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군, 파죽지세로
    전 중국을 석권해 가다
    [국공내전-60] '신중국' 설립을 준비
        2020년 11월 05일 10: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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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 공격부대를 재배치하다

    난징과 상하이 등 국민정부 심장부를 점령한 해방군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이제 창장 이북지역에 남아 있는 국군은 서북지역의 후쫑난 집단군과 초원 지역의 마부팡, 마홍쿠이 등 회족 부대, 그리고 내몽골 지역의 쑤이위안 정도였다. 군벌 옌시산이 통치하던 산시성도 성도 타이위안이 함락되어 종말을 고했다. 공산당은 이때부터 쫓기는 국군을 추격하며 파죽지세로 중국을 석권하기 시작한다. 전략적 추격 시기에 공격부대의 조정과 배치가 다시 이루어졌다.

    1949년 5월 23일 마오쩌둥은 전국 진군과 관련한 부대배치 명령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3야전군 10병단은 신속하게 푸젠성으로 진격하여 6월에서 7월사이에 푸젠을 해방할 것

    2) 2야전군은 서남쪽의 쓰촨, 구이저우와, 캉(康: 쓰촨 서부와 티베트 동부지역을 말한다.) 지역 진군을 준비할 것, 2야전군의 주요 임무는 미국 군사간섭에 대한 3 야전군의 대응에 협조를 준비하는 것이다.

    3) 4야전군 주력은 7월에 샹샹(湘鄕), 8월에 용저우(永州)로 진출하여 11월 또는 12월까지 광둥성과 광시성을 점령할 것, 1야전군은 연말 이전에 란저우, 닝샤, 칭하이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1야전군은 연말 혹은 연초에 병력을 나누어 두갈래 길로 진격한다. 그 한갈래 길은 펑더화이 지휘하에 신장성으로 진군하고, 나머지 한갈래는 허룽이 지휘하여 쓰촨 북부로 진격, 2야전군과 협력하여 구이저우, 쓰촨, 티베트 3성을 해방하라.

    4) 만약 상하이, 푸저우, 칭다오등을 순조롭게 해결하면 미국의 출병 및 간섭 가능성은 소멸될 것이다. 2야전군은 연말 혹은 연말 이전에 구이양과 충칭 및 창장 상류 일대를 점령하여 창장의 수로를 개통시키라.

    5) 장제스, 허잉친 및 광시계는 충칭을 수도로 하여 서남쪽 할거를 꿈꾸고 있다. 이들과 후쫑난 부대, 쓰촨, 캉지역의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남쪽에서 진군하여 그 퇴로를 끊지 않으면 안된다.

    마오쩌둥의 부대배치는 직할 부대인 화북군구 부대를 제외한 전병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인민해방군은 1949년초 편제 개편에 따라 4개 야전군으로 재편하였다. 서북 야전군은 1야전군이 되었으며 인민해방군 부총사령인 펑더화이가 지휘하였다. 중원 야전군은 2야전군으로 바뀌고 류보청이 지휘하였다. 산둥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화동 야전군은 3야전군이 되었으며 쑤위가 지휘하였다. 동북 야전군은 4야전군으로 개편되었으며 린비아오가 지휘하였다. 부대 배치를 단행할 무렵 마오쩌둥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나 스탈린보다는 상황을 훨씬 낙관적으로 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전광석화처럼 난징을 점령하고 상하이까지 신속하게 점령할 계산이 섰으므로 가능했을 것이다.

    중공은 점령지역에 통치질서를 세우기 위해 대량의 간부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6월 11일, 중공 중앙은 ‘3만 8천명의 간부 재배치 준비 및 이동 문제에 관하여’라는 문건을 중앙국과 각 분국에 발송했다. 이 문건에서 중공은 “가능한 광둥, 광시, 윈난, 쓰촨, 구이저우 출신의 간부를 선발하라. 2야전군 및 4야전군은 내부에서 역량 있는 간부를 대거 선발하여 새 지역의 당무 및 재경, 공안, 선전, 민간인 운송등 여러 부문의 업무를 책임질 수 있게 하라. 대도시 및 교통 요충지를 점령하면 즉시 현지 간부들을 소집 훈련하도록 하라. 노동자와 직원,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들을 모집하여 업무 훈련을 시켜 일을 처리하라. 고참 간부들은 도시와 지역위원회 이상 고급 기관에 배치할 수 있도록 하라.”

