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숙 선배께, 우리 모두에게···
    그이의 눈물겨웠고 투철했던 35년
    [기고] 당신과 함께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2020년 12월 14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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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은 잘 되셨는지요. 지난 암 투병 끝나고 몸 회복이 되지 않아 43kg 정도밖에 나가지 않아 수술 후 봉합수술도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도 혹이 발견되어 추가 수술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전해 듣고 덩달아 가슴이 무너집니다.

    수술 있기 며칠 전이던 지난 11월 28일 고 문중원 경마기수 1주기 추모제를 위해 부산엘 갔지만 문병도 가질 못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이 드러나는 일에 대해서만은 무슨 수도승마냥 엄격한 당신의 평소 성품을 아는지라 굳이 가려고도 안했습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1990년대 후반 어느 때인가 당신의 글이 제2의 전태일평전 같으니 책으로 묶자고 찾아갔을 때부터 보였던 당신의 싸늘함을 익히 알고 있어서요.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야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로 묶여 나왔지요. 2년여 전에도 당신은 암 투병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죠. 늦게야 알게 된 부산지역 분들이 병원비 모금이라도 하겠다고 주변에 알렸다가 호되게 야단맞고 곧바로 알림글 등을 모두 SNS 상에서 황급히 지워야 했죠.

    “희망버스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당신에 대한 신뢰”

    2011년 희망버스 이후에도 그랬죠. 무수한 언론들이 당신의 글과 인터뷰를 원했지만 투쟁하는 동료 노동자들 등을 돕는 어쩔 수 없는 경우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응하지 않았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고 삼갔죠. 어쩌다 전화해서 물어보는 것도 재능교육 동지들 투쟁에 뭘 도우면 되냐, 쌍차 고공농성 중인 김정욱과 이창근은 어떠냐, 유성 한광호열사 투쟁은 어찌 되냐, 단식 중인 콜트콜텍 동지들은 괜찮냐, 삼성 고공투쟁은 어떻냐 하는 걱정들뿐이었죠.

    누군들 당신이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어주고, 당신이 무슨 진보정당의 대표가 되어주고, 당신이 노동자들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을까마는 당신은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야 그가 혁명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어떤 나라의 뗏목지기처럼 자신이 지켜야 할 소박한 자리를 최선으로 여겼죠. 그런 삶의 자세 보면서 늘 옷깃 여며 왔습니다. 하여 지금 당신이 마지막 나선 복직 투쟁이 어떤 깊이이며 치열함인지 조금은 알 듯도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을 당신의 35년을 떠올리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참 쓸쓸했습니다.

    그건 지난 2011년 5월, 당신의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100일차에 응원차 내려갔다 오는 길만큼이나 더 쓸쓸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도 당신은 참 외롭게 생사의 그네를 타고 있었죠. “동지들이 조금이라도 오는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잘 안 보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기울면서 말입니다. 벗이기도 했던 김주익 열사가 자결한 후 8년여 동안 더운물로 세수를 하지 않고, 방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는 독종이 당신이었습니다. 8년여 만에 처음으로 목욕탕에 가서 더운물에 몸을 씻고, 보일러를 켜고 늦은 밤 혼자 배낭을 메고 벗 김주익이 목을 맨 85호 크레인엘 올랐었죠. 함께 십여 년을 살던 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올라가고 난 후에야 ‘놀라지 말고 책상 위 편지를 보라’는 문자를 보냈죠.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85호 크레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번민했”다고 했었죠. 그 의미를 너무 잘 알기에 당신은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라고 말했죠.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주익 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고 싶다고 했죠.

