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진동 장군 서훈 취소?
    어처구니 없는 보훈 심사
    [기고]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
        2020년 11월 30일 01: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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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 국가보훈처 심사위는 몇 가지 보훈 심사에서 우려할 만한 결과를 자초했다. 필자는 세 가지로 특정해서 보훈처 보훈 심사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보훈처 심사위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 최진동 장군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서훈 박탈을 시도했다. 국무회의에 안건이 올라가면서 그때서야 최진동 장군 후손들에게 보훈처 심사위의 서훈 취소 결정 사실이 알려졌다. 그전까지 보훈처 심사위는 최진동 장군 후손들에게 서훈 취소 결정을 앞두고 소명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보훈 행정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올해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해이다. 그런 특별한 기념 해에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자 진정한 영웅인 최진동 장군에 대해 보훈처가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유는 최진동 장군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몇 가지 자료제시에서 비롯되었다. 보훈처 심사위가 제시한 최진동 장군 친일행위 제시 자료는 ‘친일’의 근거로서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근거가 미약하다. 이를 논증해 보겠다.

    먼저 보훈처가 일제 외무성 1911년 5월 10일자 문서와 1923년 11월 13일자 문서를 통해 최진동 장군이 독립군 동향을 중국 측에 ‘밀고’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최진동 장군과 동생인 최운산 장군, 최치흥 장군이 중국군에 복무한 경험과 일찌감치 중국에 귀화한 사실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실제로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 최치흥 장군 등 최씨 3형제 일가는 1908년부터 황무지를 개간해 봉오동에 마을을 일구어 정착했다.(박청산, 『연변항일혁명사적지』. 연변인민출판사. 2002년. 62쪽) 1912년엔 봉오동 마을을 지키는 100명 규모의 자위대 병력을 두었고 1915년엔 ‘도독부’로 개칭해 500명 규모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리고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당시엔 670명 규모로 병력이 늘어났고 명칭도 ‘군무도독부’로 개칭했다.

    ‘군무도독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독립군 정예부대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기도 했다. 최진동 장군의 ‘군무도독부’는 당시 대포, 기관총, 장총, 수류탄 등으로 중무장한 최정예 독립군 부대였다. 거대한 연병장과 병영 막사 3개동이 위치한 봉오동은 일제 정탐꾼이 근접할 수 없도록 군사 요새화된 공간이었다. 최진동 장군이 지휘한 ‘군무도독부’는 러시아 장교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고 체코 병단이 쓰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영화 <봉오동 전투>(2019) 장면에서 보듯이 독립군들이 누더기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중국군 복장의 회색 빛깔 군복을 맞춰 입었다. 모두 봉오동에 거주한 독립군 부인들이 8대 미싱으로 손수 지어 만든 군복이었다. 다만 안무가 지휘한 <국민회> 소속 독립군들은 일본군 복장과 비슷한 누런 복색의 군복이었다.

    마찬가지로 영화 <봉오동 전투>(2019) 어느 장면처럼 감자 한 알을 여럿이 나눠먹었던 게 아니다. 봉오동 요새엔 하루 3,000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비축돼 있었다. 모두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 재산으로 충당되었다. 특히 동북만주 일대 제1의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이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기부한 결과였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기지 서대파와 사관연성소 기지 십리평도 모두 최운산 장군이 제공한 사유지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서간도에 이회영 형제들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북간도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왜곡된 사실은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은 ‘홍범도’가 아니라 ‘최진동’ 장군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봉오동 전투>(2019)에선 홍범도 장군(최민식 분)이 카리스마로 등장하면서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오랜 제도권 학교교육이 가르쳐온 잘못된 영웅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봉오동 전투> 당시 통합부대 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었고 홍범도는 김좌진, 오하묵과 마찬가지로 일개 연대장에 지나지 않았다.

