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세대 유감···'상징폭력'
    그들의 시대정신과 결별
    [적녹연대] 한가한 이야기 아니다
        2020년 12월 10일 03: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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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정치의 주류는 ‘86세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혹자는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86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모호한 민주주의를 넘어선 체계화된 변혁 사상을 수용한 학생운동 경험의 공유다. 한때 북한의 노선을 따르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NL과 레닌주의 혁명노선을 표방했던 PD 계열을 구분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이념적 지향이 희미해진 지금 그들을 묶어주는 것은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앞장섰다는 자부심이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화’ 세대라는 호명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호명 모두 사실을 왜곡한다. 우선 86세대가 상징하는 80년대 ‘학번’은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대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게 만들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화를 추동했던 거대한 물결은 대학생집단으로 제한될 수 없다. 다만 이들이 대학생이라는 ‘특권적’ 위치 때문에 지속적으로 집단을 만들 수 있었고 그러한 조직적 힘으로 제도정치 안에 진입할 수 있었을 뿐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음을 집단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다수는 86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동일시되는 순간 망각된다. 86세대는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주화’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다수를 배제하는 일종의 ‘상징폭력’을 자행한 것이다.

    스스로를 민주화의 화신으로 생각하는 비민주적 발상

    ‘86세대’라는 호명이 과거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축소하고 수많은 행위자들을 역사의 현장에서 지워버렸다면 ‘민주화세대’라는 이름은 현재의 정치지형을 왜곡한다. 민주화세대의 정체성은 과거형의 ‘민주화’이지 현재의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들을 민주화의 주역으로 간주하는 이 세대의 독특한 정신구조에서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대단히 ‘비민주적인’ 발상이 자연스럽게 공유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공유한 집단이 한 사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박제화 되어 멈추어 설 수밖에 없다.

    이들의 집단적 ‘착각’은 온전히 주관적인 구성물만은 아니다. 독특한 한국의 정치지형의 구조적 조건이 그들의 착각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행태도 극우정치집단과 대결할 때는 민주주의로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것이 단지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아닌 진실로 믿어진다는 것에 있다. 이제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반민주적인 극우정치집단의 반대항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민주화의 과정이 멈출 때, 즉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선언될’ 때 퇴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위임과 대의 절차에 한정하고 낡은 엘리트주의와 전문가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엘리트 집단은 검찰개혁과 정치개혁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이 마치 민주화의 핵심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들이 ‘유권자’로 제한하거나 ‘서민’ 또는 ‘국민’이라는 비정치적인 이름으로 호명하는 인민이 정치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민주화’에는 관심이 없다.

    인민들이 참여하고 발언하는 민주주의에는 관심 없어…표가 제1기준

    인민의 참여와 압력이 없는 민주주의는 허약하다. 문재인 정부의 탈핵 약속은 말뿐인 ‘공론화’로 유명무실해졌다. ‘공론화’라는 그럴듯한 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숙의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를 통한 책임회피였을 뿐이다.

    재벌의 힘을 견제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약은 거대자본의 막강한 영향력이라는 현실 앞에 실종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생명을 자본의 이윤을 위해 ‘갈아 넣는’ 살인적인 노동 현실을 바꿔보자는 주장에도 귀를 닫고 있다. 대부분의 노동단체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 위배되는 개악이라고 비판했던 ‘노조법’을 통과시키고도 천연덕스럽게 ‘노동인권의 진전’이라고 주장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을 말만 앞세우는 좌파라고 조롱까지 하고 있다.

    기본적인 인권 문제에서도 퇴행적이다. 한때 정신 못 차리는 일부 ‘남성’들로부터 페미니즘 정권이라는 공격까지 받았지만 지금은 보수 종교세력의 눈치를 보며 낙태죄 폐지에서조차 후퇴하고 있다.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다. 온갖 멸시와 수모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는 성소수자에 대한 고려는 보수 종교단체가 동원할 수 있는 ‘표’ 앞에 사라진다.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녹색뉴딜을 발표하지만 어떻게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했던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장 전략은 있지만 녹색 전환의 방향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시절 재벌 기업에게 허가했던 엄청난 용량의 석탄화력발전소를 방치하면서 미세먼지 감축과 탄소중립을 이야기한다.

