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연대,
    페미니즘-생태주의-노동운동-사회주의
    “녹색전환과 민주주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②
        2020년 11월 17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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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전환과 민주주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①

    ‘경제학적 논리’라는 이데올로기

    물질성을 가지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일상에서 재생산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기제가 시장이다. 시장을 통해 경쟁의 원리, 이윤추구의 원리가 수행되고 몸에 각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과 이윤추구의 원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과학적 정당화는 ‘경제학적 논리’에 의해 수행된다. 이기적 개인들의 사적 이익추구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토대 위에 만들어진 경제학적 원리는 사람들의 필요(needs) 충족과 삶의 질, 그리고 생태적 지속가능성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는 이윤동기에 의해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몰아붙인다.(10)

    그리고 이렇게 현실을 왜곡하는 경제학적 논리에 기대어 이익을 독점하는 집단들은 절대다수의 필요가 표현되고 주장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는 형식적인 ‘대의’로 정치를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강화한다. 대의민주주의를 벗어나는 정치적 행위는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자기 검열되고 경제학적 논리를 넘어 필요충족에 호소하는 행위는 시장의 질서를 부정하는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으로 공격받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리와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틀 지워진 질서는 단순한 장치들(apparatuses)에 멈추지 않고 그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퍼트린다. ‘옳은 것’과 ‘그른 것’ 뿐만 아니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는 기준을 만들어 내고 이러한 기준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자기검열하고 규제하게 한다.

    경제학적 논리를 비판하고 넘어서는 것은 ‘경제’의 의미 또는 ‘경제’의 원리를 재정의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경제학적 논리가 드러나는 방식은 기획재정부가 설정하고 경제학의 ‘관념적’ 지식으로 무장한(스스로는 완벽에 가까운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에게 의해 재생산되는 정책결정을 통해서다. 이러한 ‘허구적’ 관념에는 ‘인간’과 ‘자연’이 빠져 있다. ‘사회’(실재)로부터 분리된 경제학은 이기적 원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의해 극대화된 효용, 그리고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에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경쟁과 그러한 경쟁이 촉진하는 기술적 진보를 ‘측정’하는 도구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구들로 측정된 데이터의 해석을 실재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바꿔치기 한다.

    기획재정부의 경제학적 논리는 산업통상자원부와 국토해양부가 인간과 자연을 훼손하면서 숫자로만 표현된 양적 성장에 집착하는 것을 정당화해준다. 정책결정의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인간의 가치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라고 간주되는 협소한 경제학적 원리이며 그 기준을 강화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수단화하고 착취하는 개발(development)이다. 다양성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공존하기 어려운 시장주의적 일원론(monism)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적 논리의 관념적(허구적) 기초는 세 가지다.

    첫째,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관계가 초역사적이라고 가정한다. 둘째, 인간본성은 이기적, 계산적, 원자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산의 조건인 자연은 무상으로 주어진다고 가정한다. 이 마지막 가정은 외부성(externalities)이라는 이름을 달고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한다. 자연은 오직 가격이 부여될 때에만 합리적 계산의 범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자연의 한계를 고려한다고 하면서도 자연자본(natural capital) 개념에 의존하는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환경경제학(ecological economics)이 제시한 길이기도 하다.

    세 가지 허구적 가정 위에 두 가지의 원리가 도출된다.

    첫째, 개인 행위자는 ‘언제나’ 주관적으로 정의된 효용을 최적화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시장과 국가는 이러한 개인들의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자율적인 선택들의 합으로 만들어진 ‘결과’일 뿐이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말했듯이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고립된 원자로서의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은 시장을 통해 최적화되기 때문에 시장행위는 균형을 이룬다는 일반 균형(general equilibrium)이론이 따라 나온다.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시장경제에서 균형이 깨지는 것은 일시적인 적응과정일 뿐이기에 ‘위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위기는 ‘이론적으로’ 부정된다. 경제학은 현실을 설명하려하지 않고 현실을 스스로가 제시한 이론에 맞추어 왜곡하여 ‘구성한다.’