    보훈처 심사위가 제시한 중국 측에 밀고했다는 일제 외무성 문서는 1910년대 전후로 봉오동 요새를 군사기지화하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해 온 최진동 장군 형제들의 활약상을 간과한 데서 비롯되었다. 1912년 당시 최진동 장군은 독립운동기지인 북간도 간민회 왕청현 지회장을 맡고 있었다. 나아가 1919년 3월 26일 1,500명이 참석한 북간도 ‘3‧26 독립선언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11년 6월 12일자 일제 외무성 문서에는 “봉오동으로 수백명의 병사들이 도착할 예정으로 식량과 물자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더구나 1923년 11월 13일자 중국 측 ‘밀고’는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 부대에 대한 기록이다. 최진동 장군은 항일독립군들끼리 총격 끝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초래한 <자유시 참변>(1921)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 사건 이후 최진동 장군은 망연자실했고 이후 공산주의에 대해 강한 불신과 적의를 지니고 있었다. 큰아들 최국신이 총명한 공산주의자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자 최진동은 큰아들과 사상 갈등 끝에 크게 꾸짖은 적이 있다. 그 사건 이후 큰아들은 병명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1년 뒤 요절했다. 그리고 며느리도 남편을 따라 죽었다. 그 일로 최진동 장군은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따라서 일본군에 밀고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한때 복무했고 친분을 쌓았던 중국 측에 밀고한 것을 두고 ‘친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훈처가 제시한 근거인 일제 외무성 자료에도 “不逞鮮人 領袖 최진동”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제 스스로 최진동 장군을 독립군 대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음으로 1924년 최진동 장군이 중국 측에 체포되었다가 1926년 석방 뒤 일제에 귀순했다고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이다. 이는 1923년 하반기 항일독립군을 후원했던 직예파 오패부 군벌과 친일군벌 장작림 봉천 군벌 사이에 제2차 직봉전쟁이라는 전운이 감돌던 당시 동북지방 정세를 감안하지 못한 보훈처의 잘못된 판단이다. 항일독립군들은 자신을 지원했던 오패부 군벌 쪽에 섰다. 그러자 친일 군벌 장작림 봉천 군벌은 항일독립군 부대를 지휘한 최진동 장군을 사전에 체포함으로써 적수인 오패부 군벌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이었다.

    당시 최진동 장군이 지휘한 독립군 부대 군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보도기사가 있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자 기사를 보자.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북간도와 러시아령 방면 근처에 근거를 둔 독립당 최진동이 거느린 다수의 부하가 무기를 가지고 그 세력이 매우 굳세다 한다. 중국 관헌 간에서도 매우 염려하고 있다. 동녕현 지사가 조사하여 길림성 성장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최진동의 부하는 4199명이고 장총이 4059개이며 기관총이 27개, 대포가 4문이라고 한다.” – 「최진동의 세력 왕성」. 『동아일보』. 1924. 1. 12.

    최진동 장군이 일본군에 체포된 것도 아니고 중국 군벌에 체포된 사건을 두고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거나 억측일 뿐이다. 오히려 중국 군벌 장작림 군벌은 최진동 장군을 석방시키면서 일제가 체포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신변을 보호해 주었다. 실제로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에 복무할 때 동북 군벌 장작림의 목숨을 몇 차례 구해준 적도 있었다.

    보훈처가 제시한 1926년 귀순과 이후 귀순 선무반 활동 역시 근거가 매우 미약한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귀순 선무반 활동은 최진동 장군이 일제 헌병대의 고문 후유증으로 와병 상태일 때 일제가 일방적으로 내건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반민특위 재판(1949)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아나키스트 항일독립투사 이정규의 증인신문에서도 명백히 입증된 사실이다. 일제가 일방적으로 귀순 선무반 간판을 내건 지 5개월 뒤 최진동 장군은 운명하기 때문이다. 운명 직전 최진동 장군은 둘째 아들 최국량과 가족을 앉혀 놓고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 쏘독 전쟁이 이미 폭발했고 일본도 이 전쟁에 말려들 것이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죽은 후 봉오동 어귀 선산에 묻어, 죽어서라도 부모님과 함께 있게 해다오."- 김춘선 외(2006). 『최진동 장군』. 흑룡강 조선 민족출판사. 254쪽.

