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 절박한 생존의 기로에 놓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 소작권을 왜 이리저리 옮기시오!!
        2021년 01월 14일 10: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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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판서 댁 사랑채 마당

    소작지를 잃은 농민이 지주인 김 판서에게 엎드려 사정을 호소하고 있다.

    소작농: 세상천지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요, 대감마님! 보릿고개 때 진 빚도 아직 탕감하 지 못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소작을 떼 가시면 소인 굶어 죽습니다요, 대감마님!

    김판서: 허허, 내 이런 놈을 보았나. 보릿고개를 내가 만들었더냐? 내 땅 내가 팔겠다는데 내 그 땅을 팔아야 우리 손주 시계도 사고 유학길에 여비를 보탤 것 아니냐? 땅 한 마지 기 안 남긴 네 놈의 조상을 탓해야지 왜 나를 탓하느냐. 감히 어디 와서 행패야, 행패 가.

    소작농: (절규하는 목소리로) 땅이 있어야 빚도 갚고! 저희도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요. 대감 마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감마님. 식구가 일곱입니다요. 대감마님!

    김판서: 이런 경을 칠 놈! 땅이 없으면 몸으로 갚으면 될 것 아니냐? 소작을 못 붙이면 들어 와 종살이라도 하면서 갚을 생각을 해야지 그저 울고불고할 생각부터 하니 매양 네놈 꼬라지가 그 꼬라지인 것이다. (하인들을 향해) 뭣들 하느냐. 당장 끌어내지 않고.

    소작농: (하인들에게 끌러나가며) 대감마님, 대감마님, 제발! 식구들 좀 살려 주십시오. 대감마 님! 우리 식구들 좀 식구들 좀 살려주세요. 대감마님! 대감마님!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화 중

    소작농의 처지는 이렇게 불안한 것이었다.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그 죄 때문에 그들은 항상 경제적 약자였다. 땅은 농민에게 밥이자 생명이었다.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나라가 망할 때면 어김없이 경제적인 양극화가 심화되어갔다는 것을. 무슨 정해진 법칙이 있는 것처럼 왕조 말기가 되면 지배층에게 토지와 부는 급격히 집중되었다. 산천으로써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들이 이를 말해준다. 이와 반대로 민중들은 송곳을 꽂을 땅조차 갖지 못한 채 자신들의 궁핍에 절규하고 삶의 파탄을 저주해야 했다. 비유하자면 서민들의 처지는 흡사 목까지 물이 차오른 강을 건너는 행렬과도 같았다. 위태위태하게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다가 강바닥이 조금만 꺼져있어도 그들의 삶은 죽음의 나락으로 쓸려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다같이 잘 사는 사회는 역사 속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였다. 심지어 평등을 지향한다고 표방했던 사회주의 국가에서조차 가난한 다수의 민중들과 소수의 배부른 관료들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잘사는 사회는 어쩌면 영원히 구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늘 고난의 한 가운데 서 있던 민중의 삶!

    이번 글은 그들에 대한 것이다.

    무슨 과실로 이러는지 알 수 없소

    10년도 더 지난 오래전 옛 한글 문서 한 점을 수집했다. 가로 18, 세로 32cm 크기의 한지에 먹으로 쓴 것으로, 세로 방향으로 6번 접힌 흔적으로 보아 누군가에게 전한 편지 글로 보인다. 문서에는 세로로 총 8줄의 글이 쓰여 있는데, 날려 쓰지 않고 비교적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쓴 노력이 보인다. 그럼에도 옛 한글 문서 대부분이 그렇듯 띄어쓰기가 전혀 안된 데다가 옛 표현들이 구어체로 쓰여 문서 내용을 해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독자들께서도 읽고 어떤 내용인지 유추해보시기 바란다.

    [사진] 소작권을 둘러싼 옛 한글 문서로 해독이 쉽지 않다. (박건호 소장)

    암호처럼 난해한 내용이다. 어떤 문서일까?