    하지만 경제학적 논리의 자율적 인간은, 그 토대가 허구적이기 때문에 관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율은 시•공간적, 역사적으로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이 주는 구조적 효과 안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자율이 구조의 효과(구조의 효과는 이미 고립된 원자로서의 행위자를 부정한다)를 전제로 한 행위자의 해석과 개입, 그리고 실천이라면 경제학적 논리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진다.

    첫째, 경제학적 논리는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착취를 부정하거나 은폐한다. 부정과 은폐의 궁극적 목표는 정당화(justification)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기댄다면 노동가치론에서 도출되는 잉여가치법칙을 볼 수 없게 한다. 경제학적 논리의 눈에는 오직 가격과 이윤만이 보일 뿐이고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요소(factor)를 생산과정에 투입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개인으로만 존재한다. 오직 가격으로 표현된 효용함수와 생산함수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과정에 내재한 계급적 적대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대립과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적대적 태도를 계급투쟁 말고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둘째, 균형과 최적의 허구적 가정은 체계의 모순과 그 모순이 발현되는 위기를 설명할 수 없다. 위기는 고작해야 균형을 찾아가는 적응기로만 인식될 뿐이다. 2008년 이후 지속되는 지구적 차원의 경제위기, 그리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의 효과로 ‘이미 예정된’ 경제위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부적으로 누적된 모순을 예기치 못한 외생적 변수 탓으로 돌리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대단히 낯선 사회적 조건에 진입하고 있기에 이러한 낡은 인식으로는 위기에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모순과 위기의 부정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설명할 수 없기에 제대로 된 문제해결을 방해한다. 위기와 모순을 부정하기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 최소한 개혁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봉쇄한다. 경제학적 논리가 알고 있는 변화는 다윈 진화론의 ‘왜곡된’ 해석에 근거한 점진적 ‘적응’(adaptation)일 뿐이다. 위기는 순간적인 불균형이고 사회는 (고립된 원자들의 선택들의 결과로서만 존재하지 때문에 ‘사회’는 주류경제학에서 적절한 이론적 위치를 갖지 못하지만) 그러한 불균형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진화할 뿐이다.

    사실 이러한 설명은 다윈 진화론의 왜곡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우발적인 비약(contingent leaping)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발성과 비약이 진화의 핵심이다. 특정한 역사적 단계의 사회적 형태의 기원 자체가 우발적이며, 발전과정 또한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요인들에 의해 과잉결정(over-determined)된다. 따라서 기원과 발전과정 자체가 우발적이다. 결과적으로 모순이 해결되는 방향, 미래의 발전 방향도 다양한 요인들의 효과 아래 있기에 비결정적(undetermined)이라는 점에서 우발적이다.

    인류의 역사는 정해진 조건 속에서 거기에 맞춰 행위하며 적응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얽혀 있는 집합적 행동들 사이의 투쟁의 효과로 만들어져 왔다.(11) 이것이 다윈이 말하고 싶었던 ‘적응’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한 비약을 가리키는 자연의 경고, 그리고 이미 공진화(co-evolution)의 과정을 통해 이것과 뗄 수 없게 된 인간사회의 위기를 협소하고 오만한 근대적 과학으로 부정하는 현재의 인류는 스스로의 얄팍한 지식이 허용한 ‘적응적 향상’의 테두리 안에서만 사태를 인식함으로써 공멸의 길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신고전파경제학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존재, 사회적 유대가 필요한 존재,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존재, 실존적으로 자긍심이 필요한 존재인 인간을 이기적인 경쟁기계로 환원하기 때문에 기본적 필요(basic needs), 인간적 필요(human needs), 사회적 필요(social needs)를 인식할 수도, 정의할 수도, 이론화할 수도 없다. 경제학에서 인간본성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따른 인간 역량(capacities)의 역사적 발전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지성의 개선’과 ‘의식의 성장’은 불가능하다. 한편으로 이미 인간의 지성은 최고의 단계에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지적 능력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정치와 정책 결정은 엘리트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경제학적 논리 앞에 근대적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은 불가능한 이상으로 항상 유예된다.