    독립투사다운 비장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보훈처는 2008년 항일독립지사 최문무를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했다. 그러나 최문무는 최운산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은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최운산 장군의 본명은 최명길이고 최운산, 최고려, 최빈, 최풍, 최복, 최만익, 최문무 등 8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최진동 장군은 중국말에 능통했지만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은 문무를 겸비하였기에 항상 친형인 최진동 장군을 앞세웠고 자신은 최진동 장군을 돕는 위치에 섰다. 당시 동북만주 일대에서 최진동 장군은 카리스마를 간직한 항일독립투사로 기억되는 배경엔 최운산 장군의 지대한 공헌과 숨은 조력이 있었다.

    2008년 최문무 서훈 문제에 대해 최운산 장군 후손들이 보훈처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전문연구자에 의한 연구를 진행하거나 추후 심도 있게 재심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냥 동일 인물임에도 최운산과 최문무 모두에게 이중으로 서훈을 추서하는 등 이중 서훈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보훈처 심사위원 가운데엔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도 없을 뿐더러 최진동-최운산 장군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 부박한 연구가 어설픈 ‘친일’ 자료를 앞세워 최진동 장군 서훈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보훈처 심사위는 전봉준 장군, 최시형 선생을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추서하지 않고 있다. 관련 학자들이 제2차 동학농민혁명(1894) 서류를 제출하고 서훈 추서를 요구하였음에도 “독립운동 성격이 불분명하다”는 황당한 답변만 돌아왔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것에 격분하여 촉발된 제2차 동학농민혁명(1894)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항일구국투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미 40년 전부터 독립운동사학계 내 일치된 학설로 정립된 내용이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1894. 3)이 부패한 관료와 봉건 질서에 저항한 반봉건 운동이었다면 제2차 동학농민혁명(1894. 9)은 일본군을 경복궁에서 몰아내려는 데서 촉발된 반외세 반제국주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실제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였던 공주 우금치 전투에 손병희, 최시형, 전봉준 장군이 참전한다.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교도(천도교인)는 우금치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에 전멸당하다시피 쓰러졌다. 그리고 일본군은 경상, 전라, 충청 3남 지방을 돌면서 농민군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연구자에 따라 다르지만 20만 명이 일본군에 학살되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이듬해 을미의병(1895)과 을사의병(1905), 그리고 정미의병(1907)에 참여했다. 그리고 1909년 일제가 자행한 남한 대토벌을 피해 북간도와 러시아령으로 독립운동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3‧1독립만세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도교는 15명이 참여했다. 그들 15명 가운데 9명이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다. 동학농민혁명(1894)에서 3‧1운동(1919)까지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손병희 선생은 그중에서도 민족대표 제1인자였다.

    문제는 친일식민사학자이자 1세대 역사학자인 이병도와 신석호가 주도하여 만든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에는 독립운동의 기점을 을미의병(1895)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된 지 75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친일식민사학자의 영향력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앞에 깊은 분노와 함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루빨리 낡은 기준을 수정하여 제대로 된 보훈정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보훈’(報勳)은 국가사회에 공적을 쌓거나 공동체의 공동선에 기여한 사람들을 ‘기리고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보훈’(報勳)의 이치는 ‘희생과 헌신에 대한 보답’이고 ‘보훈’(報勳) 심사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공정’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해 보훈처의 보훈 심사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되는 해에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인 <대한 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린 것은 백번 양보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100주년을 맞아 그 공훈을 기리지는 못할망정 서훈 박탈을 시도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보훈행정이 아닐 수 없다. 보훈처에서 내린 최진동 장군 서훈 취소 결정에 대해 하루빨리 취소 결정을 철회하고 낡은 규정을 정비해 전봉준 장군, 최시형 선생 등이 하루속히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추서되길 고대한다.

    영화 봉오동전투의 한 장면. 박스 안은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오른쪽). [반병률 교수 제공]

    필자소개
    학교시민교육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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