    당신은 그렇게 올라갈 때도, 올라가서도 참 외로웠죠. 때때로 많은 경우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거라는 당신의 말처럼요. 당시 한진지회 노조 집행부조차 당신이 조직적 결정 없이 독단적으로 올라갔다 해서 공장 안에서조차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죠. 당신은 소수의 조합원들만이 지켜주고 있는 외로운 섬이었죠. 당시 서울로 돌아와 당신과 당신 동료들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개를 저었죠. 노조 내에서도, 지역에서도 연대를 안 하고 있는데 멀고 먼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이미 진 싸움이라고, 서울 지역에 있는 투쟁들 지키는 것만도 힘에 벅차지 않냐고, 조금 더 애정이 있고 건강한 동지들의 경우는 다른 까닭을 들기도 했지요. 사내 비정규직들이 먼저 잘려나갈 때 아무런 연대도 하지 않았던 정규직노조 정리해고 싸움을 돕는 게 무슨 의미일지 모르겠다고도 했죠. 뼈아픈 이야기들이었죠. 참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버스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순전히 당신에 대한 신뢰였죠. 당시 열다섯 번째 희생자가 나와 연대하고 있던 쌍용차에서처럼 결국 한진중공업에서도 정리해고가 관철되고 나면 또 누군가 죽어나갈 수 있다는 절박함도 있었죠. 무한한 자본의 생존만을 위해 극악하게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리해고 구조조정 광풍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자본의 신화가 다시 한진중공업에서 완성되어가는 것도 가만두고 볼 수 없다는 운동적 고민들도 있었지요.

    또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투쟁은 김진숙의 투쟁만도 아니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만의 투쟁도 아니라는 뼈아픈 역사의식들도 있었죠. 민주노조 태동기였던 1991년 구속된 후 공권력에 타살당하고 시신마저 탈취당해야 했던 박창수 열사의 설움과 분노가 서려 있는 공장. 2003년 내려가면 세 아이들에게 할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서라도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 크레인 위에서 내 시신을 내리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단 김주익 열사와 이어 목숨을 던져야 했던 곽재규 열사 투쟁의 한이 서려 있는 우리 모두의 공장이 한진중공업이었죠. 2003년 그 즈음 극심했던 노동자 탄압 과정에서 시나브로 퍽, 퍽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숨을 잃어갔던 두산중공업 배달호, 세원테크 이현중, 화물연대 박상준, 국민연금공단 송석창,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 이용석 열사의 한이 더불어 서려 있는 곳이 한진중공업이기도 했죠.

    그 공장, 그 크레인 위에서 다시 누군가가, 그것도 1980년대 이후 투쟁하는 선진노동자의 한 상징이기도 했던 동지가 다시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열다섯 명의 동료를 잃고 싸움 중이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싸움을 미루고 달려갔고, 이명박의 민주노조 파괴 시나리오의 정점에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또 그렇게 나섰죠. 자본이 신인 생의 바닥에서 그런 설움과 외로움을 겪어 본 기륭전자, 이랜드뉴코아, 재능교육, 콜트콜텍, 대우지엠비정규직, 현대차비정규직,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철거민들, 가난한 문화예술노동자 등이 우리가 먼저 외로운 김진숙에게 연대의 손이 되자고 마중물로 나서주었지요.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에 함께 했던 날라리들도요. 세대를 넘어 지금은 당신처럼 힘겹게 투병 중이신 백기완 선생님과 당시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준비 중이시던 문정현 신부님, 박창수열사 아버님, 박종철열사 아버님 등 어른들이 맨 앞에 나서 주시기도 했지요.

