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키아벨리에서 그람시까지,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 기행
    [책소개] 『물속에 쓴 이름들』(손호철/ 이매진)
        2020년 11월 13일 10: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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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부터 그람시까지, 사상의 나라 이탈리아를 가다

    1513년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와 1929년 이탈리아 남부의 투리는 평행 이론으로 이어진다. 두 시공간에는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현대의 군주론>을 쓴 안토니오 그람시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자유를 빼앗긴 몸과 상처 입은 마음이라는 악조건을 사상의 거처로 삼아 자기만의 생각을 벼려낸다. 생가에서 묘지로 나아가며 끊어지고 이어지는 여정은 삶과 죽음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로마 비가톨릭 공동묘지에 자리한 그람시 무덤에 가다가 만난 존 키츠의 묘비에 남은 문구처럼 ‘물속에 쓴 이름’은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시간 속에서 곧 잊힐 테지만, 역사 속 인물들이 피땀으로 써 내려간 사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물속에 쓴 이름들》은 진보적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가 예술과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를 색다르게 다녀온 기록이다. 로마, 투리, 시칠리아, 피렌체, 이몰라, 피사, 빈치, 제노바, 토리노, 사르데냐까지 22일에 걸친 기행에 담긴 이탈리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시대의 제약과 개인적 한계 속에서 자기만의 사상을 펼친 ‘사상의 나라’다. 고문과 유배가 횡행하고 전쟁과 파시즘이 창궐하는 ‘반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 간 ‘시대의 반항아’의 목록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축으로 알리기에리 단테, 갈릴레오 갈릴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주세페 가리발디 등이 이름을 올렸다. 《물속에 쓴 이름들》은 이 ‘시대의 반항아’들이 남긴 흔적을 돌아본 사상 기행인 셈이다. 이제 우리가 팬데믹 시대 ‘지상 여행’의 동반자가 돼 ‘21세기의 군주론’을 쓸 차례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시대의 반항아들을 좇다

    《물속에 쓴 이름들》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500년 넘게 권모술수의 대가이자 군주론자로 오해받는 마키아벨리 이야기(8, 9, 11, 12장)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에 가담한 혐의로 유배를 간 뒤 《군주론》을 써 자기를 쫓아낸 메디치가에 헌정했다. 군주정 때문에 고난을 겪은 공화주의자는 왜 군주를 위해 악명 높은 《군주론》을 쓴 걸까? 피렌체와 이몰라, 피사 등을 돌며 ‘진짜 마키아벨리’를 찾아본다.

    다음은 시민사회와 헤게모니의 이론가이자 《옥중수고》를 쓴 그람시(1, 2, 17~23장)다. 곳곳에서 ‘그람시’라는 이름을 단 길과 건물을 만날 때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라는 현실에 뿌리내린 진보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단어로 다가온다. ‘이탈리아의 호남’인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그람시는 자동차의 도시 토리노에서 활동하다가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지만,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람시가 갇혀 있던 투리 교도소에서 시작해, 대학을 다니고 노동운동을 한 토리노, 의원 활동을 하고 죽음으로 안식을 얻은 로마를 거쳐 추모식이 열린 길라르차까지 그람시의 길을 좇아간다. 허름한 하숙집이 최고급 호텔로 바뀌고 그람시의 후예인 좌파 정당들은 지리멸렬하지만, ‘21세기의 군주’를 찾아 ‘조직화하되 제도화되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데 그람시가 남긴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두 거인의 흔적을 좇다가 마주친 아름다운 풍광과 예술 작품, 사람들을 만난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 이집트 박물관을 가득 채운 식민 시대의 유물, 피렌체 출신인 단테, 피사와 피렌체에서 활동한 갈릴레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인적 인간’이라는 다빈치, 자본주의 패권국에서 태어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 가리발디 등 이탈리아의 과거를 살다 간 사람들과 친절한 민박집 주인부터 그람시 기일을 기념하는 토리노의 ‘적기 부대’(재건공산당 당원)까지 이탈리아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책의 등장인물이다.

    로마에서 길라르차까지, 이탈리아를 보고, 듣고, 먹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탈리아는 예술의 나라이자 미식의 땅이다.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이 반짝이는 북부에서 푸른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 중부를 거쳐 햇살 뜨거운 남부까지, 어느 곳을 가든 맛있는 음식과 유적이 여행자를 반긴다. 괴테와 니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등의 사연이 얽힌 타오르미나, 바닷가에 자리한 ‘작은 다섯 천국’ 친퀘테레, 콜럼버스의 고향이자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패권국인 제노바, 파스타를 처음 만든 시칠리아의 트라비아, 피렌체의 정육 식당에서 원조 티본스테이크, 느끼함의 끝판왕 곱창버거, 그람시 기일에 길라르차에서 대접받은 사르데냐풍 음식은 모두 이탈리아라는 매력적인 단어로 응축된다. 여행하고 사진 찍는 정치학자 손호철은 이 모든 자연과 사람과 문화를 카메라에 담고, 보이는 것 너머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바로 이 책 《물속에 쓴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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