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인물을 통해 본 황혼기의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 왕조의 쓸쓸한 몰락에 대하여
        2020년 11월 10일 10:3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사촌 오빠께

    제가 오빠만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놈을 왜 풀어줬어요? 이젠 안 잡힌 것만 못하게 됐으니 너무 억울해요. 오빠도 제 사정 잘 알잖아요. 종도 없이 생활비는 여기저기 돌려막으며 근근이 살아가는데, 가난한 양반이라고 우릴 무시하면서 욕설과 악행만 일삼는 괘씸한 놈이었다고요. 나도 참다못해 법관인 사촌 오빠만을 믿고 고발한 건데, 진짜 서운하네요. 일이 너무 커지지 않게 알아서 잘 야무지게 처리하시고, 그 놈을 꼭 다시 잡아다가 감옥에 넣어주세요. 귀양을 못 보낸다면 적어도 소작인 노릇은 못하게 해주세요. 제가 너무 보채서 오빠가 괴로운 것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부탁할게요.

    -박영서,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들녘) 중에서

    1882년 의성 김씨가 사촌 오빠인 김흥락(金興洛,1827∼1899)에게 보낸 청탁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의성 김씨는 법관으로 있는 사촌 오빠에게 가난한 양반을 무시하고 능멸한 ‘그놈’에 대해 엄하게 처벌하지 않고 풀어준 것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놈’이 어쩔 수 없이 풀려났더라도, 이 일대에서 소작인 노릇이라도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의성 김씨의 말만 들어서는 ‘그놈’이 가난한 양반을 어떻게 무시하고 능멸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선 후기 이래 흔들리고 있던 양반의 지위를 보여주는 편지임은 분명해 보인다.

    두 달 전에 이런 사회상과 관련된 옛 문서 한 장을 수집하였다. 가로 33cm, 세로 35cm 크기의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인데, 뒷면은 두꺼운 종이로 배접이 된 상태였다. 문서는 ‘을사년 9월’ 작성된 소장(訴狀) 초안으로 실제 올려졌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조선 후기 왕조 쇠락과 함께 동반 추락해갔던 양반의 권위가 잘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장은 남일면에 위치한 상적(上赤), 중적(中赤), 황청(黃淸), 부곡(富谷) 네 마을의 양반들이 작성하여 성주(城主), 즉 군수에게 바친 것이다. 아마 오늘날의 충북 영동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일면’으로 검색해보면 현재 전국의 여러 곳이 검색되지만, 문서 끝에 언급된 4개 마을(상적·중적·황청·부곡)과 ‘남일’을 같이 넣어 검색해보면 충북 영동군에 ‘남일면 황청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마을 이름은 나오지 않아 속단하기는 힘들다.

    소장 초안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이 지역에 이규백(李圭伯)이라는 사람이 땔감 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 이 인물은 잔반(殘班; 몰락양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장의 앞머리에 이규백을 ‘이반규백(李圭伯)’이라고 표현하여 그가 원래 양반 신분이었음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건은 이규백에게 경월리 주막에 살던 최한(崔漢)이라는 인물이 땔감을 외상으로 달라고 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규백은 최한이 이전에 사 갔던 땔나무 값도 아직 갚지 않았기 때문에 외상 거래를 거절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최한은 이규백을 구타하고 옷을 찢고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규백의 땔감까지 불태워 버렸다. 얼마나 심하게 구타했으면 이규백은 이로 인해 거의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최한의 이런 행동이 이번 일 한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장에 따르면 평소에 그는 전직 장교를 지낸 인물이었는데 문맥상 양반계급 아래의 중인계급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한은 관속으로 근무했던 그 위세를 믿고 촌민들을 구타하고 잔반들을 능욕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결국 남일면에 위치한 상적, 중적, 황청, 부곡 네 마을의 양반들은 위중한 이규백이 가까운 친척도 없고, 고아가 된 규백의 어린 아들을 불쌍히 여겨 대신 소장을 썼던 것이다. 그들은 지방관에게 이러한 사정을 자세히 살펴서 최한을 잡아들여 법정에 세워 그 패악에 대해 엄히 처벌하고, 촌민을 멸시했던 그 습관을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소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진] 지방 양반들이 최한의 몰락양반 이규백 폭행사건에 대해 지방관에게 올린 소장이다. 소장의 붉은 테두리 부분에 ‘(최한이) 그 위세에 의지해 촌민들을 구타하고 잔반들을 능욕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이 문서가 작성된 ‘을사년’은 언제였을까?

