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빈 이후의 코빈주의,
    짧은 영국 정치 이야기①
    [적녹칼럼] 영국노동당 좌·우파 투쟁
        2021년 01월 15일 05: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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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노동당의 대표를 역임한 강경좌파 제레미 코빈을 당에서 출당시키려는 노동당 주류의 시도와 이를 둘러싼 논쟁, 2019년 총선거의 투표 성향, 세대문제와 계급문제의 착종, 공적 소유에 대한 입장, 당원들의 코빈 구하기 시도, 스태머의 우경화 시도와 혼란, 보수당 보리스 존슨 총리의 녹색산업혁명 도용하기 등에 대해서 살펴보는 서영표 교수의 글을 3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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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2020년은 코로나19의 충격이 너무나 커서 웬만한 사건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도의 유명세를 갖고 있으면 모르겠지만 직접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 사건들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조차 없는 1년이었다.

    당연히 2019년 12월 총선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끈 떨어진 신세가 된 머나먼 영국의 전직 노동당 대표가 자신의 당에서 쫓겨났다는 외신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노동당의 ‘살아 있는’ 권력일 때도 그의 이름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노동당의 역사와 영국 정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었다. 정말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일까?

    숲속에 있을 때는 숲 전체를 볼 수 없다고 한다. 당장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 일에 연루되어 거시적인 조건과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말하면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먼 나라 영국의 사건은 ‘우리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거울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거울에 우리를 비추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로가 필요하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긴 영국노동당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민주주의 위기일까 아니면 민주주의의 한계일까

    코빈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우리의 유명인사 트럼프로 우회해 보자. 트럼프의 ‘막 나가는’ 말들과 ‘과격한’ 행동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한다. 트럼프 스타일의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우리가 지난 100여년 동안 ‘정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알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것은 ‘지금’의 민주주의가 이중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으로 정치인들은 대중의 의지, 요구, 열망을 ‘대의’하지 않는다. 정치는 자본의 이익을 둘러싸고 똘똘 뭉쳐 있는 기득권을 대의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대중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조작’하고 왜곡시켜야 한다. 기득권과 대중은 공존 불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대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애초부터 매우 제한적이었다. 노동계급과 대중의 정치적 힘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잠깐 동안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실현되기 어려운 헛된 약속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민주주의는 대중이 정치엘리트가 그들을 대변하기는커녕 거짓과 조작으로 소수의 기득권만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조차, 이에 대한 정치적 행동을 보장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거리와 광장에서 실력 행사를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력 행사는 대중의 ‘민주적’ 참여에 의해 구성된 ‘비민주적’ 권력의 공권력과 마주서게 한다. 역설적이다. 실력 행사의 규모가 충분하지 않을 때 ‘민주적’ 의지는 무시되고 억압된다.

    하지만 실력 행사의 힘이 충분할 때조차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는 민주주의의 원리, 대의의 원리를 실현하기에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한 원래의 관행으로 되돌아가고,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으로 퇴행한다. 대의의 부재,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고 시정할 수 있는 대중의 권력 부재, 이것이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이중의 한계인 것이다.

    영국노동당의 헌정주의와 노동계급의 이익

    영국 노동당 안 좌파와 우파의 대결은 근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이중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노동당의 당권파들은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를 금과옥조로 여겼다. 핵심은 영국의 법률적 질서 안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것. 그런데 이 목표는 근대적 대의민주주의의 틀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약속만큼이나 모순적이었다. 노동당이 대표하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잔재와 금융자본-군사주의가 결합된 대영제국의 낡은 질서와 공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순(헌정주의를 신봉했지만 노동자의 정당이었던, 그래서 의회 바깥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은 항상 노동당 안에서 당을 흔드는 반대 경향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헌정주의와 노동계급의 이해가 공존 불가능하다는 체험은 노동운동을 주기적으로 좌경화시켰고 지구당 수준의 사회운동을 급진화시켰다. 좌경화된 노조와 지구당은 노동당의 정치기구를 압박하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운동은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가들을 만들고, 그 활동가들은 아래로부터의 힘과 함께 정치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기존의 정치기구 안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된다.

    클레멘트 애틀리

    1945년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정부의 사회민주주의 개혁은 흔히 생각하듯이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페이비안주의의 후원주의(paternalist)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2차 세계전쟁의 전시 동원체제는 계획경제의 효율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전쟁의 동원체제를 통해 노동계급의식도 성장했다. 이러한 조건은 전쟁영웅 윈스터 처칠(Winston Churchill)을 권좌에서 밀어낼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헌정주의와 공존하기 어려운 아래로부터의 강력한 에너지가 없었다면 애틀리 정부의 개혁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 근본적으로 1945년 노동당 정부는 출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틀리 정부는 헌정주의에 갇혀 있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 정치인들의 엘리트주의와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헌정주의를 수호하는 전위부대였다. 전근대적인 신분질서와 강력한 영국이라는 제국주의적 향수의 지배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 즉 1918년 채택된 당헌4조를 실현하는 것은 헌정주의와 충돌했다. 당헌4조는 노동자들이 공동소유(common ownership)를 토대로 자신들 노동의 결실을 향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애틀리 정부는 이런 근본적인 개조를 원하지 않았다. 50년대 말 노동당 당권파가 당헌4조를 폐지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1945년 노동당 정부는 당헌4조의 실현을 열망하는 노동자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 구성되었지만 헌정주의는 그 에너지를 제도 안에 붙들어 두려 했다. 노동당은 선거정치의 동학 안에 갇혔다. 1951년 보수당에게 정권을 빼앗기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전쟁영웅 처칠은 권좌를 되찾게 된다.

