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더기 된 중대재해법
    믿으라 했던 민주당…분노하는 유족
    5인미만 사업장 제외, 50인미만은 3년 유예 등 퇴행
        2021년 01월 07일 05: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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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 논의를 거듭할수록 법 적용 규모와 대상이 좁아지고 처벌 수위가 낮아지는 등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 특히 거대양당은 법 적용 대상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을 제외하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2년 유예하기로 해 공포 후 시행까지 걸리는 1년을 더하면 사실상 3년을 유예하도록 했다. 재계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중소기업벤처부 등 정부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법이 돼버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산업재해 피해 유가족은 단식 농성장을 찾아와 “믿어 달라”했던 민주당을 향해 “왜 죽음에도 차별을 둬야 하는지 그 이유라도 듣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단식농성 중인 산재 피해자 유가족들은 7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가 원한 것은 차별이 아니라 처벌이며, 처벌을 통해 예방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한 법안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유가족들과 중재법제정운동본부 기자회견 모습

    민주노총 기자회견(사진=유하라)

    이날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도출된 잠정합의 내용은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 ▲50인 미만 사업장 2년 유예 ▲10인 이하 소상공인과 1000㎡ 미만 다중이용업소 적용 제외(중대시민재해) ▲처벌 수위 하향 조정 및 벌금 하한선 삭제 ▲발주처·공무원 처벌 삭제 ▲처벌대상에 안전보건업무 담당 이사 신설 ▲인과관계 추정조항 삭제 ▲일터괴롭힘 삭제 등이다.

    잠정합의안에서 삭제되거나 후퇴한 내용들은 대부분 이 법안의 실효성을 좌우하는 핵심적 내용이다.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 유예’ 조항이 포함된 법안이 통과될 경우 우리나라 전체사업장 중 98.8%가 최대 3년간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지난 9월까지 전체 산재 발생의 80% 가까이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벌어졌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처럼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법이 시행되게 된다는 뜻이다.

    근로기준법 적용조차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는 이중 차별, 사각지대 확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5인 미만 사업장 산재 사망 비율이 연간 20%로 2천 명 중 약 400명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다 사망한다. 전체 사업장 중 5인 미만 사업장은 40%에 달한다. 특히 이 조항은 민주당 박주민·박범계·이탄희 의원 안이나 정의당 강은미 의원 안에도 없던 새로운 내용으로, 중소기업벤처부의 요구를 국회가 수용한 결과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죽어도 되는 목숨’ 취급…분노스러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는 이날 입장문에서 “유예도 아니고 배제로 적시해 공식적으로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는 ‘죽어도 되는 목숨’으로 규정한 것에 분노한다”며 “이제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다 죽은 것을 자책해야 하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셈인가. 근로기준법 적용제외로 노동기본권조차 보장 받지 못한 채차별 받으며 일한 것도 억울한데 생명과 안전에도 차별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안전·보건조치를 해야 할 대상과 이를 하지 않아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했을 때 처벌 받을 대상의 범위에 ‘안전보건업무 담당 이사’가 포함된 것은 사실상 경영책임자에 대한 면죄부를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기업의 실질적인 예산권을 쥔 경영자가 책임지고 안전·보건 의무를 챙겨야 산재를 예방해야 한다는 취지를 완전히 훼손한 셈이다.

    지나친 공기단축 강요로 인한 물류센터 화재 참사를 유발한 발주처나 세월호 선박의 불법 개·증축을 허가해준 공무원들도 양당이 소위에서 처리한 법안대로면 처벌할 수 없게 된다. 또 기업의 이윤과 공무원의 직무유기로 벌어진 사고에서 가족을 잃은 피해 유가족들이 직접 증거를 수집해 책임자를 기소해야 하는 지금까지의 기이한 상황들도 유지된다.

    온전한 중대재해법 제정을 위해 28일째 단식 중인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참담한 심정”이라며 여론조사에서 국민 71%가 중대재해법을 원하고 있다. 잠정합의안은 그런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게 엉망으로 죽었다. (잠정합의안을 보고) 그 사무치는 한이 폭발한 것 같고 분노스럽다”며 “이 법을 막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해 선거 때 반드시 심판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 김태규 건설노동자의 누나 김도연 씨도 “가족이 살아 돌아올 수 없는데 백혜련 의원은 유족에 대한 보상을 두텁게 하겠다고 한다. 그 자체가 이 법의 취지를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는 뜻”이라며 “우리는 이 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가족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겠다는 절박함으로 온전한 중대재해법 제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유가족 등의 면담 요구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벌인 유가족을 외면했던 보수정당과 똑같은 모습이다.

    고 이한빛PD의 아버지 이용관 씨는 “아침부터 법안소위 위원장인 백혜련 민주당 의원에게 여러 차례 전화도 하고 문자 메시지도 보냈지만 답변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외치는데도 외면한다. 너무 억울하다”며 “왜, 죽음에도 차별을 둔 것인지 그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백혜련 의원은 무엇이 두려워 만나는 것조차 피하고 전화조차 받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상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집행위원장도 “백혜련 의원과 여야 원내대표에게 ‘오늘 오전에 잠시라도 시간을 내달라’고 정중히 간청했지만 일거에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이 집행위원장은 “28일 동안 이곳에서 밥을 굶는 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이 농성장에 들렀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믿어 달라, 반드시 중대재해법 만들겠다’고 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사람을 살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법안’이라고 했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도 와서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양당 합의 내용을 보면) 결국 그들은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정치를 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민주당 의총장 앞에서 항의하는 정의당 의원들(사진=정의당)

    유가족과 함께 단식농성 중인 정의당은 각 정부 부처가 제출한 개별 의견이 국회에서 법안이 후퇴한 주요 원인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정의당 의원들은 민주당 의원총회 장소 앞에서 피케팅 등을 벌이며 재논의를 촉구하고 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걸린 법안에 대해 단일안을 만들지 않은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정부 각 부처가 마치 쪽지 예산 끼워넣기 하듯 각 부처의 민원을 의견서에 끼워 넣는 졸속 심사방식으로 중대재해에 국민을 차별하는 기괴한 법안이 합의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의 적용 제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의 논의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쟁점으로 거론조차 된 적이 없다”며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일등시민, 이등시민 구분하며 차별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중대재해 발생 시 법의 보호를 받는 국민과 받지 못하는 국민을 구분하며 차별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정 수석대변인은 “개별 부처의 의견서가 법안 심사의 주된 기준이 된 졸속심사”라며 “국회의원의 입법권이 무시된 주객전도의 졸속 법안 심사의 합의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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