    그런 마음으로 우린 힘겨울수록 서로를 다독이며 기운내자고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며 ‘깔깔깔 희망버스’에 올랐지요. 희망버스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당신은 더 가파른 백척간두로 내몰리기도 했었죠. 희망버스 운동이 범사회적인 운동으로 발전해 가자 공권력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강제로 당신을 몇 번이나 끌어내리려고 했지요. 그것은 박창수처럼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의문사를 위한 거였죠. 김주익 열사도 사실 그렇게 죽였죠. 2003년 당시 노무현 정부는 여섯 명의 한진 노조원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경찰력 투입을 예고하고 있었죠. 집권 4개월 만에 철도 파업에 경찰을 투입하고 이후 연달아 다섯 차례나 노동자들 파업 현장에 경찰력을 투입하던 때죠. 이틀에 한 명 꼴로 모두 132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되던 때죠. 입만 열면 ‘노동귀족’이니 하면서 노동운동을 공격하고, 기업주들만 편드는 ‘노사관계 로드맵‘을 발표하던 때죠. 비로소 ‘삼성공화국’이 도래하고, 힘없는 비정규직노동자 수백 명이 감옥 양심수의 대부분을 채워야 했던 시절의 처음이었죠. 말하자면 죽으라는 신호, 타살인 거죠.

    그리곤 2011년. 당신은 “노동운동 30년에 한진 앞에서 이렇게 많은 공권력은 처음 본다고” 했었죠. “공장 둘레가 모두 시커멓다고”, “어제는 경찰 1600명, 집달리 120명, 체포조 50명이라더니, (오늘은) 훨씬 넘게 오는가 봅니다.”라고 트윗을 통해 알렸죠. 마지막 항전을 혼자 준비하며 “짐을 정리해서 내리고 문자와 소중히 간직했던 사진들을 지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 중 제가 선택한 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 어떤 밤들이 제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담담해지려 애쓰며 기다릴 뿐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이든 특공대이든.”이라고 유서 같은 말을 남겼었죠. 그 글을 읽으며 싸늘히 감싸오던 전율과 차디찬 분노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노가 희망버스의 세찬 엔진이기도 했지요. 2차 희망버스 당시 새벽 2시경 대치하고 있던 영도로터리에서 중앙방송차를 기습적으로 탈취하고 최루액을 다량 함유한 물대포를 무차별적으로 쏘며 70여 명을 연행하고 있는 현장에서 긴급히 보조 방송차의 음향을 켜고 “희망버스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한 발 앞으로 가겠습니다. 또 한 발 앞으로 가겠습니다.”하며 전진해 나갈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이기도 했죠. 공교롭게도 쏟아지던 비까지 흠뻑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 모두가 연좌한 채로 1박 2일을 버틸 수 있게 한 뜨거움이었죠.

    이제 와 얘기지만 당시 제가 수배 중이던 경향신문 건물에도 그런 긴장감이 감돌았더랬습니다. 몇 명의 경찰 라인들이 경찰 체포 계획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왔죠. 저녁 6시 이후 대부분이 퇴근하고 나면 무주공산인 건물이었죠. 엘리베이터를 타면 3분 내외나 걸릴까. 민주노총 위원장이, 금속노조 위원장이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수배받고 있어도 이럴까 라는 서글픔도 눈꼽만큼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애초에 기대도 안했던 터라 꿋꿋이 버텼죠. 밤마다 희망버스 주요 자료들을 챙겨들고 8층이거나 9층이거나 15층이거나 컴컴한 계단으로 가서 혼자 은박지에 누워 자기도 했죠. 당시 경찰 라인들에게 전하라는 뜻으로 말했었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들어오라고 해라”고요.

    부끄럽고 철없는 일이긴 하지만 기륭전자 비정규직 포크레인 점거 투쟁 당시 새까맣게 몰려왔던 공권력 앞에서 했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크레인 꼭대기 위로 올라 가느다란 전깃줄 몇 개를 움켜잡고 눈을 감고 뒤로 누운 채 몇 시간을 대치했던가 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몰려든 공권력에게 농성장 털리고 곱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다른 선택이 없었죠. 당신의 말씀처럼 ‘내가 선택했던 이력’이 아니었죠. 경고했음에도 치고 들어온다면 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죠.

