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동당의 결정 역사가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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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0월 24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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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국과 프랑스가 핵무장을 시작한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1956년 이집트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국유화 선언과 관련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절 이래로 경영권을 주장하던 두 나라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고, 그해 11월 연합군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중동전쟁인데, 그해 11월 UN이 개입하고, 12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수에즈에서 철수하게 된다. 물론 전쟁 이후에 급속하게 경제를 재건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자진해서 수에즈를 이집트에게 넘겨주게 된 배경에는 소련이 모스코바에 있던 두 나라 대사를 불러서 핵폭탄으로 위협을 했던 사건이 숨겨져 있다. 크렘린으로 불려간 프랑스 대사는 난감한 질문을 접하게 된다.

    “상상해보시오, 대사 동무, 파리에 핵폭탄이 떨어지면 얼마나 불행하겠소.”

    이렇게 수에즈에서 철수한 파리와 런던의 정치인들은 냉전 시대의 핵개발 레이스에 불을 당기게 된다.

    2.

    프랑스는 이후 3,000개 이상의 핵폭탄을 개발하고, 1960년 사하라에서 1차 핵실험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후에 장소를 태평양으로 옮겨 170여회의 실험을 하는데, 이중 상당수를 산호초섬인 무로로아 섬에서 실시한다.

    1992년 사회당 출신의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핵실험 중지 선언을 할 때까지 약 35회가 이 작은 섬에서 핵실험이 시행된다. 그야말로 냉전 시대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집권당인 사회당 시절에도 핵실험이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소비에트의 꼭두각시라고 놀림을 받던 프랑스 공산당과 녹색당이 핵실험을 반대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이 원래 핵실험에 대해서 확고한 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골파인 시락에게 내각이 위협받는 동거정부 상태에서 좌파 연정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냉전의 종료와 함께 비로소 프랑스 사회당이 핵실험을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는 핵실험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국민여론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좌파정부로부터 정권을 가져간 시락 대통령은 핵실험을 재개하지만 ‘단 한번’만 해야하는 기술적 문제 때문이라고 상당히 구구하게 핵실험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태평양에서 1회 핵실험을 실시한다. 바로 이 핵실험이 영화 <고질라>의 배경이 되고, 레옹으로 유명해진 장 르노가 니키타를 배출한 바로 그 프랑스 정보국 출신으로 영화 내내 “프랑스가 한 일은 프랑스가 책임진다”면서 총을 들고 얼쩡거리게 된다.

    프랑스 내에서 핵무장과 핵실험은 무척이나 예민한 문제인데, 냉전 시대와 탈냉전 시대에 집권도 해야 하고, 국민들의 정서도 살펴야 하고, 또 좌파가치도 실현해야 하는 몇 가지 제약조건 사이에서 프랑스 정당들이 택했던 입장은 그야말로 현대 정당사의 중요한 연구거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사람들을 만나서 프랑스의 핵무장과 핵실험 때 어떤 입장을 가졌느냐고 얘기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했었다고 대답하고, 그러면서 반드시 하는 얘기가 수에즈 운하 사건이다.

    알제리 독립 때 사르트르가 독립을 지지하고 많은 지식인이 국민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독립을 지지한 것이 사건이 된 것처럼 사실 냉전 시대에 프랑스 좌파에게도 핵무장을 반대하고 핵실험을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정치적 결정이었던 셈이다.

       
     ▲ 냉전시대의 핵지도
     

    3.

    녹색당의 등장은 냉전시기에 불거진 좌파노선들의 위기와 상관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단순히 좌파로 구성된 집권정당이 부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992년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를 이끈 것은 전략 핵무기의 감축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계되어 있는데, 이 때 평화주의라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하나의 축을 형성하게 된다. 80년대 유럽의 좌파정당들 역시 민족주의와 민족생존이라는 담론에서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았고, 이 와중에 별의별 일들이 다 발생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본다면 92년 이후 핵확산을 방지하고, 더 이상 핵무기를 늘리지 않는다는 불안한 균형 위에 세계가 서 있는 셈이다. 대단히 불안한 균형인 셈인데, 큰 눈으로만 보자면 전략핵의 중요성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우주의 무장화’라고 하는 우주 전략 쪽으로 전환하면서 다른 나라의 핵무장을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90년대 이후에 반핵이라는 세계적 흐름은 70~80년대에 걸쳐서 형성된 국제적 조류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좌파담론에 역시 유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금은 평화가 유행인 시절이다.

    4.

    평화를 조건으로 볼 것인가 혹은 목표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정치지형은 변화하게 된다.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녹색당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정치세력들이 국내의 5%에서 8%의 정치 지분을 가지게 되면서 정치담론에 평화가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실제 국민들의 생각도 많이 변하게 된다.

    70년대 영국의 노동당이나 프랑스의 사회당이 핵폭탄과 핵실험에 대해서 강력한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정도로 이 시기에 각 정당들이 실제로 행한 정책들을 보면 그렇게 평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은근히 핵무장으로 인한 국가의 권력과 “좌파가 집권해도 안보에는 문제가 없다”는 담론을 즐기고는 했었다.

    유럽의 80년대와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놓고 기계적으로 비교한다면 “핵무장을 통한 국가 위상의 제고”에 대한 국민들의 ‘평균적 갈망’에서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은근히 많은 국민들은 “차라리 우리도 핵무장을…”, 이 상황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엄연히 군사주의와 민족주의가 패권주의로 향하기 위한 이념적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후대에 평가한다면 노무현 정권이 ‘평화정권’이었다고 할 것인지 아니면 ‘이라크 파병’을 강행한 전쟁 정권이었다고 할지는 약간 애매하기는 하다.

    5.

    생명평화라는 관점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생태적 평화주의’라고 할 수도 있고, 그냥 편하게 표현하면 ‘극렬 평화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국가와 여러 가지 정세적 상황 그리고 현실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평화를 수행한다”는 비대칭적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디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자리를 잡는 이유나, “평화는 용감한 자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이런 극렬 노선을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정치에 던져진 북한 핵이라는 질문은 민감하고도 심각한 질문이기는 한데, ‘극렬 평화주의자’가 아니라면 잘못 대답하면 ‘이중잣대’의 곤란함에 빠지기 쉽다. ‘한반도 비핵화’를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지지할 것인가?

    혹은 민족 팽창주의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거나 대처할 것인가? 그리고 사실상 미국이라는 특수한 지위에 있는 국가에 기꺼이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미국 사회에 편입되는 편을 선호하는 나라에서 어떠한 입장을 가질 것인가?

    6.

    북한이라는 특수한 관계에 있는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상관없이 핵폭탄과 핵무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이 질문 앞에서 민주노동당은 상당히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평화라는 눈에서는 그야말로 그 자체가 목적인 된 ‘절대 평화’를 지지하는데, 그런 이유로 핵발전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확대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대체적인 생태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민감한 문제에 어떠한 원칙으로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앞으로 한국의 진보정치의 향배가 놓여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정으로 가는 과정까지의 논쟁이 더 중요한 시기이고, 교과서에 있는 원칙이 실제로 현실의 원칙이 되는 과정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미테랑의 사회당의 경우 수많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1992년의 일이다. 30년간 프랑스 좌파에게 던져졌던 곤란하고도 어려운 질문이 이제 지금 우리 앞에 만개한 셈이다.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야말로 역사와 미래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눈을 쫑곳이 뜨고 지켜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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