    이 소장의 전반부에 보이는 국한문 혼용체로 보아 이 문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으로 추정된다. 다른 소장들과 비교해보면 이런 형태의 국한문 혼용의 문서들은 근대 시기에 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1905년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로부터 60년 전인 1845년 철종 때 아니면 120년 전인 1785년 정조 때의 자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다만 지질이나 기타의 조건을 고려했을 때 그 이전인 영조 때까지 올라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확한 시기 추정은 좀 더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구한다.

    어쨌든 조선 후기 이래 양반의 권위가 추락하고, 특히 잔반들의 처지가 일반 농민들과 다를 바 없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전직 장교 최한의 잔반 이규백 폭행사건’은 그 지방 양반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거지 같은 양반이라도 양반은 양반이었고, 그들은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영동군의 양반들은 이 사건을 양반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로 받아들였고, 이 소장을 지방관에게 올려 최한이라는 자를 엄징하여 고을 기강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가 동요하는 상황 속에서도 수백년의 신분제 관념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끈질기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문서 한 장은 조선 후기 이래 흔들려갔던 신분제도와 쇠락해가던 조선왕조의 운명이 겹쳐지던 시기의 사회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었다.

    ‘김영소’와 ‘신상덕’!

    이미 오래 전에 수집·소장하고 있는 자료 속 인물인 그들은 왕조 몰락기 애잔함으로 기억되는 인물들이다. 이규백이 소환한 인물인 김영소와 신상덕.

    그들은 누구인가?

    이 인물들 역시 이규백처럼 신분제가 해체되어가던 왕조의 황혼기 양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시기의 쓸쓸함과 초라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규백만큼이나 짠한 인물들이다. 이제 그들을 한 명씩 만나볼 것이다. 문서로 알 수 있는 사실이 제한적이라 나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들을 그럴듯하게 독자들에게 소개할 것이다. 미리 이해를 구한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김영소와 신상덕 씨에게도 동시에 양해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종이 한 장으로 알 수 있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어찌 대단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확실히 양반 신분인 김영소와 달리, 신상덕은 양반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김영소처럼 신상덕도 양반으로 추정해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양반’을 직업으로 어떻게 표시하면 되오?
    – 무주 양반 김영소, 고민에 빠지다.

    매년 9월 1일은 통계의 날이다. 이 날로 지정된 이유는 한국 근대 통계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호구조사규칙’이 제정된 날이 1896년 9월 1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는 1896년 건양 원년으로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서 집무를 볼 때였다.

    먼저 ‘호구조사규칙’으로 새로운 방식의 호적표가 작성되기 전에 작성하던 호구문서부터 알아보자. 기존의 호구문서에는 문서의 오른쪽 첫 줄에 호구문서를 작성한 날짜와 거주지,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과 호를, 이어서 호주의 이름과 나이, 본관을 적는다. 그리고 호주의 4조(4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적는데 이들의 기재 시 양반의 경우에는 관직을 기재하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경우에는 유학(幼學;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상태의 양반)이나 학생(學生; 유학으로 생을 마친 양반)으로 기재한다. 이어서 동거하는 가족들과 그들의 관직, 이름, 나이, 본관 등을 기재한 후 노비를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소유 노비의 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1896년 9월 ‘호구조사규칙’이 제정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호적이 작성되었다. 먼저 직접 작성하고 확인받던 문서들은 이제는 정부가 새롭게 정한 표 형식의 문서(호적표)에 필요한 내용을 기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기존에는 3년에 한 번 작성하던 호구문서와 달리 매년 1월에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하였다. 하나로 붙어있는 동일한 문서를 두 개를 작성하여 관청에 제출하면, 해당 관청은 사실관계를 검토한 후 관인을 날인한 후에 두 장이 합해진 곳을 분할하여 오른쪽 문서는 해당 관청에서 보존하고, 왼쪽 문서는 해당 호주에게 주었다.

