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나라들로부터 배우는 세계관
    [책소개] 『늠름한 소국』 (이토 치히로/ 나름북스)
        2020년 11월 28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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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 시대임에도 코스타리카, 쿠바, 우즈베키스탄, 미얀마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있지만, 정보도 제한적이다. 미디어에는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거나 이른바 ‘대국’인 나라들의 사정이 주로 등장한다. 아사히신문 특파원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전후의 일본이 줄곧 대국을 의식하며 대국을 지향해 왔지만, 세계에서 대국의 존재감은 점차 엷어진다고 말한다. 지금껏 다른 나라를 우격다짐으로 굴복시킨 업보를 테러와 난민 유입이라는 형태로 돌려받으며, 미국도 유럽도 빗장을 걸어 잠그는 데 열심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잃고 폐쇄적으로 되어 가위눌리는 것이 오늘날 선진국의 모습이라는 주장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를 취재한 저자에게 독자적이고 모범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며 특별히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코스타리카, 쿠바, 우즈베키스탄, 미얀마였다. 강대국의 개입과 횡포로 오랜 세월 경제적 곤경을 겪었지만, 민중의 힘으로 의연하게 자립해 나름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나라들이다. 경제대국을 꿈꾸다 군사대국으로 회귀하려는 일본이나, 불황이 장기화하고 일자리는 불안정하며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이나 행복도가 세계 최하위 수준인 것은 비슷하다. 세계가 글로벌리즘 풍조에 내몰려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시대에서 다소 곤궁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국민들에게서 진정한 대국의 늠름함을 느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권과 평화, 환경에서 중남미의 선진국,
    군대를 버린 나라 코스타리카

    중남미에서 가장 평화롭고 민주적인 나라로 알려진 코스타리카는 인권과 환경 분야에서 특히 돋보인다. 트럼프 정권이 국경에 벽을 쌓고 유럽에서 난민에 빗장을 채울 때 코스타리카는 난민을 모두 받아들여 무상 교육과 의료를 제공했다. 3년 거주 후에는 국적을 부여해 인구가 4천만 명에서 5천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에코투어의 발상지로서 환경문제 선진국이기도 하다. 국토의 4분의 1이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이며 세계 모든 생물종의 6%가 코스타리카에 서식한다. 자연에너지가 99%를 차지하고, 원전을 건설할 계획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없다고 정부는 단언한다. 2014년 151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코스타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혔고 현재까지 늘 상위권의 행복도를 유지한다.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가려 하는 일본과 비교할 때 1949년에 이미 군대를 완전히 없앤 코스타리카는 저자에게 의미하는 바가 컸다. 일본은 전쟁에서 져 평화헌법을 만들었지만, 코스타리카는 자발적으로 평화헌법을 제정했고 정말로 군대를 없앴다. 주변 중남미 국가들이 내전에 시달릴 때도 평화를 유지했으며, 주변 나라들의 내전 종식에 힘써 1987년에는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병사의 수만큼 교사를 만들자, 병영은 박물관으로 만들자는 슬로건에 따라 국방비는 교육비가 되었고 국가 예산의 무려 30%가 교육비로 쓰이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모의 대통령 선거가 활발하고, 초등학생도 위헌소송을 할 정도로 민주주의 체감도가 높다.

    미국과 국교를 회복한 쿠바,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도 약자를 구한다는 원칙

    쿠바는 1959년 혁명 이후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중남미에서 일관되게 자립을 유지해 왔다. 초강대국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했으나 단절했던 미국과의 국교를 2015년 7월 회복하면서 변화의 바람도 있다. 2016년에 쿠바를 방문한 관광객이 400만 명을 넘어섰고 숙박과 교통, 시설 개선이 빠르게 이뤄졌다. 관광회사와 레스토랑은 늘고 범죄는 줄었지만, 저자가 만난 쿠바인들의 심경은 복잡했다. 미국이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멈추고 대등한 관계가 될 때야말로 진정한 교류가 시작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맥도날드가 쿠바에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이고 “쿠바 국민에게 국교 회복은 마이너스 효과뿐”이라는 쿠바인의 지적도 등장한다.