    넷째,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인 경쟁기계로 고정시키는 것의 당연한 결과는 자연적 한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공존과 연속성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 한계에 대한 인식이 맬서스처럼 절대적인 자연의 한계로 해석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사회의 변화 가능성, 구조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얻어질 인간역량의 성장을 알지 못한다. 맬서스는 인간이 자연적 존재로 자연의 한계 안에서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인간 역량의 발전에는 넘지 못할 한계가 있다는 존재론적인 자연주의에서 멈추지 않고 존재하는 사회질서를 옹호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인식적 보수주의를 주장했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고 비인간-동물종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연속성), 인간만의 독특한 역량, 즉 역사적으로 자연생태계 안의 인간적 삶의 양식을 발전시켜 왔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위기를 넘어서는 것은 인간의 새로운 역사적 역량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 성공여부를 미리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진화의 우발성은 정치를 함축하며, 정치는 단선적 진화(linear evolution)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다섯째, 경제학적 논리는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의 문제를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경제학비판(또는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도 ‘생산적’ 노동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에 한정함으로써 돌봄과 가사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격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물론 신고전파의 무지막지한 환원론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비판이 사회적 재생산노동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기준은 노동가치론이 지배하는, 즉 착취법칙이 관철되는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적 도구일 뿐이고, 여기에 저항하는 사회적 실천에서 사회적 재생산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 메리 멜러(Mary Mellor) 등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이러한 입장과 공명한다.(12)

    경제학적 논리의 협소한 이론적 토대를 비판하는 것은 현재의 지배적 질서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운동이며 이는 곧 인간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시대 역사적으로 요청되는 인간의 역량은 자본주의 아래 정의된 ‘생산적인’ 것의 기준을 변화시켜 이윤이 아닌 사회적 필요충족에 맞추어져야 한다.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도 정작 사회적 필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재의 사회체계를 보다 효율이 높은 체계로 이행시켜야 하는 것이다. 에너지 소비가 적은 체계는 곧 끝없는 경쟁, 경쟁의 결과인 확대재생산, 확대재생산의 수단인 이윤추구가 불러오는 낭비가 종식되는 세계일 것이다. 당연히 필요충족을 토대로 한 재생산중심의 경제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로의 이행은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노동패턴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노동과 여가의 시간배분이 달라질 것이며, 일자리의 종류도 변화될 것이다. 경제학적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는 IT와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사라질 일자리에 대해서만 걱정할 뿐, 그러한 기술적 진보를 이용한 삶의 방식과 노동패턴의 변화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않는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의 이데올로기적 자기검열만 넘어서면 충분히 도달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가야만 하는 목적지임에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한계는 현실의 정책결정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학적 논리가 왜 삶과 유리되어 실재와는 무관한 ‘논리를 위한 논리’,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전락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논리를 위한 논리’와 ‘이론을 위한 이론’이 단순히 관념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실재를 왜곡하여 표상하는 경제학적 논리는 궁극적으로 실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고 그럼으로써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기 때문이다.

    5. 민주주의의 무력화

    형식적로나마 존재했던 대의정치제도의 효과는 ‘무(無)’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수동적’ 정치행위자인 유권자로 남아 있도록 하는 정치적 기제와 그것에 동반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여전히 강력하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견해 차이는 거의 소멸하고 우경화된 위치에서 수렴하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한동안 상대적으로 정치적 통제 아래 있었던 자본의 힘은 자립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주류경제학이 사회과학을 집어삼켜 식민화하는 것과 나란히 정치와 사회, 문화는 온통 경제적 논리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은 ‘보험’으로 대비되어야 하며 주택, 자동차에서 휴대전화까지 모든 상품은 금융적 투자의 대상이거나 할부라는 이름의 부채와 관련된다. 장례문화마저도 금융상품이 되어버렸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불충분한 소득이 소비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신용’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부채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엘리트는 거대자본(특히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정치가 자본의 힘에 지배되고 최소한의 ‘대의’ 조차도 막아 버리는 퇴행이 생겨나는 데서 진보정치세력과 시민사회운동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정치세력과 시민사회운동은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근대적 한계(개발주의와 전문가(엘리트)주의)와 후기근대적 모순(소비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여기에 여전히 남아 있는 연줄망과 권위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전근대적 잔재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에 편승했다. 정당정치가 우경화된 시장주의에 수렴되는 것은 계급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고 노골화되는 것의 이면이었지만 진보세력과 시민운동은 ‘계급’정치를 포기하고 시장맹신주의를 포스트모던 정체성의 정치로 정당화했다.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질지 미처 깨닫지 못하면서 진보정치세력과 시민사회운동은 자신들의 열망하는 사회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정치적 현실, 제도적 현실을 수용한다. 이념적으로는 급진적이지만 실제의 정치적 행위는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이념적 급진성도 약해진다. 기득권 세력이 권력의 자기장 안의 귀퉁이에 허용한 ‘달콤한’ 역할에 중독되어 버린다.(13)