    하나 하나 암호를 풀어보자. 이 문서의 핵심 단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여섯번째 줄에 나오는 ‘소작권’이란 단어다. 글을 쓴 이는 이 편지에서 ‘세상에 무과실한 소작권을 이리저리 옮기는’ 일에 대해 “무슨 과실로 이러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소작권을 졸지에 빼앗긴 한 소작농이 지주에게 그 부당함을 따지는 것이다.

    첫째 줄부터 보자. 2월 열흘 장날 밤에 유자성이 주점(酒店)으로 마전 소작인을 다 호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둘째 줄. 글을 쓴 이도 주점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유자성으로부터 “마전 전평 아홉 마지기 소작 이도삼이는 ‘이졍푀’가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셋째 줄과 넷째 줄은 이 말을 들은 유한주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푀’를 본즉 정국찬이 앞으로 났다”고 하면서 자신(유한주)이 알았으면 그리 안 되었을 것이라 하면서 자신이 들어가서 교체해 주겠다고 했다는 대목이다. 그런데 다섯 번째 줄에서는 유한주가 지주한테 들어갔다 나온 후 나온 책에 ‘짐병현’, 즉 김병현이 앞으로 ‘출푀’하여 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되자 글쓴이는 절망하여 지주에게 하소연한다. 4째줄 중간부터 끝까지의 내용이다. 그는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이 누가 중간에 개입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답주(畓主) 즉 지주의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 뒤 “아무 잘못 없이 소작권을 이리저리 옮기며 도조(소작료)로 말하면 신유관이 편에서 그렇게 재촉하여도 아니 주고 2년간 본 지주앞으로 꼬박꼬박 착실히 받쳤는데 무슨 과실로 이렇게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이 편지를 쓴 이는 소작인 ‘이도삼’으로 보인다. 이도삼은 마전 들판에서 아홉 마지기 논을 소작하고 있는 농민이다. 문맥상 신유관의 땅도 동시에 소작을 얻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점(酒店)에서 유자성에게 ‘이졍푀’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 유한주가 끼어들어 말하기를 ‘푀’를 봤더니 정국찬이 앞으로 났는데, 자기가 지주를 만나 교체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그 후에 ‘출푀’된 걸 보니 이번에는 의외로 김병현이 앞으로 소작이 나 버렸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이도삼은 ‘무과실한 소작권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마전의 아홉 마지기 땅에 대한 소작권은 처음 이도삼에서 정국찬으로, 그리고 다시 김병현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렇다면 편지 속의 ‘이졍푀’, ‘푀’, ‘출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푀’는 문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사실을 기록한 증표(證票)일 것이다. 즉 ‘표(票)’를 ‘푀’라고 쓴 것으로 보인다. ‘출푀’는 ‘출표(出票)’ 즉 표가 나왔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졍푀’는 무엇인가? 얼핏보면 ‘이정표(里程標)’ 비슷하게 볼 수 있지만, 그래서는 문맥이 맞지 않다. 이 경우 ‘소작권의 이동과 관련되는 표’여야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졍푀’는 아마 ‘이작표(移作票)’’, 혹은 ‘이경표(移耕票)’로 봐야 할 것이다. 이작표는 지주가 소작을 바꿀 때 발급하는 증표이다. 필자가 수집한 문서 중에도 이작표가 있다. 문서는 일제 강점기 경성 장교정(長橋町)에 거주하는 지주 이씨가 자기 소유지에 대한 소작권을 기존 소작농에서 다른 소작농으로 넘긴 사실을 밝힌 증표 2장이다. 두 장 모두 대정11년(1922) 문서인데, 첫 번째 문서는 이영완, 이영태, 최상옥, 안성조의 소작권를 이작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문서는 윤기화, 신덕삼, 이범장, 정은서, 김효정, 허순명, 임금성, 신만필의 소작권을 이작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문서에서는 기존 소작인의 소작권을 누구에게 넘겼는지는 따로 밝히지 않고 있다.

