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색전환과 민주주의"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①
    [적녹연대]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근원
        2020년 11월 16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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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5.18 40주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논문 형식의 다소 딱딱한 글이지만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2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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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말

    인류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4억5천만 년 전부터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6천6백만 년 전의 마지막 대멸종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인류의 조상이 지구상에 출현했으니 그 때의 일들은 인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때의 대멸종이 포유류에게 진화의 기회를 주어서 오늘날의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으니 어쩌면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인류는 지구생태계를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화산활동, 소행성 충돌, 그리고 그에 따른 급격한 기후변화라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인간의 행위가 생태계 자체를 교란시키고 지구의 행성적 순환을 변경시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전대미문’의 위기다. 만 년 전에 시작된 충적세(holocene)가 인류세(anthropocene)으로 접어들었다는 지질학자들의 경고는 가히 충격적이다.(1)

    충적세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를 명명하는 것은 전문적인 과학의 영역이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현재진행형 논쟁이다. 혹자는 인류세라는 개념 자체가 현재의 생태위기를 인류전체에게로 돌리면서 위기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은폐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구시스템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인류세는 ‘과학’의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는 대중문화현상일 뿐이다. 엄밀한 지층학적 증거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홀로세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확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논쟁은 당분간 대중적 토론과 학술적 논쟁의 주제로 남겨 두자. 우리가 확인할 것은 인류세 논의가 기후위기를 포함한 생태위기가 코로나19로 상징되는 팬데믹의 충격과 겹쳐지면서 우리 삶의 방식, 생산의 방식, 유통의 방식, 소비의 방식, 이동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이 요청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판단과 요청은 이미 젊은 세대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기득권 세력의 안이함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2019년 ‘멸종 저항’(Extinction&Rebellion)으로 드러난 청(소)년 세대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 과학과 지식의 상품화로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객관적 데이터가 말해주는 경고 또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더 이상 대응을 늦출 수 없다는 절박감이 과학계 안에서 팽배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2019년 여름에 출간된 책 On Fire: The (Burning) Case of a Green New Deal에서 기후변화 위기의 원인이자 위기대응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IPPC가 제시하고 파리협정에서 합의한 섭씨1.5도 내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억제하는 목표 달성은 자본주의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이안 앵거스(Ian Angus)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앵거스는 인류세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계의 극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클라인은 이런 조건이 기회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2014년에 출판된 전작 This Changes Everything에서 2008-9년 위기가 가져다준 기회를 ‘날려버린’ 버락 오바마(Barak Obama)를 강도 높게 비판했었다.(2)

    클라인이 제기하는 또 다른 논점은 기후위기는 복합적인 사회, 정치, 경제위기와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혁명적 변화를 동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이미 1997년 교토의정서가 어떻게 유명무실해졌는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본이 제시하는 지구공학과 기술적 돌파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새로운 축적 영역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현실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도 잘 알고 있다. 사회, 정치, 경제의 혁명적 변화 없이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근원

    지구생태계가 지구상에서 진화한 생명체에 의해 위기에 빠졌다는 것도 있어본 적이 없는 현상이지만 인류가 출현하고 ‘문명’을 이룩한 후에 직면한 여러 번의 격변과 비교해도 현재 위기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다. 우선 다섯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 약 500여 년 전에 출현한 자본주의는 매우 압축적이고 급격하게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자본주의는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일상까지 상품과 화폐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도록 추동하는 힘이었다. ‘살아 있는’ 노동의 착취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생산의 계급적 성격에 의해 발생하는 위기와 발작적 진동이라는 구조적 모순은 일단 논외로 하자. 그러한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는 현상적 측면에서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논리에 꿰어 맞추어지면서 자본주의 그 자체가 근본적 위기에 빠졌을 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봉쇄되거나 극히 제한된다는 점이 우리가 처한 딜레마다. 위기는 기껏해야 모순의 폭발을 지연시키는 약간의 양보를 동반하는 임시방편적인 착취메커니즘으로 관리되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된 적이 없었다.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위기를 진단하는 방법은 성장률이고 주가와 환율이다. 숫자로 표현된 성장률과 도박판의 돈 걸기와 다를 것이 없는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 맞추어진 경제정책이 낳은 사회적 파국을 다시 그 낡은 기준으로 진단하겠다는 것이다.(3) 단기적인 시야에서 협소하게 설정된 ‘목표달성’에만 맞추어진 제도적 틀, 특히 개인의 책임성만을 강조하고 공적인 것의 가치를 폄훼하는 제도적 관행이 위기의 원인임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공적인 책임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개인에게 부과된 책임의 무거움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적대로 왜곡될 뿐이다. 그 와중에 사회적 유대는 무너져 내린다.

