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은 갔다, 김일 선수 만세!
    2006년 10월 26일 0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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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전직 대통령 한 분의 영결식이 있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짧았던, 그리고 가장 힘이 없었던 대통령 최규하. 12.12사태를 묵인하고 1980년 5월 18일 광주에 군 투입을 승인했던 대통령 최규하. 그리하여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시대의 길을 열어줬던 대통령 최규하.

그의 짧았던 재임기간 동안 우리나라에는 실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뜻하지 않게(?) 대통령이 된 최규하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에 둘러 쌓여 대통령 같지 않은 대통령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명목상 대통령이라도 대통령인지라 그는 12.12에서 5.17로 이어지는 신군부 쿠데타, 그리고 광주 민중에 대한 신군부세력의 학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시대에 대해 역사와 국민 앞에 증언할 의무가 있었다.

   
▲ 고 박대통령 국장 영결식- 헌화, 분향하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사진= 연합뉴스)
 

그렇지만 그는 내내 침묵했다. ‘전직 대통령’이란 걸 내세워 일체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오로지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12.12사태가 쿠데타로 규정되고,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규정되고, 그리하여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가 감옥에 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전두환은 최규하의 빈소에 조문한 후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워낙 꼼꼼하고 섬세한 분이라 다 기록해 두셨을 것이다. 메모든 비망록이든 이제 사실이 다 밝혀질 것이다.”라고. 마치 최규하의 기록이 발표되면 자신의 죄가 모두 없어질 것이라는 자세로.

이제 밝혀야 한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교훈이다. 모든 진상이 밝혀질 때만이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는다. 계속되는 침묵, 아니 이제는 은폐는 역사에 대한 더욱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일 뿐이다.

최규하를 갑자기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다시 10월 26일. 1979년. 한밤중에 울려 퍼진 총성은 우리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하였다. 18년간 철권통치를 하여 온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가 쏜 총에 쓰러졌다. “나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말처럼 철옹성인 것 같던 유신독재는 내부 분열에 의해 붕괴됐다.

박정희. 실로 그는 풍운아 같은 삶을 살았다. 1917년 가난한 농민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기도 하였지만, 이내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일제시대에 시골 동네의 초등학교 선생으로서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자신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임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강조하였고, 가난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안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부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고, 시대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인 처신도 서슴치 않았다.

일본군에 입대한 것도 그러한 그의 인식과 처신의 일환이었다. 일본군 소좌로 임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45년 일본은 패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일대 변신을 꾀하였다. 남로당 관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여순반란사건’으로 체포된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그는 재차 변신을 하였다. 수사기관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고 협조함으로써 그는 목숨과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그는 경제개발을 내세워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냈으나, 노동자 농민에 대한 극도의 억압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발전을 강조하는 쪽은 찬양론으로, 억압과 탄압을 강조하는 쪽은 비판론으로 나뉘어 핏대를 올려가며 설전을 벌이고 있다. 박정희는 우리 현대사의 한 시대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그 그림자가 걷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게 아이러니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쪽이 박정희 찬양론에 서 있다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쪽이 비판론에 서 있다. 박정희는 강력한 국가 주도 경제를 추진한 사람이다.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다.

박정희가 억압하고 탄압했던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사람에게도 10월 26일은 너무나 불행한 날이 되었다.

또다시 10월 26일. 2006년. 또 한 사람이 스러졌다. 김일. 우리 국민 중 절반은 그를 알고, 나머지 절반은 그를 잘 모른다. 아니 알고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인간 김일이 아닌 사각의 링 위에서 박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알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 전성기의 김일 선수
 

박치기왕 김일. 프로레슬러 김일. 그는 192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남보다 출중했던 그는 동네 씨름판을 휩쓸다 1956년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다. 당시 상황에서 씨름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하기 이전인지라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곧바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당시 세계 챔피언이던 역도산 도장으로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된다. 자신만의 주특기가 필요하다 하여 수천 번, 수만 번 박치기 훈련을 하였다.

김일이 프로레슬링에 처음 데뷔한 것은 1963년경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간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레슬러였다. 김일 선수는 계속 공격을 당하여 고전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힘을 내어 박치기를 작렬시켜 승리를 이끌어냈다.

TV가 제대로 보급되어 있지 않던 1960~70년대 TV수상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마을에 TV가 1대 있다면 그 집으로 온 동네사람들이 모이고, 심지어 전파상에서 틀어주는 TV앞에 길 가던 모든 사람들이 멈춰 서서 김일 선수의 이 경기를 관람하였다. 흑백 진공관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에 나타난 김일은 어떤 화려함도 다 누르고 가난한 시절의 인민을 무서울 정도로 빨아들였다.

김일 선수가 고전하면 내가 당하는 것처럼 괴로워하였고, 그러다 박치기가 작렬하면 온갖 세상의 시름과 근심이 한 순간에 날아가듯이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최저생계비에도 턱없이 부족한 임금을 받던 도시 노동자와 서민,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하던 농민들이 그 순간만은 세상만사를 잊고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김일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스포츠 스타가 있지만, 김일처럼 전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호프’였다. 한 순간이나마 서민들의 주름살을 펴주고 근심을 덜어주던 선수였다.

김일의 죽음으로 또 한번 70년대의 한 막이 내린다. 새로운 군부독재의 길을 열어줬던 사람도 가고, ‘우리의 호프’ 김일 선수도 갔다. 그러나 70년대의 그림자는 아직도 걷히지 않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오늘, ‘우리의 호프’는 언제 어디서 다시 등장할 것인가?

마지막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우리 민족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아! 10월 26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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