    [사진] 지주 이씨가 이영완, 이영태, 최상옥, 안성조의 소작지를 회수한다는 내용을 밝힌 이작증이다. 표시된 부분에 ‘이작증(移作證)’과 ‘이작(移作)’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이도삼의 편지에 나온 ‘이졍푀’, ‘푀’, ‘출푀’를 이 ‘이작표’ 혹은 ‘이작증’으로 보면 문맥상 자연스러워진다. 이 이작표를 대입해서 다시 문서 내용을 정리해 보자.

    글을 쓴 이는 유자성으로부터 지주가 이도삼의 소작지에 대한 소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이작표가 나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유자성이 한 이야기 속의 ‘이도삼’은 소작지를 빼앗긴 인물이므로 이 글을 쓴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글 속에서 소작권을 뺏긴 인물은 이도삼과 정국찬 둘이 나오는데, 정국찬은 어차피 실제 소작을 하지도 못하고 바로 김병현으로 소작권이 넘어갔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 이 편지 쓴 인물을 이도삼으로 보는 근거이다. 이도삼은 지주의 토지를 지난 2년간 소작을 해 왔던 인물이다. 소작지에 대한 이러한 이작 사실을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유한주라는 인물이 자신이 이작표를 봤는데 정국찬이 앞으로 소작지가 났다는 사실을 알리며 자신이 미리 알았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거라며, 자신이 지주를 만나 어떻게든 본래대로 교체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로 보아 유한주는 중간 관리인, 흔히 마름으로 불린 사람으로 추정된다. 지주를 만나 그런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유한주가 지주를 만난 후 새로 나온 이작표에는 이도삼으로 소작권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김병현이란 사람 앞으로 소작이 나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 당황한 이도삼은 이렇게 된 것이 지주의 마음인지, 아니면 중간 관리인 유한주 때문인지 모르겠다며 지주에게 하소연한다. 그는 자신이 다른 지주 신유관에게는 재촉을 받고도 소작료를 못내더라도 해당 지주에게는 소작료를 2년간 꼬박 꼬박 빠짐없이 냈음에도 이런 조치가 나온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호소문 형식의 편지는 언제 작성된 것일까? 이 편지가 작성된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처지와 삶을 역사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소작농의 삶

    이도삼처럼 땅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짓는 것이다. 이때 땅을 빌린 사람을 ‘소작인(小作人)’ 또는 줄여서 ‘작인(作人)’이라 하고, 땅 빌려준 사람을 ‘지주(地主)’라고 한다. 지주는 토지를 제공하는 대신 소작농으로부터 소작료를 도조(賭租), 또는 도지(賭地)라는 이름으로 받으며, 경작자는 소작권을 가지고 경작한 후 도조를 치르고 나머지를 가졌다. 토지 사용료를 벼로 지급할 때는 도조, 금전으로 지급할 때는 도전(賭錢)이라 하였다. 소작료 즉 도조는 조선시대 이래 대략 수확량의 절반으로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리하여 ‘병작반수(竝作半收)’라는 말도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작료를 지주와 작인이 4:6으로 하는 경우, 거꾸로 6:4의 경우도 있었고, 아예 비율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액수를 정해놓고 그것만 내는 경우도 있어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지주는 보통 많은 수의 소작인을 거느렸으므로, 직접 소작인과 소작지를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마름(舍音)’이라고 불리는 중간 관리인을 두었다. 마름은 소작인의 생산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수확기 소작료 징수만이 아니라, 소작권의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름은 지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지고 농민들 위에 군림하였으며, 소작료 액수를 속여 지주에게 갈 돈을 횡령하기도 하였다.

