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 일대기
    [책]『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정철훈/ 시대의창)
        2021년 01월 09일 10: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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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 최초의 여성 사회주의자를 아십니까

    1885년 러시아 연해주의 중국 접경 마을 시넬리코보에서 태어난 한인 2세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그녀는 자라서 동청철도 건설 현장과 우랄 산맥의 벌목장 등지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목격합니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알렉산드라는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떴습니다. 조선인과 중국인 등 러시아로 건너온 소수민족 노동자들을 대변해 우랄노동자동맹을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활동을 눈여겨본 러시아공산당은 마침내 알렉산드라를 1918년, 러시아공산당 극동지역 인민위원회의 외교인민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해에 이동휘, 김립 등 독립운동가들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할 때 알렉산드라 역시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극동 지역은 볼셰비키에 적대적인 수많은 나라의 군대가 주둔한 화약고였습니다. 모스크바 등지에서는 볼셰비키의 힘이 강했으나 시베리아 넘어 연해주 일대에는 백위군의 위세에 적위군이 밀리는 형국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활동의 근거지인 하바롭스크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기선 바론 코르프 호에 몸을 싣고 아무르강 상류로 향하던 중 러시아 반혁명 세력인 백위군에 체포되었습니다. 모진 고문이 계속되는 등 비인도적 대우를 받던 끝에 알렉산드라는 아무르강 우초스 절벽 인근 공원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서른셋이었습니다.

    “내가 죽을 자리를 내가 잡을 것이다” 하고 자기를 사형리들이 세웠던 자리에서 13보를 엄숙하고 정직하며 진중한 태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서 헤이룽강 물이 휩싸고 도는 파도에 하얀 물결이 넘치는 검고 푸른 바윗돌 위에 마치 기념 동상처럼 우뚝하게 올라섰다. 수많은 관중들은 모두 숨도 크게 쉬지 아니하고 그를 향해 침묵에 잠기었다.”

    ―알렉산드라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이인섭 비망록’ 가운데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시대에 바치는 서사

    오랫동안 ‘알렉산드라’에 천착해온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철훈 작가가, 그녀를 다룬 소설과 평전을 다시 정리하고 이후의 자료와 연구를 집대성하여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을 펴냈다. 저자는 러시아 외무성 외교아카데미에서 관련 주제로 쓴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터라, 역사적 식견에 문인으로서의 섬세함을 더해 알렉산드라의 일대기를 탁월하게 그려냈다.

    알렉산드라를 최근 노동계의 시각에서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가하며, 국제주의적 시각에서는 ‘민족의식의 경계를 극복한 인물’로 재평가한다. 그럼에도 그 이름은 아직 일반에 생소하기만 하다. 독립 투쟁 시기부터 따지자면 한 세기가 넘도록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해온 혁명가의 삶을 역사에서 송두리째 지운 까닭이다.

    저자는 이를 극복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드러냈다. 문학적 글쓰기란 “한 인간의 내적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자 “꿈과 상상력의 총화”이기 때문이다. 숨통을 조여오는 차르 헌병대의 감시망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 나고르나야 14번지에 살던 알렉산드라의 흔적을 좇아, 그녀가 황급히 기차에 올랐을 오케안스크 역을 서성이면서 느꼈을 그 감정을, 그리고 역사의 장면을, 저자는 우리에게 생생하게 펼쳐놓는다. 책을 펼치면, 러시아 극동에서부터 우랄의 산악 지역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내딛은 그녀의 절실한 발걸음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너무도 혼탁한 이 시대에 이정표처럼 도드라지는 발자국을.

    닥터 지바고의 ‘라라’ 혹은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의 일대기를 음미하다 보면, 두 캐릭터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바로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라라’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격변기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투쟁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우랄이라는 한 공간에서 겪어낸 알렉산드라와 라라의 환영은 오래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닥터 지바고는 아름답고 정열적인 간호사 라라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러시아 혁명과 전쟁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어느 날 지바고는 전차 차창 밖의 라라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라라의 잔영은 사랑에 실패하고 혁명에 뛰어든 알렉산드라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독일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의 《자본축적론》은 마르크스주의에 소중한 기여를 했다. 그는 선진 공업국과 후진 농업국의 상호 관계를 다루면서, 제국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본주의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인간성을 그 폐허 속에 파묻는 위협이 된다는 중요한 사상을 제시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 우파 민병대에 의해 총살됐고 시신은 베를린 운하로 내던져졌다. 이 비극적인 장면은 알렉산드라의 최후와 거의 일치한다.” (<작가의 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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