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과 절망을
    '급진적 열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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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01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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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체제의 성립과 함께 단절을 경험했던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은 독재에 저항하면서 급속하게 재성장하였다. 87년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개혁을 추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조직적・정치적 발전을 성취해왔다.

    그러나 지금 ‘포스트-민주화’시대로 이행하는 ‘전환적 위기’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으며 그에 따른 전환적 진통을 겪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진보세력에게 주어지는 전환적 위기의 성격과 나아가 진보세력에게 제기되는 전환적 진통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결합

    주지하다시피 87년 이후 90년대를 거치는 민주화 과정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결합되면서 진행되었고 민주화의 결과로 국가와 시장의 민주화와 투명성 제고가 촉진되었다. 진보세력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러한 변화를 아래로부터 촉진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영향의 결과로, 또한 그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사회정책을 ‘민주정부’가 구사하지 못함으로써, 민주화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삶의 조건은 더욱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다. 나아가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담지자가 되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비정규화로 고통 받고 있다. 민중들의 삶의 고통은 물론이고 성공신화를 가지고 있었던 중간층마저도 그 기반이 붕괴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교육을 둘러싸고는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제 교육 불평등을 통해서 계급적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나아가 계급적 분리의 중요한 경제적 근거인 부동산 소유문제를 둘러싸고는 독재 정부보다도 민주 정부 하에서 토지주택 불평등이 더욱 고착화되었고, 세금정책을 통해서 이의 악화를 간신히 방지하는 수준에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화가 역설적으로 투명성이나 민주성을 높였지만, 더욱 악화된 불평등과 경제적 고통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가 출현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 출현

    이러한 모순적 양상이 바로, 민주개혁이 압도적인 시대적 과제가 되었던 민주화 시대와 달리 새로운 ‘포스트-민주화’로의 전환적 위기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 참여정부의 수장 노무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민주정부의 위기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보수적 회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추동했던 당시의 (민주)진보세력의 일부가 집권세력이 된 참여정부는 정치 이념적 성격을 보면, 중도자유주의적 정부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부의 위기와 붕괴가 보수주의세력의 재약진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수의 능동화’로 표현하는 현상들이 지적・현실적 수준에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뉴라이트의 등장이나 박정희 재평가도 이러한 현상에 속한다. 개발독재시기에는 관변단체들의 능동화가 있었으나 이는 단순히 위로부터 동원된 것에 불과하였다. 87년 이후의 개혁국면에서는 보수 세력이 민주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압도되어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주개혁국면에서 포스트-민주화 국면으로의 이행과정 속에서 보수세력의 능동화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정부 혹은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급진적’ 열망으로 나타나지 않고 보수화의 정신적 자산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진보세력, 그 일부로서의 민주노동당의 과제가 주어진다.

    강고한 계급적 기득권세력

    ‘투쟁과 시대의 소망을 명료하게 드러내야 하는’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나는 단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시장권력과 계급권력, 혹은 계급적 기득권세력이 강고해져 있고 이를 돌파할 힘은 형성되어 있지 않고, 여기서 대중들이 중도자유주의 민주정부의 참담한 위기 속에서 보수적 출구에 기대를 걸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국민정부를 지나 2번째의 ‘민주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형해화되고 한국자본주의와 계급권력, 시장권력에 의해 무력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민주정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시장권력과 계급권력이 너무 힘이 커졌기 때문이며, 민주정부의 무능력과 실책으로 인하여 ‘계급적 기득권세력’이 민주정부의 제한된 개혁마저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공간을 더욱 크게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에 대응하는 민주정부의 사회적 ‘비(非)개혁성’으로 인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도자유주의 민주정부의 실책과 무능력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계급적 기득권세력과 보수 세력이 진보를 ‘희화화’하는 정도의 상황이 출현하고 있는 셈이다.

       
     ▲ 비정규 철폐투쟁을 외치는 금속노동자들
     

    계급적 각성과 공공성의 전선

    이러한 상황에서 두 가지 돌파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와 민중들 자신이 투철한 계급적・사회적 각성을 촉진하는 정면 돌파를-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수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적 차원에서 ‘시장화 대 공공화’ ‘사적 이해와 공적 이해’‘시장성 대 계급성’의 전선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른바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공공성을 가능하게 하는 계급적・사회적 힘을 형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계급적-정치적-정세적 역관계

    나는 개인적으로 계급적 역관계, 정치적 역관계, 정세적 역관계를 구분한다.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정치적 역관계에 해당한다. 이는 물론 계급적 역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로 형성되는 역관계이다.

