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의사절’과 몸뻬 바지,
    일제강점기 우리 옷 어떻게 변화했나?
    [역사의 한 페이지] "옷도 진화하는 생명이며 역사"
        2020년 12월 15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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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세 인물을 통해 본 황혼기의 조선”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의 시(詩) ‘슬픈 족속’의 전문이다. 시인이 1938년 9월에 쓴 시다. 단 4줄 짜리에 불과한 이 시에서 시인은 ‘검은 머리’, ‘거친 발’, ‘슬픈 몸집’, ‘가는 허리’라는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단어들과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를 각각 대비시킴으로써 일제 강점기 하 ‘백의민족’인 우리 민족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제목처럼 식민지 조선인들은 슬픈 민족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옷조차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다.

    [사진] 1916년 조선물산공진회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입은 옷 색깔이 온통 흰색이다. 왜 한국인들을 ‘백의민족’이라고 부르는지를 잘 보여준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어느 외국인은 산에 올라가 보았을 때 길거리에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개인 소장 엽서)

    색복 착용 정책과 ‘백의 사절’

    2019년 10월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을 수집하였다. 십여명의 사람들이 가운데 우승기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 사진으로 얼핏 보면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이 사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에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세 개의 구호 때문이다.

    먼저 현관 정문의 오른쪽을 보자. 거기에는 ‘선양(宣揚)’이라고 진하게 쓴 플래카드가 세로로 걸려있는데, ‘황도선양(皇道宣揚)’이란 구호에서 ‘황도’ 두 글자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황도선양’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함께 많이 사용된 구호인데, 이를 통해 이 사진이 중일전쟁 이후에 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관 왼쪽에는 ‘보국(報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보국’ 위에는 ‘축(祝)’자 비슷한 글자가 보인다. 원래 네 자로 된 구호일 테데 어떤 구호였는지 종잡을 수 없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가 되면서 ‘총후보국’, ‘언론보국’ 등 ‘ㅇㅇ보국’ 형태의 다양한 구호가 난무했는데, ‘축(祝)’자와 결합될 수 있는 내용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혹시 ‘저축보국’에서 ‘저축(貯蓄)’의 ‘축(蓄)’자를 ‘축(祝)’으로 잘못 쓴 것은 아닐까? 당시 관공서에서 ‘저축보국’ 이라는 구호도 많이 사용된 구호였기 때문이다.

    앗! 다시 자세히 보니 이 글자는 세금을 뜻하는 ‘세(稅)’자 같다. 그렇다면 분명 ‘납세보국(納稅報國)’이란 구호였을 것이다. 세금을 잘 납부해서 나라에 보답하자는 의미. 시대 상황과 어울리는 구호이다.

    [사진] 1930년대 후반 어느 관공서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으로 가로 15, 세로 10cm 크기이다. 그들 뒤의 관공서에 큰 글씨로 쓰인 구호들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이제 마지막 구호이다. 왼쪽 ‘납세보국’과 오른쪽 ‘황도선양’을 거느리고 정면에 걸려 있는 구호가 보인다. 흰 광목천에 가로로 글을 써 붙인 것인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백.의.사.절(白衣謝絶)’

    흰 옷은 사절합니다!!!???

    무척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 구호는 무엇일까?

    이것은 1930년대 일제가 관 주도로 전개한 색복(色服) 착용 정책을 반영하는 구호이다. 일제는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생활 개선’의 명목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흰옷 대신 색옷 입기를 장려하고 이러한 시책을 각 지방에 하달하였다. 김사량의 1940년 단편 소설 [덤불 헤치기]에는 한 군수가 한국인 산민(山民)들을 모아놓고 왜 색복을 입어야 하는지 연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색복 착용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는 군수의 말을 들어보자.