    참, 그때 우리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으로 힘겨워하고 있을 때 당시 알기론 책 인세의 거의 대부분이었을 수백만원을 주고 가셨던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의 책을 내 손으론 못냈지만 인세는 받았으니 참 특별한 인연이다 했습니다. 지금도 기륭전자 벗들이 당신의 일이라면 두손 두발 들고 나서는 것도 그런 연대에 대한 고마움이죠. 하여튼 희망버스 때도 내가 선택한 일은 아니겠지만 언제라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잘 때면 더부살이하던 민주노총 13층 전해투 작은 방의 창문을 열어두고 자곤 했답니다.

    “2011년 11월 10일, 그때도 여전히 당신은 외로운 채였죠”

    지난 일이고, 모두 덧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당신의 투철한 투쟁과 함께 한 희망버스 승객들의 투쟁이 전세계에 만연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비인간화 시대에 맞서 오랜만에 인간의, 사회의 존엄을 세우는 세계적인 투쟁으로 넓혀져 가기도 했었죠. 사람들은 잘 기 못하겠지만 당시 1%의 탐욕에 맞서는 99%의 저항운동이었던 ‘오큐파이’(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맨하탄에서 시작해 전세계 수백 개 도시로 퍼져 나가고 있었죠. 당시 월가 투쟁의 집행부 역시 한국의 희망버스 운동을 주목해 그해 가을 오큐파이 전체 총회 시 한국의 남단 끝 부산의 한 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고립되어 있던 당신을 지목해 여는 발언을 청하기도 했었죠.

    한국의 지배집단들은 자신들이 김진숙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시키지도 않았는데 전세계 언론에 당신의 소식을 세세히 전하는 독립언론인들(?)이 있었지요. 이 밤 우리는 세계 노동자민중의 저항운동과 소통하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는 짜릿함에 전율하던 때도 생각납니다. 그렇게 아랍의 알자지라를 비롯해 전세계 주요 언론이 당신과 희망버스의 연대투쟁을 쉬지 않고 알려주었지요. 4차 희망버스 때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맞춰 국제영화제 사무국도 하지 못하는 5개 국어로 된 희망버스 홍보 브로셔를 보름 만에 만들고 영화인버스를 운행해주던 이들이 있었죠. 그 아름답던 버스들을 모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퀴어버스, 청소년버스, 반값등록금대학생버스, 철거민버스, 인디버스 , 교수학술버스, 어린이책작가버스, 이주노동자버스, 장애인버스, 인권버스 등 그 모든 이들이 주인이 되어 5차까지 쉬지 않고 달렸던 희망버스가 6차를 준비하고 있던 2011년 11월 10일, 당신은 비로소 그 크레인 위에 한맺혀 있던 김주익 열사의 원혼을 곱게 안고, 살아서, 이겨서, 이 땅으로 다시 귀환해 내려올 수 있었죠.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당신은 외로운 채였습니다. 희망퇴직자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97명의 동료들 전원이 복직되었지만, 그 대가로 또 당신은 당신의 복직을 양보하고 포기해줘야 했죠. 땅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건 수많은 기자들도 있었지만, 현행범 체포를 하러 온 경찰들과 불법농성에 대한 죄과였죠.

    그런 외로움과 아픔만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런 눈물겨운 합의조차, 세계적인 합의(?)조차 세상이 조금 잠잠해져가자 조남호 회장은 1년 내 복직이라는 약속을 파기했죠. 또다시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신경이 곤두서가던 시간, 2012년 12월 21일 이번엔 서른 다섯 살의 청년 최강서가 아무도 없는 노조 사무실에서 자신의 목을 걸었죠.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누구보다도 여리고 예민한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영혼이 얼마나 많이 혼절하고 곤두박질쳤을지 저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 아수라 지옥에서 매번 살아 나와야 했던 당신과 우리의 삶이 정녕 인간의 삶이었을까요. 2003년 벗인 김주익의 장례식에서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인명은 재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 걸 그랬습니다.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 내일에 대한 희망, 새끼들에 대한 미래 따위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며, … ‘회장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감지덕지 살 걸 그랬습니다.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 그 꿈을 포기해서 박창수 동지가, 김주익 동지가, 그 천금같은,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그 억센 어깨를, 그 순박하던 웃음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습니다.”라고 절규했던 당신인데 다시 사랑하던 후배동료가 목숨을 끓는 그 고통과 상처를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피눈물나는 35년, 누구보다 치열했던 35년