    정세적 역관계는 주체와 무관하게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특정계기에 의해서 조성되는 역관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북핵 위기 이전과 이후가 정세적 역관계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기본은 계급적 역관계이다. 이제 계급적 역관계 자체를 변화시켜내지 않으면 진보를 추동할 수 없는 조건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단계 높은 사회진보를 위해서는 새로운 역관계의 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형성한 계급적 역관계의 틀 내에서 성취할 수 있는 민주개혁의 한계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87년 이후의 민주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계급적 역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새로운 진보를 추동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은 없다”, “더 이상 ‘시민’은 없다”

    먼저 첫째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독재 하에서 국가권력의 개발주의적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의 시장권력과 계급권력이 성장하였고 민주화 과정에서 주어지는 ‘자율화’의 공간을 향유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친시장적 효과에 의해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그 힘을 강화하여 왔다. 한국의 시장권력과 계급권력은 때로는 국가권력을 도구화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그것을 ‘형해화’하는 방향에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한다.

    반면에 민주개혁의 많은 부분은 ‘사회경제적 개혁’의 문제의식이 적고,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서 고통 받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정작 투철한 계급적 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변형된 반공주의’-과거의 수평적인 대결적 반공주의에서 ‘체제우월론적 반공주의’로-에 의해서 그 계급적 각성이 질곡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글로벌한 차원에서 모든 사람을 미친듯이 경쟁력 제고를 향하여 달려 나가도록 촉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효과가 미치고 있다.

    나는 단적으로, “강남사람들은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강북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또한 자본가와 상층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직시하는데 노동자와 민중은 자신들의 계급적・사회적 이해를 직시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상층계급은 자신의 이해를 보호하는 정당을 잘 아는데 노동자들과 중하층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정당을 잘 알지 않는다. 이것이 현존 계급적 역관계의 의식적 내용이다. 이러한 계급적・사회적 의식의 질곡의 최대의 질곡요인은 물론 분단반공체제이다.

    이러한 계급적・사회적 의식의 질곡은 노동자와 민중, 다양한 하위주체들이 ‘국민’이라는 정체성, 시민이라는 정체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적으로 분화된 국민

    돌이켜 보면, 박정희 개발독재의 시대는 ‘국민’의 시대였다. 경제적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개발・성장이 이루어지면 ‘모든 국민’이 다 잘살 것으로 생각하고 노력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개발・성장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국민’은 없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드러났다. 계급적으로 분화된 국민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시민(운동)’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정치적 개혁, 투명성, 민주화, 합리화를 진행하면 ‘모든 시민’이 그 민주적이고 투명한 사회에서 잘 살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노력하던 시대였다.

    이 시민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더욱 양극화된 사회가 출현해 있다. 이 양극화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흐름은 이제 새로운 의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개발독재 하에서 고문된 ‘국민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며, 민주화 과정에서 고무된 ‘시민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제 시민들이 계급적・사회적으로 분열・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전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괴적 결과에 저항하는 분노한 노동자, 농민, 다양한 하위주체들이 출현하지 않는 한 ‘민주개혁’을 뛰어넘는 진보를 성취하기가 어렵다.

    국민의 이름으로 반독재 민주주의를 추동했던 반독재민주화운동과 시민의 이름으로 민주개혁을 추동했던 시민운동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교육을 둘러싼 계급적・사회적 투쟁

    예컨대 교육문제를 보자. 최근 교육을 둘러싸고는 두 가지 힘이 각축하고 있다. 하나는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강고하게 존재하여 왔던 학벌・학력 차별・기득권체제를 약화시키려하고 하는 힘이며 다른 하나는 계급적 불평등체제에 조응하는 형태로 기존의 학벌교육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힘이다.