    에에, 요컨대 우리는 흰옷을 폐지하고 색을 들인 옷을 착용해야 한다. 조선인들이 가난해진 건 흰옷을 착용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낭비이기 때문이다. 즉 흰옷은 빨리 더러워지므로 돈이 들고 세탁하는 데도 시간이 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일제의 정책이 추진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흰옷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식민지 조선인들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인들의 풍속을 개량한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친일단체 조선교풍회가 지방에 내려보낸 1921년 12월 11일의 제26호 공지문에는 이런 색채 개량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회장이었던 박영효 명의로 작성된 이 문건을 보면, 우리의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고 좋은 풍속으로 바꾸자는 이야기를 한 후 마지막에 “재첨부하는 의복원료와 색채개량 취지서는 부람(俯覽) 찬동하시와 일반에게 광포(廣布) 실천케하심을 역망(亦望)하옵니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의복 원료와 색채를 개량하자는 취지서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홍보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백의를 색복으로 바꾸자는 목소리는 최소 1920년대 초반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여성단체들도 색복을 입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여성운동 단체들은 ‘색의 장려’라고 쓴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민족주의 계열의 신문이나 여성단체가 이런 운동을 전개한 목적은 이후 일제가 전개하는 색복 착용 정책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색복은 흰옷보다 빨래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으므로 여성의 가사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남는 시간만큼 여성들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즈음 춘원 이광수도 이런 계몽 운동 연장선이었는지 아니면 일제의 색복 착용정책에 대한 찬동 때문이었는지 ‘색의(色衣) 노래’를 지어 망국의 옷인 흰옷을 벗고 색복을 입자 호소하였다.

    흰옷을 벗어 놓고 / 일터로 가세
    흰옷은 망국의 옷 / 노는 이의 옷
    맘일랑 희게 희게 / 옷은 물들여
    조선의 사람들아 / 일터로 가세

                            이광수, [동광] 1931년 5월호

    그런데 일제가 1930년부터 본격 추진한 색복 착용 정책의 문제점은 기존의 한국인 내부에서 전개된 색복 착용 운동이 단순한 계몽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백의민족’으로 표상되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정책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일제는 ‘백의 철폐’, ‘색복 착용’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흰옷 대신 염색한 옷을 입어야 하며, 심지어 상을 당한 사람조차 상가를 벗어날 때는 색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이 정책으로 염료를 파는 상점들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사진] 1938년 충남 예산군에서 배포한 전단지로 ‘색의를 착용하시오. 백의는 금물이오’라는 구호가 전단의 위 아래에 보인다. 내용 중 상복인에 대한 경고도 있는데 ‘상 기간 14일간이라도 외출할 때에는 색의를 착용하고 상장(喪章)을 부착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일제는 색복 착용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흰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관공서 출입을 금지하거나 행정상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또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는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1일자에는 전남 해남에서 면사무소 직원들이 장날에 흰옷 입은 사람에게 먹물을 뿌렸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희활극 연출한 색의 장려 묘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말마따나 ‘웃기는 활극’ 이었다.

    지난 22일 해남읍 시장에서는 난데없는 검은 물방울이 쏟아져서 모여든 수천 군중은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 일대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해남면에서는 색의 장려로 직원과 소사가 총출동하여 각기 물총을 가지고 일부러 검정물을 뿌린 것이라는 바 때는 마침 정월 초 장날이라. 모처럼 새옷을 갈아입고 장도 보고 세배도 겸하여 왔다가 뜻밖에 먹벼락을 당하고 어이없이 돌아갔다 한다.

    이런 먹물 세례 외에도 여성들의 치마를 들쳐 흰 속바지에 붉은 물감을 칠하거나 초상을 당한 사람의 베옷에까지 먹물을 칠했다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먹물로 모욕 당하고 색의를 입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한 노인들의 소식도 있다. (박찬승, 일제하의 백의 비판과 색의 강제,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9집, 2014)

    [사진] 해남 장날의 먹물 세례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3월 1일자 신문 기사이다. ‘희활극 연출한 색의 장려 묘법’이라는 큰 제목 아래 ‘장거리에서 먹물을 뿌려’, ‘해남 장날에 흑색우(黑色雨)’라는 작은 제목도 보인다.