    그게 당신의 피눈물나는 35년이었죠. 열다섯 살 무렵 “복수 찬 덴 돌미나리가 좋다는데”, “평생 40kg이 안 넘어 바람에 날릴까 한 손으로 등을 받쳐야 했던 엄마”, “내가 자전거 안 태워주면 그 무거운 짐을 들고 혼자 시장에서 돌아올 엄마”, “병원 갈 돈도 없는 집구석, 갈 거면 빨랑 가라고 생각한 적, 솔직히 많았”다던 아픈 엄마를 두고 어쩔 수 없이 떠나와야 했던 낯선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께끼도 팔아보고, 시내버스 안내양, 미싱사 거치며 “첫 월급. 그 눈물나는 돈을 받아 엄마 쉐타 사고 법랑냄비 사니까 없더라. 그걸로 내가 지은 죄 갚았다고 생각했어. 엄마 유품 정리하는데 그딴 게 구석구석에서 나오대. 쉐타는 반다지에서, 냄비는 선반 위에서 박스 채로, 중학교 때 신문배달해서 사준 털신은 농 안에서…, 왜 그딴 걸 하나도 안 쓰고 죽었냐”고 “엄마. 보고 싶을 때가 있어. 한 번만, 잠깐만이라도, 안 되면 먼발치에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싶은 날이” 속으론 참 많았다던 35년이었겠죠. 그러나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는 동안 그런 작은 행복, 작은 상념조차 사치였던 35년이었겠죠. 당신들과 같은 현장 활동가들 따라다니며 함께 학습하고, 잠깐 조력하던 변호사 둘이 ‘인권변호사, 노동변호사’라는 휘장을 달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지만 당신은 여전히 해고자로 남아 마지막 복직 투쟁에 나서야 하는 비정한 35년이었겠죠.

    무리한 투자 등 제 욕심에 무너진 조남호 회장은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고 제 빼먹을 것 챙기곤 훌훌 도망쳐버리고, 이제 다시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법정관리로 넘겨진 한진중공업. 아직 벗겨 먹을 게 남은 공장이라 늑대처럼 달겨드는 투기자본들을 보는 당신의 마음은 또 어떤 것일까요. 이제 또 닥칠 수 있는 정리해고의 광풍 앞에서는 또 어떤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저 크레인을 오르고, 저 난간에 목을 매고, 저 농성장에서 곡기를 끊어야 할까요. 왜 이렇게 노동자들의 삶은 평생이 칼날 위처럼 불안해야 할까요. 1100조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100대 재벌, 2000조가 넘는 눈먼 돈이 투자처를 찾아 금으로 갔다, 채권으로 갔다, 부동산으로 갔다 한다는 풍족한 세상이 모두 이런 노동자들의 목숨값에 다름아니겠죠.

    그래서 당신은 꼭 복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싸워봤자 안돼라는 패배감이 남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거겠죠. 그것이 작은 일일망정, 설혹 단 하루를 복직했다가 나오더라도 너희들이 불법이었다는 것을 끝끝내 확인시키고 싶은 거겠죠. 우리가 정의였다는 것을, 그렇게 불의에 끝까지 저항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들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은 거겠죠. 35년 동안 당신을 지켜 온 현장의 동료들에게 끝내 돌아왔다는 생의 선물을 남겨주고 싶은 거겠죠.