    이러한 경향은 종종 지역정치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났다.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진보세력과 시민사회운동도 지역공동체의 연줄망의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그들은 현재의 상태가 가지는 결함을 비판하고 그것의 대안을 모색하며,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 넓은 정치, 시민의 정치를 기획하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 ‘비효율’을 선택하기보다는 지역의 개발동맹의 이익독점이 드러나는 개별적 정치 사안에 대해 ‘반대’하는 캠페인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효율적’인 선택이다. 선택과 집중은 비판과 대안이 없는 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개별 사안마다에서 보여주는 전투성은 ‘운동 산업’(movements industry)의 효과적인 수단이다. 개별 사안이 어떤 경제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지, 그것이 드러내고 있는 모순이 무엇인지, 그래서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복잡한 비판적 분석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대단히 두텁고 다층적이며, 때로는 분열적이기까지 한 보통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분석하고 정치화하는 작업도 불필요하다. 결국 진보세력과 시민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의 시장주의에 편승했을 뿐만 아니라 협소하게 정의된 낡은 정치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 정도의 역할은 기득권세력에게도 필요하다. 협소한 정치의 제한된 민주주의는 ‘비판의 목소리’도 듣고 있다는 정당화의 기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고 계급정치를 ‘포기’하게 되면 결국 주기적인 선거정치에 붙들리게 된다. 그런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거정치는 마케팅과 광고로 전락했다. 탈정치화(depoliticisation) 또는 탈정치(post-political)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혹자는 탈민주적(post-democracy)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치는 민의를 대변하기 보다는 돈에 의해 거래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진실 또는 진심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성(authenticity)은 사라지고 탈진실(post-truth)의 시대가 도래 한다.

    그런데 ‘탈진실적 탈정치’는 정치가 정치인 개인으로 더욱 협소해지는 효과를 가진다. 현실에 대한 한탄과 비난은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짜증나지만 피할 수 없는, 또는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고 불만은 구조와 제도가 아닌 개인으로 향한다. 탈민주적, 탈진실적 탈정치 시대에 어울리는 소비주의적 정치를 목격하게 된다. 상품시장에서 소비자는 구매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매자에게 불만을 표시한다. 대안적 선택은 다른 상품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비자 민주주의의 실체다.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란 이런 상품교체 요구와 다르지 않다. 노무현을 이명박으로, 이명박을 박근혜로, 그리고 박근혜를 문재인으로. 광장의 촛불이 표현한 ‘다른 사회에 대한 열망’은 대통령을 교체하는 것에서 끝나 버렸다. 대단히 요란하고 소란스러운 지배적 정당들 사이의 과잉된 싸움에 현혹되어 ‘문재인 정부’를 지키고 ‘조국’을 수호하는 것이 대단한 정치행위인 것처럼 오인하기도 한다. 결국 거리와 광장에 결집된 에너지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한다.(14)

    다양한 쟁점과 현안이 제기되고 대중의 불만이 쌓이지만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는 이러한 쟁점과 현안, 불만을 잠재우고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로 수렴되면서 정치를 텅 빈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치정당 사이의 이념적, 또는 정책적 대결이 약화되고 모든 정치세력이 시장 친화적으로 우경화되고 있는 경향에 갈수록 강력해지는 미디어의 힘이 더해지면서 선거정치는 마케팅과 다름없어졌다. 현실의 갈등을 정치의 장에서 해결한다는 정당정치의 의미는 거의 실종되어버렸다.