    [사진] 1896년 ‘호구조사규칙’이 공포되기 전후 호적 문서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두 자료 모두 강원도 강릉의 유영(柳映)이라는 인물의 호적자료인데, 왼쪽은 1894년 구제도 하에서 작성된 호구단자이고, 오른쪽은 새로 제정된 ‘호구조사규칙’에 근거하여 작성된 광무2년, 즉 1898년의 호적표이다. (모두 박건호 소장)

    호적표의 양식은 도(道)·군(郡) 이름이 제일 위에 기재되고 그 밑에 면리동 행정구획과 통호의 번지수가 기재되었다. 이때부터 기존에 다섯 집을 묶어 한 통을 이루던 것이 열 집을 묶어 한 통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호주의 이름과 나이 등이 나오고 그의 4조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그런데 새 호적표가 기존의 호구문서와 다른 것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기존에는 호내 구성원 개개인에게 기재되던 ‘직역(職役)’에 대신해서 호주에게만 ‘직업(職業)’을 쓰게 한 것이었다. 호주에 이어서 같은 집에 사는 ‘동거친속(同居親屬)’을 기록하였다. 부모, 처, 자식들에 대한 정보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혼인관계로 맺어진 부모, 처, 며느리, 사위들의 사조에 대한 정보를 기재하던 것과는 달리 새 호적표에는 호주 한 사람에게만 4조를 기입하도록 하였다. 제일 아래에는 기존의 호적에는 없던 ‘가택’란을 설정하여 가옥의 소유·임차 관계를 구분하게 하고(자택은 己有, 빌린 집은 借有), 또 기와집인지, 초가집인지 가옥의 형태를 표시하고, 이어서 집의 규모를 칸수로 표시하게 했다.

    내가 김영소를 만난 것은 어느 낡은 광무 연간의 호적표를 통해서였다. 호적표의 크기는 B5 정도로 수집 시기는 대략 8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호구단자와 달리 광무 연간의 호적표에는 ‘직업란’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신분제가 폐지된 직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 의미가 크다. 그런데 김영소 호적표의 직업란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이한 이름으로 자신의 직업을 적어 놓았다. 이 호적표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소는 전라도 무주에 살던 26세의 젊은 양반이었다. 신분제가 폐지된 직후인 1898년 당시 대부분의 양반들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어떤 ‘직업’으로 바꾸어 적어 놓았을까? 그 중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김영소는 다른 양반과 달리 어떻게 직업란을 채웠을까?

    1898년 1월의 김영소를 만나기 위해 당시로 돌아가 보자.

    1898년 1월은 광무 2년이었다. 전라북도 무주군 인안면 과문리에 사는 26세 김영소(金永泝)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올해 새해가 밝은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옆집 김 통수(統首)가 호적표를 빨리 내라고 닦달이다. 재작년에 공포된 ‘호구조사규칙’에 따르면 호적표를 호주가 작성해서 10개의 호를 담당하는 통수에게 내면, 통수는 이를 이장에 해당하는 리존위(里尊位)에게, 리존위는 면장에 해당하는 면집강(面執綱)에게, 다시 면집강은 이를 부·목·군·현의 관청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작년에 새 호적제도에 따라 호적표 용지를 구입해서 처음으로 제출했었는데, 직업란에 ‘양반’이라고 써냈더니 군청에서 양반은 직업이 아니니 올해는 그렇게 쓰지 말고 직업을 정확히 써 내라고 한소리를 했다는 것이었다. 양반은 신분을 나타낸 것인데 신분제도가 몇 해 전 갑오개혁 때 없어진 것이므로 시대에 맞게 직업을 쓰라는 것이었다.