    이런 마름의 수탈적 성격 때문에 문학 및 영상 작품에서 마름은 주로 탐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준희의 소설 『그리운 보릿고개』에 등장하는 박용칠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 마름 박용칠은 자신이 관리하는 소작인들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장학구라는 소작인의 딸을 자기 첩으로 삼으려다가 거절당하자 바로 일본군 위안부로 팔아버리는 악당이었다. 분노한 장학구가 박용칠을 죽이려고 시도하나 미수에 그쳐 주재소에 끌려가 모진 고문에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 모두가 굶주릴 때 어떤 아낙이 자기 손주를 위해 밤중에 호구지책으로 박용칠의 집에 가서 밥을 훔치다가 박용칠에게 걸려서 몽둥이로 맞아죽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사진> 북한의 리얼리즘 계열의 미술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계급적 갈등의 측면에서 표현하였는데 지주와 마름은 늘 탐욕적인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다. 왼쪽은 민병제의 「딸」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소작료를 내지 못하는 소작농이 어린 딸마저 지주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없게 된 비극적인 상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오른쪽은 윤형섭이 그린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라는 그림으로 지주의 탐욕과 수탈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미술박물관 도록)

    이런 지주 소작제 하에서 소작인의 처지는 지주에게나 마름에게나 파리같은 목숨이었다. 그나마 계약 관념이 약했던 조선시대에는 그러한 소작이나마 한번 소작을 얻으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소작이 바뀌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소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 ‘관습적 경작권’ 혹은 ‘영구 소작권’이라고 한다. 즉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절대화시키지 않았고 농민의 토지 이용권도 상당히 존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초기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기한부 계약제’라는 것을 동시에 도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다수의 일본인 지주가 창출될 판인데, 기존의 조선의 소작 관행에 따르면 소작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므로, 이래 가지고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내지에서 조선으로의 농업이민을 모집하는 것 역시 어려울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도입된 것이 기한부 계약제였다. 즉 앞으로 소작계약을 할 때에는 1년이면 1년, 2년이면 2년 기간을 정해놓고 계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기한부 계약제 이전의 소작인이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비교적 안정적으로 소작권의 변동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면, 이 기한부 계약제 시행 이후의 소작인은 1∼2년 주기로 소작권의 변동을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 전체 계약의 70%가 계약 기간이 1년이었고, 나머지는 2년 이상이었다고 한다. 기한부 계약제는 철저히 지주에게 유리했고 소작인에게 불리한 제도였다. 이 변화를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정규직 노동자가 하루 아침에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지주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소작농에게 ‘소작계약 해제 통지서’를 보내 계약을 끝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제 강점기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는 소작 조건과 기간을 약속한 소작 계약서 말고도 ‘시작표’, ‘이작표’, ‘소작계약해제통지서’, ‘소작료 납부 독촉고지서’ 등의 숱한 문서가 만들어졌고, 여기서 지주는 철저하게 갑의 위치, 소작농은 을의 위치였다.

    당시 소작 계약서를 살펴보면 이 계약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계약서 중에는 계약서란 이름 대신 아예 ‘소작권 승낙서’라고 쓴 것도 있다. 대등한 두 경제 주체가 소작 조건을 가지고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 소작농이 소작권을 요청해서 지주가 소작권을 승낙해 주었다는 의미이므로 문서의 제목 자체가 수직적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소작 계약서 끝 부분에는 연대 보증인 1∼2명을 반드시 쓰게 했다. 소작인이 소작료를 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지주가 마련한 일종의 안전 장치였다.

    [사진] 필자가 수집한 문서 중에는 김태희라는 소작인이 연대 보증인 2명 외에 추가로 15명의 보증인을 내세워 지주에게 소작권을 얻고자 한 ‘약증’이라는 이름의 문서도 있다. 소작지를 얻고자 한 소작인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문서이다. 그 내용은 “김태희가 빌린 소작지에 대하여 귀하가 보증란에 날인하여 소작권을 얻어주시면 설혹 소작인이 소작료를 납입치 못하더라도 귀하를 제한 원래의 연대인 2인이 책임을 부담하겠고 귀하에게는 하등 연루를 끼치지 아니할 것을 서약함”이라고 되어있다. 소화 9년, 즉 1934년 제작되었다. (박건호 소장)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소작계약서 한 장을 직접 살펴보는 게 좋겠다. 역시 필자가 수집한 문서로 전북 정읍군 태인면에 살던 소작인 김수만이 지주와 체결한 계약서이다. 병술년에 체결한 것인데 해방 이듬해인 1946년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의 소작 관행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계약서에 따르면 매년 음력 10월 10일까지 내기로 한 소작료는 정조(正租;껍질을 벗기지 않은 벼의 열매) 일백육십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주가 일이 있어 기한 내에 납부하라고 하면 소작농은 그것을 내야 하는데, 반대로 소작인이 약속 기한을 넘길 경우에 소작인은 연체 이자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납입 기한을 바꿀 수 있는 권리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제방이나 언덕이 무너질 경우 소작인이 즉시 수리할 것도 규정하고 있다. 소작 기간은 1년간이고, 문서 말미에 연대보증인 김봉순의 이름도 적혀 있다. 계약서 전문이다.