    둘째, 현재의 위기는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추동한 기술적 진보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제한했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토마스 맬서스(Thomas Malthus)는 보수주의자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당한 것 같았다. 그러나 좁게는 ‘기후변화’의 위기로, 넓게는 ‘인류세’로 표현되고 있는 생태적 위기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인류문명 그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인간 생물종과 자연생태계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 욕구충족의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자연에 대한 태도가 만연한 바로 그때, 인간은 결코 자연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자연의 복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4)

    셋째, 지금의 위기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반성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이윤추구와 경쟁에 던져진 개인들의 업적 성취에 내맡겨져 폭주하고 있는 ‘기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자본주의 아래서 기술의 진보는 계급적이며 그래서 편향적이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경쟁의 결과이며, 살아 있는 노동을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노동과정에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이 위기의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개별 자본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윤을 향해 돌진하는 숙명은 절대적이다.

    공론의 장에서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성격이 논의될 수 있는 통로가 막히고 연구실과 실험실에 갇힌 고립된 연구자들의 경쟁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될 때 과학적 지식은 사유화되고 기술은 폭주한다. 우리는 그런 디스토피아의 입구에 서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라는 테두리 안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한 과학과 기술이 이제 인류생존의 위기를 더욱 추동하는 위기 증폭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5).

    넷째, 지금의 위기는 인간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문제는 미묘하고 복잡하다. 근대문명은 ‘인간의 가치’ 위에 쌓아 올려졌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권’이라고 누구나 인정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민주주의와 더불어 인권은 최상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인권에 토대를 둔 사회가 인간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한다. 종종 인권이 인간의 수단화를 비판하는 강력한 규범적 기준이기는커녕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은 물질주의적으로 정의된 인간의 욕망 충족 앞에 부정되고(근대적 과학기술주의는 인간본성을 극복되어야 대상으로 간주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욕망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고무한다),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문서로 보장된’ 권리들은 그러한 욕망 충족을 위해 필수적인‘양적’ 성장을 위해 ‘언제나, 지속적으로’ 유보된다. 생물학적인 삶의 리듬이 깨어져 노동과 소비의 리듬에 맞추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인은 욕망충족을 위해 ‘자연적’ 존재로서 향유해야 하는 많은 것을 박탈당한다. 인권보장의 전제로 설정된 ‘성장’을 위해 사람들은 최소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성장의 도구’로 닦달 당한다.(6)

    다섯째, 인간이 도구화되고 인권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곧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간의 유대와 연대가 인간 문명의 특징임을 부정하게 만든다. 물질적 만족과 소비주의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원자들은 ‘나’ 이외의 타자를 약육강식의 경쟁상대로만 간주하도록 한다. 인류가 약육강식의 자연의 세계에서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거대 포식자들과의 경쟁에서 진화의 기회를 포착하고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자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협동, 유대, 연대의 관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인간문명의 비밀은 사회적 연대와 유대였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시장맹신주의는 이러한 연대와 유대의 원리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7)

    3. 팬데믹의 시대

    2020년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초래한 위기와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자. 코로나19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계의 현상이며 잘 대처하기만 하면 극복될 수 있는 인류가 경험한 많은 감염병 중 단지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인류가 경험했던 수많은 감염병은 단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으며 각 시대마다 안고 있었던 사회적 모순이 증폭되는 계기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창궐은 자본주의 체계가 축적해온 모순, 특히 지난 4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체계의 모순이 응축되어 드러나고 있는 계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8)

    코로나19는 정부개입의 비효율성과 관료성을 강변해 온 시장맹신주의자들의 주장의 한계, 그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강변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자유주의 시대의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의 민낯을 드러내주고 있다. 위기가 드러나는 계기는 우발적이지만 위기의 근원인 모순은 오랜 시간 축적된다. 물론 위기를 통해 드러난 모순은 압도적인 권력과 동원 가능한 자원을 가진 지배계급에 의해 은폐되거나 또 다른 착취와 지배 기제를 통해 중립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 이후에 찾아올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경제위기가 재난소득 지급과 같은 미봉책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에 대한 모범적인 대응에 뿌듯해 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우발적 계기가 드러내줄 한국사회의 모순에 눈을 감고 또 다시 낡은 기득권 질서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코로나19가 초래한 위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강요된) 길은 두 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위기에 동반된 공포, 그리고 개인에게 주어진 과도한 책임에서 오는 압박을 인종주의적 혐오라는 왜곡된 형태로 해소하려 하거나(결코 해소되지 않지만), 국가라는 공동체의 일사불란한 통제를 받아들이거나. 둘은 동시에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인종주의적 혐오는 이윤을 보장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데는 무능한 체계의 문제를 위기에 더욱 취약한 소수자들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라는 이름의 ‘질서’에 대한 불만을 약화시키고 다시 문제해결의 열쇠를 국가와 자본에게 돌려준다. 효과적인 통제와 배제, 군대의 논리를 닮아 있는 동원, 그리고 국민국가들 사이의 배타적 경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1930년대에 버금가는 것이어서 중요한 전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공항, 호텔, 유원지, 테마파크 등등)가 감염병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소비주의에 의해 지탱되어 온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구적 분업에 의해 구조화된 생산과 소비의 사슬이 받을 충격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길은 하나다. 국가 공적 개입을 확장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2009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갔던 길이다. 도산한 은행을 공적자금(세금)을 쏟아 부어 구제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똑같은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쏟아 부은 공적자금은 곧 정부의 부채였고, 그 부채를 갚기 위해 긴축을 단행함으로써 기본 서비스를 축소하고 삶의 질을 저하시켰기 때문이다. 소위 선진국마저도 팬데믹 위기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적 서비스의 축소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삶의 질과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 소비, 분배의 새로운 체계이다.(9)

