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익 · 곽재규 열사 3주기 추모제 열려
    By tathata
        2006년 10월 27일 08: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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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진중공업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3주기 추모제가 지난 11월 27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정문 앞 단결의 광장에서 열렸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을 비롯 지역노동자들 5백여명이 모여 진행된 추모식에는 민주노총 최용국 부산지역본부장과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당 위원장 등도 함께 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지난 1월 1일 해고된 지 20년만에 복직한 박영제(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총무국장) 조합원 등도 푸른 작업복을 입고 조합원들 사이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난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영도공장)에 입사하여, 당시 같은 부서 동료였던 김진숙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함께 ‘노조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그 뒤 20년동안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살며 복직투쟁을 전개해왔고, 지난 2003년 10월 김주익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의 ‘희생의 결과’로 그해 11월 해고자 17명에 대해 단계적 복직을 얻어내 지난 1월에 복직했다. 올해 초 한진중공업에 복직한 이들은 푸른 작업복을 입고 복직이후 처음으로 추모행사에 참여한 것이다.

       
    ▲ 27일 한진중공업 정문 앞에서 ‘김주익 곽재규 열사 3주기’ 추모식이 조합원 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제는 오전 11시에 진행되었다.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시신을 놓고 투쟁을 벌이던 2003년의 차가운 날씨와는 달리 따듯한 가을 날씨였다. 참가한 조합원들은 ‘열사정신계승’이라 적힌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 때처럼 흐느껴 우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랜만에 한진중공업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크레인과 푸른 작업복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이가 몇몇 있었으나, 이날 추모제는 전체적으로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추모사에 나선 최용국 본부장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때의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때 조금만 최선을 다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두 열사의 목숨으로 변화시킨 노사관계이건만, 노무현 정부의 반노동정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려한다”며 “11월 총파업투쟁은 다시말해 열사투쟁 정신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라 강변했다.

    이어서 추모연설에 나선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당위원장 또한 “김주익, 곽재규 열사 투쟁이후에도 우리는 이현중, 이해남, 류기혁, 김동윤 열사를 떠나 보내었고 올해 하중근 열사를 또 떠나보내었다”며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써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임에도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악법, 노사관계 로드맵, 한미 FTA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열사들의 뜻을 이어받아 11월 총파업 투쟁을 가열차게 벌여나가자고 강조했다.

    이날 추모제에는 김주익 열사의 친누나와 매형 내외도 함께 참여했다. 김주익 열사의 누나는 김주익 곽재규 열사를 애도하는 추모시를 직접 써서 낭독했다.

    <김주익· 곽재규 열사 투쟁의 기록>

    2003년 여름이 끝날 무렵,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는 무쇠솥 같은 큰 손을 지닌 덩치가 큰 노동자가 100여일이 넘도록 35미터 크레인 위를 홀로 점거하고 농성 중이었다.

    바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 지회장. 그해도 아닌 지난해 임단협도 성사시키지 못한 무능한 노조의 지회장이었다. 고작 몇 천원을 요구한 임금인상안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몇 차례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대해 회사는 손배가압류를 신청하였고 조합간부를 비롯하여 줄줄이 월급마저 회사에 차압당한 상황이었다. 중간관리자들의 일상적인 회유와 협박, 탄압에 주눅이 들어 더 이상 투쟁에 동참하지 못하는 동료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의 추모비
     

    박창수 열사의 한이 맺힌 민주노조를 어쩌면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이른 초여름 김주익 지회장은 큰 덩치를 이끌고 아무도 모르게 35미터 크레인으로 올랐다. 회사에는 전해의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이길 요구하고 손배가압류를 해지시키기 위한, 그리고 동료들에게는 투쟁을 호소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1미터 87센티의 키에 100kg에 이르는 거구에게 크레인 조종실은 너무 좁은 공간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사다리도 제대로 못 오르는 그가, 발을 뻗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사투를 벌였다.

    조그만 깡통에 볼일을 보고, 동료들이 줄에 매달아 주는 식사를 받아 100여일을 그렇게 버텼다. 매미, 역사상 최악의 태풍이 하필 불어왔고, 40톤의 크레인이 바람에 세 바퀴 반이나 회전하며 굉음을 울렸지만 김주익 지회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100여일이 그렇게 지났지만 회사에서는 ‘내려오면 대화하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김주익 지회장은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크레인에 목을 매었다. 크레인에 홀로 오른 지 129일째였다.

    슬픔에 빠진 조합원들이 하나둘 85크레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엔 노동조합의 전 간부한명이 있었다. 저녁이면 술에 취해 ‘주익이에게 미안하다’던 그는, 어느 날 아침 가족들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라는 전화 한통을 남기고 85크레인 앞의 도크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곽재규 열사였다.

    2003년 초겨울 한진중공업에서는 한명의 노동자가 35미터 위 크레인에 누웠고, 또 한명의 노동자는 15미터 아래 지하바닥에서 누워있었다.

    6년만에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한진 조합원들은 미친듯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평상시 같으면 ‘또 데모질이냐’ 욕하던 부산 영도의 시민들은 아무 말도 없이 노동자들의 슬픈 행렬을 지켜보았다. 택시운전사들은 한진중공업을 지나가며 “이 공장이 노조원을 세 명이나 잡아먹은 공장”이라고 승객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집회에 참가한 기자들과 카메라맨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절규하는 김진숙의 연설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서울시경 기동단장은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한 무차별 폭력진압을 자행한 전투경찰에 대해 "믿을 건 역시 서울기동대원 여러분 밖에 없다"고 치하문을 발표했다. 어쨌든 두 열사의 시신을 떠메고 투쟁은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마무리 보고대회에서 두 열사의 시신이 하늘에서 땅 밑에서 각기 옮겨졌다. 그렇지만 아무도 승리라고 말하지 못했다. 투쟁이 있었고, 3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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