    국제사회에서 기후악당이라고 비판받지만 대통령은 억울해하는 것 같다. 신·재생에너지 (시장) 활성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경제는 여전히 대형국책사업과 양적팽창, 멈추지 않는 성장에 의해 지탱된다. 지역정치인들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상관없이 ‘삽질’과 ‘콘크리트’ 이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생태주의와 녹색을 표방하면서 공항을 더 짓겠다는 나라가 아닌가? 녹색전환의 핵심이 인공지능과 드론기술의 발전이고 전기자동차공급 확대인 나라가 아닌가?

    시장맹신주의가 진보로 탈바꿈하는 미친 시대

    이제 지겹도록 보아왔던 소란스러운 ‘짜고 치는’ 게임이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마치 이 나라의 만악의 근원은 검찰인 것처럼 주장하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만드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는 정부·여당과 여기에 결사반대하는 야당의 난투극이 모든 대중 매체를 가득 채운다.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싼 극한 대립과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진흙탕 싸움을 매일 보고 들어야 한다. 이런 난장판은 정치적 혐오를 조장한다. 시끄러운 ‘허구적’ 대결 속에 여당과 야당이 공유하고 있는 기득권 사수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시급한 기후위기 대응과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인 녹색전환은 진지하게 논의조차 되지 못한다. 은근슬쩍, 그리고 종종 노골적으로 재벌의 편을 들면서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다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지만 소란스러움은 이런 뻔뻔함도 감춘다.

    조금 길게 보면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불렸던 김대중 정부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 민주화는 시장의 힘, 재벌의 힘, 자본의 힘이 독재권력을 대신하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외환위기를 기회로 한국경제를 외국자본에게 완전히 개방하고 자본의 힘이 노골적으로 행사되고 시장의 논리가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것을 민주화라고 착각하게 했다. 노무현 정부도 이런 시장주의적 ‘개혁’의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공연하게 시장을 옹호하는, 그것도 이제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시장맹신주의를 신봉했던 정치집단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그 상대편이 극우정치세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좌파’라고 불러주었다. 그 대가로 이 시장자유주의자들은 낡은 냉전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공극우를 ‘보수’라고 불러주었다. 자본과 유착되어 대형 개발사업과 금융투자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이익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좌파와 보수로 호명하면서 ‘허구적인 대립’을 연출했다.

    민주주의를 시장의 힘과 동일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 자체가 후퇴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정치마저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다. 다른 한편으로 유명무실해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초래했다. 민주주의는 중요하지 않다, 독재라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면 좋은 것이라는 퇴행적인 생각이 만연하게 된다. 그 결과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었다. 도덕적 타락이나 반민주적 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용인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

    허구적 대립만이 86세대라고 불리는 정치집단을 진보로 착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86세대의 ‘상징폭력’에 의해 지워진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과 시대정서를 공감한다. 민주당에 비판적이고 스스로를 ‘좌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그 세대에 속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들의 ‘사기행각’에 슬쩍 눈을 감는다. ‘수구꼴통’들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강박’이 판단력을 흐린다.

    사실 86세대니 민주화세대니 하는 호칭의 문제로 시간을 낭비할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다.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은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요청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화석연료를 토대로 한 자본주의적 확대재생산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다.

    그럼에도 ‘한가하게’ 86세대에 대한 유감을 표하는 이유는 그들이 기후위기와 팬데믹으로 드러난 현행의 생산, 소비,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전환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극우파들보다야 낫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극우파들의 주장은 ‘노골적’이다. 그래서 대놓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86세대의 담론은 ‘비열’하다. 한편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인권을 내세우지만, 그리고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달콤한 맛에 도취되어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자나 말만 앞세우는 ‘입진보’라고 비아냥거린다.

    이제 86세대의 ‘시대정신’은 낡았다. 우리는 그들과 결별해야 한다. 이제 그들을 ‘민주화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조롱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민주화’세력이기에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조롱인 것이다. 인민은 충분히 그들을 조롱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조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들의 ‘민주주의’와 다른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자본의 맹목적 이윤추구에 생산비로밖에 계산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이라는 지구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공적서비스를 축소하고 상품화하는 시대착오적인 시장맹신주의를 돌려놔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돌보고, 공감하는 수많은 ‘생산적’ 노동(사회적 재생산노동)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그리고 그것을 공동체와 여성의 의무로 돌리는 시대착오적인 정치는 종식되어야 한다. 여전히 숫자로 표현된 성장에 중독되어 내일의 재난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자본의 논리와 결별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민주주의의 내용이다. 과거에만 집착하고 그것에서만 존재감을 찾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콤한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있는 ‘그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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