    이제 그만 자신도 모르게 올라타야 했던 시대의 작두 위에서 내려와 그날 당신의 청춘도 거기 묻어버렸다는 솔밭산 박창수 열사의 묘지 앞에서 ‘창수형’하며 한 번은 엉망으로 무너져 보고 싶은 거겠죠. 또 거기 옆에 묻혀 있는 ‘주익씨’ 하면서 한 번은 더 목 놓아 펑펑 울어보고 싶은 거겠죠. 또 거기 옆에 묻혀 있는 ‘재규 형’하면서, 또 거기 옆에 묻혀 있는 ‘강서야’ 하면서 35년 피맺혔던 설움과 분노 다 한번은 쏟아버리고 싶은 거겠죠. 제2의 박창수가 되어, 제3의 김주익이 되어, 제4의 곽재규가 되어, 제5의 최강서가 되어 그들이 일했던 공장 구석구석 한번 돌아보며 쓰다듬어주고 싶은 거겠죠. 나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나 끝내 의리는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 모진 세상 향해 절규하며, 스물 한 살 자신을, 스물 여섯 자신을 한 번은 꼭 껴안아주고 싶은 거겠죠. “‘아저씬 소원이 뭐예요?’ 물으니 ‘안 죽고 일하는 거다’ 1초도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오던” 공장,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 그래서 더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있기도 했던 공장. “술만 먹으면 개구신 되는 인간, 뺀질이, 지 이름 안 불러줬다고 01시 10분에 전화해 징징거리는 넘, 내만 밋으소 수첩 북 찢어 쪽지 보낸 아저씨. 볼 때마다 애틋한 27년(필자주 : 이젠 35년) 날 사로잡고 있는 사람들. 이 나이 먹도록 변변히 연애 한번을 못하게 한 사람들.”에게 ‘진숙이 여기 안 왔나’고, ‘여자화장실 청소는 깨끗이 해놨노’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한 번은 얘기해주고 싶은 거겠죠. 우리 노동자들이 바라는 건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따뜻한 밥 한 공기 좋은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거라고, 그 누구에게서든 이런 소박한 행복과 평화를 빼앗지 말라고, 이젠 먹을만하다는 공장 식당에서 밥 한 끼 나눠먹고 싶다는 거겠죠.

    그런 김진숙의 35년을, 우리 모두의 35년을 이 정부가 나서서 또 능멸하거나 이용하려 하면 안되겠죠. 맨날 검찰개혁이다 뭐다 하며 온 나라를 뒤집어놓으면서 뒤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상정도 않고, 언제적 공약사항이었던 ILO 협약 비준도 않고, 노동법이나 다시 누더기로 만들면서 김진숙의 35년을 정략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면 안되겠죠. 무슨 매각협상과 관련한 딜 카드로나, 자신들의 반노동자적인 얼굴을 숨기는 치장이나 무슨 시혜나 업적 같은 걸로 김진숙의 투철한 35년을 활용하려 해선 안되겠죠. 그 악랄했던 이명박 때도 심지어 당시 부산법원은 합법해고라는 판결까지 내린 상태였지만 끝내 희망퇴직자 뺀 97명 전원이 정리해고 철회되고 모두 복직되었는데 말이죠.