    이런 사회상을 배경으로 사진 속 관공서에 걸려있는 ‘백의사절’ 구호를 다시 보면 그것이 가진 의미가 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듯 일제는 관공서에 오는 이들에게 백의를 금지하고 색복 착용을 강요하는 의복 통제를 통해 그들이 바라는 새로운 국민을 만들고자 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사진은 색복착용 정책이 추진된 1930년대 사진이고, ‘황도선양’이라는 구호를 통해 중일전쟁 이후인 1930년대 후반, 특히 1938∼39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부여군 규암면사무소 앞 풍경

    다시 사진!

    그렇다면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이며, 그들은 무엇을 기념하고자 한 것일까?

    사진 속에 힌트가 있다. 사진 가운데 세워져 있는 우승기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기에는 흰색으로 ‘축우증식경려회(畜牛增殖競勵會)’라는 대회명과 ‘우승(優勝)’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우승이라는 글자의 좌우에는 살집이 잘 오른 두 마리의 소가 그려져 있다. 아마 축우증식의 성과를 겨루는 경진대회에서 사진 속의 인물들이 우승을 차지했고, 그것을 기념하고자 이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소 같은 가축도 수탈 대상이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우승기 하단에는 ‘부여군(扶餘郡)’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부여군이 이 대회를 개최하고, 이 우승기를 수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사진의 주인공은 부여군이 수여한 우승기를 받은 부여군 관할의 어느 면 단위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고, 이 사진에 나오는 관공서 비슷한 건물은 그 면사무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곳은 어디였을까?

    [사진] 백의사절 간판이 걸린 면사무소 앞 기념 사진 속에 ‘부여군’이 수여한 우승기 부분 확대 사진이다. 우승기에 ‘축우증식경려회’라는 글자와 소 두 마리 사이에 ‘우승’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우승기의 왼쪽은 규암면 순사주재소 소장, 오른쪽은 규암면장으로 추측된다.

    검색 엔진을 돌려 1930년대 후반 부여에서 축우증식과 관련한 사실들을 찾아보니 1938년 5월 14일 [매일신보]에 ‘부여 축우증식 품평회 포상식’이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기사에 따르면 부여군 농회 주최 축우증식 품평회에 입상한 우량 면과 부락의 상품 수여식을 5월 11일 오전 9시 거행했는데 수상자는 1등이 규암면으로 금 30원과 우승기를, 2등은 조촌면으로 금 20원을, 3등은 충화면으로 금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이 이 기사와 관련된 것이 맞다면 사진을 찍은 곳은 이 경진대회에서 우승을 한 부여군 규암면 면사무소 앞일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상금 30원과 함께 받은 우승기를 가운데 두고 그들의 우승을 기념하고자 했던 것이다. 촬영 장소가 면사무소가 아닌 축우증식경려회와 직접 관련된 규암면 농회(農會; 일제가 조선 농업을 수탈하기 위하여 설립한 관변 단체) 사무소 앞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건물 앞에 적힌 구호들의 성격으로 보건대 면사무소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위의 [매일신보] 기사의 끝부분에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시상식이 끝난 후 이어서 “면장 회의를 개최하고 색의 착용과 농촌진흥에 관한 토의가 있었다”고 쓰고 있다. ‘색의 착용’이 당시 부여군의 주요 시책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진 속 관공서에 붙은 ‘백의 사절’ 구호와 그 관심과 시점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추측을 바탕으로 사진을 보자. 이 사진은 1938년 5월 부여군이 주최한 축우증식경진대회에서 우승한 부여군 규암면이 그 직후 우승기와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일 것이다. 장소는 면사무소 앞이고, 이 건물에는 중일 전쟁 직후였던 1938년 당시 유행했던 ‘황도선양’, ‘납세보국’, ‘백의사절’ 등의 구호들이 붙어있다. 이것이 규암면 우승 기념 사진이라면 면장이 중심인물이었을 것이다. 제일 가운데 앉은 인물(우승기의 바로 오른쪽)은 비록 면장들에게 지급한 오동나무 잎과 꽃모양을 본뜬 면장 휘장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규암면 면장이겠다. 당시 군수나 면장은 거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면장 왼쪽에 앉은 인물은 복장으로 보아 이 지역 경찰 책임자로 보인다. 규암면 같은 면단위에는 보통 순사주재소가 있었으므로 규암면 순사주재소의 소장이었을 것이고,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면서기(面書記)를 포함한 면사무소 직원들, 그리고 축우증식경려회와 직접 관련된 규암면 농회 관련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유난히 어려 보이는 뒷줄 제일 오른쪽 인물은 잔심부름하던 사환(使喚)이었을 것이다. 사환은 흔히 소사(小使)라고도 불렸다.