       
    ▲ 대학평준화를 외치는 학벌없는 사회 학생모임 회원들
     

    개발독재 하에서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국민’을 만드는 기제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평준화체제가 도입된 것이 박정희 체제 하에서였다. 그것은 일정하게 경제적 불평등을 상쇄하는 평등화기제로 작용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화의 진전과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확장으로 인하여, 기존의 평등화 기능을 하던 교육체제(공교육 포함)와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상층은 평준화체제를 해체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의 재생산기제로서 교육체제를 재편하려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것은 강화된 시장의 힘이 개발독재 하에서 대중적인 고등 노동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정된 평준화 교육체제마저 무력화시키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학벌철폐운동 및 교육민주화운동은 이러한 시장의 요구에 대항하면서 ‘시장의 해체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교육을 지켜내어 경제적 불평등의 상쇄기능을 지속하도록 하며, 기존의 공교육체제 내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학벌기득권체제의 약화 및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만일 ‘시장의 힘이 승리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경제적 불평등의 상쇄기제가 아니라 바로 경제적 불평등의 재생산기제의 중요한 일부로 정착되게 될 것이다.

    국민이라는 범주를 전제하고 개발독재가 이루어졌다면 반독재민주화운동 역시 국민적 운동이었다. 국민적 민주주의운동이었다. 이어서 전개된 시민운동도 시민적 동질성에 기초한 운동이었다.

    나는 국민적 합의, 시민적 합의만으로 더 이상 우리 사회 진보를 추동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계급적 기득권세력은 국민의 이름으로, 시민의 이름으로 양보할 자세는 더 이상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한 양보를 강제하는 공적 기능을 해야 할 민주정부는 무능력과 한계로 인하여, 계급적 기득권세력이 더욱 명분 있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나는 국민의 이름으로, 시민의 이름으로, 전진하기가 어려운 조건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이나 시민의 이름으로 이러한 불평등화에 저항할 때, 우리 사회의 계급적 기득권세력은 ‘헌법’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자유시장의 원리로 저항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민주개혁을 계급적 기득권세력과 보수 세력에 강제한 도덕적・실제적 힘을 부여하였던 6월 민주항쟁의 정신적 자산들은 이제 고갈되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새로운 정신적 에토스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러한 계급적 불평등체제에서 고통 받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민중, 다양한 약자들이 이러한 새로운 불평등화체제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담론전략, 언술전략의 수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 다양한 약자집단들의 계급적・사회적 분노를 제약하는 이데올로기적 언술과 담론을 해체하기 위한 과감한 해체적 전략이 필요할 수 있다.

    분단과 개발독재 하에서 방어적 담론전략을 취해왔다. “너, 좌파지” 하면 바로 방어적 자세로 들어가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구도를 타파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급진여성주의자인 스피박은 언젠가 “서발턴(다양한 사회적 약자집단들)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현재의 담론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계급적・사회적 분노를 명료화하는 새로운 언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서 노동자와 민중, 다양한 약자집단들은 새롭게 강화되는 신자유주의적 불평등질서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선

    둘째,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시민적 전선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첫째가 현존 교착상태를 돌파하기 위하여 계급적 역관계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선의 형성은 정치적・정세적 역관계를 진보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 2006년 5월1일 노동절 "비정규직 철폐! 무상의료 실현!"을 외치며 투쟁하는 노동자 (사진=매일노동뉴스)
     

    첫째의 차원에서의 국민과 시민의 ‘분열’을 주목해야 한다고 한다면, 둘째의 차원에서는 계급적・사회적으로 분열된-만일 우리가 다시 국민과 시민을 이야기한다면-국민과 시민을 새롭게 공공성이라는 전선에 폭넓게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공공성은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와 민중, 다양한 하위주체들이 새로운 연대투쟁을 형성할 수 있는 매개지점이 될 수 있다(국민, 시민은 계급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차별선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는 범주라고 하는 인식을 전제로 할 때 그것은 다양한 계급계층・사회적 집단들의 헤게모니 경쟁의 결과로서 이차적으로 규정되는 이데올로기적 범주이다).

    여기서 공공성은 국가(경제, 사회)의 공적(公的)・비사유(丕私有)적 성격을 의미하는데, 이를 기본적으로 나는 ‘강제된 비(非)계급성’으로 규정한다. 맑스주의의 국가론의 핵심적인 명제는 국가의 계급성과 폭력성이다.

    이는 ‘본질로서의 국가’에 대해서는 타당하다. 그러나 ‘현실로서의 국가’는 비계급적이고 비폭력적인 모숩으로 나타난다(물론 광주항쟁에서처럼 폭력적 국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여기서 본질과 불일치하는 ‘국가의 비계급성’은 한편에서 국가의 전략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민중에 의해 국가에 의해 강제된 성격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국가를 자본주의적 국가라고 했을 때 그것이 근본적으로 계급적 국가이지만 강제된 비계급성을 가질 수 있고 이는 노동자와 민중, 다양한 하위주체들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라고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각축

    그런 점에서 포스트-민주화의 국면에서는-민주화가 달성한 민주주의 혹은 자본이나 우리 사회의 보수도 수용한 민주주의의 조건을 의미한다-‘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대립되지 않는 수준으로 인정하고 형해화하려는’ 힘과 반대로 민주주의의 ‘잠재적인 급진성’을 확장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공적・사회적・정치적으로 규율하고자 하는 힘 간의 각축이 전개되게 된다.