    촛불정부에, 한때 노동변호사였다는 문재인 씨가 대통령으로 있는 때, 이미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에 따른 복직 판결까지 받은 바 있는 김진숙 한 명의 복직이 이렇게 어려운 건 참 이해하기가 힘들죠. 삼성 이건희처럼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김진숙은 안된다던 조남호도 아니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앞장 세워서 말이죠. 부산시의회와 국회 환경노동위의 복직 촉구 특별결의도 무시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나 노동부 등의 뒤에 숨어 ‘업무상 배임’ 등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산업은행 앞세워 김진숙을 다시 탄압하고 있는 상황을 곱게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결국 그가 다시 매순간 긴장을 요하는 복직 투쟁 과정에 재발한 암으로 긴급 수술 받고 어디선가 외롭게 누워 있다는 소식이나 전해지니 당신들은 고소한가요. 무한한 권력을 무기로 김진숙의 35년의 끝 무렵에 적당히 흙탕물 튀게 만들고 싶은 게 당신들의 뜻인가요.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촛불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2011년 1월부터 시작한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고공농성과 이에 화답한 희망버스가 그해 11월까지 근 1년여 동안 보수의 아성이었던 부산을 뒤흔들고 난 후 그 성과의 하나로 다음 해 4월 총선에서 비로소 문재인 현 대통령을 포함한 민주당 국회의원 다수가 부산에서 나올 수 있었죠. 우리 모두가 촛불항쟁으로 들고 일어나 박근혜를 쫒아내고 난 뒤에야 당신들이 덤으로 또 정권을 인계받았듯이 말이죠. 쪽팔리게 그런 선공후사나 대가나 보상 같은 떡고물이나 찌그러기 같은 거 내놓으라는 말은 추호도 아니니 걱정마시길 바랍니다. 당신들이 또 다시 외면한 김진숙의 복직, 우리 힘으로 이룰 거니 걱정마시기 바랍니다. 김진숙의 복직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에서 내린 법적 판결만 이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쓸데없는 옛 인연 찾아 무슨 권력의 시혜나 동정을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그냥 최소한의 민주주의나마 이 땅에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부동산공화국이나 재벌공화국 같은 나라말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삶터, 일터가 조금은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나라 정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그런 정도의 상식들은 바로잡히리라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돌아온 소식은 모두가 간명하고 손쉬울 거라 했던 김진숙의 복직 소식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이던 그가 다시 길고 지난한 투쟁 과정에 나서서도 문제 해결이 안되고 급기야 암이 재발하여 11월 30일 긴급 수술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죠. 정년 내 복직이 근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죠. 주채권사인 산업은행이 자회사인 KDB인베스트먼트를 통해 한진중공업을 셀프 매각해서 또 다시 도마 위에 올리고 구조조정이라는 짭잘한 난도질을 계획하고 있다는 흉악한 소식이었죠. 간단하게 바로잡힐 정의가 왜 이렇게 헤매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과 같은 것이었죠. 도저히 안되겠다고 다시 ‘리멤버 희망버스’를 띄워달라는 부산지역 분들의 간곡한 요청이었죠.

    그렇게 긴박한 며칠의 시간이 또 흘러 오늘이 12월 14일,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년 내 복직인 연말까지는 보름밖에 안 남았습니다. 희망차가 무슨 요술방망이도 아니고, 희망차가 무슨 조직처럼 누군가 지침 내린다고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벌써 9년여의 시간도 흘렀는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낼 수 있을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나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2주기를 맞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때, 고 김용균의 어머니인 김미숙 님과 이태희, 김주환 등 ‘1100만비정규직 이제그만’의 비정규노동자들이 무기한 단식에 돌입해 있는 이 긴급한 때, 한 축으로는 김진숙의 35년을 함께 지켜내는 일에 우리 사회가 다시 나서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몸을 두 조각을 내서라도 함께 하겠다는 이들은 여전히 가지지 못한 자들입니다. 2011년처럼 이 참혹한 세상의 바닥에서 늘 풍찬노숙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에 연대하는 연대자들이 ‘내가 김용균이며, 내가 김진숙’이라며 먼저 마음을 내주는 듯 합니다. 이들에게 자본의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는 코로나19보다 더 오래전부터, 더 치명적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체적으로 빼앗아가고 있는 인류 이래 가장 악독한 바이러스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이윤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산재로만 1년에 2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퍽, 퍽 죽어가고 있습니다. 알아서 자결해 가는 이들의 행렬로 OECD 최고의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쓴 것이 벌써 이십여 년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은 그간 코로나19보다 더 극악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온 자본이라는, 이윤이라는 오래된 바이러스를 걷어내는 사회적 백신이 될 것입니다. 이는 금세 가능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19 3단계가 임박해 오고 있다는 엄혹한 때입니다. 그 누구라도 제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나서고 싶지 않습니다. 내 한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 때문에 혹여라도 누군가가 불편해지고 위험해질까봐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우린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12월 19일 ‘리멤버 희망차’로 내밀고 다시 저 먼 부산까지 향하게 한 것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뒤에 숨어 김진숙의 35년을 조롱하고 있는 이 정부입니다. 그 모든 파국의 책임은 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희망차는, 희망차의 승객들은 150여개 전투중대 등을 배치해 희망버스를 막으려 했던 그 무도한 이명박 하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 나약하지만 온전하려는 정신을 확인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파국이 있기 전 하루속히 김진숙을 년내 복직시키고, 우리 모두의 염원을 복직시키고, 이 피눈물나는 민주주의의 세월을 복직시키고 위험천만한 놀이를, 행여나하는 도박을 멈추십시오.