    소작계약서

    소작료: 정조(正租) 160근

    오른쪽의 계약은 정읍군 태인면 증산 논으로 143번의 219평을 병술년도 소작을 하기로 정한 바 전기(前記) 소작료 수납 기한은 음력 10월 10일로 정하되 만약 어떠한 일이 있을 때는 지주가 기한 내로 납입하라는 대로 지불하기로 하고, 또는 기한을 경과할 때는 기한일자로부터 연체 이자 배당하기로 하고, 만일 소작료를 내지 못할 때는 연대 보증인이 동등의 채무를 이행하기로 하고, 소작계약과 소작권리는 당년(當年)으로 하고, 본 논의 제방이며 높은 언덕이 파락(破落)의 염려가 있을 때는 소작인이 급속히 개선 수리하기로 계약함.

    병술년 음력 3월

    정읍군 태인면 증산리 소작인 김수만
    연대보증인 정읍군 태인면 증산리 김봉순

    이렇게 명백한 갑을 관계였던 지주-소작인 관계에서 지주는 소작농의 소작권을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소작권을 빼앗긴 농민은 생존권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당연히 지주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주는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 존재여서 쉽게 대들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구도 소작농의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이런 분노는 종종 자신의 소작권을 가져간 또 다른 소작농에 대한 앙심과 분노로 표출되었다. 을끼리 서로 반목하고 적대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한 신문에는 이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건 한 토막이 실려 있다.

    소작 이작에 원한을 품고 산중에 유인난자

    [부산] 소작권을 남에게 빼앗기고 그것을 분개하야 살인까지 하게 된 생활전선의 1막 비극이 있다. 경남 하동군 양포면 장암리 농업 이상준(37세)은 얼마 전까지 소작해오던 전답을 한 동리에 사는 정태년(44)에게 소작권을 뺏기고 항상 정태년을 원망하여 오던 중 31일 오전 1시경 이상준은 정태년을 자기 밭에 일을 거들어 달라고 유인하야 부근 산중에 데리고 가서는 덮어놓고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단도로서 정의 머리를 함부로 찔러 사경의 중상을 입힌 후 도망하고 말았는데……..김모(金某)란 친척의 집에 범인이 숨어 있는 것을 경찰대가 습격 체포하야 목하 엄중히 취조중이라 한다.

    『매일신보』, 1934년 6월 3일자

    [사진] 소작권 이작을 둘러싼 소작인 사이의 살인 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 1934년 6월 3일자

    1∼2년 단위로 바뀌는 불안정한 소작 조건도 그렇지만 높은 소작료 역시 소작농에게는 고통이었다. 조선시대에 소작료는 대체로 50% 정도였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60∼70% 정도로 고율화되었다. 심지어 80%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한부 계약제 때문에 소작농 입장에서는 이런 고율의 소작료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 고율의 소작료와 기한부 계약제는 동전의 양면이었던 셈이다. 지주가 소작농에게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른 사람에게 소작권을 넘기겠다고 위협하면, 소작농은 지주가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무리한 요구는 비단 소작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주는 자기 집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소작인들을 불러 일을 시켰고, 집 수리 등을 맡기기도 했다.

    이런 높은 소작료와 손쉬운 소작권의 이동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이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소작인의 단결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하의 소작인들과 지식인들은 단결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920년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가 1922년 발표한 ‘소작인 선언’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소작인들의 단결 선언이었다. 이 소작인 선언은 이후 전개되는 소작쟁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통해 소작권의 보장, 소작료의 인하, 각종 세금의 지주 부담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단결된 힘을 통해 가혹한 소작조건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31일자에 실려있는 ‘소작인 선언’의 주요 내용이다.

