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천년 고도 경주에
    든든하게 서 있는 첫 교회
    [그림 한국교회] 경주제일교회
        2020년 12월 02일 09: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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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하다 천년세월 찬란했던 신라문화 / 고려왕조 오백년에 조선왕조 오백여년
    일제시대 육이오난 모진풍상 다겪으며 / 오늘까지 남았으니 장하도다 자랑일세
    ….
    경주시내 번화가의 대릉원이 남쪽이라 / 대릉원의 안에들면 아늑하기 그지없다
    미추황릉 천마총에 황남대총 포함하여 / 이십여기 고분군이 풍만하고 편안하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어린아기 안기듯이 / 병풍처럼 두른능들 포근함이 그만일세
    보름달이 뜨는밤엔 능이더욱 둥글구나 / 들불처럼 밝은만월 둥실둥실 떠다니네
    ….

    – 김형기 목사, 시 “이천 년 고도 서라벌 유람기”중에서

    고도 경주의 모든 유적, 산, 인물을 다 망라하고 있는 기막힌 4.4조 시는 경주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던(1997-2002년) 김형기 목사님(경주 팔복교회)의 시집 <서라벌의 봄 소식>(시간의 물레, 2015)에 실린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새문안교회 대학부에서 저를 지도한 선배들 중 한 분입니다. 저는 1973년부터 탁월한 선배들에게 배우며 신학과 문학,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엄혹한 시대상황이라 낭만감정을 누르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노동자 야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일들로 인하여, 저의 신앙과 삶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한 번쯤은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의 떨어짐은 떨어짐이 아닙니다. 마침입니다. 그리고 시작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떨어지면서 다음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배를 두고 가야 하듯이 이 가을에는 우리 인생의 마침과 준비를 바르게 하는 겸손한 교훈을 마음에 품읍시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 정영택 목사, “낙엽의 떨어짐”

    자기 성찰을 자극하는 짧은 글은, 기독교 주간지 ‘가스펠투데이’에 실리는 정영택 목사님의 단상 “희망의 편지”(11월 26일)입니다. 장신대 신대원 선배이신 정 목사님은 2003년에 경주제일교회에 부임하여 2018년에 은퇴하셨는데, 예장통합 총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림=이근복

    이천년 고도(古都) 경주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902년이었습니다. 1886년 대구에 부임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사역하던 미국 안의와(James Edward Adams) 선교사는 1902년 봄 경주 장날 노방전도에 나섰습니다. 불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땅에서 예수를 받아들인 박수은, 김순명, 이남생 등 10여명이 1902년 5월 10일, 성건동 초가집에서 안의와 선교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림으로 ‘경주읍 노동교회’(현 경주제일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박수은, 김순명 두 분을 영수로 세워 교회를 돌보게 하지만 불교가 꽃피워 수많은 사찰과 불교 유물이 많은 경주라서 복음전도가 여의치 않자,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기성 종교와 갈등을 피하고 근대문화를 통하여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교육선교에 치중했습니다. 그 결과 1909년 교회부설 계남학교가 설립되었고, 경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였던 이 학교에 김동리 작가도 다녔습니다.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에 망연자실한 시민들은 교회로 몰렸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라는 설교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일경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박영조 목사와 청년들을 투옥하였고, 박 목사가 출감하자 대구 남산정교회로 쫓았습니다. 또 일제는 반일민족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계남학교 마저 폐교시켰습니다. 1945년 7월 29일에는 성수주일을 방해할 목적으로 경보사이렌을 울려 양화석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키자, 임오순, 강철수 등 교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였고 일경은 10여명을 연행하여 구금하였습니다.

    2018년 11월 26일자 경북연합일보는 경주교회의 역사문화적 기여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기자는 경주제일교회가 일제강점기 경주 3·1운동의 주역이었음을 밝히며, 만세시위가 벌어진 경주장터 신한은행 앞 사거리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로 지정됐다고 썼습니다.

    또 11월 25일 경주제일교회가 아라키 준(53) 박사를 초청한 ‘신앙과 민족문화의 만남-경주제일교회의 역사적 위상’ 제목의 공개강연을 보도했습니다. 강사는 교회가 1921년에 발견된 금관총 출토유물을 경주에 유치하는 주역이었고 동아일보와 협력하여 신라문화를 최초로 시각적으로 민족에게 전하는 역할로써 교회의 역사적 위상이 높아졌다고 평가합니다. 경주제일교회는 경주지역 기독교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문화를 전국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전파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진단하였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여행하지 못한 까닭인지 경주 가는 날은 수학여행 가는 기분으로 좀 이른 시간에 KTX를 탔습니다. 교회 사무실에서 친절하게도 교회요람의 역사 부분을 복사해 주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경주제일교회의 석조예배당은 단아하게 보였습니다. 1951년에 건립할 당시 경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는 단순한 형태의 100여평의 석조예배당은 200명이 예배하였는데, 지금은 사회봉사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당의 예쁘게 물든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1980년에 건축한 본당과 석조예배당을 찍고, 왕들의 계곡인 ‘대릉원’으로 걸어갔습니다. 20여 고분으로 이루어진 왕들의 무덤에 대하여 대구 출신이지만 아예 경주에 사는 소설가 강석경은 <능으로 가는 길>(창비, 2000)에서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대능원에서 유목민의 흔적이 묻힌 거대고분들을 만나며 내 뿌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한 것 같다…. 그들이 신라를 국가로 만들었고 삼국을 통일하여 고려와 오늘에까지 이어졌으니, 그 뿌리는 한국문화의 원형이며 이곳은 정신적인 고향이다.” (84쪽)

    도시 한 복판에 거대한 봉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스럽습니다. 아침 햇살에 잔디는 금관총의 금제장식들처럼 화사하였고, 고분 사이로 걸으니 영혼이 잠든 묘지가 주는 선물인지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무성한 송림을 지난 정문으로 나가 더 걸어가니 선덕여왕 때 건립한 첨성대가 들판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눈높이가 달라져서인지 첨성대가 이전보다 더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은 작았지만 신라 천년을 보여주는 무성한 고목들에 눈길을 주며 산책하는 여유로움을 만끽 하였습니다.

    지난 11월 19일, 충남/대전 목회아카데미의 강사였던 백광훈 목사는 “우리 시대의 문화변동과 한국교회의 과제”란 제목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와 문화는 궁극적으로 상관관계적이며 상호변혁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와 문화는 서로 관계를 주며 형성되어 왔다. 교회는 문화를 변혁하지만, 거꾸로 문화 역시 교회의 변화를 촉발시키기도 한다.”

    작년 1월 1일에 부임한 박동한 담임목사께서 경주의 찬란한 전통문화를 기독교와 잘 접목하여,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가 변혁되는데 기여하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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