    물론 지혜롭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희망차의 발랄한 승객들은 나 또한 경험한 바 최대한 우리 사회 모두의 안전을 위한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것이 끝내 희망차들을 출발케 만든 이 무능하고 부조리한 정부의 안위를 위한 길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우선은 코로나19의 우려를 떨치기 위해 비대면의 전국 350대의 드라이브스루 희망차를 운행한다고 합니다. 과거처럼 몇 대가 될 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벌써 전국의 노동자 시민들이 희망차를 타겠다고 한답니다. 금번 희망차의 수많은 승객 중 제일 덜떨어진 철부지 승객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의 이 투박한 글 또한 이렇게 이 사회 모두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간곡한 몸부림의 하나로 읽혀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염원은 ‘김진숙의 2020년 정년 내, 연내 복직’인 바 12월 19일 리멤버 드라이브스루 희망차 출발 전까지 문재인 대통령이 입장과 해결책을 내놓을 것을 통보하고 있습니다. 그 염원들이 배반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언제나 함께 외치던 구호,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돌아와, 긴 세월의 끝자락에 외롭게 선 김진숙 선배에게 전합니다.

    “한진중공업엔 우리들만 다닌 게 아니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맘 놓지 못했던 아내들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들도” 다녔던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걸었던 35년, 당신 혼자 걸은 게 아니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이들이 그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 온 것으로 압니다. 또 판결받으러 간다며 “손 흔들고 돌아서는 젊은 녀석들의 등이 영감처럼 굽”어서 “어깨 펴라 자슥들아!” 고함을 지르려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는 그 날들이 우리들의 아픈 날들이기도 했고, 우리들의 설운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열사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만의 열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핍박받는 모든 이들의 아픔과 분노였고, 이 사회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가없는 꿈과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가더라도 이 사회가 조금은 더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어, 눈물겨운 사람들, 억울한 일들 조금은 줄어들게 하자는 소박한 꿈들이었습니다. 그 꿈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당신의 복직은 그래서 우리 모두의 복직임을 다시 한번 새겨보니, 선배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부디 빨리 쾌차하기를 바래봅니다. 한진중공업에 바친 40여 년, 이 땅의 참 민주를 위해 바쳐 온 35년, 이젠 훌훌 털어버리고 “동지들에게 이젠 더 이상 미안하지 않으셔도 되니”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떤 흙탕물에도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남은 생은 한없이 자유로우시길 바래봅니다. 열 다섯에 떠나 온 고향 “5년이면 돈 벌어 금의환양”할 줄 알았다던 스물 한 살, 사번 23733번 김진숙의 눈물겨웠던 35년을, 투철했던 35년을, 우리는, 이 사회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외치던 구호,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 추신 : 어쩌다 보니 허락 없이 당신의 얘기를 내 글처럼 함부로 많이 쓰곤 했습니다. 늘 조심스럽고, 당신이 불편해 하면 어쩌나 하면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복직 소식 듣고, 저 또한 험난했던 당신의 삶을 함부로 들추는 글을 쓰게 되는 시간이 그만 종료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 김진숙 복직 드라이브스루 부산 희망차 참여신청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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