    (만약 신문기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규암면 사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여군 관할의 다른 면 사무소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국민복과 몸뻬

    지금까지 부여군 규암면사무소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을 통해 일제 강점기 색복 착용 정책을 살펴보았다. 이 정책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한국인들의 의생활 변화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에 의한 의생활의 변화는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변화가 한국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사진을 들여다 보자. 이 사진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사진 속 등장하는 총 13명 중 주재소장과 사환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 빼고 나머지 11명이 입고 있는 옷이다. 군복 같기도 하고, 민간인 복장 같기도 한 이 옷은 ‘국민복(國民服)’으로, 중일 전쟁 직후인 1938년부터 전시체제를 위한 의복을 준비한다는 취지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전시체제에서 국민은 모든 생활 부문에서 절약과 근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양복의 원료인 양모를 절약하기 위하여 총독부 관리의 제복과 청년단체복, 사회사업단체복, 학생복을 개조하여 통일하였다. 이후 1940년 10월 신체제 운동에 따라 국민복을 착용하라는 칙령이 내려오고, 1940년 11월 신체제의 국민복이 법령으로 새로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남성들에게 이 국민복을 입게 했다.

    일제 강점기 의생활의 변화는 여성들의 옷에도 있었다. 일제는 1940년대 여성들에게 ‘몸뻬’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몸뻬는 일반적으로 허리와 허벅지까지 통이 아주 크고, 발목으로 내려갈수록 통이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큰 허리를 잡아주기 위하여 고무줄이나 끈으로 동여맬 수 있게 되어 있는 옷이었다. 이 옷은 원래 일본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여성들이 밭일 할 때 입던 작업복이었다. ‘몸뻬(もんぺ)’라는 일본말 그대로 들어왔다. 그래서 지금은 ‘왜바지’라는 말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남성의 국민복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재건복 형태로 잠시 부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중 복장으로는 그 명맥이 끊긴 데 비해, 몸뻬는 지금도 여전히 강한 생명력으로 우리 의복 문화 속에 남아있으니 몸뻬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사진] 몸뻬는 원래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 여성들이 입던 작업복이었다. 왼쪽은 18세기의 우키요에(浮世繪)로 몸뻬입은 여성이 빨래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1915년 몸뻬 복장의 어느 농촌 여성의 사진이다. (일본 위키피디아)

    몸뻬는 일본에서 먼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농촌 여성의 작업복인 몸뻬가 도시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의 복장으로 채택된 이유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대응한 방공훈련 때문이었다. 방공 훈련은 등화관제나 대피 같은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방화나 소화(消火) 그리고 공습 후의 복구 훈련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른다. 방공 훈련 중 여성들이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나르거나 사다리를 오르고 폭격 후에는 복구 작업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키모노라는 기존의 여성복은 매우 불편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갓포기’라는 앞치마를 두르는 것도 활동성을 보장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방공 훈련에 최적의 옷으로 관심을 끈 것이 몸뻬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 몸뻬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나는 최근 몸뻬 보급과 관련된 자료 하나를 수집하였다. 2020년 8월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 충남 괴산군 장연면의 여러 수탈 자료들 속에 섞여 있었다. 이 자료는 1943년 7월 12일자 충남 괴산군 장연면장과 국민총력장연면연맹 이사장 명의로 그 예하 단위에 내려진 공문으로, 공문 왼쪽 위에 쓴 ‘특급(特急)’이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매우 긴박한 국책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 보자.