    이제는 관광의 상징이 된 체 게바라의 궤적을 따라 저자는 게릴라전 사령관이던 페르난데스를 직접 만나 증언을 듣는다. 강한 신념의 전사 체 게바라는 뜻밖에 실용적이고 유연했다. 전투 중에도 학습했고, 혁명 성공 후에도 경영시스템을 공부했다. “기술에 이데올로기는 없다”고 자주 말했으며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쿠바는 이제 유기농업과 무상 교육, 무상 의료를 세계에 자랑한다.

    미국이나 일본 언론은 종종 카스트로를 독재자라 칭하며 쿠바를 암흑사회라 부르지만, 실제로 쿠바를 방문하면 전혀 다른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 쿠바를 여행한 사람 대다수가 ‘밝은 사회’에 놀라며 호의적이 된다. 미국의 공세와 경제적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저자가 본 쿠바에는 대국을 이용하는 만만치 않은 전략이 있었다. 쿠바는 확고한 삶의 방식을 관철하고, 시대에 맞는 기술과 자격을 몸에 익혀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글로벌리즘이 확산되는 지금 세계 많은 나라가 약자를 내동댕이치고 사회적 격차를 확대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채용한다. 한편 쿠바는 완전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포기하면서도 약자를 구하기 위한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유일하게 구소련을 뛰어넘은 진전
    실크로드 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오늘을 엿보다

    우즈베키스탄은 유럽과 중동의 문화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들어온 길인 실크로드에 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사마르칸트를 누비며 고대 이슬람 문화부터 페르시아, 당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달된 문화의 자취를 찾는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돌연 독립한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의 진전은 뚜렷하다. 독립 이후 종교가 자유화되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와는 뚜렷하게 대립한다. 사회 분위기는 개방적이고 친근하며 치안이 좋아 우즈베키스탄 여행 안내서에 13페이지에 걸쳐 적힌 안전 관련 주의사항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십수 년 전의 테러 이후 위험을 실감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대처한 결과다.

    2016년에는 26년간 정권을 장악했던 카리모프 대통령이 사망했다. 사회주의공화국 시절부터 대통령이었고 정적 숙청과 강권체제 등 감시사회였던 걸로 알려졌으나 국민의 인식은 조금 달랐다. 다민족을 규합할 리더가 필요했고 독립 이후 터키와 한국 기업의 강탈 경제를 극복하고 경제 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국내총생산이 매년 7~8% 성장했고 빈곤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러시아 미디어 <스푸트니크>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보다 소련 시대가 좋았다”고 답한 구소련제국 국민의 비율은 절반이 넘고 카자흐스탄의 경우 61%나 되지만, 우즈베키스탄은 단 4%만이 소련 시절이 좋다고 답했다. 민주주의의 성장엔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유일하게 경제적 곤경을 뛰어넘는 데 성공한 우즈베키스탄 국민은 카리모프가 세계에서 독재자로 불리는 것이 미군 기지를 철수시킨 데 대한 미국의 흑색선전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미얀마의 변화는 이제부터
    역동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아시아의 이웃 나라인데도 미얀마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오랜 군사 독재 기간 동안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탓도 있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온건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지만, 공산당 무장봉기, 소수민족 반란, 중국의 국민당 군대 침입 등 내전과 혼란을 겪다가 1962년 네 윈이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미얀마가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건 네 윈 정권의 극단적 지배와 통제 이후였다. 군사 정권이 국명도 ‘미얀마’로 바꿨다. 1988년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미얀마 국민이 벌인 총파업에 아웅산 수치가 등장하며 변화가 시작된 것은 유명하다.

    민족의 영웅 아웅산의 딸인 수치는 일약 민주화의 상징이 되어 국민민주연맹(NLD) 서기장이 되었고 군사정권이 이를 탄압했지만, 국제 사회의 관심에 힘입어 1991년에 노벨상을 받는다. 그리고 2016년에 NLD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쿠데타로 닫혔던 문을 54년 만에 열었다. 군부 세력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정권 교체를 맞은 미얀마에서 저자는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저널리스트협회와 새 정권이 된 NLD본부를 찾아 변화의 기대에 들뜬 미얀마 사람들을 만났다. ‘행복’을 의미하는 ‘밍글라바’가 인사말인 미얀마에서 국민은 불교국가의 평온함을 유지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설레고 있다. 135개나 되는 소수민족 문제나 경제, 정치 분야에서 해결할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NLD의 결의는 확고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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