    마오쩌둥과 공산당, 신중국 설립을 차근차근 준비하다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은 ‘인민민주독재를 논한다.’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중공 창립 28주년을 기념한 것이었으나 눈앞에 닥친 신중국 설립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 마오는 백여년에 걸친 중국 혁명의 경험을 총괄하고 그 교훈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신중국 정권의 성격과 각 계급이 국가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서로간의 관계를 논술하였다. 마오쩌둥은 글에서 “1840년 아편전쟁 뒤 선각한 중국인들은 서방국가에서 진리를 찾았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침략이 이 헛된 꿈을 깨뜨렸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찾은 뒤 사상과 생활에서 참신한 시기를 맞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인민민주 독재를 논한다. 초기의 소책자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들이 이미 중요하고 기본적인 경험을 얻었다고 썼다. “국내에서 민중들을 분기시켰으며 노동자 계급의 영도하에 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국외에서는 평등한 입장에서 국제 통일전선을 위해 함께 분투해 왔다.” “이제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고 노동자 농민 연맹을 바탕으로 하여 인민민주독재에 집중해야 한다.”

    마오쩌둥은 “인민이 누구인가? 중국에서는 노동자 계급과 농민 계급, 도시 소자산 계급과 민족 자산계급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인민들이 반동파 독재세력에 대하여 서로 연합하는 것이 인민민주독재이다.”고 규정했다. 이글에서 마오는 마지막으로 강조하였다. “우리는 인민민주독재의 무기에 의지하여 반동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단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목적지로 한발씩 나아가야 한다.”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신중국 성립을 준비하다

    1949년 6월 15일, 신정치협상회의 1차 주비회의가 베이핑 중난하이(中南海 :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다)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공산당을 비롯하여 ‘민주당파’와 ‘민주인사’, 인민단체, 소수민족, 해외화교등 23개 단위의 대표 134명이 참가하였다. 마오쩌둥과 리지선, 선쥔로우 등이 주비회의를 주재하였다.

    마오쩌둥은 주비회의 개막식에서 연설했다. 마오는 “주비회의 임무는 각 항의 준비작업을 빨리 마치고 새로운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민주연합정부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마오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이로써 전국 인민을 영도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국민당 반동파의 잔여 역량을 일소하여 전 중국을 통일해야 한다. 그후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와 국방을 건설해야 한다.” 마오쩌뚱은 전국 인민들에게도 요청하였다. “인민들은 단결하여 견결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제국주의 및 그 주구 반동파들의 음모를 분쇄해야 할 것이다.”

    신정치협상 주비회의 모습

    저우언라이는 ’신정협 주비조직 조례 초안‘을 보고하였으며 회의는 이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어서 주비회 상무위원 21명을 선출하였다. 상무위원들은 마오쩌둥을 주임으로, 저우언라이와 리지선, 선쥔로우, 궈모뤄, 천수통을 부주임으로 선출하였다. 상무위원들을 6개 소조로 구성하고 각각 신정치협상회의 참가단위 및 대표 명부작성, 신정치협상회 조직조례 초안의 기초, 공동강령 기초,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방안 기초, 신정치협상회의 제 1차 전체회의 선언 기초등 작업을 하게 하였고 국기 및 휘장, 국가등 준비작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주비회의는 5일동안 진행되었다. 대회가 폐막한 뒤 각 소조는 3개월동안 준비하여 작업을 마무리했다. 9월 17일 베이징에서 신정치협상회의 주비회 제 2차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준비한 각 문건을 통과시켰으며 신정치협상회의를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공산당, 영국 군함 포격사건에 단호히 대처하다

    스튜어트 주중대사가 중공과 대화를 모색하였지만 미국은 더 이상의 진전을 원하지 않았다. 이 무렵 미국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도 하지 않았으며 노골적인 포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중공 사이에 시비가 발생하였다.

    1949년 5월 21일, 중공은 영국 해군 호위함 애머시스트(Amethyst)호 사건에 대한 교섭을 시작했다. 애머시스트호는 1949년 4월 21일 해방군에게 포격을 당했다. 중공측은 영국 군함이 사전 허락도 없이 해방군이 도강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창장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이때 해방군 포병부대가 포격하여 배가 파손되었다. 영국은 즉각 극동함대의 런던호 등 세 척의 전함을 파견하여 해방군 진지를 공격, 양측이 포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해방군은 25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영국은 13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영국 극동함대 부사령관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영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영국 수상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는 “영국 군함은 창장에서 평화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 수상 처칠도 영국이 항공모함을 파견하여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공측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해방군 포병이 박격포를 장전하고 있다.