    이것이 공공성을 둘러싼 국민적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확장함으로써 공적 성격을 자본주의에 강제하고 계급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의 공공적 성격을 만드는 것이 현 시기 사회운동의 과제인 것이다.

    민중운동에게 있어 공공성은 기본적으로 방어적 성격이 있었다. 노동운동에서도 노동유연화를 반대하는 방어적인 의제의 성격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시대에 전사회적 수준에서 공공성, 사회성, 사회공공성은 공세적인 국민적 의제가 되고 있다.

    ‘민중적 위협’을 통한 전진

       
     ▲ 이뤄내야 할 모든 투쟁의 만장 물결
     

    나는 바로 이처럼 노동자와 민중의 계급적 각성이 고양되고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시민적 전선이 강화될 때에라야, 현재 집권세력을 이루는 ‘중도개혁자유주의’세력이 ‘사회적 자유주의세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강제될 것이며, 우리 사회의 보수적 세력과 계급적 기득권세력이 국가의 공공성과 사회성을 ‘주어진’ 조건으로 수용하는 조건이 탄생할 것이라고 각한다.

    ‘100%를 잃어버릴 위기에서 사람들은 50%를 양보한다’. 스웨덴의 모델의 탄생은 바로 코앞에 존재하는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의 위협과 유럽에서의 혁명운동의 고양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분노’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사회적 개혁을 가능케 하는 ‘민중적 위협’이 될 수 있다. 스웨덴 모델이건, 네덜란드 모델이건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넘어서는 모델의 현실적 구현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사회적 역관계, 그것을 구성하는 민중의 분노가 필요하다.

    (물론 스웨덴 모델의 출현에-최근 도전을 받고 있지만-스웨덴의 계급적 기득권세력과 통치세력의 공로는 없는가. 있다. 그것은 많은 정치적 비용을 치루지 않고 계급적 양보를 통해서 스웨덴 모델을 만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빈민 등 민중의 새로운 계급적・사회적 각성과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개방성을 가진다면 우리 사회는 정치적 불안정을 줄이면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부의 위기가 진보적 정치의 공간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적 공간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전환의 계곡’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한국정치의 지역주의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87년 이전의 지역주의와 87년 이후의 지역주의는 다르다. 87년 이후의 지역주의는 개발독재의 파쇼화로 위기에 처한 한국의 보수가 지역주의를 매개로 자신을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는 양김의 분열 등 진보의 도덕성의 상실이다. 87년까지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헌신적 도덕성은 87년 양김의 분열 등으로 인하여 그 파괴력이 약화되면서 위기에 처한 보수가 ‘교착’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제 이러한 지역주의로 고착된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해체하고 전진하는 계기는 결국 노동자와 민중의 파괴적인 계급적 현실의 분노, 시민사회의 새로운 급진적 활성화이다. 물론 그것은 어렵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대한 파고가 이러한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계급적・사회적 분노를 보다 명료한 급진적 언어로 매개해야 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독재 하에서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민주주의에 ‘보수도 거부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였듯이, 이제 새로운 계급적 현실, 신자유주의에 의한 파괴적 현실에 맞서서, 새로운 희생과 헌신, 투쟁을 통해서, 한 단계 높은 진보의 과제에 ‘보수도 거부할 수 없는’ 도덕적・실제적 힘을 축적해가야 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편에서는 시민운동을 포함하는 공공성 방어 및 확보의 국민적・시민적 전선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공성 투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급적 역관계의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사실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조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좀 장기적인 안목에서 장기적인 견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와 민중이 ‘민주정부’적 상부구조를 갖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해에 급진적으로 분노하면서 이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급진적 대안을 추구할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요한다고 생각한다.