    부인복 몸뻬 보급에 관한 건

    부인계몽운동이 전개후 특히 결전하 부인의 책무는 유유중대화하여 부인의 옥외 노동, 방공대책 그 외 활동은 점점 증가하였으나 현 부인복은 심히 불편하여 지장이 있을 뿐 결전 체제하에 적응치 못함은 심히 유감으로 사료하오니 차제 각위는 좌기에 의하야 부인복 몸뻬를 일제히 제작하여 착용케 할 사

    기(記)

    1, 물자부족으로 물품 구입 어려울 때는 고의(古衣)을 이용할 사
    2. 몸뻬형은 각 부락에서 적의(適宜) 강구할 사
    3.색채는 흑색 또는 국방색으로 할 사

    주의

    8월 1일부터 부인에 한하여는 필히 몸뻬를 착용한 분에 한하여 식량의 배급 또는 용무를 보게 하겠기에 철저히 주지할 사

    [사진] 1943년 ‘부인복 몸뻬 보급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으로 장연면장과 국민총력장연면연맹 이사장 명의로 발송된 것이다. (박건호 소장)

    이 공문을 통해 1943년까지도 몸뻬 보급이 다소 미진했음을을 알 수 있다. 또 이 공문의 끝부분에 보이는 ‘몸뻬를 착용한 분에 한하여 식량의 배급 또는 용무를 보게 하겠기 철저히 주지할 사’라는 말에서 일제가 몸뻬 미착용자에 대하여 불이익을 주어 몸뻬 착용을 강제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COVID-19 시대에 대중교통 이용 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듯이, 일제는 1944년 몸뻬를 입지 않은 여성은 버스, 전차 등을 타거나 관공서, 극장 출입을 금지했다. 또한 몸뻬 입기를 거부하거나 파마나 화장을 하는 여성들에겐 ‘비국민적’이라거나 ‘사치’ ‘허영’ ‘창부’와 같은 이미지들을 덧씌웠다. [국민총력] 같은 관보들에서는 파마를 하거나 화장을 한 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창부와 같은 분위기를 보여,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남성을 유혹하므로 사회 안정에 위협이 된다”, “퇴폐적인 서구의 여성을 흉내내는 타락한 의식을 가진 이”라고 비판했다. 전시체제하에서 몸뻬는 ‘전시 노동’과 함께 ‘검소’, ‘애국’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사진] 왼쪽은 [매일신보] 8월 5일자 신문에 실린 삽화로 ‘긴 치마 입을 땐가. 여자의 무장은 몸뻬다’라고 적었다.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 말기 몸뻬 바지를 입고 군사 훈련을 하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모습이다. (왼쪽은 김해경 교수 제공, 오른쪽은.박건호 소장)

    그런데 일제의 몸뻬 보급 정책에 최대의 난적이 있었으니 조선의 고유한 복식 문화였다. 여성 한복에서 바지는 항상 속옷 개념이었다. 여성들이 몸뻬를 기피한 가장 큰 이유는 속옷처럼 생긴 형태의 바지를 겉옷으로 입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여전히 남녀를 구별하는 내외법이 남아있을 때라 밖에 나갈 때 가랑이 사이를 벌리면서 걸어 다닌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랑이가 터진 ‘가래바지(속옷)’만 입은 격’이라 매우 흉칙한 것이기도 하였다. 여성들이 이 복장을 꺼려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또한 마땅한 웃옷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저고리 아래에 몸뻬를 입어 허리를 드러내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일제 말기 전업주부나 학생, 교사로 활동했던 여성 17명을 구술면접한 안태윤 경민대 교수는 ‘일제말 전시체제기 여성에 대한 복장통제-몸뻬 강제와 여성성 유지의 전략’이라는 논문에서 “대부분이 몸뻬 착용을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촌스럽고 흉한 복장을 강요당한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기억했다”고 썼다.

    지금에서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겠지만, 조선은 수백 년간 유교 규범이 지배해 온 나라였다. 그런 전통을 가진 나라의 여성들에게 고쟁이처럼 생긴 속옷을 입고 바깥에서 활동하라고 하니 그게 쉽게 침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60년대로 돌아가 보자. 5∼60년 전인 1960년대만 해도 브래지어와 스타킹 광고 모델을 구할 수 없었다는 남영 나이론 사장 남상수의 증언이다.