    중공은 1949년 4월 20일 도강전역을 개시하기 전에 사전통보를 했던 것이다. 공산당은 군사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 명의로 “모든 외국 군함은 4월 20일까지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였다. 영국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애머시스트호가 무리한 운행을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양측은 이 사건에 대하여 교섭을 벌였다. 중공측은 영국이 사과 및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국은 국민정부와 맺은 조약에 의거 통행권이 있다고 대응하였다. 공산당은 이미 국민정부가 외국과 맺은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양측의 교섭은 진전이 되지 않고 최종 결렬되었다. 파손된 영국 군함은 쩐장(鎭江) 동쪽의 강 위에 머물러 있다가 8월 11일이 되어서야 홍콩으로 돌아갔다.

    펑더화이, 후쫑난 부대 주력를 섬멸하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이 국군의 창장 방어선을 돌파하자 국민당 시안 수정공서 주임인 후쫑난은 즉시 부대를 남쪽으로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후쫑난은 여차하면 집단군을 한중(漢中: 섬서성 남부지역에 위치한 도시)과 쓰촨 지역으로 달아날 예정이었다. 인민해방군 부총사령 겸 1야전군 사령원 펑더화이는 휘하 부대에 즉각 추격을 명령하였다. 5월 16일 징허(涇河) 북쪽에서 여러 길로 추격한 1야전군은 국군을 따라잡기 시작하였다. 센양과 시안을 점령한 해방군은 국군 57군과 30사단을 섬멸하였다. 후쫑난 집단군 주력은 바오지(寶鷄)와 친링산(秦岭山)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칭하이와 닝샤 지역의 회족 기마부대인 마부팡, 마홍쿠이 부대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왔다. 후쫑난 집단군과 회족 부대 연합군의 병력은 20만명에 이르렀다.

    마부팡과 마홍쿠이의 회족 기마부대들은 강력한 기동력으로 해방군을 괴롭혀 왔다. 후쫑난은 자신감을 얻어 센양과 시안을 수복하려 하였다. 해방군도 화북군구에 속해있던 18병단과 19병단을 1야전군으로 배속시켜 병력을 증강하였다. 그러나 아직 두 부대가 합류하지 않았을때 회족의 양마 부대가 강력하게 부딛쳐 오자 해방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해방군은 차츰 후퇴하면서 지연작전을 펼쳤다. 6월 12일이 되자 회족 부대가 센양 교외까지 진출하였다.

    국군 회족부대는 해방군 지원병력인 18병단과 조우하여 강력한 공격을 펼쳤다. 전투 양상이 격렬해지고 양측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한편 후쫑난 집단군 제36군도 시안쪽으로 진격했으나 해방군에 포위되어 대부분 섬멸당했다. 이때 18병단에 이어 19병단이 시안쪽으로 급히 달려오자 국군은 푸펑과 메이현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펑더화이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부대를 휴식하게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해방군은 다시 후쫑난 집단군을 공격하였다. 1949년 7월 해방군 1야전군은 섬서성 푸펑, 메이현 지역에서 후쫑난 집단군과 마홍쿠이, 마부팡 부대를 공격하였다. 제1야전군 사령원 펑더화이는 마홍쿠이와 마부팡 등 양마 부대를 견제하고 후쫑난 부대를 공격하는 방침을 수립했다. 한꺼번에 대적하기에는 회족 부대의 전투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7월 10일 제1야전군 부대는 후쫑난 집단군 2개 사단 일부를 즈우쩐((子午鎭: 현재 윈난성에 속한 진이다.) 일대에서 섬멸하였다. 7월 11일, 펑더화이는 부대 주력으로 후쫑난 부대 주력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12일이 되자 해방군은 칭화(青化), 메이현 지역으로 진격하여 후쫑난 집단군의 서쪽 퇴로를 차단하였다. 그후 해방군은 후쫑난 집단군 3개군, 1개 병단 부대를 푸펑지역에서 포위하여 대부분을 섬멸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4만 4천명을 섬멸하고 섬서성 중부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펑더화이는 숙적 후쫑난 집단군에 대한 회심의 공격을 성공시키고 주도권을 확고히 하였다.

    불과 2년 전 펑더화이는 30만 대군의 후쫑난 집단군에 맞서 3만명으로 홍색수도 옌안을 수비해야 했다. 1년 동안은 후쫑난 부대의 주력을 피해 달아나며 싸워야 했다. 이제는 그에게 후쫑난 집단군을 추격하며 광대한 서북지역과 칭하이와 닝샤의 초원지대, 신장위구르 지역으로 진격할 임무가 주어졌다. 기세와 전투력에서 펑더화이 부대의 완전한 승리는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린비아오와 바이충시 국공 양당의 맞수로 꼽히는 지장들이다.