    삶의 질을 높이고 이윤이 아닌 필요를 충족하는 생산, 소비, 분배의 새로운 체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위기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맹신하고 있는 일반균형, 한계효용이론, 그리고 균형재정에 집착과 지표로 드러나는 양적 성장이 경제의 목표여야 하는 사람들의 필요충족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경제학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무엇인 유토피아일까? 주관적 만족에 기초한 한계효용이론의 미시적 이론으로부터 나오는 시장의 일반균형이론은 원자로 존재하는 합리적 개인이라는 허구적 토대 위에 세워진 수학적 계산의 유토피아가 아닌가? 현실과 단절된, 철저히 연역적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이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면 무엇인가?

    실업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고통 받는 청년들에게 취업을 위한 경쟁은 고통을 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50-60년대 인플레이션과 균형재정보다는 일자리와 적자재정을 당연하게 여겼던 케인즈주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케인즈가 시장을 신뢰하는 자유주의자였고 최종순간에서는 신고전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을 망해가는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퍼부은 후,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균형재정을 위해 민중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긴축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전근대 시대였다면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다. 대중은 스스로 똑똑해졌다고 믿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부를 도둑질 당하면서 과학과 기술, 생산력과 소비에 현혹되어 계급적 본능,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우리)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몸에 각인된 통치성은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장치 안에 위치하며 그래서 물질성을 갖는다. <계속>

    <각주>

    1. 인류세와 관련된 자연과학적, 사회과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사이먼 L. 루이스,마크 A. 매슬린,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 세종서적, 2020을 보라.

    2. Ian Angus, Facing the Anthropocene: Fossil Capitalism the Crisis of the Earth System, Monthly Review Press, 2016, Naomi Klein, On Fire: The (Burning) Case of a Green New Deal, Simon & Schuster, 2019, Naomi Klein, This Changes Everything: Capitalism vs the Climate, Simon & Schuster, 2015.

    3. 이러한 경제학적인 사고의 지배에 대한 비판은 Ben Fine & Dimitris Milonakis, 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The Shifting Boundaries Between Economics and Other Social Sciences, Rouledge, 2009를 보라.

    4. 자연에 대한 반성적 태도에 대해서는 Ted Benton, Natural Relations: Animal Rights, Human rights and the Environment, Verso, 1993, Kate Soper, What is Nature?, Blackwell, 1995, Peter Dickens, Society & Nature: Changing our Environment, Changing Ourselves, Polity, 2004를 참고할 수 있다.

    5. 이러한 비판적 태도가 과학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생태적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서 과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태적 위기를 또 다른 이윤창출의 통로로 생각하거나 지구 공학적 기술로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과학은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6. 인권이 경제정책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Radhika Balakrishnan, James Heintz and Diane Elson, Rethinking Economic Policy for Social Justice: The Radical Potential of Human Rights, Rouledge, 2016을 참고하고, 경제학적 논리를 넘어서는 사회발전에 대해서는 Hartmut Rosa and Christoph Henning eds, The Good Life beyond Growth, Routledge, 2018에 실린 논문들을 참고하라.

    7. 이러한 현실은 다양한 전통의 현대철학자들의 고민거리다. 예를 들어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이학사, 2019, 악셀 호네트,『물화-인정이론적 탐구』나남, 2015를 보라.

    8. 코로나바이러스가 드러낸 자본주의의 민낯에서 대해서는 Mike Davis, The Monster Enters, OR Books, 2020을 보라.

    9. 2008-9년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최근의 분석은 데이비드 하비,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 창작과 비평, 2019를 참고할 수 있다. 단 하비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가치론의 재해석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필자소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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