    윈스턴 처칠, 앤소니 이든(Anthony Eden), 해럴드 맥밀란(Harold Macmillan)으로 이어지는 보수당 정부는 애틀리 정부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건드리지 않았다. 노동당의 정책은 나중에 케인즈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정신의 반영이었고 헌정주의적 질서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역사적 타협’이 가능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그러한 타협에 안주할 수 없었다. 이미 말했듯이 노동당은 존재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당 좌파는 1950년대 말 최고조에 달한 냉전적 대결이 불러온 핵전쟁의 공포에 맞서 싸우면서 결집한다. 아주 잠시였지만 일방적 핵폐기운동(Campaign for the Nuclear Disarmament, CND)은 노동당에게 그들의 입장을 당론으로 강제할 만큼 강력했다. 평화운동은 초기적 형태의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결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 대열 안에는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이 있었다. 그들의 정치적 지향은 매우 다양했지만 소련의 억압적인 공산주의체제와 서구의 (비록 복지국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그 모두에 반대하는 신좌파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좌파(new left)와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으로 불릴 새로운 정치적 흐름은 노동당을 관통했다. 노동당은 이러한 정치적 에너지와 단절하고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헌정주의와 당의 관료적 질서는 이것과 공존하기 어려웠다. 노동당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모순적 운동의 양쪽을 만족시키는 타협책이 필요했다. 1960년대 초의 노동당은 낡은 영국 사회를 근대화하는 ‘기술의 백열’(white heat of technology)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이러한 모순을 봉합하려 했다. 노동계급의 열망을 영국의 기술적 근대화라는 프레임 안으로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선 1964년 해롤드 윌슨(Harold Wilson) 정부는 실망 그 자체였다. 기술의 백열은 1950년대의 맹아기를 거쳐 분출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열망을 담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노동당 정부는 처음부터 새로운 사회운동이 쟁점화하고 있었던 ‘사회혁명’의 열망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노동당에 대한 환멸과 함께 6년 만에 정권은 다시 보수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신좌파의 출현과 노동당의 좌경화

    1960년대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케인즈주의 시대의 아이들, 다시 말하면 1940년대 태어나 대공황과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복지국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대가 20대가 된 때였다. 나중에 68세대로 불리는 그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확장된 고등교육의 기회를 누렸다. 앞선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했고 훨씬 더 높은 것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분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분배를 넘어선 다양성과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원했다. 윌슨의 ‘기술의 백열’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새로운 세대 열망의 출현이었다.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가 출현하는 두 개의 통로가 있었다. 하나는 지식인 집단 사이에서 출현한 신좌파적 흐름이었다. 이들은 노동계급의 참여를 통한 민주적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침공을 계기로 형성된 공산당 탈당파 지식인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과 미국의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이었다. 평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인종주의 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형성되었다. ‘베트남’은 평화운동과 민족해방투쟁이 ‘반전운동’의 형태로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도부의 관료적 행태에 환멸을 느낀 현장 단위의 노동자운동이 분출했던 것도 같은 시기였다. 노동운동 내에서 주변화되어 있었던 여성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968년 포드자동차 여성 재봉노동자들의 파업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지식인 신좌파, 신사회운동 신좌파, 그리고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물결은 지구당을 거점으로 노동당 안으로 넘쳐흐르게 된다. 당 밖의 급진화된 운동이 당 내부에 좌파블럭을 형성시켰다. 토니 벤(Tony Benn)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노동당 내 신좌파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토니 벤

    노동당은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이런 조건에서 당권파들은 대세를 따르게 된다. 대부분의 노동당 정치인들은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벤의 표현대로 풍향계에 따라 대세를 따라 움직일 뿐이다. 1973년에 채택된 노동당의 총선 강령이 사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띨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건 때문이었다.

    노동당은 1974년 선거에서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과반을 넘기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당 정부(minority government, 과반에서 33석이 부족했다.)를 구성한다. 그리고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다시 치러진 총선에서 의석수를 늘리지만 보수당을 압도하는 데는 실패한다. 과반에서 겨우 3석 많은 정부였다. 위태로운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산업부 장관이 되어 당헌4조를 실현하려 했던 토니 벤과 정치를 ‘가능성의 기예’(art of the possibility)로 생각하는 의회노동당, 내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다. 보수당을 압도하지 못하는 의석수는 타협의 좋은 핑계였다. 유럽공동체 가입을 둘러싼 논쟁과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좌파는 수세에 몰렸고 벤은 산업부장관 자리에서 해임된다. <계속>

    필자소개
    교수. 제주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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