    사람은 본연의 자유가 있으며 본연의 평등이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태초 생활 상태를 살펴보면 아무 계급이라도 존재가 없었으며 그의 자유 평등을 구속한 적도 없었다……무참한 자본주의가 조선에 침입되자마자 일반 경제생활 상태는 돌변하였다…..그리하여 좌우로 협공을 당하는 조선 농촌은 그 자작 소농가가 해가 갈수록 몰락하여…… 이 많은 소작인은 과연 어떠한 생활을 하는가를 일별할진대 1할에 불과한 지주배(地主輩)를 위하여 피의 제전에 바치는 희생적 동물의 운명과 같다. 왜 그러냐 하면 지주는 특권만 있고 소작인은 의무만 있어서 지주는 자본가인데 소작인은 무산자이며, 지주는 신사인데 소작인은 노동자이며, 지주는 상전인데 소작인은 노예이며, 지주는 모든 권위자인 동시에 소작인은 온갖 피압박자이다. … 현재 소작 제도는 각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보면 수확한 곡물의 반 이상의 소작료는 상례가 되고 그 밖에도 지세, 비료대가, 마름료, 소작료 두량(斗量) 과다, 수리세, 출포료 등을 일일이 정산하면 소작인의 소득은 0이 될 것이다……. 소작 문제는 소작인 자체의 자각이 아니면 안될 것이오 소작인의 자각은 현금 상태와 같이 산산이 개인의 행동으로 아무 조직적 단체가 없으면 문제의 이해를 연구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 힘도 생기지 아니할지며 아무 일도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작 문제 해결은 반드시 소작인의 단결이 공고하여야 할 것을 가장 굳세게 신념하고 이에 선언하노니 조선의 소작인이여 단결하라. 조선의 소작인이여 단결하라. 단결하여야 살 것이다.

    -소작인 선언, 동아일보, 1922년 7월 31일자

    [사진] 소작 문제를 다룬 1924년 조선일보에 게재된 만평이다. 살찐 체구의 지주가 “달라는 대로 안 주니 이놈 좀” 잡아가라고 일본 경찰한테 말하자, 농민이 “내가 무슨 죄가 있소. 목구멍이 원수요!”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이놈아! 야가마시(시끄럽다)”라고 외치며 잡아가고 있는 그림이다.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 지주와 약자의 위치에 있던 소작인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소작쟁의이자, 한국 농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사진은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비(출처: 한국관광공사)

    다시 이도삼의 편지

    그럼 다시 이도삼의 편지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그 편지가 언제 쓰였는지를 따져보는 중이었다. 아쉽게도 문서에는 편지의 작성 시기를 알려주는 시간 정보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도삼의 편지는 종이의 질과 문장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이작표’를 통해 손쉽게 변경되는 소작권 등을 고려했을 때 일제 강점기의 문서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소작농에 대한 처지들을 바탕으로 이 문서가 쓰인 당시로 돌아가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

