사회와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노동당 바깥에 조직된 좌익들 중 가장 컸다. 그런 영국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 영국공산당의 CND 보이콧을 풍자한 당시의 만화

    그러나 급성장하는 대중운동을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기층당원이나 당의 영향력 아래 있는 노동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영국공산당은 CND에 참여를 결정했다.

    유로코뮤니즘 성향의 지도부가 새로 들어선 것도 전환의 배경이 됐다. 그러나 모든 핵무기는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은 안 된다는 입장만은 고수했다.

    이런 공산당의 입장은 CND를 비난하던 보수파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CND 저격수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 덕에 지금은 보수당 소속 하원의원이 된 줄리안 루이스Julian Lewis는 "CND는 한쪽(미국)의 일방적인 감축만을 요구하는데 이는 CND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표방하면서도 사실은 한쪽(좌파)의 사람들로만 구성된 일방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이런 비방이 효력을 발휘하고, 계속되는 감축운동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60년대 내내 영국을 포함한 서구와 중국을 포함한 동구의 핵무기 비축량이 급상승하자 CND 자체에 대한 회의와 함께 대중의 참여도가 눈에 띠게 떨어졌다.

    CND운동이 부활한 것은 80년대 들어서면서다. 새로 등장한 레이건 행정부가 퍼싱2 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자 이에 대항해 소련은 SS-20 미사일을 전진 배치했다.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동지인 대처 정권도 미국에 호응해 폴라리스 미사일을 트라이던트 미사일로 교체했다. 핵전쟁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자 CND운동이 다시 활발해지고 60년대보다 더 광범위한 규모로 전개됐다.

    이번에는 영국공산당도 적극 참여해 수많은 지역지부와 노동조합내 CND분회를 조직하고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핵무장에 우선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내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발이 여전히 거셌지만 60년대에 비해 모스크바에 대한 원심력이 더 강해진 당 지도부는 모든 핵무기의 감축이라는 CND의 일반 목표를 옹호했다.

    80년대 초반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군의 핵무기 전진배치에 반대하는 운동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거세게 벌어졌다. 나토군의 미사일 수송열차를 막기 위해 철로를 점거했던 독일 반핵운동가들의 투쟁은 독일녹색당이 초반의 부진을 딛고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둘로 쪼개진 일본의 반핵운동

    핵무장은 나쁘지만 소련의 핵무장은 불가피한 것이라는 입장은 이웃 일본의 반핵운동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1954년 미국은 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원자폭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력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공격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핵의 공포를 몸소 겪은 사람들로서 같은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는 전국민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 서명운동에 기반해 1952년 8월, 히로시마 폭격일에 맞춰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열렸다.

    이후 대회조직위는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原水爆禁止日本協議会, 원수협)’라는 단체로 조직돼 반핵-핵무기철폐 운동을 지속했다. 또한 일본비핵화 원칙을 지키기 위한 감시활동을 벌였다. 일본비핵화란 핵무장, 핵발전은 물론이고 주일미군의 핵잠수함, 핵함공모함도 일본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1년 제7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이번 대회 이후) 핵실험을 재개하는 정부는 평화와 인도주의의 적으로 규정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뒤인 8월 30일 소련이 처음으로 핵실험을 재개했다. 이를 놓고 원수협 안의 사회당, 총평계는 소련에 항의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공산당계는 반대하면서 갈등이 생겨났다.

    이듬해에는 대회 개최 중에 소련이 핵실험을 하면서 사회당계와 공산당계가 대회 도중에 충돌해 대회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진 1963년에도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에 대한 지지여부를 놓고 또 다시 양쪽이 충돌해 대회가 무산됐다.

    공산당계는 이 조약이 당시 중국의 핵무기 개발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고 "사회주의 국가의 핵무장은 침략 방지를 위해 용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 논란이 됐다. 결국 사회당, 총평계는 1965년 원수협을 탈퇴해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原水爆禁止日本国民会議, 원수금)’라는 별도의 조직을 꾸렸다.

    누구나 핵공격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50년대 일본에서 원수협은 노동조합에 이어서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 운동단체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매체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대중운동이기도 했다. 또한 원수협은 단순한 반핵단체가 아니라 일본의 핵공격을 불러일으킨 전쟁과 그 전쟁을 시작한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한 단체였다. 그래서 원수협은 전후 일본 진보적 양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의 핵무장을 둘러싼 갈등으로 운동이 분열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둘로 나눠진 일본반핵운동은 지금도 따로 원수폭금지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 2005년 피폭 60주년을 맞아 따로 열린 원수폭금지대회. 왼쪽이 원수협, 오른쪽이 원수금의 대회다. 두 단체는 1965년 이래로 두 개의 대회를 치르고 있다
     

    진정한 ‘진보’는 무엇인가

    반핵-핵무기 감축운동에서 소련과 중국의 핵무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던 논란이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모든 핵무기가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먼저 핵무장을 한건 미국이고 사회주의국가들의 핵무장은 자위권’이라는 주장은 항상 평행선을 달렸다.

    북핵을 둘러싼 논란도 따지고 보면 오래된 논쟁의 지겨운 반복에 불과하다. 제국주의자들의 핵위협에는 핵으로 맞서야 한다는 논리는 스탈린이 여전히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핵무기의 진정한 철폐를 원하던 대중들의 염원에 언제나 걸림돌이 됐다는 사실도 역사를 통해 확인된다.

    또한 냉전시기 반핵운동 안에서 그런 주장이 제기되면 운동의 목표는 핵무기의 감축이나 철폐가 아니라 ‘현상의 유지’로 바뀌었다. 역사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진보’가 아닐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 최후의 방어선이라던 소련의 핵무기는 정작 소련이 붕괴할 때 소련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소련의 핵무기들은 처음부터 자위적 무기가 아니었다. 소련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핵무기도 자위적 무기가 아니다. 그 무수한 핵무기들이 자위적 무기였다면 냉전이 끝난 지 십수년이 지났건만 왜 미국, 러시아, 중국은 핵무기를 없애지 않는 것일까. 왜 핵무기 보유국가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일까.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들어가는 어려움은 그것을 폐지하는데 드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냉전 시대의 핵미사일들이 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인류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북한의 핵무장도 민족을 제국주의로부터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통일이후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골칫거리로 남을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이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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