    양반이면 양반이지 또 뭐란 말인가? 지금은 몰락해서 초가삼간에 사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이 지방에서 알아주는 광산 김씨 양반가였다. 김영소는 나름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1년 전이었다.

    [사진] 왼쪽은 1899년 경북 성주군 이승철의 호적표로 양반이라는 신분을 직업으로 ‘사업(士業)’으로 표시하였다.(붉은 테두리 부분) 오른쪽은 당시 양반을 다양하게 표현한 호적표를 모은 것이다. ‘사(士)’, ‘유(儒)’라는 한자를 기본으로 자신이 양반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 박건호 소장)

    며칠 전 김 통수가 찾아와서 작년에는 그럭저럭 ‘양반’으로 넘어갔는데, 올해는 절대 그렇게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영소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직업란에 뭐라고 쓰는지 물어봤었다. 통수는 영소에게 양반들은 보통 ‘사인(士人)’이나 ‘사(士)’, ‘사업(士業)’을 쓴다고 답한다. 학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유(儒)’나 ‘유업(儒業)’으로 쓰는 사람도 있고, 혹자들은 ‘사농(士農)’, ‘사인작농(士人作農)’ 즉 ‘학문하는 사람으로 농사를 지음’ 이런 식으로 섞어 쓰는 사람들도 있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은 양반을 어떤 직업으로 표기해야 할지 대혼란에 빠진 터였다.

    드디어 오늘 김 통수가 호적표를 받으러 김영소의 집을 찾아왔다. 영소는 통수에게 호적표를 내밀었다. 남들 따라하기를 싫어하는 김영소는 과연 양반에 맞는 직업으로 무엇을 선택했을까?

    영소가 김 통수에게 내민 호적표의 직업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독서(讀書)”

    이전에 아무도 쓰지 않았던 창의적인 표현이었다.

    김영소는 만족한 표정으로 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나는 양반 출신 아니던가?

    ‘독서’라는 직업, 양반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권위가 반영된 이름 아닌가? ㅎㅎ

    [사진] 전남 무안 김영소의 1898년 호적표. 양반 출신인 그는 비록 초가삼간에 사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직업란에 ‘독서’라고 적어 양반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박건호 소장)

    경술년의 쓸쓸한 풍경
    – 신상덕, 생활고로 전당포를 찾다.

    “나 전당포 한다.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2010년 8월 개봉한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의 유명한 대사이다. 전당포(典當鋪)는 ‘물건을 담보로 잡아 돈을 꾸어 주는 곳’이다. ‘가게’를 뜻하는 ‘포(鋪)’ 자가 붙은 옛 이름 그대로를 지금도 쓰고 있다. 전당포는 그때도 지금도 전당포다. 가끔 지물포·시계포·자전거포 따위가 쓰이긴 하지만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것과는 대비된다.

    근대적 전당포는 개항과 함께 은행이 들어오고 일본의 상업자본이 밀고 들어오면서 급격히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런 전당포에 대한 법체계를 갖춘 것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직후인 1898년 11월 발표된 ‘전당포 규칙’을 통해서였다. 이에 따르면 ‘자본금 2천냥 미만은 전당포를 허가하지 않고, 자본금의 크기에 따라 상등포, 중등포, 하등포로 구분하였다. 이 시기의 전당포에선 토지와 집문서와 같은 부동산, 비녀와 가락지 등 패물, 의복과 솥 등 가재도구 등 쓸 수 있는 모든 물건이 담보물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자리잡아갔던 전당포는 이후 가난한 서민들의 사금융이자 구제금융으로 기능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신문 기사이긴 하지만 전당포가 가난한 서민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7일자에 실린 기사이다.

