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인문학상 유감
    문단의 역사정의를 기대
    [기고] 스스로 폐지하기를 권고한다
        2020년 11월 16일 10: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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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은 한국근대문학의 형식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작가이다. 1919년 도쿄 유학생 시절 자비로 출간한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지난해 2019년은 한국근대문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다. 김동인의 『창조』을 기점으로 『폐허』, 『백조』, 『조선문단』 등 한국사회에 문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이인직의 신소설이나 이광수의 계몽주의 소설처럼 교훈적이고 계몽적 성격의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동인은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글쓰기를 싫어했다. 아예 소설의 본령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김동인의 『창조』 창간호에 발표한 「약한 자의 슬픔」은 그런 부류의 소설과 성격을 달리했다. 먼저 김동인은 과거형 어법의 사용과 구어체 형식, 그리고 3인칭 ‘그’의 사용 등 근대문학의 형식을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어떤 문학평론가는 최초의 근대소설로 회자되는 이광수의 『무정』(1917)에서 이미 그런 표현들이 앞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김동인의 순문예동인지 『창조』의 창간과 자연주의 문예사조를 비롯해 근대문학의 형식을 선구적으로 열어젖힌 업적에 대해서 한국문단사는 이견이 없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일본 유학 시절 김동인이 근대소설 작법을 연구한 것이나 서구 근대소설과 일본 근대소설을 열정적으로 탐독하고 연구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학구적 노력의 결실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인지 김동인은 소설가로서 자부심이 고고할 정도로 뛰어났다. 어떤 문인이나 문학평론가들은 그런 김동인의 태도를 보고 오만한 풍경으로 묘사하곤 했다. 실제로 김동인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호승심이랄까 경쟁심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다. 『창조』 창간 동인인 주요한과 동갑내기임에도 더 나이가 많은 양, 행세한 일화도 그런 성격 탓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광수 작품을 비평하면서 당대 작가 이광수를 논하고 1920년대 초 지면을 통해 염상섭과 문학비평논쟁을 벌인 일은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1920년 『현대』 에 실린 김환의 소설 「自然의 自覺」에 대해 염상섭과 벌인 논쟁은 대표적이다.

    김동인은 평양 시내 대단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동인 문학을 연구한 문예비평가 늘샘 김상천에 따르면 김동인은 평양 시내 내로라하는 부유한 집안의 귀공자였다. 기독교 장로였던 부친이 1917년 별세하자 차남 김동인은 쌀 3천석에 해당하는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19살 나이에 한국 근대문학을 열어젖힌 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발간한 것이다. 김동인은 14세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시절 김동인은 톨스토이, 뚜르게네프, 도스트예프스키를 비롯해 서양 작가와 일본 근대작가의 작품들을 섭렵해 나갔다.

    19살 그 젊은 나이에 문예동인지 『창조』를 발간한 사건은 단순히 우연한 객기가 아니었다. 김동인은 근대소설 작법과 근대문학형식에 깊이 천착했고 근대소설에 대해 나름 자신의 견해를 학문적으로 정립했던 인물이었다. 인형조종술이나 일원묘사 등 김동인이 작가로서 작품 속에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모두 탄탄히 다진 학문적 노력의 소산이었다. 자신의 처녀작인 「약한 자의 슬픔」에 대해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작가로서 인형조종술에 기초해 자신의 정신세계에 맞게 결말을 짓지 못한 것을 비판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실제로 김동인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작가는 작품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주도적으로 창조해야 한다고 믿었다.

    100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쓰면서 한국근대 단편소설의 대가로서 그의 자취는 현진건, 이태준에게 이어져 그의 명성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동인에 대한 문단 내외의 비평은 다양하다. 일제 식민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과거사 청산을 요구했던 2000년대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시절, 김동인은 다른 친일 작가 42인과 함께 비판의 대상에 올랐다.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무려 4쪽에 걸쳐 당대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운 과거사가 기술돼 나온다. 이미 1960년대 친일문제를 선구적으로 연구한 임종국 선생에 의해 김동인은 『친일문학론』(1966)에서 자신의 작품과 함께 과거의 오명이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당대의 대문인으로서 김동인의 반민족행위는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1939년 ‘북지황군위문 문단’을 조성해 다른 문인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친일행위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1938. 2. 4)에 일장기를 ‘최고로 자랑스럽고 우수한 국기’로 찬양하는 산문을 기고하는가 하면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미국과 영국에 맞서 “인류 역사를 재건하는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감격과 긴장」. 『매일신보』. 1942. 1. 23.) 심지어 해방되던 날 오전에 김동인은 기존 친일문인단체보다 더 친일적인 문인단체를 만들어보겠노라고 조선총독부 정보과장을 자발적으로 찾아갔던 인물이다.

    반민특위을 비롯해 역사청산이 좌절된 이승만 정권 시절 사상계에서 『동인문학상』을 제정하다 운영난에 처해 중단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일보가 이어받아 1987년부터 『동인문학상』을 시행하고 있다. 문학상을 기념하는 것은 후배 문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하려니와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귀감이 되기 때문에 기리는 행사이다. 그러나 귀감이 되기보다 오히려 드러난 오점으로 인해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작가라면 굳이 문학상을 기릴 이유가 없다. 한국문단사에 춘원 이광수의 업적은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문단에 이광수를 기리는 『춘원문학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미당 서정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앙일보가 2001년 제정해 운영해 오다 뜻있는 작가들과 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미당문학상』은 2019년 폐지되었다.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역사정의를 실현해 가는 모습이자 문학인들 스스로도 자존감을 잃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다.

    조선일보 스스로 『동인문학상』을 ‘한국문단의 노벨상’이라 추어올리며 상금도 5,000만원으로 격상한 적이 있다. 물질이 인간의 영혼을 압도하여 잠식해가는 시대, 인간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문인들을 ‘노벨상’이나 ‘거액의 상금’으로 자극하고 유인할 게 아니다. 전국 판매부수 1위인 조선일보가 ‘1등 디지털 신문’을 구호로만 자처할 게 아니다. 오히려 친일반민족 단체인 「대정친목회」가 조선일보 창간 주체였다는 준엄한 역사적 사실 앞에 조선일보는 ‘1등 신문답게’ 깊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사회적 공기로서 조선일보가 민족 언론을 지향한다면 『동인문학상』을 스스로 폐지해야 한다.

    필자소개
    학교시민교육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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