    당시만 해도 여성 의류 모델 자체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속옷 모델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여성이 아슬아슬한 속옷만 걸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브래지어를 찍으려면 가슴 부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스타킹 모델은 다리만 나오게 찍는 데도 꺼려했을 정도니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크다. 모델이 없으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술전문가에게 의뢰해 일러스트 기법으로 브래지어와 스타킹을 착용한 모습을 그려 광고를 내보냈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 3권 314페이지

    이것이 문화의 보수성이라는 것이다. 정책 하나로 쉽게 바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보수성도 결국 편리성을 이길 수 없었다. 일제의 강압 정책과 몸뻬가 가진 그 편리성 때문에 몸뻬는 점차 식민지 조선사회에 확산되어갔다. 특히 이 시기 여학교들이 총독부 시책에 따라 거의 대부분 몸뻬 바지를 교복으로 채택했는데, 이는 몸뻬가 더 넓게 더 빨리 식민지 조선 사회에 보급되는데 기여하였다.

    [사진] 일제 말기의 학생들 사진이다. 1943년 9월 여학생들이 야외에서 찍은 사진인데, 보급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몸뻬 차림이 퍽 자연스럽다. (박건호 소장)

    드디어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 직후 몸뻬는 사라지는 듯했다. 해방 직후의 열기 속에서 사람들이 몸뻬를 왜놈 복장이라 하여 몸뻬바지 입은 여성들의 바지를 벗겨 옷을 찢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이 편한 활동복을 입기 시작했고, 저고리 상의에 몸뻬바지,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 여성의 표준 복장으로 자리 잡아갔다. 일부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몸뻬형 교복을 입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에서 이식되어온 이 옷은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서민들의 편한 활동복으로 자리잡아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비록 그 태생은 일제 강점기 전시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강제된 옷이었지만, 해방 이후 몸뻬 위에는 우리의 역사가 새롭게 아로 새겨졌다. 가족을 위해 고단함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 희생하며 억척같이 살았던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이웃들의 땀과 피가 이 옷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옷을 어떻게 일제의 잔재라고 규정하여 척결할 수 있을 것인가? 몸뻬는 이제 우리의 역사가 새겨진 우리의 옷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최근 농촌에서는 남성들도 이 옷을 입고 일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성별을 넘어 놀라운 확장성을 보이는 이 옷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옷도 생명이며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진] 해방 전후 여학생들의 복장 변화를 보라. 위 사진은 일제 말기의 사진으로 주로 교사를 포함한 남학생들은 국민복을, 여학생들은 몸뻬바지를 입었다. 아래 사진은 해방 직후의 어느 학교의 졸업사진이다. 여학생들 대부분의 복장은 원래의 한복으로 돌아왔지만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학생(붉은 테두리)의 복장에는 여전히 몸뻬바지가 남아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그 시대 모든 문화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몸뻬는 저런 식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두 사진 모두 박건호 소장)

    [사진] 1950년대 남과 북. 일제 시대의 의복 정책이 우리 옷에 남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위 사진은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 직후 재건기의 북한 함흥의 거리 풍경이다. 왼쪽 여성은 한복 치마를 입었고, 오른쪽 여성은 몸뻬바지를 입고 있다. ([독일인이 본 전후 복구기의 북한], 눈빛출판사, 2013) 아래는 비슷한 시기 남한의 어느 농촌 아낙이 몸뻬 바지를 입고 도리깨질을 하고 있다. 몸뻬 바지는 그 활동의 편리성 때문에 서민 부녀자들의 노동복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갔다. (작자 미상)

    [사진] 1966년 제12회 과학전람회에 참석한 여학생들의 모습으로 몸뻬형 교복이 인상적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일부 여학교에서는 몸뻬형 교복을 입었다. (국가 기록원)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지난 몇 개월간 몸뻬와 관련된 많은 대화를 통해 도움과 영감을 주신 문화지평 유성호 대표와 ‘진정한 수집가’이신 최달용 변리사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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