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이후 최대 병력 집결했다"
        2006년 10월 23일 08: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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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오전 11시 김포공항. 강원도에서 온 농민 36명이 관광버스에서 내려 한미FTA 4차 협상이 열리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권이 끝나자 한 간부가 “제주항공 우리가 전세 냈으니까 전세비행기 타러 갑시다”고 말하자 큰 가방을 둘러멘 농민들이 그의 뒤를 따라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12시에 제주를 출발하는 제주항공의 74개 좌석 중에서 36석을 강원도 농민들이 차지했다. 10명 이상을 예약하면 할인이 되기 때문에 이들은 10만7천5백원에 왕복항공권을 예약했다. 제주항공의 한 관계자는 “제주도 행사 때문에 오늘 모든 비행기의 예약이 끝났다”고 말했다.

    강원도 정선에서 야채와 약초 농사를 짓고 있는 김영돈(42)씨는 이날 새벽 6시 정선군 농민회 12명과 함께 김포공항으로 왔다. 제주에서 가장 먼 거리인 강원도에서 제주 원정투쟁을 하는 데에는 비행기와 버스, 숙박비까지 한 사람당 35만원 넘게 들 예정이다. 그는 25만원을 냈고, 나머지는 농민회 등에서 도움을 줬다.

    바쁜 수확철 비싼 돈 내고 제주 온 농민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수확철이잖아요. 비용도 그렇고. 이래저래 부담이 많이 됐죠. 저를 비롯해 정선에서 온 사람 13명 중에 열 명 이상이 제주도에 처음 가요. 농사꾼이다 보니 신혼여행도 가까운 설악산에 갔죠. 제주도를 관광으로 가야 하는데 투쟁하러 가다니 서글프네요.”

    가을 가뭄에 목마른 밭작물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는데 지난 여름 이후 처음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시절인데…” 제주행 비행기를 탄 농민들의 마음은 밭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없는 살림에 멀리 돈 들여 갖고 왔는데 열심히 투쟁을 하다가 돌아가야죠. 이 나라 농업정책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랍니다.”

    비행기가 아름다운 제주바다가 돌아 공항에 내리자 경찰들이 공항 안팎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난 4.3항쟁 이후 육지에서 최대 규모의 병력이 내려갔다는 얘기를 실감케 했다. 농민대표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모이자 순식간에 경찰 수백명이 이들을 둘러싸고 관광객들에게 격리시켰다.

       
    ▲ 빗속에서 진행된 농민결의대회 (사진=참세상)
     

    제주공항을 점령한 경찰

    농사를 짓고, 소를 기르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농민대표자들이 멀리 육지에서 제주도로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문경식 의장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평화적인 시위를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쟁을 통해 반드시 협상을 파탄내겠다”고 경고했다.

    이날 공항에는 20개 중대 2천명이 배치됐다. 이들은 제주공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 곳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미FT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주재준 상황실장은 “어떤 분들은 경찰에 의해 40분 동안 감금당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차량검문으로 공항에 들어오지 못하는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평화의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경찰은 제주 전역을 준계엄상태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박석운 집행위원장은 “군사독재시절에나 있을 법한 불법행위가 21세기 참여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범국민운동본부는 “정부 당국의 불법적이고 비상식적인 탄압에 맞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한미FTA를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할 것”이라며 “한미FTA는 선진화의 길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협상”이라고 밝혔다.

    오후 4시30분 제주지방경찰청 앞에 모인 노동자와 농민들은 “불법탄압 중단하고 평화시위 보장하라”고 외쳤다. 금속노조 150여명의 노동자들을 비롯해 300여명은 경찰의 불법행위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끝까지 남은 항쟁의 섬 제주도”

    제주에서 살고 있는 여성농민회 김옥임 부회장은 “옛날부터 유명한 유배지가 제주도였고, 끝까지 남은 항쟁의 섬도 제주도였다”며 "협상장소로 고르고 고른 제주도 딱 걸렸다“고 말했다.

    한미FTA저지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중문관광단지로 연결된 95번 국도의 양 옆으로 ‘저지 한미FTA’라고 씌여진 노란 깃발이 5m 간격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꽂혀 있었다. 깃발을 매달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깃발이 매달렸고, 대형 현수막도 곳곳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협상장이 건너다보이는 중문관광단지 컨벤션센타 옆 갈대밭에 모인 노동자, 농민, 제주도민 등 3천여명은 저녁 6시 30분부터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노동자 농민 3천명 촛불문화제

    “내 밭에 있는 삽 한자루 곡갱이 한자루 빌려줄게. 구덩이 파서 그 안에서 쉬라고. 그 때 딱 한마디만 할게. 너희의 오만이 너희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라고. 이왕 영어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 하지. uprising. 우리말로 봉기야.”

    한 제주시인의 피를 끓는 시가 낭송되자 왁자지껄했던 참가자들은 곧 숙연해졌다. 한국수산업협회 이윤수 제주 회장은 “한미FTA는 농민을 비롯한 수산인들 모두의 저지대상”이라며 “육지에서 힘을 모아 열심히 투쟁하듯 우리는 내일 바다 위를 책임지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문경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4차 협상을 박살내야 한다”며 “우리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속 협상을 한다면 11월 22일 노동자 농민 민중의 대투쟁으로 한미FTA를 막아내고 우리 세상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도 “오늘 전야제는 단순히 문화행사가 아니라 내일부터의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라며 “한국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한미FTA 협상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고 미국의 군사패권을 강화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남한 땅에서 마련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물놀이패 ‘마로’와 노래패 ‘청춘’ 등 제주지역 문화패의 뜨거운 공연이 전국 8도에서 날아온 노동자 농민들을 하나로 묶어세웠다. “비싼 돈 내고 왔는데 대충 싸우다 갈 수는 없잖아.” 바다 건너 협상장을 바라보며 노동자와 농민들이 내일의 투쟁을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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