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 내린 뒷산을 오르며
    [낭만파 농부] 그래도 '새해'는 온다
        2020년 12월 30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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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첫눈이 내린다. 그새도 한두 차례 시답잖게 내리긴 했지만 이번엔 내리는 폼이 제법 쌓일 기세다. 하지만 다 부질없다. 첫눈이 오는 날 어디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지 가뭇하기도 하거니와 설령 그런 약속이 있었다 한들 그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은 까닭이다. 이 수상한 시절에 말이다.

    코로나19 3차 유행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상황이다. 여기에 수도권에는 ‘5인 이상 집합금지명령’이 떨어져 있다. 비수도권인 이 고장은 ‘금지’ 대신 ‘권고’ 수준이지만 분위기로 보면 크게 다를 게 없지 싶다. 달포 전까지도 ‘청정구역’이던 곳이 이제는 확진자수가 0에서 30으로 치솟은 탓이다. 사회심리적으로 ‘급속동결’ 효과를 불렀다고 할까. 너도나도 잔뜩 움츠려 있는 모습이 뚜렷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때를 같이 해 인공치아를 심는 시술을 받는 바람에 더 큰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한동안 죽 따위 유동식으로 버텨야 하고 심신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하니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게 상책이었다. 게다가 상당기간 금주령까지 떨어졌으니 더더욱 나다닐 일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1차 시술의 상처도 아물었고, 금주령도 풀렸다. 그새 술판을 벌이는 것도 언감생심이지만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는 남들 술 잔 기울일 때 알콜 성분 없는 음료를 거푸 마셔대자니 그런 고역도 없던 것이다. 그 시간이 짧지 않았는데 용케 잘 버텨냈다.

    그렇다고 모든 자유를 되찾은 건 아니다. 코로나19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되레 확산세가 도지는 양상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년 4월부터 일반인 백신접종을 시작하고 9월에는 집단면역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는 소식이다. 뭔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듯도 하지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은 별로 없다. 그 때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찔끔찔끔 상황을 뒤쫓는 듯한 지금까지의 대응기조가 적절한지도 의문이고.

    사실 ‘이게 사는 건가?’ 싶은 나날이다. 농한기에 담긴 분방함과 느긋함은 어느새 따분함과 나른함으로 돌변했다. 제 뜻에 따른 칩거나 안거가 아니요 강요된 고립이니 그럴 밖에. 감방생활의 지루함이 이런 것이었지 싶다. 어딜 나서는 것도 이래저래 꺼려지고 감옥에 갇힌 바로 그 느낌? 그런 탓에 이 지면을 채울 얘깃거리도 몹시 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도 하고, 마침 시간도 되어서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뒷산에 다녀오는 길이다.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녹아내린 눈으로 하여 바닥이 눅눅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산행이라 하기엔 무안하고, 그렇다고 산책이라기엔 숨이 가쁘고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첫눈으로 온통 은세계가 되었다. 매일 오르내리는 뒷산 능선이 느긋하다.

    여느 날 같으면 두툼하게 쌓인 낙엽이 푹신하게 밟히는 숲길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성묘객들이나 나다닐 뿐이어서 드문드문 고사목이 가로 놓이고, 잡목과 수풀에 덮인 길. 낫으로 정리하고 달포 넘게 나다니니 이젠 제법 오솔길 티가 난다.

    낙옆 푹신하게 깔린 뒷산 오솔길

    오늘은 그예 어미와 새끼 대여섯 마리로 보이는 멧돼지 식구를 만났다. 이웃들 얘기로는 얼마 전 집 근처 산자락으로 지나가는 걸 봤다고 했는데 그 무리이지 싶다. 나보다 먼저 인기척을 느꼈던지 어미의 꿀꿀 외마디를 신호로 우르르 도망치는 것이다. 오솔길을 걷다가 집채만 한 놈하고 맞닥뜨리면, 그 놈이 씩씩 달려들면 어찌하나 내심 걱정하던 터였다. 짚고 다니는 스틱을 꽉 그러쥐면서. 막상 사람을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내빼는 꼴을 보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지 세상에 인간만큼 지독한 종자가 또 있을까.

    얼핏 ‘멧돼지도 물리친 몸인데 코로나 바이러스쯤이야’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냉혹한 현실을 떠올린다.

    올해 처음 우리 <고산권 벼농사두레>에 합류해 한해 농사를 마무리한 청년들이 있다. 오랜 장마와 태풍 탓에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소출을 얻었다. 그 쌀을 어떻게 처분할지 얼마 전 의견을 모은 듯하다. 그 가운데 일부로 떡을 해 두레 회원들에게 돌렸다. 가래떡과 함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생각하며 무지개떡을 맞췄다고 한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떡을 핑계로 거나한 잔치를 벌였겠지. 생애 첫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반타작의 아쉬움을 위로하는 막걸리 잔도 몇 순배 돌았겠지. 하지만 그저 떡을 돌리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19로 얼룩졌던, 그리고 이래저래 탈도 많았던 이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길이 그리 밝아보이지도 않는다마는 ‘새해’라는 기운이라도 받아서 그나마 액이 수그러들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꼭대기에 오르면 이따금 이런 석양을 선물받기도 한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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