    87년 6월 민주항쟁에 국민들이 집결하기까지 26년이 걸렸다.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 주어지는 대중들의 고통이나 잠재적인 저항성은 아직 진보운동이나 진보정당이 결합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반신자유주의투쟁과 대중의 거리, 사회공공성 투쟁과 대중의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먹는 문제 해결하는 급진적 비전

    이러한 두 가지 과제의 진전을 위해서는 대중의 급진적 열망이 진보운동과 정당에 수렴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적 비전이 주어져야 한다. 민중들이 자신들의 절망이 급진적 대안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진보세력에게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에 새로운 진보적 경제모델과 국가모델을 새롭게 창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여기서 민주노동당은 참여정부의 참담한 패배를 딛고 전진해야 한다. 그 패배의 주된 원인은 민주정부가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을 먹고 살게 하는 모델’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성장과 분배의 선(善)순환’을 당위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정책적으로 구현하지는 못하였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위기와 몰락을 단순히 참여정부의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한편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계급적 기득권세력의 강고함에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계급적 역관계의 전환이라고 하는 과제를 직시하면서도 그것이 실현가능한 급진적 비전을 통해서 촉진된다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서, 대중의 급진적 열망을 모아내는 진보적인 대안 모델의 창안의 과제를 돌파해야 한다.

    민중의 계급적・사회적 의식을 보다 급진화하고 그들의 분노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이면서도 실현가능한 비전적 대안을 민중에게 제출해야 한다. 여러 가지 복합적 정책들이 결합되어야 하겠지만 부동산 문제 같은 경우, ‘예컨대 ’1가구 2주택 소유금지’ 같은 대안을 가지고 부동산 문제의-급진적이지만-해결 대안을 민중에게 제출하고 계급적 기득권세력과 계급적・사회적 ‘전쟁’구도를 형성해가야 할 것이다.

    대중들이 비록 급진적이더라도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느낄 때 계급적 기득권세력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될 것이고 이는 진보운동 및 정당과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대안은 불가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응하는 사회적 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진보적 대안경제 모델은 대안적 국가 모델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모델은 공공성을 담지한 사회적 국가(social state)모델을 지구화의 맥락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물론 한편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모델의 붕괴와 파탄,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의 관료주의적 병폐와 경제적 동기화의 실패를 성찰하는 모델이 될 수밖에 없다. 전후의 일국적인 포디즘(Fordism)적 조건 위에서 사회복지국가가 정립되었다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조건 속에서 이는 해체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소련 및 동유럽에서도 민주화와 시장화로 상징되는 ‘이중적 전환’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이는 새로운 진통을 몰고 왔다. 과거 사회주의체제의 국가복지의 초라함에 분노하면서 시장경제로 달려가던 대중들은 이제 시장의 가혹함에 새로운 정치적 지향들을 표출하고 있고 그것이 때로는 구 좌파정권이 복귀한다거나 민족주의적 정권이 등장하는 등의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시장대안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처럼 현존 신자유주의적 시장대안과 구별되는 새로운 대안의 동력은 전지구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국가모델로 나가는 데 있어서 여전히 한국의 정치사회적 조건이 척박한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시대를 통하여 강화된 경제적 기득권층과 자본은 국가의 사회성을 견제하고 지속적으로 친자본적 국가로 기능하도록 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은 이러한 국가의 탈(脫)사회화의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압도적인 흐름은 대안의 지형 자체를 크게 제약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일정하게 계급적・사회적 투쟁이 수반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리안의 보편성’과 대안모델

    이런 점에서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 노동 등 민중부문의 역동성을 전제로 하여, 개발독재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한국에서 대안적인 경제모델과 국가모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서구의 모델을 탐색하거나 모방-모방할 모델도 없다-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모델을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그러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안의 보편성’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많은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을 가진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새로운 대안모델을 구성하기 위한 다양한 지적・현실적 노력의 각축장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행되는 한국의 진통들은 단순히 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대안모델을 찾는 선도적인 동력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러한 계급적・사회적 각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계급적 역관계를 전환시켜 진보의 공간을 만드는 일, 공공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적・시민적 전선을 형성해내는 일, 그리고 대중의 계급적・사회적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급진적인 대안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역량이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친미적・냉전적 인식이 아직도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래서 진보적 운동이 천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대중적인 진보정치역량이다. 민주노동당은 남미의 좌파 블럭이나 중동의 반미 블럭과는 구별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진보적 모델, 한편에서는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와 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부의 비타협적인 계급적 기득권세력과 싸우면서 새로운 급진적인 사회적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힘겨운 과제 앞에 서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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