    6. 탈자본주의로서의 녹색전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러했듯이 위기는 기존 사회의 한계들이 드러나는 계기다. 그리고 위기는 현상적으로 우발적 계기들과 사건들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한 우발성 아래 작동하고 있는 역사적 추세를 읽어내고 한계로 드러나고 있는 기존 사회의 모순을 찾아 그것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사회변화의 방향조차도 우발성에 내맡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경향을 찾으려는 과학적 분석의 노력은 한시도 포기될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는 탈자본주의의 길을 시작하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생태적 위기는 사회전체의 ‘거대한’ 전환 없이는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토론되고 해결되는 과정과 겹쳐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적 재생산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즘운동과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생태운동, 그리고 자본주의적 계급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연대 가능성을 정치적 의제에 올려놓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진부한’ 표현이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로 들린다.(15)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페미니즘-생태주의-노동운동-사회주의의 연대는 생산, 유통, 가치실현, 분배의 모든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할 수 있으며, 사회적 필요에 대응하는 보편적 기본서비스를 실천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무대는 이 모든 쟁점이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장소일 것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함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우울과 불안은 거대한 전환을 향한 운동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자연과학자들의 객관적 데이터가 보여주고 있는 위기의 긴급함은 이러한 불안과 좌절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역사적 성찰과 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아래서는 파국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논증하는 사회과학적 분석은 생태주의-페미니즘-사회주의에 근거한 사회적 투쟁에 정당성을 제공한다. 일상의 체험과 과학적 논증이 ‘멸종-저항’이라는 이름의 청년세대 투쟁과 해우할 때 기후변화운동은 좌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급진적 전환을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마련되었다. 문제는 우리들 대다수가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파국을 목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신자유주의가 뿌려 놓은 이기적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거나, 시장과 국가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무력감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저항할 때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플랫폼c 재인용

    <주석>

    10. 필요충족을 경제발전의 토대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Felix Rauschmayer, Ines Omann and Johannes Frühmann, Sustainable Development: Capabilities, Needs, and Well-being, Routledge, 2011에 실린 논문들을 참고하라.

    11. 다윈과 같은 시기에 진화론을 발전시킨 알프레드 월리스는 사회주의자였다. 다윈 이전의 사회진화론을 제시한 허버트 스펜서의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사회이론은 다윈의 그것과 같지 않다. 다윈주의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서는 Peter Dickens, Social Darwinism, Open University Press, 2000 참고하고, 월리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Ted Benton, Alfred Russel Wallace, Explorer, Evolutionist, Public Intellectual: A Thinker for Our Own Time?, Siri Scientic Press, 2013을 보라.

    12. 낸시 프레이저 외, 『99% 페미니즘 선언』, 움직씨, 2020, Tithi Bhattacharya ed, Social Reproduction Theory : Remapping Class, Recentering Oppression, Pluto Press, 2017, Mary Mellor, Feminism and Ecology, Polity Press, 1997을 참고하라.

    13. 한국 시민운동의 역사와 ‘체제내화’는 보다 면밀한 경험적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필자의한국 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대한 소묘는 ”포퓰리즘의 두 가지 해석-대중영합주의와 민중 민주주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민족문화연구』63호, 2014에 담겨 있다.

    14.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2017년 촛불시위를 해석했다. “변화를 향한 열망, 하지만 여전히 규율되고 있는 의식-2016년 촛불시위에 대한 하나의 해석‘,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연구』14(1), 2017.

    15. 이번 발표에서 ‘새로운 연대’의 정치까지 다루지는 못했다. ‘녹색뉴딜’과 ‘탈성장’으로 표현되고 있는 녹색전환의 구체적 경로와 정치적 실천의 과제는 독립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주제다. 이런 점에서 이 발표문은 ‘미완성’이다.

    필자소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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