    린비아오의 3로대군 후난, 후베이로 진격하다

    한편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 및 제2야전군 부대들은 세 갈래 길로 후난성과 후베이로 진격하였다. 1949년 7월 10일 해방군은 서쪽의 후베이성 이창(宜昌)과 동쪽의 간강(赣江)연안을 잇는 수백리 전선에서 국군 중남부 부대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시작했다.

    린비아오는 대군을 3로로 진격시켰다. 서로군은 후베이성 이창에서 국군의 창장 방어선을 돌파하여 후베이성 남부와 후난성 서북부 지역으로 돌진하였다. 서로군은 창사를 우회하여 29일 후난성 서쪽의 창더(常德)를 점령하였다. 동로군은 장시성에서 부대를 둘로 나누어 서쪽과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서진부대는 간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밀고 나아가 핑샹(萍鄕)을 점령하였다. 남진부대는 간강을 따라 진격하여 강 서안의 국군 잔여부대를 소탕하며 타이허(泰和)등을 점령하였다. 중로군은 후베이성 남부에서 후난성 북부로 공격해 들어가 웨한철도(粤漢鐵路: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철도) 정면에서 창사를 공격하였다. 7월 20일 후베이성의 중요도시 웨양이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해방군이 세갈래 길로 창사를 포위하자 바이충시 휘하 국군 부대는 서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청첸과 천밍런, 부대를 이끌고 귀순하다

    청첸은 1948년 국민대회에서 국민정부 부총통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당 원로이다. 1949년 그는 후난성 정부 주석겸 국민당 창사 수정분서 주임을 맡고 있었다. 천밍런은 국군 안에서 쓰핑 사수의 영웅으로 청천백일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천청이 동북에 부임하여 천밍런이 양곡을 유용했다 하여 해임하는 바람에 국민당과 장제스에 대하여 원망을 하게 되었다. 천밍런의 양곡 유용은 곡식 푸대를 바리케이드로 사용한 것이었으니 억울할 만하다.

    천밍런은 국방부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2월 창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청첸과 밀접히 연결하여 기의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해 7월 해방군이 웨양과 핑샹 등 요충지를 점령한 뒤 선봉부대가 이미 창사 교외로 진격해 왔다. 창사를 수비하던 청첸과 천밍런은 중공에 투항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7월 22일 청첸과 친밍런은 대표를 파견하여 중공과 평화담판을 진행하였다. 담판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8월 3일 창사 시민들이 해방군 영접주비회를 결성하였다. 그날 저녁 국민당의 후난성 당,정,군의 관련 인사들이 모임을 갖고 중공과 마오쩌둥이 제출한 ’국내화평협정 8개조‘를 수용하기로 결의하였다. 8월 4일, 청첸과 천밍런은 후난 보안부대 및 국군 제 1병단 전체 병력과 함께 창사에서 기의를 선언하였다. 해방군은 창사를 평화적으로 접수하였다.

    중공은 기의를 선언한 청첸과 천밍런을 중용하였다. 천밍런은 창사시 군사관제위원회에서 주임인 샤오징광에 이어 부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청첸은 후난인민 군정위원회에서 주임을 맡았다. 해방군을 지휘해 창사를 점령한 황커청과 샤오징광이 부주임을 맡았으니 청첸에 대한 예우를 짐작할 수 있다. 8월 30일 해방군 후난군구가 설립되자 샤오징광이 사령원, 황커청이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천밍런은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었다.

    마오쩌둥을 접견하는 천밍런

    천밍런이 나중에 마오쩌둥과 접견하였을 때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즈량(子良: 천밍런의 자이다.) 당신 무슨 요구할 게 있나? 가리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없습니다. 귀당이 이렇게 저를 대하는데 그걸로 족합니다.” 마오쩌둥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곤란한 듯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니 이거 곤란한데….” 마오는 한번 웃더니 말했다. “좋소. 오늘 후로 해방군이 먹을 게 있으면 당신도 있을 것이오. 해방군이 입을 게 있으면 당신도 있는 거요.” 그 후 천밍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장제스에게 반평생 동안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충성하라고 하였다. 오늘 주석을 보니 일면식이 없는데도 저렇게 솔직하게 대하여 준다. 인자한 선배 같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천밍런에게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당신이 군을 떠나 관리가 되고 싶으면 정부가 특별 경비를 지급할 것이다. 당신 의견에 달렸다.” 그러자 천밍런은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저는 정치할 생각도 없고 국가의 실 한오라기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해방군에 참가하여 인민을 위해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후 천밍런은 해방군 4야전군 21병단 사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훗날 광시성에서 국군과 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필자소개
    해남 귀농. 전 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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