    전당포가 없다 하면 아침 저녁을 굶을 지경에 있는 사람이 경성 십팔만의 조선 사람 중에 육만명 가량이 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전당포라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큰 기관일 뿐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당포 한 집이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 백 개보다도 필요하고 전당놀이하는 사람은 어느 방면으로 보면 소위 자선가라고 할 수도 있고 정직한 공익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 1920년대의 ‘뎐당포(전당포)’의 모습이다. (『일본지리풍속대계』사진)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서민 계층에게 전당포는 그런 곳이었다. 서민들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에 전당포는 문인들의 글 속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염상섭은 잡지에 전당포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빈한한 처지에 대해 “가세가 궁함에 항상 전당표와는 인연이 가깝게 지내간다. 아침에 땔나무가 없어서도 저녁에 솥에 넣을 쌀이 없어도 부득이 의복이나 기구를 들고 행낭 뒷골 전당포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1921년 현진건의 소설 「빈처」에도 가난한 무명작가인 남편의 입을 통해 당시 부부의 고단한 삶 옆에 전당포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지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에 디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다.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전당포는 생계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이들로 인해 높은 이자와 야박한 변제 독촉으로 서민들의 고혈을 빤다는 원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명맥이 유지되어왔다. 당장 내일 아침이 다급한 이들은 임시변통을 해주는 전당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당포의 역사는 곧 가난과 생활고의 역사였다.

    이제 한양에 살던 신상덕(申相德)을 만나보자. 내가 그를 만난 것은 10년 전인 2010년 수집한 한 장의 전당표를 통해서였다. 전당표(典當票)는 전당포에 물건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리고 받은 일종의 영수증이다. 생활고 때문에 그가 찾은 곳은 ‘초동전당포(草洞典當票)’였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대한제국기 전당표가 몇 점 남아있는데 그 대부분이 초동전당포에서 발행한 것이다. 초동전당포가 어떤 곳인지 찾아보았으나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초동전당포가 위치했던 초동(草洞)은 지금도 서울 중구에 존재하는 지명으로 예전 스카라극장 앞 일대 극장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자만 보면 이 곳이 풀밭이 있던 곳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본래 이곳의 이름은 초전골이었다. 조선 개국 초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사병을 일으켜 방번, 방석을 죽이고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을 제거하자 격분한 이성계가 군대를 보내 이 일대에서 첫 싸움이 벌어졌다하여 초전골(初戰谷)로 불리다가 나중에 초동으로 바뀐 곳이다. 조선 개국 초 골육상쟁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는 곳이 초동인 것이다.

    어쨋든 신상덕은 초동에 있던 ‘초동전당포’를 방문해 무언가를 맡기고 돈 15냥을 빌리게 된다. 이 전당표에 따르면 날짜는 경술년 즉 1910년 5월 10일이다. 이 해는 경술국치가 있던 바로 그 해였다. 이 전당표는 조선왕조가 망하던 그 시기 서민의 고단한 생활상을 증언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신상덕은 나라가 국치를 당하던 그해 무슨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린 것일까? 역시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 해의 5월 10일 전당표 속으로 돌아가보자.

    [사진] 신상덕이 1910년 초동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받은 전당표이다. (박건호 소장)

    때는 1910년 경술년 5월 한양에 사는 신상덕은 혹독한 춘궁기를 겪고 있었다. 나라는 1905년 을사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래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고 고등관리 인사권, 군사권, 사법권 등 국권을 하나씩 침탈당하고 “이게 나라냐” 싶을 정도로 껍데기만 남아있었고,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도 재작년 13도 창의군이 만들어져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동대문 근방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게다가 작년에 일제는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것을 통해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호남의 의병 세력을 궤멸시켜버린 터였다.

    당시 신상덕의 가정 형편은 노모의 병수발에, 딸아이 혼사까지 겹쳐 말이 아니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하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당시에 나랏님이 있기나 한지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나라는 멀리 있었고, 가난은 늘 가까이 있었다. 게다가 그 나라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했다. 가을 곡식은 이미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기 전 태산보다 높다는 보릿고개. 신상덕은 단발로 몇 년 전부터 쓰지 않고 있던 낡은 탕건 5개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기로 했다.

    탕건? 다소 생소할 것이다. 잠시 탕건에 대해 살펴보자.