    편의상 시간은 일제 강점기 중반쯤되는 1925년으로 가정했다. 그리고 이도삼이 살았던 곳에 대한 정보는 편지 내용에 언급된 ‘마전’이 유일한데, 삼밭이 많은 곳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전(麻田)은 전국 곳곳 왠만한 곳이면 다 있던 지명이었다. 필자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마전’이 있다. 서울 송파구 삼전동(三田洞)이 그러한데, 삼전동은 그곳에 삼밭〔麻田〕이 많아서 유래한 이름인데 이후 ‘삼(麻)’을 한자로 취음(取音)하여 삼전동(三田洞)으로 표기해 버린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도삼이 살았던 마전 들판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식민지 소작농의 처지가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그가 어디에 살았는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 당시 이도삼은 그 시기 다수의 농민들처럼 소작농이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농사짓는 농민이었다. 주로 김 지주(地主)의 땅을 빌려서 농사짓고, 일부는 신유관이라는 지주(地主) 땅도 소작하던 터였다. 김 지주에게서 빌린 땅은 마전 들판의 땅 아홉 마지기였는데, 한 마지기(斗落)가 200평이니 대략 1,800평이었다. 그런데 다른 소작농들처럼 이도삼에게도 7할이나 되는 소작료는 그에게 자못 큰 고통이었다. 게다가 각종 세금이나 ‘수리조합비’라는 이름의 물값까지 제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소작인들이 고안해 낸 나름의 지혜도 있었다. 수확철이 되면 홀대로 나락을 훑을 때 싹싹 훑는 게 아니라 거칠게 훑는 것이다. 그러면 볏단에 나락들이 많이 남게 되는데, 그것들을 묶어 쟁여두었다가 나중에 훑어 먹는 것이다. 아니면 타작이 끝난 논들을 돌아다니면서 바닥에 떨어진 낟알들을 쓸어 담아 말려서 생활에 보태는 것이었다.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이 한가한 농촌의 풍경이 아닌 것처럼, 농민들이 떨어진 낟알들을 줍는 일제 강점기 농촌 모습도 목가풍의 풍경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궁핍과 가난이 겹겹히 덧칠해진 애잔하고도 슬픈 그림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날벼락같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김 지주가 마름을 통해 2년간의 소작계약을 해제하고, 정국찬 앞으로 소작을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마름 유한주가 나서서 지주를 만나 원래대로 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했지만 웬걸! 어디서 꼬였는지 소작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는커녕 이웃 동리의 김병현에게 소작이 넘어 가 버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도삼은 자신의 처지가 암담하여 할 말을 잃었다. 지난 2년 계약기간 동안 소작료를 제대로 안 낸 적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지주 신유관에게는 미루더라도 항상 먼저 챙긴 쪽이 김 지주댁 아니었던가? 도대체 이것이 지주가 내린 결정인지, 아니면 중간 마름이 장난을 쳐서 소작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김병현이 지주나 마름에게 돈이나 선물을 써서 그리 된 것인지 이도삼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당장 다음 달에는 만삭의 아내가 셋째 아이를 낳고, 살림살이도 더욱 빠듯한 터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봄이 오면 시작될 보릿고개는 또 어쩌란 말인가?

    도삼은 답답한 마음에 막걸리를 한 잔 들이키고 김 지주에게 직접 글을 써서 하소연해보리라 결심한다. 억울해서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흔들리는 등잔불 아래 그는 정성스럽게 글을 써내려간다. 억울한 심정을 담되 너무 지나치게 따져서 김 지주의 화를 돋구어 눈밖에 나는 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함과 정중함도 잊지 말자. 보통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친구들을 통해 익힌 어설픈 언문으로 또박 또박 세로로 글을 썼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 편지를 김 지주에게 전할 생각이다. 옆에서 만삭의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도삼을 지켜보며 한숨을 짓는다. 자식들은 옆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1925년 2월의 어느 겨울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바깥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봄이 오긴 아직 멀었다.

    2월 열흘 장날 밤에 유자성이 주점으로 마전 소작인을 다 호출하였기로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유자성이가 ‘마전 전평 아홉마지기 소작 이도삼이 이작표(移作票)가 날 것이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마름 유한주가 깜짝 놀라며 이작표를 본 바로는 정국찬이 앞으로 났다고 하면서 자기가 알았으면 그렇게 안되었을 것이라면서 교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온 책에서는 뜻밖에도 김병현이 앞으로 소작지가 나왔습니다. 저는 이 일이 중간 마름의 일인지 아니면 지주의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무과실한 소작권을 이리저리 옮기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소작료로 말하면 신유관이 편에서 그렇게 재촉하여도 아니 주고 소작기간인 2년 동안 귀 댁에 꼬박꼬박 소작료를 착실히 바쳤는데 무슨 과실로 이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제발 제 소작지에 대한 이작 조치를 재고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2021년 겨울을 버티는 사람들