    탕건은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망건의 덮개로 갓 아래에 받쳐 쓰던 관(冠)이다. 쉽게 말하면 상투를 틀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감싸고 상투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 망건을 쓰는데, 그 망건 위에 바로 갓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탕건을 쓴 다음에 갓을 쓴다는 것이다. 탕건은 앞쪽은 낮고 뒤쪽이 높아 턱져 있는데 말총으로 만들었다. 탕건은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에서는 평상시 관을 대신하여 썼으며 집안에서 탕건만을 쓰고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외출 시에는 갓 아래 받쳐 썼다. 탕건은 처음에는 관직자(官職者)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는데, 벼슬에 오르면 쓰는 ‘감투 쓴다’고 하는 말이 탕건에서 나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감투는 턱이 없이 민틋하게 생겼으며 그 형태가 탕건과 다소 다르다.

    이렇게 양반층들만 사용하던 탕건 사용이 조선 후기 이후 점차 사용 범위가 확대되어갔다. 탕건은 중인계층에서는 망건 위에 독립된 관모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 말기 서민들에 대한 갓의 착용이 허용되고 집안에서 갓 대신 탕건만 쓰는 풍조가 늘어나면서 점차 독립된 모자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다만 탕건의 모양은 신분에 따라 다소 달랐는데 대체로 양반용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2단 구성의 원통형이고, 평민용은 그냥 원통형이었다.

    [사진] 왼쪽은 탕건 사진으로 탕건은 망건의 덮개이며 갓의 받침으로 사용되었다. 오른쪽은 김득신의 ‘밀희투전도’로 투전을 하는 네 인물 모두가 탕건을 쓰고 있다.

    신상덕이 찾은 초동전당포는 이전에도 몇 번 이용하던 곳이었다. 전당포 주인 박씨는 신상덕의 딱한 처지를 듣고 폐탕건 하나당 세 냥씩 계산하여 열 닷냥을 쳐주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열 두냥도 쳐주지 않았을 거라 너스레를 떤다. 신상덕은 사람 좋아 보이는 박씨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연신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가 주는 전당표를 받아들고 왼쪽에 적힌 변제 조건을 읽어보았다. 지난번에도 이용한 바가 있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변제 조건은 대략 이러했다. 돈을 갚는 기한으로 3개월을 정하는데 이자를 선납할 경우 기한은 다시 3개월 늘여준다. 이자는 매 1량당 5푼으로 하되, 1000량 이상이면 4푼으로 한다. 이어서 3개월이 지나도 돈을 갚지 못하면 물건을 임의로 팔아 치울 수 있고, 물표를 분실할 경우에는 물품을 찾아갈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쥐나 벌레로 인한 훼손 시 따지지 못한다.

    신상덕은 전당표를 주머니에 잘 챙겨넣고, 돈이 생기면 조만간 폐탕건을 찾아가기로 하고 전당포를 나와 서둘러 집을 향한다. 이 돈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으나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신상덕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몰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양반이었던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게다가 나라 상황도 요즘 뒤숭숭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당포에 팔리는 폐탕건은 흡사 망해가는 나라의 처지 같았다.

    문득 휘익 스쳐가는 봄바람에 약간의 더위가 섞여 있었다.

    신상덕은 나지막이 혼자 중얼거렸다..

    “경술년 나라꼴이나 내 꼴이나..”

    [사진] 왼쪽은 김정호의 [동여도] 중 도성도로 붉은 테두리로 표시된 곳이 신상덕이 찾았던 전당포가 있던 초동의 위치이다. 오른쪽은 1906년 11월 7일자 황성신문에 ‘拾票待主(습득한 표가 주인을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광고로 그 내용은 의관을 지낸 오규영씨가 11월 6일 오전 10시에 초동을 지나다가 14장의 전당표가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습득하여 황성신문사에 맡겨 놓았으니 이것을 잃어버린 주인은 신문사를 찾아 이 전당표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이 전당표도 초동전당표에서 발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14장의 전당표를 분실한 줄도 모르고 급하게 집으로 달려가야만 했던, 그리고 집에 도착해 전당표를 분실한 걸 알고 낭패감을 느꼈을 1906년 11월 6일의 ‘그’는, 결국 이 전당표들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결국 가난이 죄다.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 칼럼 링크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