    Covid-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다.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오래 지속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실물경제는 침체되었고, 영업시간 단축으로 혹은 집합금지로 문을 열 수 없게 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그들 뿐이겠는가? 특수 고용직, 임시 고용직 등 고용 취약 계층 다수도 일자리를 잃었다. 뉴스보도에 따르면 작년 2020년 취업자 수가 전년대비 22만명 줄어 외환위기 이후 최대치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중 도·소매업이 16만명, 숙박·음식점업이 15만 9천명, 교육서비스업이 8만 6천명 등 대면 서비스업의 타격이 컸다. 실업자 수는 110만 8천명으로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실업자 수를 기록했다. 실업률 역시 2001년 4.0%이후 최고치.

    우리 주변의 많은 서민들이 생존권의 위기를 느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니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중고거래 마켓에는 업소용 조리기구부터 새옷들, 가게에서 쓰던 보일러, 에어컨, PC 등 온갖 집기가 새 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코로나로 폐업하면서 나온 중고 물건들이다. 이런 코로나 충격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사람들도 오래된 재택근무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생활, 마스크와 한 몸이 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코로나 블루’로 지쳐가고 있다. 일상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코로나 승자’로 불리는 일부 업종은 코로나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이와 함께 착시를 일으키는 각종 지표들. 경제는 어렵다고 난리인데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오르고, 주가는 3000포인트를 넘어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영끌’의 절박함 때문일까? 대통령은 1월 11일의 신년사에서 “우리 경제는 지난해 OECD 국가 중 최고의 성장률로, GDP 규모 세계 10위권 안으로 진입할 전망이며, 1인당 국민 소득 또한 사상 처음으로 G7 국가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월 12일 발표된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인 1인당 국민 총소득(GNI)에서 우리나라가 G7 국가 중 하나인 이탈리아를 앞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이 통계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경제학자들은 앞으로의 경제 회복이 K자형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양극화가 한층 심화된다는 뜻이다. 이 예측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염병 위기 속에서도 부자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것이다. 섬 활동가인 강제윤 시인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다음 글은 그래서 뼈아프다.

    백화점 명품샵은 대기표까지 받아가며 줄을 서고
    1박 100만원 넘는 풀 빌라 팬션은 예약이 꽉 차 빈방이 없다.
    누구는 코로나로 죽어가는데 누구는 코로나 특수를 누린다.
    동네 골목의 작은 가게는 진즉에 불이 꺼졌다.
    전기불도 켜지 않고 난로 하나에 의지해 추위를 견디는 밤.
    더욱 극심해진 양극화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올해는 신축년 소의 해이다. 사람들은 소에 빗대 희망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 생(生)을 소와 연결하여 이렇게 절묘하게 해석했었다.

    生 = 牛 + 一

    생(生)을 파자하여 계곡에 걸쳐진 한(一) 가닥 밧줄 위에 소(牛)가 걸어가는 것이 생(生)이라고.

    그렇게 인생은 위태위태한 것이라고. 소가 한가닥 밧줄을 타고 높다란 계곡을 건넌다고 생각해보라. 원래 인생이 이렇게 위태위태한 것이라 하더라도 올해는 일상을 회복하는 해였으면 좋겠다. 일상이 회복되고 즐거워야 삶의 의미도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도록 국가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내 최악의 상황을 국가가 막아줄 것이라는 희망!

    내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가 구제해 줄 것이라는 기대!

    이런 기대와 희망은 꼬박 꼬박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권리이다. 국가 혹은 정부는 국민들에게 소작료를 착취하는 탐욕적인 지주가 아니다.

    정부는 코로나 방역에 있어서 그간 크게 선전하였다. 모두가 칭송할 일이다. 그런데 국민들 다수가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생존권의 위기에 처해있다. 절박함에 있어 소작권을 뺏긴 100년 전의 이도삼보다 덜하지 않다. 우리는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 자를 적극 보호해주는 정부의 능력도 보고 싶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유능한 대책을 마련해 주는 것이 정부의 존립 근거이다. 위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연재 칼럼 <역사의 한 페이지>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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